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직선제와 6.29-홍콩

그린페 2010. 1. 17. 01:18

"가장 좋은 예언자는 과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질곡에는 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20세기 한국은 격동기중의 격동기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 1910년의 한일합방, 1945년의 광복 및 분단체제 시작, 1961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항쟁등은 가히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분수령들이었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것 말고도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으니 1987년의 6.10 민주화항쟁이 바로 그것이다.같은해 4월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라는 국민 요구를 무시한 채 당시헌법을 고치지않겠다는 취지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는 되레 온나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한 목소리를 내게 만든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호헌조치 수개월전에 운동권이었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물고문으로 숨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호헌조치 발표전후에 당시 군부정권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된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됐다. 설상가상으로 6월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까지 일어났다(이군은 같은해 7월5일 사망).
 
다음날인 1987년 6월10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던 날, 박종철 고문死 전말이 드러난데다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전국 40개 가까운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들 시위는 6월28일까지 계속 이어졌다.6월26일엔 시위대규모가 150만명을 넘어서면서 1918년 3.1운동 참가자수를 훌쩍 넘길 정도로 전국민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필자기억으로는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가 한국의 지도를 그려놓고 시위가 일어났던 장소를 불꽃모양으로 표시했는데 지도 전체가 불꽃으로 빼곡이 차있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국민의 요구에 무릎꿇고 말았다.이때 도입된 대통령직선제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올해 대선도 6.10항쟁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올해 대선 산파격이었던 6.10항쟁에 대해 최근 대학생들의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가나다順) 등 4개 대학 학생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6월 항쟁을 알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절반도 안된 44%로 나타났다. 네오마르크스 서적까지도 탐닉했던 필자의 대학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고 아니할수 없다.

특히 박종철과 이한열에 대해 아는 학생은 10명중 한명꼴 밖에 안된다는 조사결과를 접하고 보면 당혹 그자체였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 탓으로 돌릴수 없다.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관련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돼있거나 아예 없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가르치는데 소홀한 국가는 똑같은 전철을 밟을수 밖에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 경향도 과거의 역사를 정확히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로서 어느덧 6.10항쟁 20주년이 된 시점에서 한번쯤은 "가장 좋은 예언자는 과거"라는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말이나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는 미래까지도 포기해버리는 것"이라고 한 영국 처칠수상의 말을 곱씹어 볼때다.

임경오 /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임경오 기자 iko@todaykorea.co.kr

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종합2보)
[연합뉴스 2006-10-22 12:59]
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서울=연합뉴스) 이승관 기자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서울대병원측은 최 전 대통령의 사인을 급성 심부전으로 추정했다. 지난 7월 미수(米壽.88세)를 맞았던 최 전 대통령은 수년 전부터 심장질환 등 노환으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으며 자택에는 간병인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령에 따라 최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오는 26일 국민장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유족들의 의견을 들어 2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최종결정하기로 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최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직접 찾지는 않기로 했지만 영결식 때 참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이병완(李炳浣) 청와대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했으며 한명숙(韓明淑) 국무총리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된 반기문(潘基文)외교통상부 장관도 빈소를 찾았다.
최 전 대통령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입문한 뒤 주로 외교공무원으로 활동했으며 3공 시절이었던 1967년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76년부터 4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10.26 사태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같은 해 12월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유족은 장남 최윤홍 씨 등 2남 1녀.
▲강원도 원주 ▲경성 제1고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만주대 ▲서울대 사범대 교수 ▲외무부 통상국장 ▲외무부 차관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 권한대행 ▲10대 대통령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 ▲국정자문회의 의장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humane@yna.co.kr 

[출처] 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끝내 12.12, 5.18의 증인은 역사속으로...|작성자 대고구려

 

남아공 새 대통령에 제이콥 주마 2009-05-07

...주마 내정자는 이에 따라 오는 9일 취임식을 갖고 4번째 흑인 대통령으로서 공식 취임하게 됩니다.남아공은 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음 tv팟|500*375|42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철언. 출처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름 : 박철언(朴哲彦)
출생일자 : 1942년 8월 5일
출생지 : 경북 성주
학력 :
  * 경북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 법대 학사
  * 서울대 법학대학원 헌법학 석사
  * 한양대 법학대학원 법학
가족관계 :
  *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의 고종사촌
  * 부인(14대 국회의원 현경자)과의 사이에 1남2녀
혈액형 : AB형
신체조건 : 키 174cm, 체중 70Kg
종교 : 불교
경력 :
  * 1967년 제 8회 사업시험 합격.
  *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
  * 1983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 5공 전두환 법률비서관, 장세동 안기부장 특별보좌관
  * 1988년 13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 6공 정무 제1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 1992년 14대 민자당 국회의원. 3당합당 반대 민자당 탈당
  *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정주영 지지
  * 1993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 박탈. 1년 6개월 복역
  * 1996년 15대 자민련 국회의원
  *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에 따라 김대중 지원
  *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정계 은퇴.
  * 현재 법률사무소 운영

신군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의원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검사로 활동하던 중 전두환의 절친한 친구인 노태우의 추천으로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일하며 5공 헌법의 기초를 만듬. 박철언은 노태우의 처사촌. 5공화국이 성립되자 전두환 정무비서관과 법률비서관으로 일하다 장세동이 안기부장으로 있을 때 특별보좌관 역임.

