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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여사절

그린페 2010. 2. 10. 00:12

이순자여사가  다니는절

 

제가 알기론 수종사로 알고있습니다. 양수리쪽에 있죠

아래쪽 홈피를 참조하시면 쉽게 찾아가실수 있을껍니다 ^^

http://www.hyulim.co.kr/jsp/travel_info/TravelInfo.jsp?p_travel_cd=00000307

 

'알천랑' 이승효, 차기작 '전우'에서 최수종-이태란과 호흡
[한국경제신문] 2010년 02월 09일(화) 오전 10:05   가| 이메일| 프린트

‘알천랑’ 이승효가 차기작으로 ‘전우’를 선택했다.
이승효는 MBC 특별기획드라마 ‘선덕여왕’이 종영된 이후에도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쉽게 식을 줄 모를 만큼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차기작을 결정했다.
이승효는 ‘알천’ 이라는 선덕여왕의 시위부령 역으로 열연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던 바 있다.
극중에서의 묵직하고 항상 변함없는 ‘알천’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 내며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많은 팬들이 생겼다. 또한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는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며 배우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각종 언론과 매체에서도 2010년이 기대되는 연기자라 불릴 만큼 관계자들은 물론 팬들의 관심도 폭발적이다.
‘선덕여왕’의 종영 이후 간단한 휴식을 취하며 차기작을 물색하던 중 KBS특별기획 드라마 ‘전우’의 감독님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전격 캐스팅을 됐다. 타 드라마를 포함해 다른 영화 등 여러 작품의 출연 제의도 많았지만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2010년이기에 6.25관련 프로그램과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데다 여러모로 의미가 있어 이번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 이라고 한다.
한편 전우는 최수종, 이태란, 이덕화 등 대한민국의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와 나란히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 이승효는 ‘전우’의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무술 팀과의 훈련에 합류하여 각종 무술과 몸풀기를 통해 촬영준비에 들어간 상태이다.
한경닷컴 bnt뉴스 조은지 기자 star@bntnews.co.kr
사진 김지현 기자 addio32@bntnews.co.kr
 
최수종노숙, ‘힘들었던 그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난 2일 방송된 SBS '추억게임 리멤버'에서 최수종이 노숙 경험을 털어놔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수종은 아내인 하희라와 함께 출연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고속버스터미널 등지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다"고 어렵게 말을 꺼낸 것.

이와 함께 하희라의 어린 시절 일화가 공개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하희라의 친언니는 하희라가 춤을 춰서 돈벌었던 일화를 공개했다.

하희라는 어린시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악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었던 아이로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보느라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30분이나 지연되기도 했다고.

한편 탤런트 하희라가 3번에 걸친 유산 경험을 털어놔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최수종은 "아내 하희라가 신혼 초 3번의 유산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동시에 아내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졌다"고 털어놨다.

최수종은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기에 현재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산다"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투데이코리아 강인호 기자 kih@todaykorea.co.kr

성씨의 고향 > 성씨로 찾기

氏族의 연원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문성왕조(文聖王朝, 839 -857)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신라명신(新羅名臣) 이순유(李純由)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이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공께서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에 항복함에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高麗朝)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살았으나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 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後孫)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戶長)이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포섭하기 위해 설치한,말하자면 지방통치의 수장(首長)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고려조에 호장(戶長)을 맡아왔다.
고종 때의 인물 이장경(李長庚)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중시조가 될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
아버지 이득희(李得禧)가 태몽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지었다. 호장(戶長)으로도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丞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元)의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이장경(李長庚)을 중시조로 삼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따라서 중흥시조 이장경(中興始祖 李長庚)이 농서군공(?西郡公)이 되었기에 혹은 농서이씨(?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家勢)가 크게 일어나 관향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 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본관지 연혁

성주(星州)는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주군(星州郡)에 붙였고 고려 태조가 경산부(京山府)로 고쳤으며 경종 때는 강등되어 광평군(廣平郡)으로 되었다.
충렬왕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을 만들었고 충선왕 때 강등시켜 경산부(京山府)라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인습하였다.
태종 때 목(牧)으로 고쳤고, 이후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 성씨로는 이(李) · 김(金) · 도(都) · 여(呂) · 배(裵) · 시(施) · 초(楚) · 현(玄) · 석(石)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5대종파(宗派)

→밀직공파(密直公派)·참지공파(參知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유수공파(留守公派)·문렬공파(文烈公派)
지파(支派) : 초은공파(樵隱公派)·광평군파(廣平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도은공파(陶隱公派)·경무공파(景武公派)·평간공파(平簡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총제공파(摠制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동지공파(同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간성공파(杆城公派)·고은공파(孤隱公派)·장절공파(章節公派)·도정공파(都正公派)·문과공파(文科公派)·봉례공파(奉禮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

 

주요 세거지

2세손 이백년(李百年)의 자손들인 밀직공파(密直公派)는 대체로 관향(貫鄕)인 성주(星州) 일원에 살다가 9세손 이세영(李世榮)의 후계가 전남 곡성(谷城)의 옥과(玉果)로 옮겨갔던 것 같고, 역시 9세손 이석견(李碩堅)의 후계가 성주(星州)에서 경북 영천(永川)의 와촌(瓦村)으로 이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고령 · 금릉 · 칠곡(高靈 · 金陵 · 漆谷)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지공파(參知公派)는 6세손 이종실(李從實)이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좌천되었던 사실과 8세손 이기(李琦)가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던 사실이 ‘을묘보(乙卯譜)’에 보이고 이 무렵부터 정평 · 함흥(定平 · 咸興) 등지가 세천지(世阡地)로 지켜졌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10세손 이천충(李天忠)은 경남 거제(巨濟)로 들어가 아주(鵝洲)에 살게 됨으로써 그 후계(後系)가 이 지역에 정착했던 것 같다.
한편 시중공파(侍中公派)는 5세손 이사분(李思芬) 이래로 충주 · 중원(忠州 · 中原) 등 충북 일원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며, 6세손 이지활(李智活)이 단종 3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남 거창(居昌)에 퇴거하여, 자손들이 거창 · 함양(居昌 · 咸陽) 등지에 나뉘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문렬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의 후계(後系)에서 5세손 이용(李容)이 태조조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을 사 평북 영변(寧邊)의 오리(梧里)로 유배되었던 것 같고 아들인 이익번(李益蕃)의 대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손 이사형(李師衡)의 자손들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속해 있는 간성(杆城)에 자리잡았던 것 같고, 7세손의 대에 와서 이순년(李舜年)의 자손들이 밀양(密陽)에, 이맹창(李孟昌)의 자손들이 평남 성천군(成川郡)에 각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세손 이숙순(李叔淳), 8세손 이흥로(李興老) 이래로 그 후손들이 경남 산청 · 남해(山淸 · 南海)와 충북 옥천(沃川)에서 세거해온 것 같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에 걸쳐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묘롱(墓壟)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 이르러, 자손이 번창하여 세거의 범위도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충북 옥천군 동이면(沃川郡 東二面),
전북 정읍군(井邑郡) 일원,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谷城郡 木寺洞面) ·보성군(寶城郡) 일원,
경북 성주군(星州郡) 일원,
칠곡군 · 금릉군 · 상주군(漆谷郡 · 金陵郡 · 尙州郡) 일원,
경남 산청군 · 남해군(山淸郡 · 南海郡) 일원,
함양군 병곡면(咸陽郡 甁谷面),
평남 성천군(成川郡) 일원,
함남 정평군 정평면(定平郡 定平面) 등지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경북 성주,금릉,고령,달성(星州.金陵,高靈,達城) 등지,
경남 거창,합천,거제,함양(居昌,陜川,巨濟,咸陽) 등지,
전북 전주 · 익산 · 옥구(全州 · 益山 · 沃溝) 등지,
충남 부여 · 논산 · 당진 · 보녕(扶餘 · 論山 · 唐津 · 保寧) 등지,
경기도 안성 · 광주 · 용인(安城 · 廣州 · 龍仁) 등지,
강원도 명주 · 강릉 · 홍천(溟州 · 江陵 · 洪川)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씨족史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가 삼한(三韓)의 큰 성씨로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왔다.”는 등의 종세(宗勢)를 자랑하는 귀절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문형(文衡)이 8명, 봉작(封爵)을 받은 이가 11명,상신(相臣)이 15명,또 식읍(食邑)을 받은 분은 5명,부마(駙馬)는 2명, 8세 안에 문과급제자는 75명, 생원과 진사, 그리고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한 분은 손으로 꼽을 수 없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원사(院祠)만 하더라도 24우(宇)나 된다고 하면서 성산군지(星山郡誌)에는 “성주(星州)에 다섯 이씨(五李氏)가 있는데 성주이씨(星州李氏)가 가장 현창(顯昌)하다고 했다.”는 내용도 소개하였다.
성주이씨세진록(星州李氏世眞錄)에는 또 이런 말도 있다. “우리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멀리 신라말의 명신(名臣)인 시조공으로부터 1천여년에 걸쳐 훌륭하고 빛나는 조상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왔고 오늘의 번성(繁盛)을 가져 왔다.”
으례 종문(宗門)을 이야기할 때면, 자손의 처지에서 조금은 과장스럽게 표현한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선대에 대한 후손된 당연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과거 성주이씨(星州李氏)의 관환(官宦)이나 열력(閱歷), 또 오늘의 씨족세를 감안할 때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관력(官歷)부터 살펴 보자 .

→중시조로 추앙받는 이장경(李長庚)은 이득희(李得禧)의 아들이다.
고려 고종 때 태어나 학문에 정통하였고,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이 높았고 큰 공을 세워 농서군공(?西郡公)이라 선칙(宣勅)되었다.


→이백년(李百年)은 호를 묵옹(묵翁)이라 했는데, 이장경(李長庚)의 큰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안유(安裕) 등과 더불어 유교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천년(李千年)은 요재(樂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西郡公)의 둘째 아들로 충렬왕 11년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 봉선대부 전객부령(奉善大夫 典客副令)이 되었을 때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이 元신분이 되었기에 선칙(宣勅)으로 영북등처행중서성참지정사 농서군공(嶺北等處行中書省參知政事 ?西郡公)에 봉해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정승(政丞)에 추봉하고 원효(元孝)라 시호(諡號)하였다.
유명한 이여송(李如松) 장군은 그의 7세손이다.

→이만년(李萬年)은 호가 창고(蒼皐)이며 농서군공(?西郡公)의 세째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견룡(牽龍)이라는 무관직(武官職)을 지낸 뒤 낭장(郞將) 겸 중군지후(中軍祗候)를 역임하면서 큰 도량이 인정되어 시중(侍中)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숙헌(肅憲)이다.

