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시대
검찰 무리한 기소뒤엔 ‘MB 보답인사’ | |
민정수석에 선배 앉히고, BBK검사들 대거 승진 충성도 높여 반대세력 표적수사 일사불란 지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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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2008년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실무진에서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금융조세조사부 등을 통합해 광역특별수사청(가칭)을 만드는 방안이 추진됐다. 비대하고 중복된 조직을 축소하고 수사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방안은 폐기됐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22일 “당시 검찰에서 ‘중수부를 폐지하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위에서도 아무 말이 없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2년 전의 이 장면은 이명박 정권과 검찰의 향후 관계를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부터 ‘검찰 개혁’을 전면에 내걸며 검찰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데 비해 이 대통령은 검찰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통치의 ‘하수인’으로 활용하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화두로 삼은 ‘검찰 개혁’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대신 ‘법질서 확립’과 ‘법과 원칙’을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에는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표적수사 논란이 일자 “흔들림 없이 철저히 수사해 달라”며 검찰에 힘을 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검찰을 강력히 개혁하겠다”고 밝힌 뒤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하고, 중수부 폐지와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을 시도한 것과 대비된다. 이명박 정부는 한편으로는 인사라는 고전적 수단을 통해 검찰을 장악해 갔다. 한 검찰 간부는 “검찰도 공무원인데 공무원한테 제일 취약한 게 인사”라며 “이명박 정부는 비비케이 수사 검사를 대거 승진시킴으로써 ‘충성해라, 그럼 배려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검사들은 검사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을수록 인사에 약할 수밖에 없다. 후배 검사들이 뭘 배우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뿐만 아니다. 민정수석 등을 통한 수사 간섭도 다시 부활했다. 참여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청와대에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선배 기수를 민정수석에 앉힘으로써 법무부와 검찰이 청와대 직할체제로 들어간 것 같다”며 “촛불 이후 법무부와 검찰이 엠비(이 대통령) 권력 유지와 정국 운영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무죄 판결이 난 <문화방송> ‘피디수첩’ 수사의 경우가 집요한 검찰 압박의 대표적 사례다. 한 검찰 관계자는 “당시 임채진 검찰총장은 피디수첩 수사와 관련해서도 농림수산식품부 쪽에서 고소를 취하하고, 검찰은 ‘공소권 없음’ 결론을 내려 마무리하길 원했다”며 “하지만 청와대 쪽이 워낙 완강해 수사를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여당에서는 촛불집회 때 검찰의 역할이 너무 없다고 비판하고, 나중엔 촛불집회 때 연행된 사람들 중 구속자 수가 너무 적다고 압박이 왔다”며 “그러나 500명이 연행됐을 때 검찰 쪽에서 구속자를 최소화하라는 지침을 내려 그나마 30명 정도를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디수첩 제작진과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의 ‘처리’가 지연되자 여권은 검찰총장에 대한 불만을 노골화했고, 당시 2년 임기 중 절반가량 지난 임채진 총장의 조기 교체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임 당시 총장이 정 전 사장 문제를 어떻게 할지를 고검장들에게 물은 것에 대해서도 여권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당시 호남 출신 고검장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안을 왜 호남 출신들한테 물어보며 시간을 끄냐는 불만이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 등과 관련해 임 전 총장은 “사표를 내고 싶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며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 피디수첩 제작진과 정 전 사장을 기소하도록 했고, 그 부메랑이 지금 검찰로 돌아왔다. 황준범 석진환 송호진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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