제6공화국의 황태자
노태우의 가족회의 멤버. 6공화국을 좌지우지했던 청와대 가족회의 멤버로는 김옥숙의 오빠이자 노태우와 경북고등학교, 육사 동기생인 김복동과 노태우의 동서(김옥숙의 여동생 남편)이자 상공장관을 했던 금진호, 노태우의 사돈인 최종현 SK전회장과 신명수 신동방그룹 전회장 등이다. 한국정치사에서 노태우정권만큼 친인척들이 국정 전반을 쥐고 흔들었던 경우는 없었다.
박철언은 6공화국의 실세로 안기부를 제치고 남북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가하면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사안에 대해 막강한 입김을 행사.

참고자료 : 한국의 명문가문 제 8편 노태우가

3당합당과 박철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쿠데타 당시 새로 만들었던 헌법에 따라 다시 체육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남.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쿠데타동지이자 5공화국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하겠다는 취지의 6.29선언을 하고 대통령에 당선. 여소야대 국회에서 운신하기가 어려웠을 뿐아니라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등으로 노태우 퇴진 운동이 거세지자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이 이끌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전격적인 합당을 선언.
김영삼이 민정당과의 합당에 대해 당원들에게 의사를 묻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노무현만이 '반대한다'고 의사진행발언을 했으나 묵살되어 당을 떠남. 3당합당으로 인해 구체화되어가던 4.3 진상규명과 5.18광주민주항쟁 진상규명 등의 과거사 규명 움직임이 백지화되고 유일한 야당으로 남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초거대여당의 법안 날치기통과 등에 대항하기 위해 장외투쟁을 벌여야되는 상황에 내몰림.
자체적으로 정권 연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태우는 초거대여당의 힘에 기반하여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자리를 김영삼에게, 초대 총리 자리를 김종필에게 준다는 밀실야합을 통해 3당합당을 성사시켰으나 김영삼이 내각제 개헌을 백지화시키고 김종필을 실각시키며 권력 독식. 광주민주화항쟁과 6월항쟁 등 민중의 민주화열망을 등에 업었던 김영삼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군사정부에 영합하여 학살과 독재정치, 부정부패의 주범들에게 면죄부를 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안한 논리가 그 때 나옴.
6공화국의 황태자로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던 박철언으로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형국. 이는 노태우의 가족회의 핵심멤버였던 김복동의 경우도 마찬가지. 박철언과 김복동은 김영삼에 대항하다가 김영삼정권이 들어서고나서 정치적으로 몰락.
슬롯머신 사건
김영삼 정권 초기인 1993년, 슬롯머신계의 대부인 정덕진, 정덕일 형제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홍준표검사는 정씨 형제를 선처해주는 댓가로 많은 단서를 얻어냈고(유죄거래협상, plea bargaining), 이를 근거로 박철언과 당시 대전고검장이던 이건개 등 여러 고위인사를 체포, 처벌함.
정씨 형제는 1980년대 초부터 슬롯머신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고 권력 실세들과 정계, 관계, 법조계에 다각적 로비를 펼쳤음. 이들이 5공, 6공 권력층의 정치자금원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음. 3당합당으로 집권한 김영삼입장에서는 '5공, 6공 청산'이라는 이미지 메이킹도 하고 정치적 걸림돌인 박철언을 제거할 수도 있는 좋은 기회. 당시 담당검사였던 홍준표는 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
6공화국 황태자였던 박철언은 정씨 형제로부터 6억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 1년 6개월 복역. 김영삼은 나중에 박철언을 사면복권시킴. 정덕일은 지난 2007년 제주도 신라호텔에 카지노 '벨루가'를 오픈.
돈 떼인 사연
지난 2007년 4월 박철언의 처남 현모씨가 강모 여교수를 16억 횡령혐의로 고소. 이어 작년 7월 박철언의 부인인 현경자 전의원이 같은 혐의로 강씨를 고소. 뒤이어 박철언과 박철언의 장모 등 측근인사 3~4명이 강씨와 그 언니와 형부 등 6명을 고소해 현재까지 총 6건의 고소가 접수된 상황.
박철언에 따르면 1998년 지인을 통해 강교수를 만났으며 2001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재단을 만들기 위해 모았던 집안의 기부금과 개인 출연금 등 176억원의 관리를 맡겼다가 횡령을 당했다 주장.
박철언의 국회 보좌관을 지낸 김호규는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88년에서 89년까지 정치실세이던 박철언에게 선거 때마다 H그룹, S그룹, D그룹, L그룹 등 당시 대기업들이 60~70억원씩의 돈을 싸들고 찾아왔고 박철언이 당시 조성한 비자금은 총 1000억 원대에 이른다고 주장.
테리의 인물평
- 정치검사에서 6공화국의 황태자로 자라 세상물정 모르는 듯
- 1980년대 1000억이면 지금 시세로는 어느 정도일까? 흠... 5000억원이었던가? 단군할아버지가 고조선설립 후부터 지금까지 매년 1억씩 모아야 가능한 규모의 비자금을 해드신 전두환은 왜 29만원밖에 남지 않았을까? 누구는 1000억 갖고도 179억이 남았는데...
*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 미국과 소련의 이해에 따라 분리통치. 한쪽엔 친미정권, 다른쪽엔 친소정권 수립
* 내전 발발. 주변 나라들의 참여로 확전. 최소 4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
* 휴전상태. 군사적 긴장상태 유지.
* 민주화 요구 시위 발발.
* 식민지시절 점령국의 군인이었던 자가 군사쿠데타로 정권 탈취
* 18년간 장기 집권.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 수정.
* 대통령, 측근에 의해 총격 사망.
* 군사쿠데타 발발.
*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 도시를 포위 공격하여 민간인 학살
* 헌법 수정하여 체육관에서 대통령 당선
*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시위 발생
* 집권세력의 제 2인자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하고 재집권
* 2개 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거대여당 형성
* 변절한 야당지도자가 대권 승계
* 외환위기로 IMF 관리체제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정치사같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가 아직 채 30년도 되지 않은 대한민국. 위 간략한 정치사만 보더라도 이 땅의 민주화를 이만큼이라도 만들어낸 것은 오직 국민의 피와 땀이었다. 그 5공, 6공 세력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 살만한 나라를 위해서는 아직 우리 갈 길이 멀다.
Posted by TerrytheWitch
 
