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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그린페 2010. 8. 22. 23:39

MB-박근혜 전격회동 '매듭 풀렸다?'
MB-박근혜 전격회동 '매듭 풀렸다?'
  • 박지원 'MB, 성공한 2년 반으로 역사에 남는 대통령 되길'

    박지원 'MB, 성공한 2년 반으로 역사에 남는 대통령 되길'
  • 이재오, 최대한 몸을 낮춰. .

    이재오, 최대한 몸을 낮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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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 '독대 정치' 대선구도 안정적 관리 포석

    한국일보 | 입력 2010.08.23 02:35

    [MB- 박근혜 전격 회동] 6·2 지방선거김태호·이재오·정몽준·김문수 잇따라 만나

    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간 회동은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집권 후반기를 맞아 정권 재창출의 기틀을 세우고 대선후보 경선 구도의 안정적 관리를 도모하려는 이 대통령의 구상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21일 회동 의미는 6월 지방선거 이후 진행된 이 대통령과 여권의 잠재적 대선주자들의 독대라는 프리즘 속에서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6 ∙2 지방선거 이후 이 대통령은 김태호 총리 후보자,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등을 잇따라 만났다.
    올해 1월 김태호 당시 경남지사의 요청으로 한 차례 독대했던 이 대통령은 8∙8 개각 발표 당일인 지난 8일 김 후보자와 조찬을 함께 하면서 국정 전반을 논의했다. 이 대통령이 6∙2 지방선거 참패 후 '세대교체' 성격의 개각이라는 승부수를 던지는 와중에 진행된 독대에서 김 후보자에 대한 이 대통령의 기대가 언급됐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대통령은 7∙28 재보선 다음날 친이계 좌장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 회동 후 이 후보자의 입각과 8 ∙8 개각의 큰 윤곽이 결정됐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6월 중순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와 독대해 대표직 재임시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4대강 사업 등 국정 전반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하순 청와대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실사단과 만찬 모임을 갖기 직전에도 정 전 대표와 40여분간 독대했다.
    이 대통령은 6월 중에 김문수 경기지사와도 회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방선거 후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 부상하던 김 지사와의 독대는 주자들간 신경전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정치권은 이 대통령의 독대 정치가 대선후보 경선 구도를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같은 상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대권주자 9룡(龍)을 관리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현재 최대 11명에 이르는 여권 대선주자간 경쟁 구도를 감안한 행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사이에 다른 점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가장 유력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와 줄곧 긴장 관계를 형성했으나, 이 대통령은 이번에 박 전 대표와도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22일 "이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국정운영에 대해 잠재적 대선주자들의 협력을 구하는 한편 대선후보 경선구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민주당 “서민은 춥고 국민은 불안했다”1시간 42분전 경향신문

    ...만드는 정부 ㆍ‘총체적 실패한 2년 반’ 혹평 민주당은 22일 이명박 정부의 집권 전반기에 대해 “서민은 춥고...인권을 현저히 후퇴시켰다”고 밝혔다. 경제 문제와 관련, 민주당은 “부자·대기업은 살맛나고 서민·중소기업은 절망했다...
    홍준표 "친이계, 反박근혜 단일후보 낼 것"
    [뷰스앤뉴스] 2010년 08월 18일(수) 오후 04:54   가| 이메일| 프린트
    "박근혜 지지율, 昌보다 못해", "김문수, 대권 역량 충분"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18일 친이계의 차기 대선 전략과 관련 "(친이계 후보들이) 각자 열심히 스스로를 띄운 뒤 한 후보로 단일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 최고위원은 이날 발매된 <신동아> 최신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대선 경선은 박근혜 대 반(反)박근혜연합 구도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친이계 내부에선 국민적 관심을 끌면 현 박근혜 지지율을 능가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거지"라며 "다음 대선 후보 경선은 상당히 흥미로운 형태로 전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대선 경선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박 전 대표에 대해 "이회창 총재는 7년동안 35%를 고수해도 종국에는 대통령 못됐잖나? 24~25%의 박근혜 지지율은 과거의 이회창 지지율보다도 견고하지 못하다"고 힐난했다.
    그는 그러나 김문수 경기지사에 대해선 "김 지사는 역량이 충분하다. 민주화운동을 했고 3선 국회의원으로 국정을 두루 섭렵했고 경기지사 두 번 하며 행정경험 갖췄고. 국가경영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고 본다. 오세훈 시장도 마찬가지"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는 "김문수 지사는 대선 경선에 나올 거다. 그것도 지사직을 유지한 채"라며 "경선의 경우엔 지사직을 갖고도 출마할 수 있다. 이인제가 그랬다. 제도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김 지사의 경선참여를 기정사실화했다.
    / 김동현 기자