이억년(李億年)은 요산재(樂山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西郡公)의 네째 아들로,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문인(門人)으로 문과에 급제, 개성류수(開城留守)를 지냈다.

→이조년(李兆年)은 농서군공(?西郡公)의 다섯째 아들로,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다.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제자로 17살의 나이로 형들과 함께 문과에 올라, 안남서기(安南書記), 진주목(晋州牧), 사록사(司錄事), 통문서전첨(通文署典籤), 강릉부사(江陵府使),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 합천치(陜川治) 등을 역임한 뒤 37세 때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충숙왕의 복위(復位)에 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되었다.
성근익찬경절(誠勤翊贊勁節)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문렬(文烈)이라 시호(諡號)되었고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로 추증과 함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승경(李承慶)은 이천년(李千年)의 아들이다.
元나라에서 문과에 합격,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어사(御史)를 지낸 뒤 요양성참지정사(遼陽省參知政事)로 올라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元의 조정으로부터 아버지 이천년(李千年)과 조부 이장경(李長庚)에게 농서군공(?西郡公)이추봉되었다.귀국한 뒤 공민왕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간계로 죽음을 당했다.

→이포(李褒)는 이조년(李兆年)의 아들로 벼슬이 벽상 삼중대광 검교문하대중 겸 판선부사(壁上 三重大匡 檢校門下待中 겸 判選部事)가 되고 광정대부(匡正大夫)로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다.

→또 이원구(李元具)는 이린기(李麟起)의 아들로 우탁(禹倬)과 더불어 역이학(易理學)을 공부했고, 문과에 올라 대호장군(大護將軍)에 이르고 강릉찰방(江陵察訪) 등을 지낸 뒤 추성좌명공신(推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고려조에서 뚜렷한 인물이 된 이인복(李仁復)은 이포(李褒)의 아들이다.
초은(樵隱)이 그의 호다.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예문수찬(藝文修撰) 등을 지낸 뒤 언지제교(言知製敎)가되고 元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합격, 귀국하여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공민왕 8년 상서좌복사 어사대부(尙書左僕射 御史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첨의평이 삼사우사(僉議評理 三司右使)를 역임했고, ‘금용(金鏞)의 난’ 뒤에 도첨의찬성 겸 우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 겸 右文館大提學)이 되고 공신이 되었다.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고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임(李仁任)은 그의 아우인데 호는 승엄(勝嚴)이다. 충숙왕 1년 전객사승(典客寺丞)을 거쳐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가 되어 쌍성(雙城)을 정벌 항복받았다. 홍건적을 정토하여 2등공신이 되었고, 재차의 홍건적 침입 때는 왕을 배종(陪從)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공민왕 17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를 겸하여 동녕부(東寧府)를 토벌,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왕책봉(冊封)에 앞장섰으며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지켰다. 임견미(林堅味)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어 문숙(文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립(李仁立)도 그의 아우다. 공민왕 3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진현관대제학.서경부원수(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 · 西京副元帥)가 되었고 고려 국운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포(李褒)의 여섯째 아들은
☞.이인민(李仁敏)으로, 공민왕 9년 문과에 올라 문하평리 겸 대제학 밀직사사, 판개성부사(門下評理 兼 大提學 密直司事, 判開城府事)에 이르렀다. 공양왕 2년 윤이(尹?) 등의 무고사건에 관련되어 이색(李穡) 등과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기도 했으나 풀려나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추충익대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령의정 겸 경연 판리조사감 춘추관사 성산부원군(推忠翊戴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겸 經筵 判吏曹事監 春秋館事 星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대제학 문충공 이숭인(大提學 文忠公 李崇仁)은 성산군 이원구(星山君 李元具)의 큰 아들로 호는 도은(陶隱)이다.
목은(牧隱: 이 색), 포은(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도은 (陶隱) 숭인(崇仁)은 공민왕(恭愍王)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과 태학교수(太學敎授)로 있으면서 주자학(朱子學)의 소개에 앞장섰다.주요관직을 역임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라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우왕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거쳐 서연관 (書筵官)이 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경산(京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92년(태조 1)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배소에서 살해당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목은의 동문으로 다정했던 사이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됨으로써 도은은 절개를 지켰고 정도전은 새 왕조에 귀부한 변질된 자가 되어 세상에 더없는 앙숙으로 변하였다. 도은이 정몽주의 일당이라 하여 경산(京山)에 귀양갔었는데,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태종(太宗) 때 황거정(黃居正)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에 올랐었는데, 도은을 죽였다는 말이 임금 귀에 들어가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온 터이라,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구나"하고는 훈작(勳爵)을 삭제, 서인(庶人)으로 삼고 자손(子孫)은 금고(禁錮)시켰다.태종 1년 복직되고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문경공 이직(文景公 李稷)은 이인민(李仁敏)의 큰 아들로 호는 형재(亨齋)이다.
우왕 12년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밀직사우부언 · 예문제학(密直司右副言 · 藝文提學)을 지냈다.
조선개국에 공헌,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개국공신 2등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도승지 · 중추원학토(都承旨 · 中樞院學土)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정종 1년 서북면도순문찰이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랐다.
2차 王子의 난 때는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태종 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 활약했고 뒤에 성산부원군, 우의정(星山府院君, 右議政)이 되었고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星州에 귀양가기도 했다. 세종 4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경(文景)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안성공 이견기(安城公 李堅基)는 이수(李穗)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 지평(右正言, 持平) 등을 거쳐 우승지·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예문관제학 ·판한성부사(右承旨 · 戶曹參判 · 忠淸道觀察使 · 藝文館提學 · 判漢城府事)를 역임했고,호조판서 · 이조판서(戶曹判書 · 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단종손위(遜位)에 따라벼슬을 버렸고 세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안성(安城)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이제(李濟)는 이인립(李仁立)의 큰아들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과 결혼, 조선 건국에 앞장서 순충좌명개국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이 되어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도사지겸 서경연사(義興親軍衛節度使知兼 書經筵事)를 거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다.
제 l 차 王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는데 세종 3년에 신원(伸寃)되어 경무(景武)라 시호(諡號)되었고 부조묘(不?廟)를 세웠다.

☞.이발(李潑)은 이인립(李仁立)의 둘째 아들로 태종조에 문과, 세종1년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간(平簡)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지활(李智活)은 이만년(李萬年)의 현손(玄孫),이조 판서 비(비)의 아들 단종(端宗) 때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내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居昌)의 박유산(朴儒山)에 들어가 망월정(望月亭)을 짓고 매일밤 북녘을 바라보며 단종을 사모하는 시(詩)를 짓고 통곡하였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夜夜相思到夜深)
-기우는 달만 님과 나를 비추이네(東來殘月兩鄕心)
-이 원한을 풀어 줄 사람 없어(此時寃恨無人解)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孤倚山亭淚不禁)
그 후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사후(李師厚)는 이직(李稷)의 첫째 아들로 한성부윤에 올랐으며,

☞.이사형(李師衡)은 이직(李稷)의 넷째 아들로 호를 감당(監塘)이라 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 효도와 덕기(德器)가 컸다고 한다. 단종 손위(遜位)를 당해 벼슬을 버리고 화진포(花津浦)로 퇴거하였다. 벼슬은 숭록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崇祿大夫 吏曹判書 弘文館 大提學)에 이르렀고,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으며 충열(忠烈)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안성공 이견기(安城公 李堅基)는 이수(李穗)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 지평(右正言, 持平) 등을 거쳐 우승지 · 호조참판 · 충청도관찰사 · 예문관제학 ·판한성부사(右承旨 · 戶曹參判 · 忠淸道觀察使 · 藝文館提學 · 判漢城府事)를 역임했고, 호조판서 · 이조판서(戶曹判書 · 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단종손위(遜位)에 따라 벼슬을 버렸고 세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안성(安城)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이정녕(李正寧)은 이사후(李師厚)의 둘째 아들로서 세종 7년에 태종의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결혼, 부마(駙馬)가 되어 성원위 자헌대부(星原尉 資憲大夫)에 제수되었다.

☞.이집(李집)은 장절공 이정녕(章節公 李正寧)의 큰아들이다.
성종조에 돈녕부정, 봉상정,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의(敦寧府正, 奉常正, 黃海道觀察使, 司諫院 大司諫, 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연산조에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호·공양조판서(大司憲 吏曹參判, 京畿道觀察使, 戶·工兩曹判書)가 되어 춘추관사 세자좌빈객(春秋館事 世子左賓客)을 겸했다.연산조에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재기용,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뒤에 공숙(恭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 연산군(燕山君)이 그의 가기(歌妓: 노래 잘하는 기생)를 위해 가시(歌詩)를 지어 바치라고 했을 때 최초로 거절하고 성덕(聖德)을 우려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자건(自建)은 이것이 탈이 되어 곤장을 맞고 선산(善山)으로 유배당했다.
그 죄상으로 보아 복직이 가망없다고 생각한 선산의 수령은 군졸을 데리고 가서 자건의 우소(寓所)를 포위하고는 그를 묶어서 꿇어 앉히곤 직접 매질까지 하였다.
그 후 자건이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을 때 이 선산의 수령은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다가 그 저보(邸報)를 보고 수령직을 사임하려 하자 자건은 안악으로 찾아가 잘 달래어 머물러 있게 했고, 치산(治山)에 소홀하여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녹미(祿米)를 아껴 조금씩 술을 빚어먹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이성량(李成樑)은 이경(李涇)의 아들이다. 요동철령위학생원(遼東鐵嶺衛學生員)을 거쳐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고 태보 겸 태자태보(太保 겸 太子太保)를 지낸 뒤 봉천익위 선력무신녕원백(奉天翊衛 宣力武臣寧遠伯)에 봉해졌다.

☞.충렬공 이여송(忠烈公 李如松)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손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그는 요양성 참지정사 이승경(遼陽省 參知政事 李承慶)의 후손으로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이다.
진사(進士)를 거쳐 상주국 광록대부(上柱國 光祿大夫)에 오르고 제독진수 요계보정 산동등처방모어왜군무총병 태자태보 중군도독 부좌도독 소보녕원백(提督鎭守 遼?保定 山東等處防侮禦倭軍務摠兵 太子太保 中軍都督 府左都督 少保寧遠伯)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제독(提督)으로 출전, 큰 공을 세웠다.