축하떡 자르는 김영삼-정몽준
[뉴시스] 2010년 01월 13일(수) 오후 05:44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뉴시스】이동훈 기자 =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아산정책연구원 신축 개관식에서 정몽준 명예이사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축하떡을 자르고 있다.photoguy@newsis.com
 
“강기갑 무죄 판결 판사는 사법연수원 다시 다녀야”
[투데이코리아] 2010년 01월 16일(토) 오전 01:12   가| 이메일| 프린트
[투데이코리아=김민철 기자] 서울남부지법 형사1단독 이동연 판사가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에 대한 강제해산에 항의하며 국회 사무총장 등의 업무를 방해(공무집행방해 등)한 혐의로 기소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여권에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15일 ‘투데이코리아’와의 통화에서 강기갑 의원 무죄 선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며 “해당 판사는 사법연수원을 다시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최고위원은 15일 확대당직자회의에서 “어제 법원이 지난해 1월의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을 내렸다”며 “법원의 판결취지는 정당한 항의의 표시였다라는 것인데 대부분의 국민들께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준 대표는 “해당의원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며 “검찰이 항소를 한다고 했는데 향후 상고심에서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아주실 것을 기대해본다”고 덧붙였다.
-ⓒ 투데이코리아(http://www.todaykorea.co.kr)   김민철기자/kmc@todaykorea.co.kr
김민철(기자)
 
"시위농민 사망 대통령이 사과해야"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12/22]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

기사입력 2005-12-23 오후 12:58:05

  지난주 홍콩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반대 한국 농민시위로, 천여명이 연행되고 11명이 홍콩경찰에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번 시위에 참여했던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의원은, 홍콩경찰이 고무탄을 사용하는 등 과잉진압을 했다고 비난하면서 진상조사를 촉구했는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홍콩 주민들이 우리 식의 시위 행태를 보며 놀라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시위문화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지난주 세계화에 반대하며 홍콩까지 원정을 가서, 농민시위를 주도했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을 통해서 〈 WTO 홍콩 각료회의 반대 한국 농민?노동자 시위〉의 진상과 우리의 시위문화, 문제는 무엇인가, 함께 짚어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입니다. 강기갑 의원은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등을 역임한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17대 국회에 비례 대표로 진출,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지난 10월과 11월, 쌀 협상 비준안에 반대하며 29일간 단식 농성을 벌인 바 있고,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홍콩에서 농산물시장 개방 반대 투쟁을 펼쳤습니다.
  박인규 : 강의원님, 안녕하십니까?
  강기갑 의원 : 반갑습니다.
  박인규 : 홍콩에서 오신 게 어제 밤이라고 들었습니다.
  강기갑 의원 : 네. 어제 한 6시경에 도착했습니다.
  박인규 : 아직 여독이 안 풀리셨겠네요?
  강기갑 의원 : 그렇지는 않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WTO각료저지를 위한 '한국민중참가단'.. 홍콩에 몇 분이나 가셨습니까?
  강기갑 의원 : 전체 인원은 약 1천 5여백여명정도 됐고요. 그 중에 농민들이 대략 1천3백여명정도 참여 했습니다.
  박인규 : 상당히 많이 가셨는데 평화시위를 하시다가 거의 마지막에 문제가 생겨서 1천여명이 연행되고, 그 중에서 지금 11명은 구속 상태에 있게 됐는데요. 이 11명은 제가 듣기로는 내일 재판이 있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강기갑 의원 : 네. 내일 재판은 이제 불구속 수사가 들어갈 것인가? 하는 부분인데요. 거의 구속은 정리가 되어 진 것으로 보이는데..보석을 받아 들일 것인지에 대한 부분을 판단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인규 : 어제 오시기 전에 11명을 한 분 한 분 만나보셨다고 하는데, 일단 홍콩 경찰이 11명을 구속한 것은 말하자면 그 분들이 시위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아니면 폭력적 방법을 썼다..그래서 구속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KBS 1라디오  