    'e리더' 설 곳이 없다…삼성전자, 생산중단 결정

    한국경제 | 입력 2010.08.22 18:49

    스마트폰ㆍ태블릿PC에 밀려
    전자책 판매 1만권 vs 600권…갤럭시S가 e리더의 17배 달해
    가격인하ㆍ해외진출로 생존 모색

    '17:1'.지난달 스마트폰과 전자책 전용 단말기(e리더)를 통한 교보문고의 책 판매량을 비교한 수치다. 삼성전자 갤럭시S를 통해 팔린 전자책은 1만권에 달한 반면 삼성의 e리더를 통한 판매는 600여권에 그쳤다. 전자책 시대의 주역이 될 것으로 기대를 받던 e리더의 초라한 입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리더는 장시간 사용해도 눈에 피로를 주지 않는 전자종이(e-paper) 패널을 사용해 책을 읽기 편하도록 만든 단말기다. 하지만 비싼 가격,불편한 사용자 환경(UI) 등을 극복하지 못해 전자책 시대를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태블릿PC,스마트폰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갖춘 기기들에 밀려나고 있다.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삼성전자는 전자종이 패널을 쓰지 않기로 하는 등 e리더 진영의 우군까지 축소되고 있다.

    ◆기로에 선 e리더
    삼성전자는 지난 2월 내놓은 단말기(SNE-60K)를 끝으로 전자종이 패널을 쓰는 e리더를 더이상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전자종이 패널은 공급처가 몇 곳에 불과한데다 가격이 비싸 더이상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라며 "내년 내놓을 후속 모델은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을 이용한 멀티미디어 기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킨들로 e리더 열풍을 주도해온 미국 아마존도 태블릿 PC 개발을 검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은 아마존이 전자종이를 사용하는 킨들과 달리 MP3 음악 파일과 주문형 비디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LCD 기반의 멀티미디어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마존은 최근 킨들의 세 번째 버전을 출시했지만 e리더가 힘을 잃을 것에 대비해 다른 대안까지 찾기 시작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e리더의 입지가 위협받는 이유는 제한된 기능 탓이다. 패널로 사용하는 전자종이는 LCD에 비해 전력 소모가 적고 눈의 피로를 줄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화면 전환 속도가 느려 페이지를 넘길 때 화면이 어색하게 깜빡이는데다 패널 가격이 비싸 단말기 가격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화 · TV · 게임 같은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갖춘 태블릿,스마트폰 등에 비해 활용성도 크게 떨어진다. 업계 관계자는 "e리더 보급이 빨랐던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e리더가 태블릿PC, 스마트폰과 바로 경쟁하는 구도여서 전자책 시장 주도권을 잡기 어려울 것"이라며 "교보문고 등 인터넷 서점들도 이 같은 변화에 맞춰 e리더를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단말기를 지원하는 형태로 서비스 기반을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 낮춰 생존 모색하는 e리더
    e리더 업체들은 생존을 위해 단말기 가격을 낮추고 있다. 전자책 전문기업 북큐브네트웍스는 최근 6인치 화면의 e리더(B-815)를 14만9000원이란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다. 30만원대 수준이던 기존 e리더에 비해 가격이 절반에 불과하다. 세 번째 킨들을 내놓은 아마존도 무선랜 지원 단말기 가격을 139달러로 책정,경쟁사 반즈 앤 노블의 제품 보다 10달러가량 낮췄다. 대당 499~829달러에 이르는 아이패드보다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차별화에 나선 것.
    중국 등 해외 시장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전자종이 패널을 생산하는 LG디스플레이는 아이리버와 중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한 데 이어 다음 달부터 e리더 생산에 본격 나설 예정이다. 중국 e리더 시장은 지난해 61만대에서 올해 210만대로 244% 급성장하는 등 미국 다음의 큰 시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중국에서는 교과서를 전자책으로 교체하는 논의가 시작되는 등 e리더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아이패드가 e리더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지만 전자책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을 높여 책읽기에 장점이 많은 e리더를 다시 주목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김현예 기자 taehun@hankyung.com

    ◆ e리더
    종이 느낌을 살릴 수 있는 e-paper 패널을 사용,책을 읽기 편하도록 만든 단말기다. 흔히 전자책이라고도 부르지만 콘텐츠에 해당하는 책(e-book)과 구분해 e리더라고 한다. LCD 패널을 사용한 태블릿PC에 비해 빛의 반사량이 적어 눈의 피로감을 줄일 수 있고 전력 소모량도 낮아 오래 쓸 수 있다. 구기거나 접어서 휴대하다가 신문 · 서적 · 서류 등을 마음대로 불러와 볼 수 있는 제품이 나오면 종이와 구분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전자종이라고도 부른다.
     