☞.이여매(李如梅)는 그의 넷째 아우로 황명진수요동 총병관 도독 첨사(皇明鎭守遼東 摠兵官 都督 僉事)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부총병(副摠兵)으로 맏형 제독공, 중형중협대장공 이여백(提督公, 仲兄中協大將公 李如栢)과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은 호가 일재(一齋)이다.
이자영(李自英)의 아들로 명종조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왕에게 진학(進學)과 정치를 논했다.
선조조에 의빈경력 · 선공부정 · 사옹정(儀賓經歷 · 繕工副正 · 司饔正)을 거쳐 장령(掌令)이 된 뒤 다시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충건(李忠健)은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직(李稷)의 현손(玄孫)이며 정자공 윤탁(正字公 允濯)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아 중종 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역임한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이 때 남곤 심정(南袞 沈貞) 등의 미움을 사 배척을 당하였으나 뒤에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文名)을 남겼다.그의 아우 이문건(李文楗)도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고 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형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문(弔問)하고 통곡(痛哭)하였으며 중종 23 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사간원정언 병조좌랑(承政院 左承旨겸 經筵參贊官 司諫院正言 兵曹佐郞) 등을 지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대윤(大尹)으로 몰려 성주(星州)에 유배(流配)되었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당대의 석학 이황, 조식, 이이(碩學 李滉, 曺植, 李珥) 등과 주고받은 내용을 엮은 ‘묵휴창수(默休唱酬)’가 전해온다.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은 이의로(李義老)의 아들이다. 선조조에 문과에 올라 훈련도감사(訓練都監師)가 되고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조좌랑 승정원부승지(禮曹佐郞 承政院副承旨)에 이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이 되었고, 광해군 9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관(官)에서 별세했다.
성주이씨족보(星州李氏族譜)를 간행하기도 했다.

☞.이준구(李俊구)는 이언직(李彦直)의 아들로 인조 15년 문과에 올라 정언 · 지평(正言 · 持平)을 거치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仁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송시렬(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예조참판 동지춘추(禮曹參判 同知春秋)로 있을 때인 현종 15년 제2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예관(禮官)으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파직(罷職)되었다. 이름난 청백리(淸白吏)였다고 한다.

☞.공조판서 정헌공 이광적(工曹判書 靖憲公 李光迪)은 이세미(李世美)의 아들이다. 효종 7년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와 전적(典籍), 예병조좌랑(禮兵曹佐郞)을 거쳤다.
현종 5년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가 뒤에 병조정랑 · 사헌부 지평(兵曹正郞 · 司憲府 持平)을 지냈다.
숙종 1년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장릉(莊陵)을 정성들여 모시다 파직되기도 했다.
다시 복귀해서 공조참의(工曹參議)와 형조참의 · 승정원승지(刑曹參議 · 承政院承旨)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숙종 33년 지중추(知中樞)로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정헌(靖憲)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 중에 효자로 알려져 정려(旌閭)된 분이 이몽뢰(李夢賚)이다 .
철종 2년 유생(儒生) 74명의 발의로 상순상서(上巡相書)를 올려 효자정각(孝子旌閣)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대사헌 학암공 이응협(大司憲 鶴庵公 李應協)은 영조조에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 · 사헌부교수(承政院 注書 · 司憲府敎授)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 경연관춘추관 겸 홍문관 응교(弘文館校理 經筵館春秋館 겸 弘文館 應敎)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오조윤(五曹尹)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 되었다. 특히 그는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 7권을 편찬하였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역대인물 중 학문으로 이름을 높인 이는 후산공 이도복(厚山公 李道復)이다.
최익현(崔益鉉)문하에서 공부했고, '존화록(尊華錄)' 등 여러 권의 책을 짓기도 했다.
특히 '부수오적문(復?五賊文)'은 유명하고 융희황제의 승하를 슬퍼하여 지은 '자규사(子規辭)'는 널리 알려진 명문(名文)이라 한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은 근세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옥파 이종일(沃坡 李鍾一)은 경성신문(京城新聞)의 논설(論說)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논객으로 활약했고, 천도교의 지하신문(地下新聞)인 조선 독립신문(朝鮮 獨立新聞)을 창간했다.
유명한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도 그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찍은 것이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建國功勞勳章 複章)이 추서되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은 문필가로도 유명했지만, 항일민족언론투쟁(抗日民族言論鬪爭)에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의 간행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國民勳章 無窮花章)을 추서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경암 이관(敬菴 李瓘)은 천도교령 손병희(天道敎領 孫秉熙)의 명을 받아 이종일(李鍾一) 등과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기초한 분이며 199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았으며,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그 밖의
☞.죽헌 이교재(竹軒 李敎載)는 경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국내비밀결사를 통해 애국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해방 후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을 수여받고,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호암 이준용(湖庵 李俊容)은 강원도 춘천(春川) 일대에서 3 . 1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에 서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는등 공로로 199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고,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연소 이지한(蓮昭 李芝漢)은 경북 예천(醴泉)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으로 1993년 8 월 15 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수여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항렬표(行列表)

세(世) 20 21 22 23 24 25 26 27
백파(伯派) ○秀 ○煥 圭○ ○鉉 ○永 木部○ ○火 土○
중계파
(仲季派)
容○ 敎○ 鍾○ ○淳 相○ ○熙 ○在 ○鉉
火○ ○土 ○金 ○洙 秉○ ○燮 圭○ ○錫

 

세(世) 28 29 30 31 32 33 34 35
백파(伯派) ○金 水○ ○木 火○ 土○ 金○ ○水 木○
중계파
(仲季派)
澤○ ○植 炳○ ○基 鈺○ ○洪 柄○ ○炯
永○ ○根 炫○ ○培 鎔○ ○洛 桂○ ○烈

 

역대 주요 인물

[등과(登科).음사인명(蔭仕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백년(百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밀직사서 시 정절)(密直司事 諡 貞節))
천년(千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참지정사 시 원효 농서군공추봉(參知政事 諡 元孝 ?西郡公追封)
만년(萬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문하시중 시 숙헌(門下侍中 諡 肅憲)
억년(億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개성유수 호 요산재(開城留守 號 樂山齋)
조년(兆年)(충렬왕 11년)(忠烈王 11년)(정당문학 시 문열)(政堂文學 諡 文烈)
인기(麟起)(충렬왕 23년)(忠烈王 23년)(평양윤 성산군봉작(平壤尹 星山君封爵)
승경(承慶)(원나라 을과)(元나라 乙科)(평장사요양성참정 농서군공추봉(平章事遼陽省參政 ?西郡公追封)
원구(元具)(문과급제)(대호군 성신군추봉 호 가정(大護軍 星山君追封 號 稼亭)
인복(仁復)(충숙왕 13년)(忠肅王 13년)(문하시중 시 문충)(門下侍中 諡 文忠)
인미(仁美)(문과급제)(예의판사(禮儀判事)
인립(仁立)(공민왕 3년)(恭愍王 3년)(대제학 서경부원수 성산군(大提學 西京副元帥 星山君)
인민(仁敏)(공민왕 9년)(恭愍王 9년)(대제학 성산부원군 증영의정)(大提學 星山府院君 贈領議政)
숭인(崇仁)(공민왕 11년)(恭愍王 11년)(대제학 호 도은 시 문충)(大提學 號 陶隱 諡 文忠)
직(稷)(우왕 12년)(禑王 12년)(영의정 시 문경)(領議政 諡 文景)

▲조선조

문과(文科)
이 비(李 ?)(판서(判書))
이견기(李堅基)(대제학(大提學))
이함녕(李咸寧)(교리(校理))
이경현(李敬賢)(소윤(少尹))
이경화(李敬和)(헌납(獻納))
이윤손(李尹孫)(목사(牧使))
이계창(李繼昌)(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이계공(李季恭)(학유(學諭))
이문흥(李文興)(대사성(大司成))
이집(李집)(찬성(贊成))
이자건(李自健)(형조참판(刑曹參判))
이자견(李自堅)(호조판서(戶曹判書))
이자화(李自華)(예조참의(禮曹參議))
이운비(李云비)평사(評事))
이윤탁(李允濯)(승정(承正))
이윤식(李允湜)(부사(府使))
이공색(李公穡)(사복사정(司僕寺正))
이충건(李忠楗)(이랑(吏郞))
이구(李構)(목사(牧使))
이문건(李文楗)(승지(承旨))
이계정(李繼禎)(전적(典籍))
이휘(李煇)(수찬(修撰))
이섬(李火閏)(이조정랑(吏曹正郞))
이덕응(李德應)(한림학사(翰林學士))
이언충(李彦忠)(대사헌(大司憲))
이창(李昌)(판사(判事))
이현배(李玄培)(부윤(府尹))
이함(李誠)(집의(執義))
이조(李晁)(공조좌랑(工曹佐랑))
이사겸(李思謙)(승지(承旨))
이응호(李應虎)(감정(監正))
이렴(李濂)(성권(成權))
이유함(李惟?)(도수(都守))
이형원(李馨遠)(사간(司諫))
이상길(李常吉)(공판(工判))
이욱(李욱)(이조판서(吏曹判書))
이일장(李日章)(현감(縣監))
이정현(李廷賢)(정자(正字))
이담(李譚)(가예(可藝))
이계선(李繼先)(형조참의(刑曹參議))
이직(李稙)(승지(承旨))
이경(李坰)(대기지사(大耆知事))
이장(李樟)(성균박사(成均博士))
이휴(李休)(전적(典籍))
이준구(李俊구)(예조참의(禮曹參議))
이창일(李昌一)(성박(成博))
이형천(李亨千))(병좌부사(兵佐府使))
이광적(李光적)(공조판서(工曹判書))
이태서(李台瑞)(문과(文科))
이만영(李萬榮)(찰방(察訪))
이광정(李光廷)(승권(承權))
이태기(李泰祺)(현감(縣監))
이세근(李世瑾)(대헌감사(大憲監司))
이우춘(李遇春)(현감(縣監))
이정화(李正華)(문과(文科))
이희춘(李喜春)(예조정랑(禮曹正郞))
이저(李蓍)(사간(司諫))
이세진(李世璡)(양사승지(兩司承旨)
이규휘(李奎徽)(장령(掌令))
이인호(李仁好)(장령(掌令))
이형거(李衡擧)(첨정(僉正))
이응협(李應協)(대사헌(大司憲))
이춘복(李春馥)(주부(主簿))
이가우(李嘉遇)(승지(承旨))
이규덕(李奎德)(별검(別檢))
이갑룡(李甲龍)장통(掌通))
이태우(李泰宇)(문과(文科))
이사겸(李思謙)문과(文科))
이지용(李志容)(문과(文科))
이병렬(李秉烈)(문과(文科))
이장후(李章?)문과(文科))
이홍원(李弘源)(문과(文科))
이상원(李相遠)(문과(文科))
이약렬(李若烈)(문과(文科))
이기준(李騏俊)(문과(文科))
이현묵(李賢묵)(문과(文科))
이현(李?)(문과(文科))
이명순(命純)(문과(文科))
이득열(李得烈)(문과(文科))
이우백(李佑伯)(문과(文科))
이화(李화)(문과(文科))
이병영(李秉瑩)(문과(文科))
이병흠(李秉欽)(문과(文科))
이희준(李羲俊)(문과(文科))
이광수(李光洙)(문과(文科))
이교인(李교寅)(참판(參判))
이응모(李膺模)(문과(文科))
이승덕(李承德)(문과(文科))
이정조(李鼎祚)(문과(文科))
이종률(李鍾律)(승지(承旨))
이기선(李箕善)(문과(文科))
이우(李)(문과(文科))
이댁신(李宅臣)(장령(掌令))
이동기(李東基)(문과(文科))
이택환(李宅煥)(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관직.음사인명(官職.蔭仕人名)]