  강기갑 의원 : 어제 세 개 경찰서 유치장에 계시는데..세 군데를 다 다니면서 모두 접견을 했습니다. 변호사와 함께..구속의 기준이 홍콩의 경찰서에서는 확실한 물증이 있거나, 이 사람이 폭력을 실질적으로 휘두른..그런 것이 증명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구속 기소한다고 발표를 했는데 사실상 만나보니 전혀 기준이 없었습니다. 비디오만 가지고 촬영만 한 사람도 기소가 되어 있는 상황이고, 천식이 있어서 시위대 뒤에서 겨우 행진에 따라 다닌 사람, 심장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실질적으로 각목과 쇠파이프 같은 것을 든 적도 없는..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많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고요. 재판 과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겠다..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 재판 과정에서는 많은 분들이 조기 석방될 수 있다는 정도로만 확인 됐습니다.
  박인규 : 인신구속보다는 벌금형 정도로 풀려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11명 중에 말하자면 폭력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고 스스로 인정하시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던가요?
  강기갑 의원 : 그것까지는 저희들이 확인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힘들고요. 아무튼 대부분이 구체적 물증이 확인 된 사람이 아니다..
  박인규 : 이번에 구속 된 11명에 대해서 홍콩주재 한국영사관이 신원보증을 거부했다..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강기갑 의원 : 제가 재판을 두 번 할 때마다 끝까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홍콩 경찰은 만약에 보석을 할 경우에 여권을 압류하고 홍콩에서 거주를 하면서 재판에 응할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여권을 내 놓고?
  강기갑 의원 : 네. 그렇습니다. 법원에 압류를 하고..그렇게 됐을 때 이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잠적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하는 우려 때문에 보석 결정을 하는데 망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그렇다면 이분들의 신원에 대해서 보증을 서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해서 요청을 한 것이 카톨릭 대주교님이 내가 보장을 서겠다고 나서셨고, 그 다음에 무엇보다도 한국 국민이기 때문에..
  박인규 : 카톨릭 대교주라고 하시면..그 곳에 계신..?
  강기갑 의원 : 네. 그렇습니다. 홍콩에 계신 카톨릭 대교주님이 신원을 보증하시겠다고 자청하셨고, 그 다음으로 한국 영사관에서 보증을 서 주면 무엇보다도 더 확실한 담보가 되니까..보석으로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한국 영사관은 이것을 공식적으로 거부를 했습니다.
  박인규 : 왜 거부를 했을까요?
  강기갑 의원 : 아마도..제가 그 자리에서 차관님과 직접 통화를 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런 부분은 보증을 서 줄 수 있지 않느냐..라고 했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자기들이 믿을 수가 없다. 만약에 재판 기간 중에 잠적을 하면 한국정부가 보증을 선 부분에 대해서 신뢰를 잃기 때문에 어떻게 서 줄 수 있겠는가..하는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우선 그렇다면 제가 국회의원 신분이니까..제가 우선 보증을 하겠다는 의사를 변호사를 통해서 해 놓은 상태이고 23일까지 한국 정부가 이 보증 부분에 대한 답을 지금 할 수 있는 기간은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그 분들의 보증을 서 준다고 하면 일단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군요?
  강기갑 의원 : 결정은 아닌데..보증을 서 주면 재판관이 보석 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 변호사들의 판단이죠.
  박인규 : 강 의원께서는 이번 시위 과정에서 홍콩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고 인권탄압적인 진압을 했다..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무탄을 발사했다..고 하셨는데?
  강기갑 의원 : 우선은 인권 침해 현상에서 일어 났던 것은, 저희들이 저와 전농사무총장과 홍콩 경찰청장을 직접 만났습니다. 협상을 하면서..연행을 해야겠다는 입장은 분명했고, 그 때는 연행과정에서 많은 저항을 하고 하면 다치고, 불상사가 일어나고..우리가 WTO결의 협상을 제지하러 간 것이지..경찰과 홍콩 시민들과의 관계를 적대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서..그렇다면 순조롭게 하도록 협조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해서 연행에 최대 협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연행을 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인권적 침해 사례가 많이 일어났고요.
  박인규 : 예를 들면?
  강기갑 의원 : 20시간 정도 버스 안에서 대기를 시킨 경우도 있고,
  박인규 : 20시간이요?
  강기갑 의원 : 그렇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모포나 담요도 주지 않고 밤을 지새게 한다든가, 수갑을 풀지도않고 화장실을 가서 옷도 자기들이 내린다든가, 문을 열어 놓고 용변을 보게 한다든가, 뺨을 때린 다든가, 강제 직인날인을 하게 한다든가, 양발 등 소지품을 한 곳에 모아서 돌려주지 않는다든가, 아픈 사람들이 병원을 가도 통역을 붙여주지 않는다든가..하는 여러 가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일어났고, 그리고 고무탄을 발사한 것을 그저께 제가 접견하는 자리에서 직접 확인 했습니다. 그래서 고무탄 맞은 흔적이 있고, 지금도 피멍이 파랗게 들어 있고..또 한국에 나온 사람들 중에도 두 사람이 맞은 경우도 있는데..홍콩 경찰청장은 어제 총영사와의 통화에서도 고무탄을 발사한 적이 없다고 지금 부인하고 있고, 저희들은 사진을 찍어서 증거로 제출을 하고 변호사를 통해서..본국에 두 사람이 치료를 받은 흔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소견서까지 해서 보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지금 홍콩 경찰의 인권 침해적 수사와 과잉진압..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대응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강기갑 의원 : 변호사를 통해서 법적인 대응을 하고, 실제 그 고무탄의 위력을 보니까..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고, 그것이 무릎하복부 중간 부위에 맞았더라고요. 그것이 만약에 그 위치가 조금 더 올라와서 국부 같은 곳에 맞았다면 치명적이고 또 머리 쪽을 맞았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는..그런 위력이 확인됐습니다. 이건 거의 살상무기와 같은 것인데..그렇기 때문에 홍콩 경찰청장도 3단계의 진압만 했지..
  박인규 : 3단계라면 최루탄..?
  강기갑 위원:네. 1단계가 물리적 저지, 그 다음 2단계가 소방호스, 3단계가 최루탄이었는데..여기 까지만 지시를 했고, 고무총 발사는 지시한 적이 없다..그럴리가 없다..라고 부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국제적으로도 저희 농민들이 최루탄을 쏘고 하니까..격분한 부분도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홍콩의 경찰들이 다치거나 중상을 입히게 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이 많이 놀랐던 거죠.