    한국, 이민가고 싶은 나라 50위

    세계일보 | 입력 2010.08.22 20:34 | 수정 2010.08.22 23:32

     잠비아 등 阿 국가에도 밀려 싱가포르·뉴질랜드, 1·2위
    이민 가고 싶은 나라를 순위로 매겼을 때 한국이 세계 50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5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삶의 질이나 대외적인 이미지가 경제수준에 걸맞지 않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148개국 35만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잠재적 순이민 지수(PNMI)'를 산출한 결과 이민 관련 규제를 철폐할 경우 한국의 인구가 8% 줄어들 것으로 20일(현지시간) 관측했다. 이는 조사 대상 148개국 중 50위에 불과한 수준이다. 세계은행이 최근 집계한 한국의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8325억달러로 비교 대상 국가 가운데 15위였다.
    이번 갤럽 조사에서 한국은 중국, 인도, 러시아 등 개도국뿐 아니라 잠비아,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국가,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국가, 크로아티아, 체코 등 동구권 국가보다도 순위면에서 밀렸다.
    갤럽은 해당국으로 이민을 희망하는 인구에서 이민을 나가려는 인구를 빼는 방식으로 이민 관련 순수요를 조사하고, 현재 해당국의 인구를 감안해 최종적인 인구 가감 비율을 산출했다. 각국의 이민 관련 규제 요인은 제외됐다. 즉 이민 관련 규제 없이 개인의 희망사항에 따라 이민을 보내고 받았을 경우 인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를 추정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추정할 때 인구가 가장 많이 늘어날 나라는 싱가포르였다. 개인의 희망에 따라 이민이 이뤄지면 480만명인 현 인구가 219%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뉴질랜드(184%)와 사우디아라비아(176%), 캐나다(160%), 스위스(150%)는 차례로 이민 가고 싶은 나라 2∼5위에 랭크됐다.
    떠나고 싶은 나라에는 주로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오랜 내전으로 고통받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은 -56%로 조사 대상국 중 꼴찌였다. 이민 희망자들이 가장 많이 지목한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3억명에 달하는 현 인구 구조상 순위는 14위에 머물렀다.
    김기홍 기자, 연합뉴스
     