이순유(李純由)(신라상신(新羅相臣))
이충경(李沖京)(참봉(參奉))
이효참(李孝參)(호장(戶長))
이돈문(李敦文)(호장(戶長))
이득희(李得禧)(호장(戶長))
이장경(李長庚)(경산부원군 농서군공(京山府院君 ?西郡公))
이백년(李百年)(밀직 시 정절 (密直 諡 貞節)
이천년(李千年)(참지 시 원효(參知 諡 元孝))
이만년(李萬年)(시중 시 숙헌(侍中 諡 肅憲))
이억년(李億年)(유수 호 요산재(留守 號 樂山齋))
이조년(李兆年)(성산후 호 매운당 시 문열(星山侯 號 梅雲堂 .諡 文烈))
이인기(李麟起)(평양윤(平壤尹))
이여경(李餘慶)(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승경(李承慶)(평장사중국요양성참정(平章事中國遼陽省參政))
이태보(李台寶)(삼중대광도좌사사(三重大匡都佐司事))
이태성(李台成)(밀직사사(密直司事))
이포(李褒)(시중 .시 경원(侍中 .諡 敬元))
이원구(李元具)(대호군 성산군(大護軍 星山君))
이인복(李仁復)(문하시중 시 문충)(門下侍中 諡 文忠))
이인임(李仁任)(문하시중 광평부원군 시 문숙(門下侍中 廣平府院君 諡 文肅))
이인미(李仁美)(예의판사(禮儀判事))
이인립(李仁立)(밀직사사진현관대제학(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
이인민(李仁敏)(성산부원군 대제학(星山府院君 大提學))
이 영(李 英)(지휘첨사(指揮僉事))
이득방(李得芳)(판서(判書))
이숭인(李崇仁)(대제학 호 도은 시 문충(大提學 號 陶隱 諡 文忠))
이숭문(李崇文)(판서(判書))
이사분(李思芬)(좌군도총제(佐軍都摠制))
이 비(李 ?)(이조판서(吏曹判書))
이 환(李 ?)(대호군(大護軍))
이 제(李 濟)(우군절제사 시 경무(右軍節制使 諡 景武))
이 발(李 潑)(병조판서 시 평간(兵曹判書 諡 平簡))
이 직(李 稷)(영의정 시 문경공(領議政 諡 文景))
이 수(李 穗)(동지총제(同知摠制))
이차약(李次若)(군수(郡守))
이지활(李智活)(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이 윤(李 潤)(현감(縣監))
이 유( 李 洧)(이참(吏參))
이사후(李師厚)(한성판윤(漢城判尹))
이사원(李師元)(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
이사순(李師純)(공조참판(工曹參判))
이사형(李師衡)(이조판서(吏曹判書))
이견기(李堅基)(이조판서 시 안성(吏曹判書 諡 安城))
이처화(李處和)(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정녕(李正寧)(성원위 시 장절(星原尉 諡 章節))
이계분(李繼芬)(군수(郡守))
이맹창(李孟昌)(도원수(都元帥))
이영분(李永?)(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성량(李成樑)태부(太傅))
이지번(李之蕃)(군수(郡守))
이신행(李愼行)(전라도사(全羅都事))
이자견(李自堅)(호조판서(戶曹判書))
이자건(李自健)(대사헌(大司憲))
이자화(李自華)(예조참판(禮曹參判))
이자상(李自商)(병조판서(兵曹判書))
이집(李집)(이조판서 .시 공숙(吏曹判書 諡 恭肅))
이 의(李 誼)(대사헌 시 순정(大司憲 諡 純貞))
이 전(李 詮)(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이윤손(李尹孫)(목사(牧使))
이여송(李如松)(제독 시 충렬(提督 諡 忠烈))
이여매(李如梅)(도독첨사(都督僉事))
이계량(李繼良)(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 주(李 湊)(참찬(參贊))
이 창(李 昌)(자감정(軍資監正))
이 담(李 曇)( 만호(萬戶))
이 조(李 晁)(전중어사(殿中御史))
이 항(李 恒)(사옹정 시 문경(司饔正 諡 文敬))
이운거(李云?)(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이운기(李云기)(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이윤탁(李允濯)(부정자(副正字))
이산우(李山佑)(사복(司僕))
이희안(李希顔)(부사직(副司直))
이문흥(李文興)(대사성(大司成))
이충건(李忠楗)(교리(校理))
이문건(李文楗)(승지(承旨))
이 유(李 維)(학자(學者))
이 격(李 格)(첨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숙주(李淑疇)(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
이대성(李大成)(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광후(李光後)(효자(孝子))
이창후(李昌後)(효자(孝子))
이덕응(李德應)(한림주서(翰林注書))
이옥립(李玉立)(형조좌랑(刑曹佐郞))
이언충(李彦忠)(대사헌(大司憲))
이 휘(李 輝)(경연부수찬(經筵副修撰))
이 춘(李 春)((榮中) 용양위부사과(龍양衛副司果))
이 욱(李 稶)(이조판서(吏曹判書))
이 담(李 譚)(세자사부(世子師傅))
이 구(李 構)(검열(檢閱))
이일장(李日章)(현감((縣監))
이 성(李 珹)(절신(節臣))
이현배(李玄培)(도승지(都承旨))
이원배(李元培)(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이중형(李重亨)(호 이요당(號 二樂堂))
이극개(李克愷)(상호군(上護軍))
이 축(李 軸)(훈련원정(訓鍊院正))
이윤현(李胤玄)(효자(孝子))
이윤걸(李胤杰)(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이준구(李俊耉)(예조참판(禮曹參判))
이 필(李 弼)(수문장(守門將))
이 단(李 端)(직장(直長))
이언의(李彦儀)(의사(義士))
이광석(李光錫)(직랑 학자(直郞 學者))
이지용(李志容)(정언 문신(正言 文臣))
이광적(李光迪)(공조판서 시 정헌(工曹判書 諡 靖憲))
이득운(李得雲)(의사(義士))
이지선(李祗先)(刑曹參議))
이 숙(李 肅)(의사(義士))
이봉령(李鳳齡)(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갑룡(李甲龍)(장령(掌令))
이몽뢰(李夢賚)(효자(孝子))
이만령(李萬齡)(진사찰방(進士察訪))
이응협(李應協)(대사헌(大司憲))
이기서(李麒瑞)(효자(孝子))
이가우(李嘉遇)(호조참의(戶曹參議))
이우빈(李佑贇)( 진사 학자(進士 學者))
이 관(李 瓘)(학자 독립운동가(學者 獨立運動家))
이도복(李道復)(학자(學者))
이한진(李漢鎭)(감역 서예가(監役 書藝家))
이동규(李東奎)(효자(孝子))
이기섭(李箕燮)(효자(孝子))
이민복(李敏馥)(효자(孝子))
이택징(李澤徵)(공조참의(工曹參議))
이교재(李敎載)(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면화(李冕和)(통정대부(通政大夫))
이종일(李鍾一)(국문학자 독립유공자(國文學者 獨立有功者))
이종린(李鍾麟)(독립운동가 건국유공자(獨立運動家 建國有功者))
이준용(李俊容)(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이지한(李芝漢)(독립유공자 獨立有功者))
이택환(李宅煥)(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조선조 급제자 정록]

