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페 2009. 10. 12. 01:12

박정희의 형, 박상희 2009-05-14 10:10:51  
  작성자: 권보  (125.♡.91.239) 조회 : 787  추천 : 17    

박정희 형 박상희

 

-조근래(중앙경실련 조직위원장)

 

<박정희 동상건립 추진논란,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도 재조명해 건국훈장 서훈 대상자로 추진하자!>

 

국가보훈처는 지난 2005년 3.1절을 맞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해 안동 출신 권오설 선생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훈․포장을 추서키로 의결했다. 이로써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6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부의 ‘복권’ 조치는 국가보훈처가 2005년 1월, 공산주의자로 규정돼 서훈에서 제외된 자를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로 개정한 데 따른 것이다. 일제하 신간회와 해방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등 민족독립을 위해 좌우합작에 참여했던 ‘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좌파’를 정통 사회주의자와 구별해 독립운동가로 복권시키겠다는 진일보한 변화인 셈이다. 구미가 낳은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도 이 같은 복권의 대상으로 모자람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

 

대통령급 거물 정치인에겐 권력을 잡기 위해 감춰야할 사적인 사연이 종종 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그 대상은 철저히 가려지고 왜곡되고 희생돼야 한다. 선거 악재로 자주 등장하는 감춰둔 자식 얘기가 아니다. 박정희 형 박상희 선생이 그렇다. 형은 구미와 대구․경북의 대표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가였건만 ‘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좌파’ 성향 때문에,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했던 동생에게 걸림돌로 인식되면서 ‘독립운동가 박상희’는 철저히 묻혀 지고 ‘박정희 형’으로만 왜곡되고 강요됐다.

박상희(1905.8.12-1946.10.5) 선생은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이고 박정희는 5남이지만 4남이 요절함으로써 박정희가 가장 가까이에서 의지하고 스스로 존경했다던 형이다. 박상희 선생은 가정형편으로 구미초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임에도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 겸 기자, 동아일보 선산지국장을 했을 정도로 재능이 특출했다. 이 때 받은 월급으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하숙비와 학비를 지원했고, 이러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가장 따랐던 형이 경찰에 피살된데 따른 큰 충격을 받은 박정희는, 이후 경찰에 대한 반감과 체제에의 회의로 남로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일찍이 민족의식이 싹터 선산지역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한 박상희 선생은 20대 초반에 선산청년동맹을 결성해 선산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선산지회를 결성해 간사 겸 조사부 총무를 맡으면서 수시로 일제경찰에 체포․구금되었다. 박상희 선생은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자 언론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형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박정희는 1940년 형의 반대를 뿌리치고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운영하는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던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반면 박상희 선생은 1944년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후 박상희 선생은 건준 후신인 선산군인민위원회 결성을 주도해 내정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선산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보수우익세력은 ‘비상국민회’'를, 진보적 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박상희 선생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진보적 세력에 대한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고, 그렇게도 열망했던 민족국가 수립이 점차 좌절되면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등 정치적 불만이 팽배한 와중에,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작인 강제공출과 여름 대홍수로 인해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됐고 이에 항의하는 9월 전국노동자총파업이 전개됐다. 10월 1일 대구에서 노동자들의 집회에 경찰이 발포하여 시민 한명이 죽게 되자 대규모 10월 항쟁으로 전개되고, 경북 각 지역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박상희 선생은 10월 3일 오전 9시쯤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 및 경찰관, 우익정당 요인들을 유치장에 감금하였다. 다시 군중들은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을 공격하여 면사무소 저장 식량 1백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서류를 모두 소각하였다. 이때 박상희 선생은 군중들이 경찰관을 공격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고 경찰관을 보호하였고, 이러한 태도가 경찰에 신뢰를 줘 시위대와 경찰 간의 원만한 중재를 가능하도록 한 요인이 됐다. 그러나 귀가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지원 경찰들이 오인으로 발포한 총에 맞아 집으로 와 바로 죽었다고 한다.(여동생 박재희의 증언) 경찰의 고의적인 사살이란 주장도 있다.

 

◇ 야속한 정치인과 지도층… 묘비하나 없이 방치

 