    국민훈장 모란장 받은 김정렬 한남대학교 이사장
    “교사, 미래 내다보는 교육철학으로 글로벌 인재 키워야”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김정렬 한남대학교 이사장은 지난 3일 국민교육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로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김 이사장은 1965년 학교법인 염광학원을 설립했으며 영광상업고 교장, 전국사립중고등학교장회 부회장, 서울중등사학법인연합회장 등을 맡았다. 1988년부터는 한남대 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2008년 제8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한국전쟁 중 남한에 내려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우수한 인재를 육성해 온 그의 삶과 교육 철학을 들어봤다.
    -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최근 국민훈장을 받았다. 감회가 어떤가.
    “최근에 국회 사학관계자들과 만난 모임에서 “나보다 훌륭한 분들이 더 많은데 선배들에게 미안할 뿐”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사학에서 40여년 일하며 많은 업적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사학에는 드문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아 시간이 갈수록 맘이 무겁고 송구스럽다. 1·4후퇴 때 피란을 와 학교를 설립하고, 지금 한남대학교의 이사장 된 것이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라는 신앙적인 판단도 하고 있다.”
    -6·25 전쟁 중에도 많은 고생을 한 것으로 안다. 당시 애기 좀 들려달라.
    “6·25 당시 구월당 유격부대로 차출돼 북한군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참혹한 전쟁터에서는 ‘한 달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버틸 정도였다. 한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전쟁 중 남한으로 넘어왔다. 진도에 피란민 다섯 명이 배정이 돼서 교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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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과 선교 활동을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전쟁 중에 시골의 교육은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을 이장에게 찾아가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평일에는 아이들을 교육했다. 교육과 선교로 동네에 많은 변화가 왔으며 사람들의 공감도 얻어 보람있었다. 40년 후 그 마을을 다시 찾은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 커다란 교회가 세워져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소식과 함께 교회 안에 나를 위한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공을 기억하고 있다고 들었다. 굉장히 감동스러운 경험이다.”
    -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학교 설립 이념도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인가?
    “전쟁 중의 체험을 외국에서 만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얘기했더니 말로만 듣기는 아깝다는 반응을 보여 책으로 엮었다. 그 책들이 전 세계 미션스쿨에 보내져 그걸 본 사람들이 연락도 많이 해 올 뿐 아니라 큰 세미나 할 때는 연사로 초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인들도 감동 받는 모습에 나 역시 감격했다. 그 후 법인 이름을 지을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인재를 되라는 뜻으로 ‘염광’으로 지었다.”
    - 학교법인 염광학원은 공교육 기반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 염광학원은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시작해 염광중학교, 염광상업고등학교 등 학교 규모가 확대되면서 노원구 월계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장위동 지역에 초등학교가 없어 학교용지 마련이 어려우니 서울시 교육청에 기존 학교용지를 양도하여 달라고 요청해 왔었다. 공교육 기반마련을 위해 이해득실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장위동 염광학원 부지와 건물을 시교육청에 양도한 것이 지금의 장곡 초등학교이다.”
    - 직업교육의 방향을 정보기술교육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어떤 방법으로 기여했나.
    “당시 중등 교육 중 실업교육은 크게 상업고교와 공업고교로 나뉘어 있었다. 전국 상고 가 400개, 공고가 300개로 총 700개였는데 모든 학교가 주산 교육만 시키는 정도에서 실업교육이라고 하고 있었다. 외국을 다니며 접한 교육 현실과 비교해 보고 문제점을 자각했다. 교육개혁위원회에서 미래직업교육에 대해 주제발표를 부탁받아 이 같은 생각을 전하고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화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교육부에서 예산 5억을 지원받아 총 10억원으로 92년도에 염광여상을 염광정보산업고로 개편하고 본격적인 정보기술 교육을 시작했다. 지금은 흔해진 ‘정보산업고’라는 명칭의 최초 사례다.”
    - 정보 기술 교육의 효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났나.
    “ 해마다 정보분야 기능 종목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고 2000년과 2001년에는 2회 연속 전국종합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 학교들이 우리학교의 교육 방법을 이어 받기 시작하면서 고등전문 교육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성과다.”
    - 청소년 생활체육과 문화, 평생교육 활성화에도 힘 써온 것으로 아는데.
    “1983년 당시 86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많은 예산으로 대규모 관악대를 조직해 미국 및 일본의 지도자를 초빙하고 집중 지도 끝에 우수한 기량을 가진 관악대로 발전시켰다. 각종 국가의 문화행사와 86서울아시안게임 문화행사에 출연해 성공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이에 따라 1989년 4월과 5월 2차에 걸쳐 학교가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그 후에도 88년서울올림픽게임, 2002년서울월드컵게임등 각종 국가의 문화행사에 출연했다 청소년수련활동과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2003년 포천염광청소년수련원을 설립했다. 그 곳에서 한 해에만 2만여명의 학생들이 수련했고 1996년에는 염광학원 내 여유시설에 평생사회교육원을 1996년에 설립해 지역주민과 연계한 성공적인 어머니 역할 교육프로그램과 어린이 영어교실등을 운영해 지역 사회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 중등교육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대학민국 교육을 평가하자면.
    “과거 100년 변화가 지금은 10년에 이뤄지고 있다. 학교 변화가 빠르게 이뤄져 나가야하는데. 교수, 교사 사회가 보수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려 해서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지난주 와세다 대학을 방문해 총장이사장을 만났다. 그들의 화두는 모두 세계화였다. 온통 세계화에 초점을 맞춘 몰입교육을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하고 있지만 이제는 한국 인재보다는 세계 속 인재를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중등학교에서 늦게까지 교육하고 있지만 주입식은 답이 아니다. 교사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 철학을 키워야한다. 이 역할을 국가가 지원해 줘야하는데 국가정책과 개별학교의 노력이 부족한 면도 있다.”
    - 학교교육은 과도한 사교육 문제도 심각한데.
    “사교육의 기본 원인은 공교육의 부실에 있다. 공교육은 사교육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학생도 부모도 장래를 위해 사교육기관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외국어와 IT기술을 강조해왔다. 공교육이 시대요청에 반응하지 못해 사교육이 성행하는 것이므로 공교육 개혁이 절실한 시점이다.”
    - 세계화와 함께 또 어떤 개혁방안을 생각하고 있나.
    “이제는 건강이다. 지난해 학교 이름을 ‘염광메디텍’으로 바꿨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 개편했다. 2학년까지 모집한 상태로, 호주, 미국, 일본까지 네트워크를 구축해 학생과 교사를 훈련시켜 협력 병원에서 실제 실습까지도 실시하고 있다.”
    - 지역대으로서, 또 미션스쿨로서 한남대학교의 비전은 무엇인가.