  박인규 :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처음에 저희 시위대가 삼보일배도 해서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런 과잉 진압 이랄까..이런 것들이 나타난 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단 말이죠. 말하자면 홍콩 경찰이 만들어 놓은 저지선을 저희가 돌파를 한 그런..왜 갑자기 그렇게 말하자면 평화적인 시위가 약간은 폭력성을 띠게 됐는지..어떤 사정이 있었습니까?
  강기갑 의원 : 저희들도 가능하면 평화적 비폭력 시위를 하려고 노력을 했고 약속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삼보일배도 하고 물에 뛰어 들면서 경찰관들과의 충돌도 피하고..여러 가지 방법을 했습니다만, 우리 농민들이 실제 WTO에 대해서 사생결단의 의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WTO에 몸부림치겠다는 이런 절박한 사항들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희 지도부로서는 가능한 홍콩의 많은 동조를 얻기 위해서 비폭력 평화적으로 했었는데 삼보일배를 했을 경우에 그 전에도 그랬지만 홍콩 국민들이 빵이고, 음료수고, 우유고, 심지어는 돈까지 모금을 하고, 가게에서 무엇인가 사서 한국 농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돈까지 되돌려 주는..전폭적인 지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싸서 우리가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결의도 했었습니다만, 마지막날 농민들도 그런 절규와 몸부림에 그런 것들이 경찰이나 시민들이나, WTO에 대해서 온 몸으로 던져서 표현하고 싶은 것들도 조금 있었고..그러나 전체 지도부..세계 농민지도자들 전체 회의를 통해서 우리가 정했던 여러 가지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한다는 결의 속에 갔는데 3일을 경찰이 막았습니다. 첫 날은 상여를 경찰이 목적지까지 행진하도록 허용을 했는데 이것을 경찰이 저지를 하니까..거기서부터 충돌이 일어났고..
  박인규 : 그 전에는 막지 않았는데..마지막 날 막는 바람에..
  강기갑 의원 : 그렇습니다. 행진을 하는 도중에 막았습니다. 행진을 한 3분의 1정도를 했는데 막으니까..거기서부터 경찰과 몸싸움이 나면서 상여가 터져나오면서 또 경찰이 강력하게 저지를 했으면 상여를 통과시키는 협상을 했을 텐데..경찰이 또 제대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니까..터져나오면서 가두시위가 시작됐고, 경찰이 최루액을 뿌리고 많은 농민들이 다치고 하는 과정에서 가두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협상장인 컨벤션센터 주변으로 시위대들이 다 몰리고..그래서 경찰이 물 호스를 쏘고 최루탄을 수십 발을 난사를 했습니다.
  박인규 : 이번 시위를 통해서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농산물시장 개방을 막자는..?
  강기갑 의원 : 농산물시장 개방 뿐만 아니라 여기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노동자들도 많이 갔고, 세계 민중들이 많이 갔습니다. 그리고 홍콩의 NGO..세계 농민, 노동자, 빈민들까지 수만명이 왔습니다. 거기에서는 WTO라는 곳이 자본주의 최대 모순인 빈익빈 부익부..자본의 양극화 세태를 심화시키고 특히 농산물 개방을 가속화 시켜서 농업 개도국에 농업 생산 기반을 계속 무너뜨리고 세계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를 많이 드러나게 하는..오히려 WTO D-day협상이 가지고 있는 명분..경쟁력을 강화한다기 보다는 그것에 대한 피해가 더 확대되기 때문에 이제는 WTO라는 것이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를 초래하고 세계 인류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이 것은 없어져야 할 무역기구이다..모든 사람들을 끌어 안고 가는 새로운 무역체제나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 명분을 가지고 D-day협상을 저지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 곳에 농민들이 많이 갔고, 우리의 어려운 실정과 이런 절규들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박인규 : WTO의 체제 전반..특히 DDA, 도하개발아젠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시기 위해서 가셨다고 하시는데..어떻습니까? 처음 평화시위가 마지막날 폭력시위가 돼서 우리의 메시지 같은 것이 훼손됐다고 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기갑 의원 : 홍콩시민들이 날이 갈수록 많이 결합을 했고, 집회나 행진이나 그런 것들에 동조가 많이 있었습니다만, 저희들 농민지도자 뿐만 아니라 민중 대표들이 유지하려 했던 평화적 비폭력시위가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끝가지 이뤄지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홍콩시민들, 교포들께서 저희들에게 보내주신 눈물겨운 지원과 지지, 참여..이런 것들을 타작하고 난 이후에 이삭 줍듯이 다 주워오고 싶었던..그런 소중하고 아까운 것이었는데 이것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만, 많이 저희들이 가지고 올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깝고..그러나 홍콩 사회가 영국의 식민사회이고 경찰의 무소불위와 같은 그런 권위와 어떤 억압적인 것들도 많았습니다. 분위기가..그러나 민주화 운동이라든가..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홍콩 시민들이 이제 자신들의 권리와 주장을 위해서는 당당한 그런 부분들도 할 수 있구나..하는 여지를 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평화적, 비폭력적 이런 시위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와 참여도를 마지막까지 끌어내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어떤 시위와 어떤 시위 방법이 스스로의 어떤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많이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강기갑 의원 : 네.
  박인규 : 국내도 농민시위가 대단합니다. 사실 농민의 지위가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고, 오죽했으면 계속 이 어려운 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시위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지난 달 15일날 전국 농민대회에 참가했던 농민 두 분이 한 달 사이로 돌아 가셨습니다. 전용철씨..최근에 홍덕표씨까지 돌아가셨는데..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정부의 어떤 대응이랄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기갑 의원 : 지금 한 달이 거의 넘었는데 정부가 이 일에 대해서 관심과 대응이 너무 안일하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홍덕표씨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현장에서 사고를 입어 병원에 가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고..또 지금은 거의 경찰에서도 인정을 합니다만 또 한 분은 돌아가신 지가 오래 됐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도 대통령께서 이러한 것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있고..