견기(堅基)(世宗1년.式年試.進士)
함녕(咸寧)(世宗17년.式年試.乙科)
경현(敬賢)(世宗17년.式年試.丙科)
경화(敬和)(世宗17년.式年試.進士)
윤손(尹孫)(端宗2년.增廣試.丙科)
계창(繼昌)(端宗2년.增廣試.丙科)
계공(季恭)(世祖11년.式年試.丁科)
문흥(文興)(睿宗1년.秋場試.丙科)
집(成宗10년.別試.乙科)
자건(自健)(成宗14년.式年試.乙科)
자견(自堅)(成宗17년.式年試.乙科)
자화(自華)(燕山2년.式年試.丙科)
운비(云비)(燕山2년.式年試.丙科)
윤탁(允濯)(燕山7년.式年試.丙科)
윤식(允湜)(燕山12년.別試.丙科)
공장(公檣)(中宗10년.別試.丙科)
충건(忠楗)(中宗10년.別試.丙科)
구(構)(中宗14년.式年試.丙科)
문건(文楗)(中宗23년.別試.丙科)
계정(繼禎)(中宗23년.別試.丙科))
삼준(三俊)(中宗23년.式年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휘(煇)(中宗38년.式年試.丙科)
덕응(德應)(中宗39년.別試.丙科)
섬(中宗39년.別試.丙科)
언충(彦忠)(明宗1년.增廣試.丙科)
창(昌)(明宗4년.式年試.甲科)
현배(玄培)(明宗17년.別試.丙科)
함(?)(宣祖?位.式年試.丙科)
조(晁)(宣祖?位.式年試.丙科)
사겸(思謙)(宣祖7년.別試.丙科)
응호(應虎)(宣祖9년.別試.丙科)
염(濂)(宜祖23년.增廣試.丙科)
유함(惟?)(宜祖24년·別試.甲科)
형원(馨遠)(宣祖32년.庭試.乙科)
상길(尙吉)(宣祖18년.式年試.甲科)
욱(稶)(宣祖32년.別試.丙科)
일장(日章)(光海1년.增廣試.乙科)
정현(廷賢)(光海6년.別試.丙科)
담(譚)(光海6년.全州別試.丙科)
계선(繼先)(光海7년.式年試.乙科)
직(稙)(光海10년.庭試.甲科)
경(坰)(光海21년.改試.丙科)
장(樟)(仁祖5년.式年試.乙科)
경승(慶承)(仁祖5년.式年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휴(休)(仁組12년.別試.丙科)
태서(台瑞)(仁祖23년.別試.丙科)
준구(俊구)(仁祖15년.庭試.乙科)
창일(昌一)(仁祖27년.別試.乙科)
형천(亨千)(孝宗5년.式年試.丙科)
광적(光迪)(孝宗7년.別試.丙科)
연(演)(孝宗7년.別試.丙科)
승수(承須)(中宗11년.式年試.丙科)
만영(萬榮)(顯宗1년.增廣試.丙科)
광정(光廷)(顯宗1년.增廣試.丙科)
태기(泰祺)(顯宗4년.式年試.丙科)
세근(世瑾)(肅宗22년.庭試.乙科)
우춘(遇春)(肅宗28년.式年試.丙科)
정화(正華)(肅宗34년.式年試.丙科)
희춘(喜春)(肅宗39년.增廣試.丙科)
저(箸)(肅宗45년.別試.丙科)
규휘(奎徽)(景宗3년.式年試.丙科)
세진(世璡)(英祖1년庭試乙科)
인호(仁好)(英祖9년.式年試.丙科)
형거(衡擧)(英祖11년.式年試.丙科)
응협(應協)(英祖12년.庭試.丙科)
택징(澤徵)(英祖14년.式年試)
춘복(春馥)(英祖29년.式年試.丙科)
가우(嘉遇)(英祖32년.庭試.甲科)
규덕(奎德)(英祖35년.式年試.丙科)
갑룡(甲龍)(英祖38년.式年試.丙科)
태우(泰宇)(英祖38년.式年試.丙科)
홍원(弘源)(正祖2년.式年試.丙科)
경신(敬臣)(正祖6년.咸鏡道別試.丙科-간성이씨로성주에입적)
지용(志容)(正祖13년.式年試.丙科)
병렬(秉烈)(正祖16년.式年試.乙科)
장후(章?)(正祖19년.慶庭試.丙科)
상원(相遠)(純祖3년.增廣試.丙科)
약렬(若烈)(純祖4년.式年試.甲科)
기준(騏俊)(純祖5년.別試.丙科)
현묵(賢묵)(純祖7년.式年試.丙科)
현(?)(純祖7년.別試.丙科)
명순(命純)(純祖10년.式年試.丙科)
득열(得烈)(純祖10년.式年試.乙科)
우백(佑伯)(純祖22년.式年試.丙科)
화(純祖22년.式年試.丙科)
희준(羲俊)(憲宗2년.庭試.丙科)
광수(光洙)(憲宗9년.式年試.丙科)
교인(교寅)(憲宗11년.庭試.丙科)
응모(膺模)(哲宗3년.式年試.丙科)
승덕(承德)(哲宗6년.式年試.丙科)
정조(鼎祚)(哲宗6년.庭試.乙科)
종률(鍾律)(哲宗6년.庭試.丙科)
기선(箕善)(哲宗13년.庭試.丙科)
우(哲宗13년.庭試.丙科)
택신(宅臣)(高宗13년.式年試.丙科)
동기(東基)(高宗16년.庭試.丙科)
택환(宅煥)(高宗19년.增廣試.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이직(李稷)(태종조.영의정(領議政))
●공신(功臣)
-이제(李濟)(태조조.개국1등공신(開國1等功臣))
-이직(李稷)(태조조.개국3등공신(開國3等功臣).태종조2차왕자난4등공신(王子亂4等功臣))
-이식(李軾)(중종조.중종반정3등공신(中宗反正3等功臣))
●호당(湖堂)
-이충건(李忠楗)(중종조)
●청백리(淸白吏)
-이준구(李俊구)(仁祖朝 禮參)
●절의(節義)
-이문건(李文楗)(명종조.을사사화(乙巳士禍)),
-이씨(李氏)(군자감판관 금선경(軍資監判官 金善慶)의 처, 임진왜란 순의제인(壬辰倭亂 殉義諸人)).
●문집(文集)
-초은집(樵隱集-이인복(李仁復)
-도은선생시집(陶穩先生詩集-이숭인(李崇仁)
-형재시집(亨齋詩集)(이직(李稷))
-일재집(一齋集)(이항(李恒))
-소송집(小松集)(이지용(李志容))
-월포집4권(月浦集4권)(이우빈(李佑贇)).

[커버 · 족보의 재발견]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이여송은 한국계… 유학사 연구에도 단서 제공
씨족의 병력도 드러나 유전병 예방에 도움도


 

 

 

 

 

 

 

 

 

조선조 1850년 무렵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사망 인구가 급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염병의 이동 경로를 보자. 외국인 선교사, 상인 등의 이동에 따라 외래병이 서울에서 창궐한 경우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남까지 확산되는데 충북 대다수 지역은 빠져 있다. 그 후 전염병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호남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해 평안도로 옮아가고 다시 내려와 경상도에 퍼진다. 이후 강원도로 북상한 전염병은 평안북도까지 올라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와 머물다 북상하지만 함경북도 일부에서 멈춘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 시대에 전염병의 발생과 이동 경로는 역학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지만 좀처럼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만의 독창적인 족보(族譜)가 그러한 자료를 풍부하게 전해준다. 씨족의 족보에서 특정 기간에 부자, 부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지역과 시기에 차이를 두고 나타났던 것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의 이병창(53) 사장은“족보를 오랜 기간 다루다보니까 몇몇 씨족의 족보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기간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1850년 무렵에서 1900년까지의 경우 평균 나이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본관이 거주지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염병의 분포와 확산 경로를 족보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사장의 주장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엔코리안(www.n-korean.com)’가 올해 초 전자족보 형태로 제작한 신안 주씨(新安 朱氏) 대동보(大同譜: 가장 넓은 범위의 족보로 같은 시조 아래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갖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에 따르면 수록 인원 23만313명 중 남자는 15만6,646명(68%)으로 여자 7만3,667명(32%)보다 월등히 많다.

문중 구성원의 출생률은 1~3월에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평균 9.35%), 4~5월이 가장 낮았다(평균 7.66%). 사망률은 1~3월이 가장 높았고(평균 9.25%), 6월이 6.78%로 가장 낮았다.

나주 임씨(羅州 林氏), 선산 김씨(善山 金氏), 삼척 심씨(三陟 沈氏), 이천 서씨 공도공파(利川 徐氏 恭度公波) 문중의 경우도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1~3월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장흥 임씨(長興 任氏) 문중은 출생률은 1월, 사망률은 10월이 각각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출생률이 1월에, 사망률은 5월이 가장 높았다.

엔코리안 최용석(38) 대표는 “족보에는 문중에 따라 출생과 사망이 특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임신 시기에 따라 아들과 딸의 출생률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통계학적 의미를 가질 경우 의학적으로 접근하면 문중마다의 특이 질병력(歷)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적인 성격을 띠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사고를 줄일 수 있고, 나아가 임신 시기를 조절하면 아들ㆍ딸의 출산 확률도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족보를 살펴보면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평균적으로 키가 크고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머리와 목소리가 크며 문중에 따라 눈동자의 색깔이 각각 다르고 치아의 테두리도 차이가 있다는 게 족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병창 사장은“족보에는 사람의 DNA를 암시하는 정보도 담겨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면서 “앞으로 족보를 통해 연구하고 활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족보는 씨족의 특성을 가늠케 하는 요소도 있는데, 청주 한씨나 신천 강씨(信川 康氏)가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청주 한씨는 역사의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역시 청주 한씨다. 왕건 어머니의 친척인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은 신라왕 김부(金傅ㆍ경순왕)의 시랑인 김봉휴를 만나 고려의 통일에 공을 세웠고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한 덕종 비(소혜황후) 인수대비,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한명회 등도 청주 한씨 사람이다.

신천 강씨는 족보상 유대민족과 같은 ‘오뚝이 문중’에 비유된다. 역사상 수많은 씨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 아예 사라지거나 왜소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천 강씨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핍박은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때 태조의 후비인 신덕황후 강씨의 두 왕자를 비롯한 일가의 몰락이다. 이후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강순(康純)이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 장군과 함께 처형됐으며 연산군 때는 무오사화의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신천 강씨는 깨지지 않고 문중을 부흥시켰다. 우리 시대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신천 강씨다.

족보는 씨족의 역사책일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린 역사의 틈을 잇는 사료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족보를 ‘이면(裏面)의 역사서’라고도 부른다.

앞서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라는 사실과 한헌옹의 역할은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족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사실로 밝혀낸 것도 족보다. 이여송의 아버지는 이성량(李成梁, 1526~1615)으로 14세기 말 중국으로 건너간 이영(李英)의 후손이다. 이영의 아버지는 이승경(李承慶)으로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손자다.

성주 이씨 대동보는 이여송의 7대조인 이승경의 아버지를 참지공파 이천년(李千年)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 238장 명사(明史)에는 승경이 이조년의 아들로 나와 있다(李承慶兆年之子). 이조년은 이천년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족보상 이여송이 성주 이씨 후손이란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이여송의 후손들은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여송의 13대손인 리쩌멘(李澤綿ㆍ46)이 5월 12일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ㆍ1542~1607) 선생 400주기 추모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족보가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는 물론, 씨족적 연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및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족보가 역사의 사료 차원을 넘어 기존 사학계의 통설에 정면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본격 수용되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과정을 족보를 통해 보면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ㆍ시험관)ㆍ동지공거(同知貢擧ㆍ부시험관)와 과거 급제자의 ‘좌주(座主)-문생(文生)’관계와 혈연적 연결이 성리학 토착화나 사회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권단(權妊, 1228-131

권단(權妊, 1228-1311)은 선구자적 인물로 그가 지공거일 때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백이정 등 엘리트들을 뽑아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심양왕 복위 사건으로 와해되면서 이후 이암(297~364)이 지공거가 돼 문생을 선발하고 그의 제자인 한방신은 동지공거로 포은 정몽주 등을 선발하면서 좌주-문생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이암의 주체적 성리학이 정몽주에게 이어진 것은 그러한 특수관계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중국 성리학에 충실하였는데 스승인 권보의 사위가 돼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지공거로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 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학계 1세대 대표 학자인 고 이기백 교수(2004년 작고)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 문제를 연구하면서 흥양 이씨(興陽 李氏)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 진주 소씨(晋州 蘇氏) 족보를 통해 신라 시대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이던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ㆍ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2001년 작고)가 평생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한국의 족보였다. 그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도 하였는데 족보에서 한국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옛 정보의 보고(寶庫)인 족보에서 보물을 찾아 다듬는 일은 이제 우리 시대의 몫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

자료출처: 주간한국             

 

뿌리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 - 성주이씨편

“도덕과 학문으로 명망을 떨친 성주이씨”

2007-03-23 17:14:54

오현재와 유품전시관→안산서원→봉산재→가야산→포천계곡

경북 성주군의 3월은 비닐하우스의 물결로 가득하다. 가야산과 낙동강 주변의 토지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생산돼 맛과 향이 일품인 성주참외가 4월과 5월 본격적인 출하를 앞두고 영글어 가고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 다정도 병인냥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고려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인 이조년(성주이씨 13세손)이 지은 시로 봄밤의 서정을 노래하는 주옥같은 작품이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으로 성주이씨의 종손 이시영 씨, 성주화수회 회장 이시웅 씨, 사무국장 이대현 씨를 만나 일찍이 영남 내륙에 터를 잡고 도덕과 학문으로 명망을 떨쳤던 성주이씨에 대해 알아본다.  