    “한남대의 특색은 건학정신에 있다. 설립자체도 선교사들이 했다. 오랫동안 사학에서 일하며 다른 대학에도 많이 관여해왔지만 한남대만큼 기독교육이 바탕에 깔린 학교는 찾기 힘들었다. 어떤 대학의 이사회나 학교행사를 가봐도 한남대 만큼 교목 활동 활발한 곳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영적, 정신적으로 바로 선 나라가 강국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고 있는 현실이다. 장래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아시아태평양시대에 한국 기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한다. 12년전 아태기독학교 연맹 조직했다. 미국, 호주,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등 9개 나라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를 한남대와 접목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현 김형태 총장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올해 모든 회원이 한국에 와서 회의를 하게 될 것이다. 향후 이 자격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갈 생각이다.”
    - 교육의 원로로서 후배 교육자들에게 조언부탁 드린다.
    “모든 것이 경쟁이다. 특히 오늘날의 국제화 사회에서는 더더욱 경쟁에서 뒤쳐지면 안된다. 이것은 학교교육의 역할이기도 한다. 교직원을 훈련시키고 미래를 향한 교육프로그램과 교류를 활발히 해서 10년, 20년 후 사회를 바라보며 비전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1등했다고 해서 사회에서 1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조언하겠다. 대전사람 말고 세계인이 돼라. 그리고 자신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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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박정희는 흠결많은 인간이었다.
    작성자 한국청년 작성일 2007-10-13 조회 조회 : 91 
    박정희는 흠결많은 인간이었다.
    박정희는 무흠무결의 영도자로 숭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않고 희망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에서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도 한사람의 인간이고 개인이었다.
    인간 박정희! 개인의 박정희는 과대포장되고 미화된 것과는 다르게 흠결많고 눈물많고 실수많은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민족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그였다.
    박정희는 비도덕적이었다. 박정희는 도덕적이지 못했다. 그는 첫부인 김호남과 딸 박재옥이 있는 중에 이현란이라고 하는 여성과 연애하였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이 이웃선산읍내 갑부의 딸을 데려다가 당신생전에 손자를 보겠다고 데려온 것이 3살 연하의 김호남이다. 박정희의 의사와는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자녀가 있고 가장이 된 이상에 박정희는 김호남과 딸을 배신하는 짓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김호남은 불교에 귀의하여 살다가 1991년에 사망했다.
    박정희는 귀국후에 1945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했고, 건준계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형 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으로 노선을 바꿨다. 1949년의 여순폭동에서 패하여 붙잡히자 이현란은 박정희를 버리고 떠났다. 뒤에 이현란은 다른남자와 가정을 차리고 살다가 1988년에 사망했다. 이현란이 떠난일로 박정희는 한동안 충격을 받았으나 재기에 성공하여 1953년 군부 친구의 주선으로 육영수를 만나 결혼한다.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다른여자와 살던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용납이 불가능한 행위였고 그댓가를 박정희를 어떻게든 생애 고비의 순간에 이현란의 배신이라는 것을 통해 지불받았다.
    박정희는 어리석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추종자 등 민주화 운동권들! 자칭 좌파와 사대주의자들은 박정희가 반민주적이고 정적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정적들을 탄압했다? 박정희의 정적탄압은 다른 정치인에 비하면 인도적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에 도전하던 인사들과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흉악범만을 처단하였다. 전두환이나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자들까지 색출해서 제거하였더라면!
    도요타의 납치사건은 자작극은 아닌가 의심된다. 그가 일본에서 물에 빠지자 일본의 야쿠자가 도요타를 건져냈다고 한다. 이때 다쳤다나. 그런데 그것도 심히 의심스럽다. 도요타가 야쿠자와 짜고 자신의 다리가 다친것처럼 조작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일본의 정치인들과 짜고 반한국활동을 하던 도요타는 대통령이 되자,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1988년 2천만명의 대한백성을 살해한 히로히토의 빈소에 고개숙여 절하고, 1997년 일본인 은사의 70년 황국신민 교육을 잊지못하고 대통령 당선후에 찾아가 아노 도요탑니다 해서 일본인스승은 물론 전세계를 당황하게 만든 사건과 1998년 어업협정 조약으로 독도와 주변바다를 일본에 팔아치우고, 1999년 일본왕을 천황으로 부르자고 한 것이다. 도요타는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해왔다. 왜 그랬을까? 1971년의 납치자작극때 일본에게 걸린 것이 있던가?
    박정희는 어리석었다. 반체제인사라면 격렬한 저항과 미국의 반대를 외면하고 무조건 밀어붙였어야 했다. 심지어 자칭 민주화 운동권이란 놈들 중에는 외국을 이용해서 박정희를 축출하려던 매국노같은 놈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했어야 했다. 살리기 좋아하던 박정희는 결국 방심한 중에 부하의 손에 시해된다. 지도자에게는 히틀러처럼 냉혹한 면도 부분적으로 존재해야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배신자였다. 박정희는 배신을 했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의 권유로 대구사범고등학교를 진학했고, 졸업후에는 교사로 문경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청년기때 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자와 민족주의자적인 성향을 가졌다.
    문경학교로 부임한 박정희는 비밀리에 한국의 역사와 인문교과목, 역대의 중요인물을 가르쳤고, 비밀리에 한글과 말을 가르쳤다. 황국신민의 정책이 극심해질 1930년대 후반 무단통치기에 한글말살정책이 일반화되던 때였다.
    박정희가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지목한 단군왕검, 광개토대왕, 김유신, 세종대왕, 이퇴계, 이순신, 김구, 여운형, 외국의 인물로는 알렉산더, 소크라테스, 줄리어스 시이저, 나폴레옹, 링컨, 간디를 지목했다. 박정희가 존경하며 학생들에게 권한 인물들은 일본인의 눈에는 거슬리기 좋은 핑계거리였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3년간 근무하면서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의 증언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제자 이XX 씨의 증언-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XX 비서관의 말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 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제자 김XX씨 증언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제자 이XX씨 증언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평소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 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 순사가 박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 선생님이 오가와 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 제자 이XX씨(남)의 증언입니다. -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 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제자 정XX씨의 증언입니다. -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제자 주XX씨의 증언입니다. -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라고 내몰았습니다." -제자 전XX씨의 증언입니다.-
    "박 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인간 박정희[이현란 편]2008.12.22 12:36 | 기본폴더 | 平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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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란 편]


