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idgman Fredrick Arthur - Apollon Enlevant Cyrene (출처 : 거미숲 )
키레네 [Cyrene] 리비아의 여신
강의 신 페네오스(또는 페네이오스)의 아들이자 라피테스족의 왕인 힙세우스가 물의 님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서 미모가 뛰어났으며 사냥을 잘하였다. 테살리아 지방의 펠리온산에서 아버지의 가축을 해치는 사자와 맨손으로 격투를 벌였는데, 마침 전차를 타고 지나가던 아폴론이 그 광경을 보고 반하여 키레네를 전차에 태우고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로 데려갔다. 아폴론은 그 곳에 키레네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운 뒤 여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리비아의 키레네 시는 그리스 테라섬의 식민시로서 그리스에 곡물을 공급하는 곡창지대였으며, 키레네 고고유적에서 아폴론의 신전 등이 발굴되었다. 키레네는 아폴론과의 사이에서 아리스타이오스와 이드몬 두 아들을 낳았다. 이드몬은 멜람푸스의 아들인 아바스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또 군신(軍神) 아레스와의 사이에서 트라키아 지방에 살던 비스톤인의 왕 디오메데스를 낳았다
키레네 유적
리비아의 자발아크다르주에 있는 고고유적이다. 키레네는 그리스 티라의 식민지로서 헬레니즘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BC 600년 무렵 인구 20만 명을 넘어섰고 그리스에 곡물을 공급하는 곡창지대였다. BC 96년 로마제국의 키레나이카 속주가 된 뒤에도 로마의 중심도시로 역할하였다. 도시는 두 언덕 사이에 동서로 뻗어 있는데, 도시 남서쪽은 지난날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구역과 아폴론 신전으로서 BC 7∼BC 4세기에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 공공목욕탕은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때 지은 것이며 공공광장·원형경기장은 2세기에 로마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도시 중심부에 있는 그리스 광장에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위한 원형 건축물과 주거터가 발견되었고, 도시 북서쪽에는 제우스를 모신 도리아식 신전을 발굴하였다. 또 규모가 크고 매장법과 형태가 다양한 공동묘지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1982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아폴로 신전과 분수
비록, 아폴로 신전과 분수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더라도 그들 건물의 내역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로마인들이 도시의 동쪽 변두리에 물탱크와 보조 도수관을 설치하기 전에 아폴로 분수는 수많은 구유 모양의 물받이 통에 의해 보여지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물을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동물들의 통행은 우물이 고갈되는 하절기에 집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으며, 신성한 지역내 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 및 오염이 되는 것을 피 할수 없었다. 우리는 그러므로, 길고 좁은 언덕이 아폴로 분수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저장되는 가파른 절벽으로 향해 있음을 알게되며, 넓은 언덕 아래에 많은 성지 및 기념물들이 아폴로 사원을 둘러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Watering Point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부 대지는 그리스인들의 연극을 위한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나중에는 로마인들의 원형 극장으로 사용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현대의 방문객들에게는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돌로 만들어진 선반이 여러 군데 붕괴되었으나 극장으로 통하는 도로의 흔적이 현재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초기의 로마 지배 시기까지도 짐승들이 분수까지 접근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그 지역 총독인 “베스탈리스”가 이 지역의 동쪽 끝을 봉쇄하였으며, 대신에 그는, “아쿠아 아우구스타”라고 불리는 새로운 분수를 만들어서 사용케 하였으며, 아폴로 분수는 오염이 되지 않도록 사람만 사용토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반기 로마 시절, 토목 기술자들은 도시 주변에 동물을 위한 광범위한 물 공급 장소를 설치하여 전지역의 우물에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우물의 물줄기를 로마 사람을 위한 공중 목욕탕으로 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분수에 의해 단단한 지형이 무너지고, 위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옹벽을 설치하고 중간에 중재 지역을 두었다. 이 옹벽은 또한, 계곡 도로 주변에 있는 주랑으로 보호되는 뒷담 역할도 하였으며, 겨울철 나그네 및 극장 관객들에게도 좋은 보호막 역할을 하였다. 