그래서 저희들로서는 우선 대통령이 사과를 하셔야 한다..그리고 이 일에 책임진 경찰청장을 해임시키고..행정부 장관도 책임자이니까..해임을 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를 내 걸고 있고 당연히 국가에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보상도 해야 하는 것이고..이것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이번 시위와 관련해서 노대통령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돌아가신 농민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현장에서 대응하는 전경과 의경들도 우리의 자식 아니냐..현재와 같은 시위문화가 계속되면 계속 이런 식의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시위문화가 달라졌으면 좋겠다..말하자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앞으로 농민들의 시위 방식..물론 워낙 어렵고 힘드셔서 그렇게 하시는 측면도 있지만 좀 더 평화적 시위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강기갑 의원 : 저희 전농지도부도 고민을 많이 하고 저도 사실 농민운동..지금도 전농회 부회장직을 맡고있습니다만, 국회의원으로서 평화적 시위를 정착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늘 평소에 주장하고 호소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이나 노동자들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첫 번째, 농민들이 이렇게 폭력행위를 하고 시위를 해서 많이 사람들이 와서 큰 불상사를 일으키고 여론화 될 때..정부가 들어 주는 척, 귀를 열어 주는 척..하는 이런 태도는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농민들이 평화적으로 시위할 때는 귀를 크게 열어서 들어야 하고, 반응들도 나타내 줘야 하고..그 다음에 지금 우리의 한국 시위 문화가 이렇게 과격해지고 폭력적으로 된 것은, 경찰의 대응도 문제가 있습니다. 방어적 대세만 하고 어떤 질서의 유지측면으로 해야 하는데..1001이라는 기동대..예전에 백골단이라고 하는 부대이거든요. 그 책임자는 해임이 됐죠. 벌써 며칠 전에..이런 경찰들이 들어와서 아주 공격적이고 무력 진압식으로 하니까..그것을 보는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더 이렇게 분개를 하게 되고, 과격시위를 하게 되고, 다음에는 맨 손으로 당하니까 뭔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 각목이나 이런 것들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고..그래서 이 시점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적 시위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비폭력시위가 되어야 한다..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정부, 경찰, 시위자들 삼자 모두가 함께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낼 수 있겠습니다.
  박인규 : 농민시위의 근본적 원인은 농민이 자꾸만 사회적 약자로 몰리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농민도 말하자면 일반 국민들처럼 살 수 있게만 해 준다면..농민 대책이라고 할까요? 그런 문제인데..최근에 노대통령 같은 경우에, "농민들이 구속된 것은 안타깝지만 세계화의 흐름은 못 막는다." 세계화의 흐름을 받아 들이면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어야 하고 농민들의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힘들어지고..어떤 농민들의 제대로 일반 국민들과 똑같이 살 수 있게 하는 방안도 필요할 것으로 보는데요?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강기갑 의원 : 정부의 그런 지조가 아주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산업 같은 경우에는 기술이나 여러 가지로 나름대로 성장을 하는 쪽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일방적으로 강자에게만 유리한 형태로 가서도 안되고, 두 번째는 농업이라는 것은 생명산업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과 하늘과 농민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그리고 이것은 우리 식탁건강을 담보로 하는 산업이지 않습니까? 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우리가 규모화 해서 갖출 것이 아니고 우리 농산물의 질을 향상시키는 고품질화하는 것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이런 쪽으로는 가지 않고 ..외국의 경쟁력에 항상 이등, 삼등해서 우리 농업이 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구조이죠. 그래서 농업의 전체적인 구조가 달라져야 한다..그리고 정말 우리 국민들이 우리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쪽으로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옳바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인규 : 1995년 WTO체제가 들어서면서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대책이 마련이 됐어야 하는데..우리가 그 부분에 있어서 너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평화적인 시위도 중요하지만 농민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그런 대책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의원님께서도 많이 노력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 드립니다.
  강기갑 의원 : 감사 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박인규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홍콩 새해 첫날부터 3만 명 민주화 시위
[중앙일보] 2010년 01월 04일(월) 오전 02:51   가| 이메일| 프린트
[중앙일보 최형규] 홍콩이 새해 첫날부터 민주화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1일 홍콩 주민 3만여 명은 최근 중형을 선고받은 중국의 대표적인 민주인사 류샤오보(劉曉波·54) 변호사의 석방과 행정장관선거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5시간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이날 오후 3시쯤(현지시간) 홍콩 섬 중심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가두 행진을 벌였으며, 오후 7시쯤에는 중국 정부의 홍콩연락사무소인 중롄반(中聯辦) 사무실 앞까지 몰려가 직선제 실시 등을 요구했다. 일부 시위 참가자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2명과 경찰관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사회민주연합의 옹욱만(黃毓民) 회장은 “향후 2년 내 직선제 실현을 위해 올해 다양한 활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콩 정부는 현재 간선제인 홍콩행정장관 선거와 부분 직선제인 입법회의(국회) 의원 선거의 직선제를 2017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밝혔으나 중국 정부가 이를 승인할지는 미지수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argus60/
 