    1947년 가을 춘천에서 8연대 경리장교 박경원(육군중장, 내무부 장관 역임)대위가 결혼식을 올렸다. 사관학교 중대장 박정희는 친 구들과 함께 하객으로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박경원보다 여섯 살이 많았으나 "박형"이라 부르면서 접근하는 박경원과 친했 다. 이 결혼식의 신랑측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고 신부 고금옥의 들러리는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김점곤은 그날 밤 이 현란과 하객들 하고 유쾌하게 놀았다. 이현란은 미인이었다. 몸매 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데다가 성격이 쾌활했다. 나 이는 김점곤보다 많게 보여 친구들이 "다른 건 다 맞는데 나이가 안맞는군"이라고 농담도 했다. 몇 달 뒤 김점곤은 용산에 있는 육 군장교 관사로 박정희 대위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들러리 아가씨가 박대위와 같이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박경원도 마찬가지였다. 박경원도 결혼한 뒤에 용산 관사에서 살림을 차렸다. 이 관사촌은 미군들이 사용하다가 철수한 뒤 우리 장교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서양식을 한국식으로 개조하 여 온돌과 장작아궁이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 한 집에 방이 서너개 있는 좋은 집이었다. 박경원이 하루는 퇴근하여 오니 아내 고금옥 이 말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친구가 아무래도 박정희씨와 같이 살 고 있는 것 같아요.".
    고금옥은 원산에서 출생하여 루시여고를 나온 뒤 교사생활을 잠 깐 하다가 월남했다. 이현란과는 여고시절 동창 사이였다. 박경원 은 섭섭했다.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 왜 나에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구나 한 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관사인 데. 다음날 박경원 부부는 박정희의 관사를 찾아갔다. 이현란은 정 말 미인이었다. 박정희-이현란은 원만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가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박경원 부 부를 맞아주니 이쪽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두 박 대위는 그냥 세 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고금옥과 이현란은 부엌에서 무어 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박경원 대위는 짚이는 데가 있어서 같은 경리장교인 이효에게 물어보았다. 이대위는 껄껄 웃으 면서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함남출신인 이효는 사관학교 2기생으 로서 박정희와 동기였지만 나이는 다섯 살이 많았다. 이효는 2기생 들 가운데 최연장자였다. 박정희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기 때문 인지 두사람은 생도 시절부터 친했다. 이효 장군은 몇년 전 작고했 는데 부인 우정자(81세) 할머니에 따르면 박정희는 생도시절에도 신당동에 있던 이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분은 이야기를 아주 구수하고 재미있게 하셨어요. 자기 자랑 을 전혀 안하시는 분이라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현란은 남편의 조 카와 함께 영어학원에 다녔다고 해요. 우리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 습니다. 들러리를 서게 된것도 남편이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효 대위가 박경원 대위한테 털어놓은 사정은 이러했다.
    "당신 결혼식 날 우리끼리 한 잔 했지.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형, 나도 혼자서 쓸쓸하게 지 내는데 아까 들러리 섰던 아가씨 하고 잘 좀 되도록 도와주시오'.
    그래서 내가 소개시켜주었지.".
    그때 스물 두 살이던 이현란은 고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 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를 보면 율동과목의 점수가 가장 높다(79점). 이현란은 생전증언(1987년)에서 '나는 그때 이화여대 다닙네 해서 포부도 크고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화사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이현란은 토요일 오후에 이효 대위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 명동 삼호정에 갔다고 한다.
    "윤태일, 이한림, 이주일 등 몇 사람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 나 는 부끄러워서 말대꾸도 못하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미스터 박이 소개되었습니다.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습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 뒤 미스터 박 은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부모들은 북 에서 못나오시고 해서 저는 있는 돈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형편에 미스터 박이 침착하고 저에게 잘 해주니 여자로서 끌렸습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 도 있었지만 양쪽이 다 부추겨서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현란은 은사의 도움을 받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등록금을 마 련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이현란은 1948년에 들어서 약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 독일에 간 친구 하나만 참석했어요. 피아노책을 사려고 기숙사에서 나오는데 미스터 박이 '이의 없죠?'라고 해요. 저는 부 끄러워서 대답도 못했는데 그걸로 응한 걸로 되었습니다. 가 보니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명동의 한식집인데 너무 당황해서 간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친구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 줄 알았나봐요.".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자신이 이미 장가를 들어 열 살이 넘은 딸 까지 두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즈음부터 본처 김 호남과 이혼을 하려고 애쓴다. 큰 딸 박재옥의 기억 .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셨습니다.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 다. '너희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될 수는 없을 것 같구나'라고 하 셔요.".
    박재옥은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하고 물었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엄마 이혼이 뭐예요."
    "이제 너희 집에서 못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그러면서도 김호남은 "절대로 내 손으로는 이혼을 안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이 썩었으니 자기도 당해봐야 돼"라고 했다.
    박정희 대위가 여덟 살 아래인 이화여대 1학년생 이현란과 사귀면서 본처 김호남의 소외는 더욱 깊어졌다. 이런 사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이 열한 살의 큰딸 재옥이었다.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그 뒤로는 어머니가 어 디 가신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안해졌다. 이 혼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어머 니와 나의 애처로운 모습에 할머니는 얼마나 속을 끓이셨는지 모른다. 아들을 대놓고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마냥 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할머니 입장이었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형제들 사 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축 처진 내 모습을 볼 때 마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 시곤했다. 감이 하나 있으면 할머니는 화로의 재속에 파묻어두었다가 내가 혼자 방에 들어가면 재를 걷고서 뜨뜻해진 감을 꺼내주시는 것이 었다.'.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그때 일흔을 넘긴 나이였다. 늘 막내 며 느리의 음식솜씨와 바느질이 최고라고 칭찬했지만 김호남에게는 큰위로 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재옥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다섯 살때까지 젖을 먹었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김호남의 딸에 대한 집착, 그런 어머니에 대한 딸의 집착도 그만큼 강했다. 김호남은 이윽 고 박재옥을 데리고 구미를 떠버렸다. 죽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에게 만 이야기하고 사라져 버렸다. 백남의 할머니는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 헤맸으나 알 길이 없었다. 박재옥에 따르면 모녀는 대구로 갔다고 한다.