서기 98년에 건설된 목욕탕은 상대적으로 신전의 지역을 좁게 하는 결과가 되어 나중에는 공식적인 신전 입구를 건설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분수 및 신전 지역의 급격한 변화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성 요소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들게 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동시에 같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의 어떤 것들은 그 당시 상황에는 쓸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기 되는 설명들이 다양한 현상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나, 그 당의 많은 사항들이 아직도 분명치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여기에 언급된 여행안내서에는 건물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기 쉽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방문자들은 아래쪽 입구에서 반대 방향으로 아폴로 제단을 관람토록 하는 것이 유리하며, 시간이 촉박하면, 급격하게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 곧바로 분수에 도달 할 수 있다. 아폴로 분수(1)는, 이 지역에 도시가 건립되게 한 가장 큰 이유로, 그것은 아폴로 신이 구혼하여 그의 신부를 리비아에 데려온 그리스 소녀 “쿠라 혹은 쿠라나(키레네)” 요정에 관한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 “핀다르”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를 찿다가 사자와 한바탕 격전을 치룬 아폴로는 경이로움과 감탄에 쌓여 켄타우로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공공연하게 내 손을 그녀에게 내밀거나 혹은 신부 침대의 향기로운 꽃을 꺾어 버리는 이런 것들이 합법적인가 ?” 켄타우로스는 아폴로에게 결혼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였다. “이 처녀와 혼인하기 위해 당신은 이 골자기로 들어오시오. 그대는 그녀와 맺어질 운명이며, 키레네 평원 가운데에 당신이 섬사람들(테란)을 한곳으로 모을 때, 당신은 그녀를 이 도시의 여왕으로 만들어줄 바다 건너 선택된 제우스의 정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폴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그날 아폴로는 그 일들을 성취하였으며, 리비아의 금으로 장식된 방에서 그녀와 동침하였다. 고대의 다른 작가들은 같은 줄거리를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는 “쿠라나는 그녀 자신 스스로 리비아로 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도시 주변을 파괴하고 다니는 사자를 죽이고 왕국을 얻었다”고 하는 작가도 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그녀의 이름을 따온 도시들의 수호신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Kurana 혹은 Kurene"가 원래 이름이며, "Cyrene 혹은 Cirene"라는 말은 현대의 앵글로색슨 혹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에서는 아랍 지역 이름인 "Grenuah"임을 알수 있으며, 도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평원을 뜻하는 말로써,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기간의 “Silphium" 문장 사용 후, 키레네의 동전에는 맨손으로 사자를 짓누르고 있는 여신, 키레네의 모습으로 대체 사용되었다. 이 조각품의 가장 잘 알려진 샘플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비너스 사원에서 출토된, 부조품에서 볼 수 있다. 그 부조품에 나타난 모습은, 리비아 여신이 요정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소한 2개 이상의 키레네와 사자 조각상이 도시의 분수대에 세워 졌으며, 사자의 벌어진 입에서는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하고, 믿어지지 않게도 님프는 황량한 아프리카에, 사자의 커다란 입에서 생명의 근원인 물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아폴로 분수(1)의 물은 상부 언덕에 있는 동굴로부터 흘러 나왔으며, 샘은 언덕 중심부에 위치한 300야드 정도 길이, 동굴의 끝에 있었다. 이 터널은 매우 꾸불꾸불하며, 바깥쪽 절반 정도는 순수한 자연적인 동굴이나, 안쪽 절반은 고대시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벽은 진흙으로 바른 흔적 및 물이 고여 있던 흔적이 보인다. 조각들은 주로 로마 시대에 만들어 졌으며, 터널은 님프(요정)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임을 상징하며, 때로는 순례자 및 여행자들에게 순례 장소였다. 상류 쪽에서 다른 통로를 만들어서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기 때문에, 방문자들은 발이 물에 젖지는 않았다. 현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옛날보다는 감흥이 덜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옛날 물줄기를 돌렸던 챤넬은 폐쇄되었고, 모든 동굴이 막혔으며, 현재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관계로 그곳에 접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江의 요정인, 아케로우스에게 봉헌된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은 크리토라와 테오크레스토스의 딸인, 메고가 세웠다. 분수 서쪽에는 Rock-Face가 솟아 있고, 초기까지 계단으로 남아 있었으나 “Nymphaeum"이전에 개발되었다. 그 밑에는 초기 모습 그대로의 물통이 있는데, 현재 수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18년, Sotas의 아들인, 사제 디오니시우스가 분수의 위치를 낮게 하고 Rock-Face에서 볼수 있도록 하게 한 흔적, 외관 및 차양을 설치하여 복구하였다. 