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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중재외교
그린페
2010. 7. 14. 09:46
"리비아가 부상하고 있다"
북한에 못지않게 오래도록 국제사회의 골칫거리였던 리비아의 변신이 놀랍다. 핵개발 야망을 버리고 테러 척결에 협력하면서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뤘고, 그 후 빠르게 현대적인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2일 ‘사막에서 현대국가로 가는 리비아의 길’이라는 기사에서 리비아의 변화·발전상을 소개했다.
가장 눈에 띄는 리비아의 변화는 경제다. CSM에 따르면 리비아 국내총생산(GDP)은 유엔이 제재를 중단한 1999년 167억 달러에서 2008년 1140억 달러로 늘어났다. 미국이 리비아에 대한 자체 제재를 해제한 이듬해인 2005년 리비아 경제는 10.3% 성장을 기록했다. 외국인 직접투자도 2000년 15억 달러에서 2007년 기준으로 23억 달러로 늘었다. 그 결과, 리비아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올해 5.2%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했다.
‘이단아’ 리비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역사는 짧지 않다.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1988년 발생한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의 팬암기 폭발사건의 용의자 2명의 인도를 거부하자 유엔은 1992년 무역봉쇄 조치 등 강력한 제재에 들어갔다. 엄격한 비행금지 구역이 설정돼 리비아로 통하는 항공운송이 제한됐다. 수출입은 물론 인적 교류의 길까지 차단됐다. 물가는 치솟았고 경제난은 한 세대가량 지속됐다.
변화를 가져온 것은 지도자 카다피의 특단의 결정이었다. 카다피 정부는 1999년 팬암기 사건 용의자의 인도에 동의했고, 유엔은 단계적 제재 중단 과정을 거쳐 2003년 제재를 공식 해제했다. 이듬해 리비아는 내친김에 핵프로그램 포기까지 선언했고 미국도 자체 제재를 철회했다.
국제사회의 봉쇄가 풀리자 리비아는 석유수출 프로그램을 풀가동했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 리비아는 현재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최대 허용량까지 석유를 생산해 GDP의 70%를 석유수입에서 벌어들인다. 리비아 정부는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도로와 사회기간시설 등을 구축하는 대형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외국인 투자는 물론, 국내 고용창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와 함께 부의 재분배를 위해 22만2000여 가구에 월 377달러를 지급하는 사회기금도 만들었다.
리비아는 국제 외교무대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카다피 원수는 그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중동평화 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몇 번이고 자진해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카다피 원수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이 이끄는 카다피 재단은 이번 주 가자지구에 구호선을 보내 시선을 끌기도 했다.
리비아가 극적인 탈바꿈으로 국제사회에서 성공 복귀하자 국제사회의 시각도 바뀌었다. 미 정책결정자들은 이란과 북한처럼 핵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다른 ‘불량국가’에게도 리비아를 본보기로 한 접근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CSM은 논평했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2일 ‘사막에서 현대국가로 가는 리비아의 길’이라는 기사에서 리비아의 변화·발전상을 소개했다.
가장 눈에 띄는 리비아의 변화는 경제다. CSM에 따르면 리비아 국내총생산(GDP)은 유엔이 제재를 중단한 1999년 167억 달러에서 2008년 1140억 달러로 늘어났다. 미국이 리비아에 대한 자체 제재를 해제한 이듬해인 2005년 리비아 경제는 10.3% 성장을 기록했다. 외국인 직접투자도 2000년 15억 달러에서 2007년 기준으로 23억 달러로 늘었다. 그 결과, 리비아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올해 5.2%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했다.
‘이단아’ 리비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역사는 짧지 않다.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1988년 발생한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의 팬암기 폭발사건의 용의자 2명의 인도를 거부하자 유엔은 1992년 무역봉쇄 조치 등 강력한 제재에 들어갔다. 엄격한 비행금지 구역이 설정돼 리비아로 통하는 항공운송이 제한됐다. 수출입은 물론 인적 교류의 길까지 차단됐다. 물가는 치솟았고 경제난은 한 세대가량 지속됐다.
변화를 가져온 것은 지도자 카다피의 특단의 결정이었다. 카다피 정부는 1999년 팬암기 사건 용의자의 인도에 동의했고, 유엔은 단계적 제재 중단 과정을 거쳐 2003년 제재를 공식 해제했다. 이듬해 리비아는 내친김에 핵프로그램 포기까지 선언했고 미국도 자체 제재를 철회했다.
국제사회의 봉쇄가 풀리자 리비아는 석유수출 프로그램을 풀가동했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 리비아는 현재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최대 허용량까지 석유를 생산해 GDP의 70%를 석유수입에서 벌어들인다. 리비아 정부는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도로와 사회기간시설 등을 구축하는 대형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외국인 투자는 물론, 국내 고용창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와 함께 부의 재분배를 위해 22만2000여 가구에 월 377달러를 지급하는 사회기금도 만들었다.
리비아는 국제 외교무대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카다피 원수는 그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중동평화 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몇 번이고 자진해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카다피 원수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이 이끄는 카다피 재단은 이번 주 가자지구에 구호선을 보내 시선을 끌기도 했다.
리비아가 극적인 탈바꿈으로 국제사회에서 성공 복귀하자 국제사회의 시각도 바뀌었다. 미 정책결정자들은 이란과 북한처럼 핵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다른 ‘불량국가’에게도 리비아를 본보기로 한 접근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CSM은 논평했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