    '대구로 가보니 어머니에게도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나이에 비 해서 조숙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대번에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상황이 싫었다. 결사적으로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반기를 들었다. 열살 남짓한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거부 의 표시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조리 있는 말로 어머니를 설 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 이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하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현란과 약혼한 박정희 대위는 곧 이현란을 용산의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하기 시작 한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여름방학 때는 대학 기숙사를 비워 주어야 하는데 마땅히 머물 곳도 없어 친구와 함께 박정희의 관사를 쓰 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다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아 혼자 쓰고 있는데 한 20일이 지나 박정희가 관사로 들어왔다. 박정희가 자신을 '계획적으로 관사에 오게끔 했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이현란 은 이 관사를 나와 친구 집으로 옮겼는데 "명동에 칼국수를 먹으러 갔 다가(박정희에게)들켜서 다시 관사로 잡혀왔다"고 한다.
    "맨날 피했다가 들켜서 다시 관사로 오곤 했습니다. 그분은 신사 였습니다. 내가 나이가 어린데도 '식사하쇼'라면서 존대를 했습니다. 인격있고 무게 있고 말이 없고… '내가 말이 없어 재미 없지요'라고 하 기에 '말이 핀꽃에 열매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은 술은 노상 마셔도 정신은 항상 말짱했어요. 자세가 흩어지지 않고요. 내가 술을 싫어하니까 집에서는 안마셨어요. 술 한 상이라도 우리 집에서 받 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누가 오기만 하면 벽장에 숨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다칠까봐 했던 때이니까요. 그분은 일본교육을 받은 탓에 독한 사람이었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데 철두철미했어요. 그 이상 다정다감할 수 가 없었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이현란 몰래 사라진 김호남과의 이혼수속을 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김호남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절하고 어디론가 가버린 데다가 김호남의 아버지도 딸을 대신하여 도장을 찍어 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으 면서 한편으로는 좌익에 빠져들고 다른 편으로는 이현란이란 미인을 만나 난생 처음으로 연애를 체험하고 있던 1948년 여름 뭉게구름이 모여 들더니 폭풍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해 8월17일 윤희중외 2백18명 의 7기 특별반 사관후보생들이 입교했다. 이들은 거의가 일제시대에 군 간부로 근무하였던 경력자들. 일본 육사58기 출신인 정래혁(육군중장 예편·국방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박정희의 만주군관 학교 동기 이 주일(감사원장 역임)도 이때 들어왔다. 8월20일 이들 생도는 완전무장을 하고 태릉 학교 근처의 산을 돌아오는 10㎞의 구보를 했다. 여기서 민영식 서청하 생도가 일사병으로 죽었다. 그해 8월1일로 소령으로 승진하였던 박정희 중대장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되고 말았다.
    군내의 남로당 조직에 깊숙이 빠져 있던 박정희 소령은 북한 공산주 의를 체험하고 월남한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창윤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최창윤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북했다가 김일성 일당의 행태를 가까이서 본 뒤 절망한 과정을 설명했다. 최창윤, 박창암, 박임항, 방원철 등 만군출신장교들은 해방 직후 박승환을 중심 으로 서울에 모였다가 여운형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의 인민군 창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1946년 초에 월북했었다
    여순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지자 최남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체포되었다. 최창윤에 의한 설득 때문에 마 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반란사건을 맞아놓으니 진압군도 아니고 반란군 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소령의 체포에 대해서는 용산관사에서 동거하던 이현란의 증언이 실감난다.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효대위(편집자 주-- 박정희를 이현 란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가 찾아왔어요. 술을 마신 모양인데 저에게 돈을 얼마 주면서 당분간 기다리라고 해요. 미스터 박이 출장갔다는 겁 니다. 그랬다면 아래 채로 전화를 했거나 메모라도 전해왔을텐데 밤새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다음날 강문봉 대령 부인에게 찾아가서 물었더 니 부인이 "아직도 몰랐느냐"면서 남편을 불러서 (체포사실을)알려주는 거예요.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릴 정도로 쇼크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사에 왔다갔다 했습니다.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는 저로서는… 이북에서 그게 싫어 왔는 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얼마 후 (수사담당자) 김창룡이가 찾아와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의 메모도 전해주었습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육사7기생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를 하고 아침에 국방부로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아는가.' 그러나 난 괘씸했 습니다'.
    숙군수사팀에 구속된 박정희 소령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 고백한 내용 -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 데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여덟 살 아래인 그녀 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이때 이현란이란 여인이 없었 고 박정희가 달아났다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동 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 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애절한 고백은 그러나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 이 마누라라니'하면서 배신감을 가누지 못했던 이현란에게는 효과가 크 지 않았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구속된 얼마 뒤 조카 박재석과 한 여인이 서울로 올라와 관사로 찾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이 현란에게 "재옥이 엄마(편집자 주-박정희의 본처 김호남)가 알게 될지 모르니 서대문형무소에 면회를 다니지말라"고 하더란 것이다. 박재석과 같이 온 여인은 박정희의 죽은 형 박상희와 친한 서울 여자였는데 이현 란을 보고서는 "이렇게 참한 색시가 어쩌나"라면서 김호남이 가출한 이 야기,박정희가 이혼수속을 하려고 했으나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이 현란은 이때 처음으로 박정희가 결혼하여 열한살 딸이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포되기 전 어느 날 박정희는 이현란의 손을 잡고 한참 쳐다보더니 "참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의아했는데 일이 닥 치고보니 '말 못할 사정'을 전달하려 한 것임을 알았지만 이현란은 '배 신감으로 용서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아내로 맞을 때 암시를 주었어야지. 장가를 가서 아이까지 낳았 다고 하니 정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성의 '이'자도 모르는 여자인데 도저히 이해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
    .....