그후, 서기 70년경, 플라마 게멜로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분수 옆에 암벽을 깎아 직사각형의 수로를 건설하였다. 분수를 지나서, 일정이 촉박한 방문자는 계단(2)를 내려가서, 아폴로 사원 및 목욕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상부 언덕을 따라 중앙 계곡의 입구로 가는 것이 좋다 좌측의 높은 담은 신전 고유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며, 우측 삼각 문장이 있는 낮은 담 옆에는 많은 짐승들의 구유가 있으며, 가장 위쪽에 기독교 승리 후에 불태워버린 많은 이교도 상의 Byzantine lime-kilns(3)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우리가 나중에 음미할, 복구된 Strategheion (7)이 있으며, 바로 동쪽에 조상대를 받히기 위해 복구된 4개의 도릭식 기둥으로 되어 있는 Greek Propylea(4)가 있다. 기원전 4세기경, 아폴로 사원의 사제, Praxiades가 로마 목욕탕이 건립되기 전, 신전의 출입구를 표시하였다. 이런 기념물 출입구는 로마 사람들이 목욕탕을 세울 때 허물었으며, “Sacred Way" 의 옹벽(호안)이나 주랑 등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출입구는 서쪽 멀리 눕혀있는 “Roman Propylea(8)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아마도 Trajan이나 Hadrian시기에 복구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입구 정문에 있는 코린토식 4개의 기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처음과 나중 출입구 사이에, 방문자들은 3개의 중요한 기념물울 지나게 되는데, 첫 번째는, 통로의 우측에 아마도 여신, 아프로디테로 여겨지는 여신이 위치했던 담 뒤쪽에 파괴된 “절(5)”가 있다. 사원 뒤편, 계곡 거리 끝에,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샘에서 목욕탕 각 부분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짧은 주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열린 현관 “Byzantine Bath(6)"로 가는 출입구가 있으며, 이 문을 지나 공중 목욕탕의 Main Cold Bath로 가게 되며, 북쪽은 Hot Room으로 통해 있다. Trajan시기에 건설되었던 초기 목욕탕은,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그후 서기 400년경, 다시 건설되었다. 나중에 건설된 목욕탕에도 주 출입구가 있으며, 비잔틴 시기에 해체된 트라얀식 출입구에 있는 기둥에 흠이 있는 하얀 대리석 기둥의 상부를 볼 수 있다. 2개의 목욕탕 부근에 초기 시대의 많은 담벼락이 있으며, 서기 98년, 초기 목욕탕을 건설하면서, 신에게 바쳐진 건물에 속해있는 제단 등을 볼 수 있다. 서쪽으로 진행하여 로마식 개선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가는 도중 왼편에는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된 “Strategheion (7)"이 있다. 그 건물은 이름에서와 같이, 기원전 4세기경, 3명의 키레니아 출신 장군들이 세웠으며, 그것은 시르틱 걸프 지역의 승리, Libyan Marcae 및 Nasamones를 향해 행군하면서 거둬들인 전리품을 십일조를 바치는 신과의 관례에 따라 아폴로 신에게 헌상 되었었다. 이 시기의 정확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원형 조각품이나 중앙 바닥의 제단 받침만 남아 있다. 로마 지배 초기에 많은 건물들이 보수되었으며, 지방 총독이었던, “Sufenas"에 의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납되었다. 또한 그는, Forum도 보수하였다. 헌정의 말을 기초에 새긴 티베리우스의 동상은 벽 쪽에 세웠으나, 동상의 머리 부분은, 서기 115년, 유태인 반란 시, 손상이 되었다가 아마 그후에 다시 보수 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개선문(8)을 지나면, 방문자들은 신전 영내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 좌측에는 매력적인 헬레니즘 양식의 분수(9)가 있으며, 아폴로 분수로부터 공급되는 물이 저수조에 모였다가 다시 헬레니즘 분수로 흐르는데, 현재도 물이 흐르고 있다. 4계단의 작은 인공 폭포를 내려오면서, 지붕을 받히는 가냘픈 열주가 지탱하고 있는 하부 물 받침대로 떨어지게 된다. 기념문과 같은 축으로, 고대 순례자들의 첫 번째 성지 형태를 한 것은, 지하 세계의 지배자인 “Temple of Hades(10)"이 케르베루스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동상의 머리와 손발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부분은 일반 돌로 만들어 졌으며, 이러한 재료의 혼합 사용은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키레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사원의 기초가 계단식으로 된 것은 그리스나 헬레니즘이 기원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나, 외관은 서기 2세기경에 재 보수되었으며, 기둥의 한곳에는 사제의 이름도 새겨진 채 남아 있다. 하데스 사원 남쪽에, 적은 규모지만,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를 위한 로마 시대의 사원이 있으며, 근처에서 페르세포네의 머리 없는 동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처에서, 아그리피나의 깨어진 초상화가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Baths of Museum(목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