성주이씨(星州李氏) 본관의 유래
문헌에 의하면 성주이씨의 기세조(起世祖)인 이순유는 신라 재상으로 있을 때 나라가 망하자 그의 아우 돈유와 함께 신라의 마지막을 지켰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당시의 경산부,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에 옮겨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순유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그 절의에 감복하여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성주에 살며 대대로 호족을 이루었고, 조선조에 와서 향리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관향(貫鄕)을 정하게 된 것이다. 시조인 이순유의 묘는 실전하여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골 오현재에 시조제단비를 건립하여 시조묘를 대신하고 있다.

성주이씨의 중시조는 이장경이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인 이장경에게는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이천년의 둘째 아들인 이승경은 원나라 관직에 나아가 많은 공적을 쌓았다. 이에 원의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이승경의 부친 이천년, 조부인 이장경을 농서군공으로 추봉하였으며, 성주이씨의 중시조가 된다. 이장경의 위패는 흥양 성산사, 단성 안곡사, 울곡 보본사, 정평 보덕사 및 김천 상친사, 옥천 평산사에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는 오현재 옆 산자락에 있다.

이조년 등 많은 고관대작 배출
성주이씨는 고려 말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하며 명문거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시조인 이장경을 비롯해 매운당 이조년, 경원공 이포, 도은공 이숭인 등이 그들이다. 이조년은 1285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지합주사·비서랑 등을 지낸 뛰어난 문신이다. 이천년의 아들인 이승경은 공민왕 때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고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서경을 회복하기도 했다. 이인임은 이조년의 손자로 1359년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 개경을 수복하여 1등 공신에 오른 고려말의 권신이다. 고려말 삼은의 한사람이며 성리학의 거두로 명망이 높은 도은 이숭인도 문중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고려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인물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명문거족으로 조선의 개국에 강력히 저항한데다 당쟁에서 남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좁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조년의 손자 이인임으로 되어 있다가 기록을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200여 년 후인 선조 때 고쳐진 사건인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여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조에도 개국공신 2명, 문과 급제자 107명과 당상관 53명 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 지신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진 이직이나, 이직의 손자로 태종의 딸인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위에 봉해졌으며 1433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 이정녕 등은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 성주이씨에서 특이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당시 원군 4만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 전투를 치르기도 한 이여송이 있다. 그는 이천년의 8세손이다.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농서이씨로 불리며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가 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낸 이종일 등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정계에는 국회사무처장을 지낸 이종률 의원, 대구시장을 역임한 이해봉 의원, 5공 때 민정수석을 지낸 이학봉 전 의원, 자민련 원내부총무인 이재선 의원 등이 있다. 관계에는 최근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 이상용 전 강원지사 등이 성주이씨다. 재계에는 대종회장을 맡고 있는 이석룡 대한손해보험협회회장, 이의순 세방그룹회장, 이종상 대유개발회장 등이 활약하고 있다.

오현재와 유품전시관
성주이씨 문중에는 삼현소라고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선현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안산서원’그리고 농서군공의 유허지인 ‘봉산재’가 있다.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인 오현재는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곳이다. 공(公)의 묘소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 옆 비호석봉에 모시어져 있었으나 훗날 세종의 적서(嫡庶) 18王子의 태(胎)를 봉안한다는 구실로 1443년(세종25년) 왕명을 내려 이장하게 하니 지금의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오현에 이장하게 되었다. 지난 1985년 11월 12일 대종회 총회에서 오현재를 건립키로 뜻을 모아 9년여에 걸쳐 50여 평의 재실을 비롯하여 내외 삼문 등 부속 건물 등을 준공했다. 음력 10월1일에는 전국의 수많은 후손이 모여 시제를 올리고 있다.  

유품전시관은 1998년 3월 24일 대종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작업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19일에 개관하였다. 30여 평의 유품전시관에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된 13폭의 영정사진 사본, 전국에 산재한 원사(院祠)의 사진 48점, 문열공 이조년의 친필 병풍 사본, 1613년(광해 5년)에 간행된 계축보와 성주이씨 역대의 족보 15종과 문집 50여권을 비롯해 조선조 명종 때 대사헌을 지낸 이언충의 묘소(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지난 2000년 4월 22일 발굴된 원형 시신의 사진과 부장품인 의류 24점 중 모조한 4점 등 각종 유물 및 유품을 전시하며 숭조사상(崇祖思想)을 일깨우고 선조의 유덕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택과 오현재를 오가며 기거하고 있는 종손 이시영씨는 종손이면서 이곳 유품전시관의 관장을 맡고 있다. 유품전시관을 둘러보며 자랑스러운 선조의 업적들을 줄줄 읊지만 “농촌의 젊은이들은 죄다 도시로 나가 종사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아쉬움도 말한다.

현조 22위 모신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중에서 도덕, 경술, 문장, 관직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가 높은 현조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이 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 말에 현창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 매운당 이조년, 경원공 이포, 초은공 이인복, 도은공 이숭인, 형재공 이직 등 여섯 영정을 국가의 숭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의 묘소 옆 선석사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배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써 산소는 오현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서원 앞에는 철종 6년(1855)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이 주관하여 세운 농서군공 이장경의 신도비가 있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중시조의 유허지 봉산재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봉두산 아래 위치한 봉산재는 성주이씨의 여러 인물들의 유허지다. 중시조인 농서군공으로부터 현손 문충공 이숭인의 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산 기록들이 경산지에 수록되어 있다. 재실에는 농서군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단오절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제향한다. 현재 사당 외에도 본헌, 동재, 서재 등을 증축할 계획이다.

교육프로그램 운영 현황
성주이씨 대종회(www.sungjulee.co.kr)는 종약 제23조에 육영사업에 관한 규정을 두고, 대종회의 각종재산의 일부 및 독지종친의 특별헌금 등을 사업기금으로 하여 농서장학회(이사장 이용택)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1993년 9월에 설립되어 이 장학회는 현재 예치된 원금 28억 원의 이자로 운영되고 있다. 매년 하계방학 때는 오현재에서 장학금 수여와 조상의 전통에 대한 교육 등이 1박2일의 일정으로 이뤄진다.

성주군 관광명소
성주군에는 조선8경으로 알려진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봉인 칠불봉 (1433m)과 우두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1봉, 매화산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수륜면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검붉은 기암절벽이 하늘을 찌르는 장쾌한 광경이 펼쳐진다. 계곡과 폭포를 끼고 이어지는 용기골과 심원골의 이색적인 등산로 코스가 있다. 특히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포천계곡은 가야산의 여러 계곡 중 대표적인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 전경과 어우러져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을 도야하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 선생이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이 상류에 있다. 약 7km에 이어지는 계곡은 우거진 숲과 어울려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

27부터 29까지 3일간 성주에서는 세계적 명물인 성주참외의 우수성을 알리는 ‘성주참외축제’가 개최된다. 한마음걷기대회, 태실 출정식 및 봉안 의식 등 16종의 행사와 참외따기, 문화답사 등 10종의 체험, 야생화, 생활도자기 전시 등 4종의 전시회가 열린다.
성주의 특산물로는 대가면 칠봉리 유촌마을의 이필순 할머니가 들국화, 누룩, 찹쌀, 솔잎을 주재료로 만드는 ‘송국주(松菊酒)’,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자연수 중 100m 이상의 암반수와 참숯을 투입하여 생산되는 무농약·무공해의 ‘가야산참숯미나리’, 당귀, 계피, 감초, 생강, 마늘, 인삼 등 한방영양제를 사용해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은 ‘가야산한방능금’ 등이 있다.

찾아가는 길
서울방면에서는 서울남부터미널에서 1일 5회로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있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김천에서 내려 김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성주행 버스는 왜관이 더 많이 있으므로 왜관역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 왜관역에서 내려 왜관 남부 또는 북부 정류장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승용차로 올 경우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김천나들목에서 내려 4번 국도를 따라 왜관방면으로 오다 김천 남면의 부상에서 905번 지방도를 따라 성주로 오면 된다.
부산쪽에서 올 경우는 기차를 타면 왜관역에서 내려 왜관 남부 또는 북부 정류장에서 성주행 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왜관나들목으로 나와 33번 국도를 따라 성주방면으로 20㎞ 정도 오면 된다.
전라북도에서 오려면 30번 국도를 따라 무주를 경유해서 김천시 대덕면과 증산면을 통해서 성주로 오면 된다.

박동진 기자 (pdj@newsone.co.kr)

간산 대가면성주이씨 재실 밎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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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산소를 세종대왕 자태실로 인해 대가면으로 옮긴곳도 명당인데요.

 

 

 

 


 

출처 :운봉 명리 풍수지리 학 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운봉 거사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최진보진 소둔촌 성주이씨마을


"
성주가 본관인 이여송 장군이 우리 조상"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보통 조 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중국의 호구(주민등록)에 '조선족'이라는 민족분류가 돼 있다.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소수민족으로 대접받고 있는 지금의 조선족이 중국에 뿌리내린 시기는 대개 18세기 중엽 이후. 만주지역이 과거 우리민족의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민족의 핏줄이 그곳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겠지만 대부분 그 뿌리를 잃어버려 이렇게 일천한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이같은 통상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말과 문화는 잃어버렸더라도 뿌리는 기억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후손들이 대륙 곳곳에서 발견돼 뉴스가 되기도 한다.