홍콩 한국국제학교 리카싱 장학금 유치
08-28 18:01 | HIT : 981
홍콩 한국국제학교 리카싱 장학금 유치
한국국제학교는 한국학교 설립 20주년과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국제학교기금 유치사업의 일환으로 리카싱자선재단(李嘉誠基金會: Li Ka-Shing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금년부터 앞으로 5년 동안 영어과정의 매년 성적이 우수한 홍콩이나 중국학생 1명(중3 이상)을 선발하여 졸업할 때까지 전액의 학비(현재 연간 84,500 홍콩달러)를 지급하는 리카싱 장학금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홍콩 한국국제학교(1988년 대한민국 문교부 인가, 1994년 정부예산 교민기부금 채권발행 등 6,500만 홍콩달러가 소요된 교사 신축과 함께 영어과정을 개설하고 학교이름을 한국국제학교로 개칭)는 지난 5월 16일 학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20명의 이사 전원이 발기위원으로 참여하는 한국국제학교 기금발기위원회를 출범하고 석동연 홍콩총영사와 이원희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한 바 있다.
금년 80세이며 아시아 최고부자(2008년 기준 개인 순재산 265억 미달러, 포브스 선정 세계11위 부자)인 리카싱 홍콩 청쿵(長江)그룹회장은 1980년 교육, 의료, 학술지원 사업 등을 목표로 리카싱자선재단을 만들고 100억 홍콩달러 이상을 투입했으며, 이 자선재단을 애지중지하여 ‘셋째 아들’로 부르고 있다.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권 학교들은 리카싱 장학금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도 학교에 대한 평판이 확실하게 높아진다는 점에서 이번 리카싱 장학금의 유치는 한국학교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카싱 장학금의 유치에는 본교 학교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용이 한국은행 홍콩 소장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평소 리회장과 친분이 있던 하용이 소장이 리회장의 80회 생일을 맞아 욕심을 버리고 자비를 베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금강경(A4 용지로 무려 20쪽 분량을 20시간에 걸쳐 손수 자필로 필사)을 선물로 보내며 한국국제학교 학생에게도 장학금 혜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고 이에 감동받은 리카싱 회장이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이루어 졌다(본 내용은 2008년 8월 15일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연합뉴스에 동시 보도됨).
홍콩의 국제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Spring Board
(지각 지체, Down증 아동)학급을 개설하여 홍콩사회의 칭송을 받고 있는 한국국제학교는 리카싱 장학금의 도입이 한국과 홍콩 그리고 중국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편 홍콩한국국제학교는 조영우 교장의 부임 이후 새로운 이사진 및 경영진 개편, 총영사관을 통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한인회 등 교민 단체의 총력 지원, 투명한 학교 행정, 이머젼교육(immersion: 1학급 내 한국어 교사와 원어민 교사 2담임제 운영을 통한 영어 몰입교육)을 비롯한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의 계발과 효율적 운영 등으로 학교가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왔다. 또한 교직원들의 열성적인 학생지도와 학교관리에 힘입어 우수학생들을 유치하고자 하는 학교간 경쟁이 치열한 홍콩에서 1년 반 만에 학생수가 20% 이상 급증하여 교민사회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함은 물론 교민사회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홍콩 중문대 평생교육원에 한국어문화원 개설 2008-11-27 20:35:45
레드 프리미엄관 1일 무료이용권 받기 | 신고 0명
 