    박정희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와 민간인 신분으로서의 박정희의 가정 생활도 서서히 파국로 치닫고 있었다. 이현란과의 싸움은 박정희가 손찌검을 하는 정도로 발전하여 용산의 관사 촌에서도 알려지고 과원들도 짐작할 정도였다. 이현란이 멍이 든 얼 굴을 하고 다니고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현란은 1950년2월 6일 밤에 몰래 관사를 나와 박정희와 영원히 헤어진다. 두 사람은 싸 움을 한 후인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박정희는 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자는데 이현란은 메모를 써놓고 몸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메 모의 내용은 '그동안 고마왔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이현란이 며칠 뒤에 나타나서 자신의 소유물을 싣고 가는 것을 목 격한 사람이 있다. 같은 과에서 근무했고 같은 관사촌에 살던 한무협 대위였다. 1950년에 첫 봄비가 내린 날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저녁 에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짐 실은 트럭을 타 고나오는 이현 란을 보았다. 두 사람은 트럭을 가로막고 "가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트럭은 돌진하여 한무협은 몸을 급히 피하여야 했다고 한다.
    박정희에게 이현란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성격이 서로 강 해서 자주 부딪히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한 쪽은 박정희 였다. 이현란의 박정희에 대한 정은 냉담해갔지만 박정 희의 그녀에 대한 연정은 그럴수록 더 절박해졌다. 직업과 어머니와 미래까지도 모두 잃었던 박정희가 붙들고 있던 유일한 끈은 이현란이 었다.그녀가 떠난 것이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넓은 관사에 혼자 남게 되었다. 서른세 살의 홀아비가 된 것이다. 박정희가 친구들을 배신하여 살아 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의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박정희도 자격지심에서 사람접촉을 피했다. 어머니도, 친구도, 연인도 떠난 1950년의 봄은 박정희의 생애에서 최악의 나날들이었다.
    이때의 박정희를 아주 가깝게 관찰한 것은 육사2기 동기생인 한 웅진중령이었다. 당시는 이름이 한충렬이었던 그는 한웅진으로 개명 할 때 박정희와 의논할 정도로 형제처럼 가까웠다. 3연대 3대대장으 로서 지리산에서 여순14연대반란사건의 지휘자 김지회 홍순석을 사 살한 한웅진은 중령으로 특진하여 정보국 산하의 방첩부대(CIC)본부 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대륙공사란 회사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었다. 보안사의 전신인 이 조직은아직 독립 부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한웅진은 방첩수사 책임자로서 박정희를 마음놓고 만날 수 있었고 박정희는 동생처럼 아끼던 네 살 아래의 한웅진을 하나의 보호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웅진은 결 혼하여 전주에 집이 있었지만 이때는 경교장 근방의 언덕바지(옛 고 려병원근방) 2층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퇴근한 뒤에 이 하숙집에 자주 놀러 왔다.
    한웅진의 생전(생전)증언-.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들 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 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 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 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