심양시에서 동북쪽으로 1시간30분 이상을 가야 만나는 도시, 철령을 찾은 이유는 경상도에 연고가 있으면서 이주시기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집안의 집성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진작에 한족으로 동화된 그들을 찾는 일이 '중국속의 경상도를 찾아서'라는 이번 취재의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바로 경상도에 뿌리를 둔 '성주이씨'의 한 갈래이고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녕조선문보 기자출신인 김철용씨와 조선족 작가 김예호 선생의 안내로 철령현 정치협상위원인 이택면(李澤綿)씨(43·성주이씨 철령종친회 부회장)의 집을 찾아 나섰다. 이씨는 자기 집안의 역사를 십수년째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 철령현 외곽의 농촌지역에 있는 그의 자그마한 집에 들어서자 겉모습과는 달리 놀랄정도로 깔끔하게 청소된 실내가 인상적이다. 이씨는 "공식적인 민족분류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조선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에 부끄럽지 않게 청결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처럼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씨는 스스로 본관이 성주이며, 한국인들이 익히 아는 이여송 장군이 자신의 13대 조상이라고 밝힌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한 그 이여송 장군이 우리핏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관까지 구체적으로 전해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는 성주이씨 문중회보와 벽진이씨 문중회보를 동시에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양 성씨가 동시에 철령의 이씨를 자기 집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러나 십수년째 집안의 뿌리를 연구하고 있다는 이씨는 '연구 결과 우리들의 뿌리는 성주이씨가 틀림없다'고 장담한다. 기자의 고향이 성주라고 밝히자 그는 새삼 다시 악수를 청한다. 조상의 고향에서 온 사람이니 더욱 반갑다면서.

14세기 말 조선에서 귀화-죄를 짓고 도망했다는 설도 있다-한 성주이씨 참지공파 9세손이던 이영(이여송의 5대조)이 철령에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에서의 성주이씨 역사가 시작됐다고 이씨는 주장한다.

철령이씨는 이후 중국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요동 제일의 명문가로 부상한다.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李成梁·1526~1615)이 바로 그 인물이다. 40대에 요동총병에 오른 이후 그 자신은 물론 아들인 이여송의 대에 이르기까지 요동지방은 실제로 그의 집안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집안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시 명황실은 이민족의 발호가 끊이지 않았던 요동지방의 수비를 전적으로 이성량에게 의지할 정도였다. 이성량의 가신으로 출발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도 이들 부자가 살아 있을 때는 철령을 넘어서지못했다고 이택면씨는 자랑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동북지방의 역사에서 이성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중국정부가 철령현 반룡산 기슭에 이성량기념관을 지어 개관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기념관에는 금주성(지금의 철령)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량이 늘 꽃을 감상하던 누각 간화루의 주춧돌 등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건물 두동에 당시의 생활상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사진과 그림 등을 전시해 놓았다.

이씨의 집에서 그의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소둔촌까지는 또 다시 자동차로 20~30분을 가야하는 거리. 야트막한 야산과 백양나무 가로수, 그리고 도로변의 작은 개천…. 특징없는 중국 농촌풍경을 잠시 눈여겨보고 있는데 이씨가 외진 곳에서 차를 세운다. 제법 푸른 수목이 무성한 규모가 큰 언덕의 옆이다. 이씨는 그 언덕을 가리키며 집안의 묘지라고 설명한다.

밭과 구릉의 경계를 이루는 길을 따라 잠시 걸어들어가자 이내 무신상과 문인상, 십이지신상 등의 석물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서 그 옛날 이 집안의 영화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연이어 커다란 비석과 수십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고원조이성량지묘, 고원조이여송지묘라고 새긴 두개의 묘비석이 유난히 우뚝하다. 한자를 크게 새기고, 그 옆에 작은 한글로 음을 달아놓았다. 철령의 이씨들이 우리말과 글을 알 리가 없는 터에 묘비에 한글을 새겨놓다니 여간 신통하지가 않다. 알고보니 묘비의 한글은 1994년 묘비를 세울 돈을 희사한 재일교포 한중민씨가 묘비에 반드시 한글을 새겨넣을 것을 요구한 결과였다. 묘비석 뒤의 이성량과 이여송의 묘소봉분은 시멘트로 포장돼 있다. 한국의 성주이씨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수백년의 세월은 풍습을 크게 바꿔 놓았다. 한족화한 것이다.

현재 이곳 성주이씨들의 선산에 있는 각종 비석과 석상들은 시급 유물로 보호를 받고 있지만 문화대혁명 시절 소실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당시 후손들은 이 유물들을 땅속에 묻어둬 화를 피했다. 이 곳 묘지의 면적은 무려 800무(1무는 300평). 이처럼 널찍한 묘지를 확보해둔 조상덕에 이 집안 사람들은 중국법률로 매장을 금지하고 있는 요즘도 여기에 묘를 쓴다고 했다. 굳이 이곳에 묘를 쓰는 것은 묘지의 형태가 용의 모양을 닮은 명당이라고 이들은 믿기 때문이다.

묘지에서 지척인 곳에 두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두마을이 합쳐 소둔촌을 이루고, 주민의 70~80%이상이 성주이씨이니 가히 집성촌이라 할 만하다.

마을로 다가가자 지금까지 거쳐온 조선족마을과는 외형이 유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높지않은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마을의 터며, 주변의 넓은 들, 붉은 기와를 얹은 집들의 외양은 조선족 마을과 흡사하다. 그러나 논농사를 짓는 조선족 마을은 어디를 가나 집집마다 담벼락에 커다란 볏짚가리가 쌓여 있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 대신 옥수숫대가 쌓여있다. 어쩌다 눈에 띄는 볏짚가리는 불쏘시개 더미마냥 자그마하다. 논농사는 거의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마을앞 도로변에는 조선족 마을의 소 대신 당나귀가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이제 곧 농사일이 시작되면 저 당나귀도 바빠질 것이다. 한족들은 소를 부릴 줄 모르는 대신에 말과 당나귀를 부리는데는 능숙하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가게에 들어서자 여인네들이 둘러앉아 한창 마작을 놀고 있다. "이제 한창 일할 시기가 왔는데 이렇게 놀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을 건네자 여인들은 "아직은 바쁘지않다"는 대답을 하고는 낯선 이들의 행색을 살핀다.

가게 바로 옆골목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본다. 곧게 뻗은 골목은 이 마을의 입향조 이영의 산소가 있다는 마을 뒷산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700호에 2천200여명이 산다는 큰 마을답게 골목의 길이는 길다. 간혹 보이는 텃밭은 나지막한 돌담으로 막아놓았다. 한 집의 마당에는 소가 여섯마리나 누워 있다. 그 소 중에는 전신에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흰소도 있어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다.

마을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익숙지 않은 냄새가 역겹게 풍겨온다. 산으로 이어질 듯하던 길이 끊긴다. 산과 마을사이에는 제법 큰 하천이 가로막고 있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논농사를 지을 줄만 안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수원은 될 성싶다.

차를 세워둔 마을중앙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마을노인들이 모여 있다. 조선족에 비해 훨씬 초라한 옷차림을 한 노인들은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들의 조상이 조선사람이라는 등의 집안 이야기를 한마디씩 한다. 족보도 있다고 했다. 이 마을의 주변에는 고구려성도 있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국의 친척들에게 전할 말을 해달라고 청하자 이사용씨(李士勇·65)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우리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한국의 친척들도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한다.

철령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택면씨는 자신들의 희망은 조선족으로 민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먼저 언어회복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족회복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생각에는 철령의 집안들도 지지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는 마을에 조선족학교를 꾸리는 방안과 아니면 한족학교에 조선족반이라도 만드는 방안을 강구해봤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철령시 등의 지지를 얻어내지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들이 한국의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도 이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있을 것이다.

헤어질 시간.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에 전해줄 것을 부탁하는 이택면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수백년간 단절된 핏줄과의 인연을 다시 잇고, 민족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그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2004-12-27 09:39:32 입력

/글=정근재기자
kayjay@yeongnam.com /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노년시대 신문 내용중에서

노년시대신문은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는 제하의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가며 충효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기획을 활용해 독자 여러분의 성과 본, 대종회 및

종친회 등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는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게재됩니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로 성주이씨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다음호는 성주 도씨 편입니다.) 

 

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고서에 따르면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시대. 지금의 경주 부근에 6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취산진지촌(于珍村),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오현재.
성주이씨 중시조(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1443년(세종 25년) 왕명에 따라 태실 자리로 양보하고, 지금의 오현으로 이장했다.

 

신라 건국 설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알 속에서 태어나 이들 6촌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고, 양산촌 촌장인 알평의 도움으로 신라를 개국하게 된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탄생과 왕위등극도 대략 비슷하다.


신라 3대 유리왕에 의해 이들 6촌은 6부로 격상되고 각각 성(姓)을 하사받는다.
즉 양부 이(李), 사량부 최(崔), 본피부 정(鄭), 점량부 손(孫), 한기부 배(裵), 습비부 (薛) 등 성(姓)씨가 그래서 생겨났다.
이씨의 시조는 혁거세를 신라 개국 시조로 옹립한 양부 양산촌장 알평이다.


그러나 현대 성씨연구자들은 각종 금석문 등을 근거로 7세기 이전(676년에 삼국통일이 됐다)에는 성씨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성씨는 신라 후기에 수입된 중국의 문화였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양민의 순으로 전파됐다는 것.

 

그리고 성씨와 본관 개념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태조가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행한 ‘토성분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호족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인질을 중앙에 진출하게 하여 관향을 삼도록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서 깊은 명문 성씨들의 시조가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인물로 집중되고 있다.


성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조에서 이부상서를 지낸 재상공 이순유(李純由)다.
신라 말 경순왕이 고려태조에 항복한 뒤 신라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읍 경산리로 들어가 은둔했다.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현조(顯祖)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있고,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됐다.

 

그 뒤 고려 원종(1260~1274)조에 이르러 시조 이순유의 11대손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들이 크게 출사하게 된다.
장자인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
이남 참지정사(參知政事) 천년(千年),
삼남 문하시중(門下侍中) 만년(萬年),
사남 개성유수(開城留守) 억년(億年),
오남 정당문학 문열공(政堂文學 文烈公) 조년(兆年) 등이 그들이다.


아들 5명이 모두 나라에 크게 공헌하여 아버지 이장경은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承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특히 손자(천년의 아들) 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까지 오르게 되어 그 조부인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있다
후대 8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에 달할 정도로 후손들이 크게 일어난다.

성주이씨는 고려말에서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유서 깊은 가문답게 그중 현조(顯祖) 22위를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안산서원에 모시고 지금까지도 배향하고 있다. 배향하는 인물은 중시조 이장경으로부터 조선 숙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은암 이광적(1628~1717)까지 모두 22위.