(홍콩=연합뉴스) 정재용 특파원 = 홍콩의 명문대인 중문대 부설 전업진수학원(평생교육원)에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배우는 현지인들을 위한 한국어교육문화원이 생겼다.
중문대 전업진수학원은 27일 몽콕에 위치한 학원 23층에 한국어교육문화원을 마련, 석동연 주홍콩 총영사와 빅터 리(李仕權) 전업진수학원 원장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 행사를 가졌다.
이 문화원에는 한국어 및 한국문화에 관한 각종 서적, 비디오와 오디오 등 시청각 자료, 컴퓨터 등이 비치돼 있어 우리나라 말과 문화를 배우려는 홍콩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주홍콩 총영사관과 삼성전자, 홍콩 한국국제학교 등이 교육문화원 설립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어교육문화원의 코디네이터인 이수경씨는 "교육문화원은 홍콩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보급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한국어 말하기 대회, 각종 강연 및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문대 전업진수학원은 지난 2001년부터 성인들을 위한 한국어 학습과정을 마련해 운영해오고 있다.
이와 함께 홍콩 최고 명문인 홍콩대도 지난해 9월 학기부터 한국어 과정을 개설하는 등 홍콩에서 한류 열풍을 바탕으로 한국어 학습붐이 일고 있다.
특히 홍콩 시티대학은 지난해 9월 학기부터 3년제 한국어 정규 학사과정을 신설한 바 있다.
이밖에 중문대, 침례대 등도 한국어 과목을 새로 개설하는 등 홍콩 대학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jjy@yna.co.kr
영상취재: 정재용 특파원 (홍콩), 편집: 김지민VJ
 

중국학교, 국제학교, 한국국제학교 어느 학교를 선택할 것인가  2006-12-12

...파견돼있는 공무원들이나 대기업 주재원들은 국제학교외에 한국국제학교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중국에는 베이징한국국제학교외에 상하이와 톈진, 홍콩, 옌타이, 따리엔 등 7개의 한국국제학교가 있습니다. 이중 베이징에 있는 한국국...

blog.daum.net/candycandy38/9055020 블로그명: 캔디네랭킹631,20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