 

여기 모신 10위의 영정 13폭은 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또 영당(影堂)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어 성주이씨가 1100여년이 넘는 유구한 가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관직에 나간 성주이씨 후손들 중에 전국 각지의 임지에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아 성주 외에도 경기, 충청, 강원, 호남권까지 전국적으로 성주이씨 집성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임지에서 본관지로 돌아온 후손들이 상당수여서 중시조 이래 지금까지 명문가 본관지로서의 전통과 족보·서원·사당·묘소 등 사적들이 성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국 종친 800여명이 지난해 음력 10월 1일 오현제 시조공 제단비 앞에서 열린 시향제에서 참례하고 있다.


그런데 성주이씨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여 본관지 성주에서 분파해 다르게 칭관하는 경우도 있다. 농서이씨가 그들이다.

 

그리고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주이씨 인물검색을 해보면 본관이 성주인 이씨 인물들 사이에 본관을 벽진(성주군 벽진면)이라고 쓰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도 성주이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승경의 증손자인 이영(李英)을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그 5대 후손이 이여송이다.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철령(鐵嶺)에 비를 세우기도 했으며 그들은 현재 철령이씨라 한다.

 

 

낱장 서문만 남은 국내 최초의 족보

권씨 성화보와 유씨 가정보에 이은 세번째 족보 1968년 종친회 창립, 1질 9권 을묘대동보 발간

성주이씨의 족보는 1464년(세조 10년)에 최초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꼽히는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12년이나 앞서 발간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윤손(李尹孫)의 농서이씨보에 서문만 전하고 있다.


그뒤 1613년(광해 5년)에 계축보(癸丑譜)를 간행했다. 단권 목각본이었으며,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유씨 가정보(1562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족보다. 그리고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활자본을 속속 간행했다.

 

1751년(영조27년) 7권 6책의 활자본 신미보(辛未譜)을 비롯하여 1830년(순조 30년) 21권의 활자본 경인보(庚寅譜), 일제시대인 1924년의 활자본 27권 갑자보(甲子譜)까지 족보를 간행하여 성주이씨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대에 와서는 1968년 성주이씨 전국종친회(대종회 전신)가 창립되면서 1질 9권의 현대활자 인쇄본 을묘대동보(乙卯 大同譜)를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직공파 등 수많은 중간 지파종회별 족보는 생략)

성주이씨 인구분포

이씨 중 세번째 규모, 18만 6188명


영남 47.3%, 충청과 호남 14% 차지


국내 성주이씨의 분포도를 보면(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본관별 인구통계) 전체 인구 18만 6188 중에서 영남권이 8만 8145명으로 47.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 연고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충청과 호남권에도 성주이씨가 2만 6075명(14%)으로 구석구석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에도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는 이농현상 후에 전국의 성주이씨들이 모인 결과여서 인구분포 통계로서 큰 의미가 없다.

 

 

 

 

 

 

 

 

 

 

 

 

 

 

 

 

 

 

 

 

 

 

 

 

 

 




 

역사속의 성주이씨 인물

조선중기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 배출 李兆年·李崇仁·李 稷·李如松 등 다수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말 재상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뒤 마의태자와 함께 구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로 숨어들었다.

 

이후 고려 초기까지 숨어 지내다가 중후기에 출사하면서 고려시대를 풍미하는 권문세족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려 말 조정에 출사한 친원(親元) 그룹에 속해 친명세력인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실각하여 성주로 대부분 안치되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공신도 있으나 조정 출사는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다시 크게 일어나고 말기에 이르면서 그 기세가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조선중기(15세기부터 17세기)에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을 배출한 영남권의 30여 성·본의 하나로 꼽힐만큼 명문이다.


주요인물로는 ‘이화조’를 지은 이조년, 고려의 삼은으로 꼽히는 도은 이숭인, 영의정을 지낸 이직, 중국의 장군 이여송 등 다수가 있다.

 

성주이씨의 인물에 대한 세세한 사항은 세진록을 참고하면 알수 있다.
여기서는 이름만 소개한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이인기, 이여경, 이승경, 이태보, 이태성, 이포,
이원구, 이영, 이득방,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민, 이비, 이환, 이존성,
이숭인, 이제, 이발, 이직, 이수, 이사후, 이견기, 이사형, 이숭문, 이지원, 이영분, 이혼,
이문흥, 이정녕, 이지활, 이집, 이의, 이전, 이문재, 이자상, 이자견, 이자건, 이운거,
이지번, 이윤탁, 이자화, 이충건, 이성량, 이창, 이성, 이문건, 이항, 이언충, 이조, 이담,
이산우, 이여송, 이원배, 이일장, 이현배, 이구, 이덕응, 이휘, 이현배, 이준구, 이광적,
이지선, 이응협, 이택징, 이종일.


현대의 성주이씨 인물

국회의원·장차관·판검사·박사 등 많아
독립운동가·학자 등 비관직에서도 인물

조선후기부터 조정에 출사하는 인물이 감소하여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학자 등 비 관직에서 인물이 나온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정계, 군, 판검사,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이 배출된다.


성주이씨의 현대인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그 외에 국회의원 장차관, 군장성, 판검사,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인물이 배출된다.


<성씨총감>에 수록된 박사 수는 헬 수 없이 많다.
경제계에서는 신영그룹 이운일,
세방그룹 이의순등 준재벌급 인사도 포진하고 있고, 한국잡지협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주택신문과 현대주택 발행인 이심회장을 비롯한 언론·출판계 인사도 다수 있다.


-이순자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병희 국회의원(15대까지 7선),무임소 장관
-이용택 국회의원(11,12대)
-이학봉 국회의원(13대)
-이종률 국회의원(10,12대)
-이대순 국회의원(11,12대),체신부장관
-이상용(강원도지사, 노동부장관)
-이동근 국회의원(13,14대)
-이해봉 대구종친회장 국회의원(15,16,17대)
-이재선 국회의원(15,16대)
-이문석 육군대장, 총무처장관
-이기주 경남 도지사
-이규동 육군준장(작고)
-이희근 공군대장
-이소동 육군대장
-이태섭 육군소장
-이종학 육군준장
-이규광 육군소장
-이상태 육군중장
-이해순 핀란드대사(작고)
-이산석 전주교육대학장
-이정한 경상대학교총장
-이상만 서울대학교수
-이명섭 변호사, 농서장학회이사장
-이중근 서울지검검사장, 청와대법무비서관
-이재훈 성남지법원장, 변호사
-이광열 청주지원장, 서부지원장
-이만희 서울고검부장판사
-이창민 국민가수(예명 백년설)
-이석용 대한손해보험협회장.

■ 인터뷰 / 성주이씨 대종회 이시욱 회장

鳳山齋(봉산재) 성역화 삼현소 중건 마무리 온 힘

화합행사 ‘선현들의 발자취’ 일깨워
검·판사 50여명 예비 재벌급 인물 많아

이시욱 대종회장은 1934년생으로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에서 출생했다.
성주이씨 맏집인 백파(밀직공파)이며, 철강회사를 창립하여 경영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종회장과 국제라이온스클럽 등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신촌의 성주이씨 대종회 사옥에서 이시욱 회장을 만나 성주이씨 대종회에 대해 들어보았다.
성주이씨 대종회사무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걸출한 분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고 있어
이날도 대종회 고문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이소동장군이 인터뷰에 합석했다.


 

 

 

 

 

 

 

 

 

 

 

 

 

 

 

 

 

 

 

 

 

 

성주이씨 지파종회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한다면 

▶중시조인 농서군공 할아버지께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등 다섯 분 자제가 있는데
모두 크게 출사하신 분들이다.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등 5파로 나뉜다.
성주이씨 종친회는 이 5파별로 운영되고
대종회가 이 5파를 통합 관리한다.

 

또 16개 광역시도별로 성주이씨 종친회도
대종회가 관리한다.

대종회가 수행하는 사업은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이 삼현소를 유지 관리한다. 제례나 시향 행사를 관장하고유물 유적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사업도 대종회가 맡고 있다.

특히 중시조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안산서원에서는 해마다 정기총회, 한식재, 시향 등 대단위 종사를 거행한다.
사람도 많이 모인다. 큰 시향 같은 경우에는 오현재 주차장이 버스로 꽉 찬다.
1000~2000명 정도가 모인다. 대종회 전국 대의원 수는 400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말이 많고 분란이 잦은 것이 종친회인데 

▶그런 면이 있다. 우리도 내 전임 때 1년 이상 대종회가 마비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단합이 깨지고 지파종회에서 불만들이 표출됐다. 다행히 내가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지금과 같이 단합하는 전통을 복원했다.

대종회장님이 리더십이 있는 것 같다.

▶글쎄…. 원래 남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는 데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그런 게 바탕이 돼 한국라이온스클럽은 물론 국제라이온스클럽 아시아지역 TOP에 오르기도 했다.
그것이 리더십이라면 리더십일 것이다.
어쨌든 대종회 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더십이라기 보다 대종회 임원들이 단합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주이씨 대종회를 운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종친회 성원은 전부 혈족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적인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연로한 분들이 이끌어가지만 현대적인 흐름에 맞게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중 행사할 때 재미있게, 예를 들어 야유회를 하듯이 가족소풍을 하듯이 참여할 수
있게 이벤트도 마련하고 선물도 들려주며 선현들의 자취를 알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sungjulee.co.kr/)를 꾸민 것도 그 일환이다.

역사인물도 많고 현대에는 4성 장군도 많고, 집안으로 보면 대통령 사위도 보았는데…

▶격동기에는 많은 일이 있다. 누구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이순자 여사와 5공화국의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국가 중흥기에 큰 업적을 남기신 것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성주이씨 5파 중 맏집인 밀직공파의 후손이지만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살았다
물론 그 부모대 삼형제(이규광, 이규동, 이규성)가 모두 군에서 높이 올랐다.

 대종회 사무실에서 종친회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이문순 사무처장, 이원섭 서울종친회장, 이시욱 대종회장, 이소동 고문,이도필 대종보편집위원장.

 

성주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는가 
▶고르게 분포한다. 4성장군이 5명이나 되고, 고급관료와 정치인도 있지만 검판사가 50여명에 이르고 경제계에도 예비재벌급 인물들이 많이 있다. 모두 애종심이 강해서 명망과 지위에 구애됨이 없이 종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대종회와 지파종회, 지역종친회 임원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다.

앞으로 성주이씨 종사에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곧 이사회가 있다. 성주이씨 20년 현안사업인 봉산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확정지을 것이다.
이것을 하면 비로소 삼현소가 모두 중건된다. 금년에 착공을 해 놓으면 내년에 내 임기가 끝난 뒤에도 후임이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특집팀

박병로 편집국장
최종동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