자료를 제대로 대조하지 않은 일부 학자들이 박상희 선생을 남로당원이라고 주장하는데, 남로당은 박상희 선생이 피살된 다음 달인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됐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지방 중소도시의 독립운동가라고 자료를 대충대충 확인하는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일제때 민족주의자로 평가받았던 그는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사회운동을 하며, 특정한 노선이나 특정단체에 편향됨이 없이 폭넓게 활동했다.”(대구․경북 사회주의 독립운동-하, 영남일보, 2000.8.28)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특히 1931년엔 개량주의 사회운동으로서 ‘구미소비조합’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31.5.6) 이는 실사구시형 진보운동가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동안 박상희 선생이 경제자립·국산품장려·소비절약 운동의 일환으로 발족한 구미소비조합의 이사였다는 언급이 없었는데 당시의 신문을 찾아내어 이를 처음으로 밝혀내고, 구미시민으로서 박상희 선생에 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에 가장 열성인 김종길(구미경실련 전 집행위원장) 씨도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민족주의자이다.”라는 판단이다. 박상희 선생 부인인 조귀분 여사도 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김천지회장 겸 중앙부회장으로서 야학교사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작년 말 김종길 씨와 함께 박상희 선생 묘소를 찾았다. 각자 초행이었다. 부친과 형제들의 묘소가 위압적일 정도의 묘비와 함께 낙동강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터를 잡은데 비해, 박상희 선생 묘소만 유일하게 가족묘지 오른쪽 귀퉁이 산자락 깊숙이 묘비하나 없이 방치돼 있어 바로 찾지를 못했다. 그나마 사각형 나무 표지가 몇 개 꽂혀있어 박상희 선생의 묘소임을 어렵게 확인할 수 있었다.

구미에서 수차례 국회의원 출마에다 경북도지사 출마까지 한 유복자 박준홍 씨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부친의 묘소에 묘비마저 세우지 않는지 의아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구미시의 정치인들과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상희 선생이 주도했고 이로 인해 42세에 애석하게 피살된 10.1 항쟁은 굶주림 지경에 이른 민중들의 생존권투쟁이었다. 실제 이를 주도했다는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수배와 피신, 월북으로 현장을 떠났음에도 전국으로 확산돼 200만 명이 참여했다는 것은 민중의 자발적 생존권투쟁이 동력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지역민들의 생존권투쟁을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굶주림으로부터 먹고살기 위한 생존권투쟁처럼 존엄한 게 없건만, 고깟 진보적인 이념 때문에 겁이 나서 발길은커녕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들이 너무나 한결같으니 야속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박정희 생가엔 속물적 욕망이 넘치도록 과잉이고, 생가로부터 걸어서 20분 지척의 거리에 있는 박상희 선생 묘소엔 동생이 대통령이었고 사위가 김종필이었건만 묘비하나 없는 야속한 현실, 이젠 건전한 상식과 균형감각을 가진 구미시민들이 바꿔나가야 하지 않을까?

 

◇ 건국훈장 서훈 대상자로 추진하자

 

야속한 구미지역 정치인과 관변단체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더욱 야속해지려고 한다. 박상희 선생의 독립운동과 재조명에 대해선 철저히 무관심하면서, 각종 선거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박근혜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한 박정희 추모사업이 선거 목전에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도와 구미시는 박정희 생가주변 공원화사업에 2006년부터 연차적으로 216억 원을 투입하고 있고, 여기에 동상건립이 예정돼 있음에도 새마을 등 관변단체들이 3억 원을 모으고, 구미시가 역후광장(구미역 후면광장)이나 금오산을 부지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오비이락이라고, 뜨자마자 내년 시장선거를 겨냥한 속셈이라는 순수성 훼손 논란에 직면했다. IMF 경제위기 때보다 더한 경제 한파로 위축된 시기에, 서민들의 가슴과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동상건립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 역시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0 대 5 완패를 안겨준 4.29 재․보선에서 나타난 민심 즉,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독선행정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훈처는 그동안 연 1회 8.15 광복절에만 실시하던 독립유공자 포상을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부터 3.1절과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11.17) 등 연 3회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생명이고, 건전한 시민의식의 미덕은 균형감각이다. 지역의 미래를 밝히는 사표가 될 우리지역 인물 발굴은 우리지역민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구미지역 정치인과 관변단체 여론주도층 인사, 시민들이 건전한 균형감각을 발휘해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을 재조명하고, 건국훈장 서훈 대상자로 추진하자. 박상희 선생 건국훈장 서훈 대상자 추진이 국회의원 선거와 시장선거의 공약이 되도록 공론화하자. 정치인과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가장 눈치를 보는 박근혜도, 이참에 왜곡된 ‘삼촌=좌익’ 딱지를 떼고 독립유공자로 격상할 수 있으니까 찬성할 것이다. 이런 주문과 기대와 무관하게 순수 민간 차원의 ‘박상희 선생 추모모임’이 소박한 모습으로나마 조만간 가시화 될 것이다.(경북문화신문 칼럼-2009.5.12)

◈박근혜의 형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의 남편)/ 한병기
: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현)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
: 28살 포항제철 행정실장. 32살 동양철관 회장.민정당, 민자당 4선 국회의원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김종필 처남)/ 박준홍
: 31살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 32살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 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
◈박근혜 외삼촌 (박정희 부인 육영수의 오빠)/ 육인수
: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5선 국회의원
◈박근혜 외삼촌의 사위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
: 전직 청주 MBC 사장, 전직 충청일보 사장, 현재 일신산업 회장
◈박근혜 사촌언니 남편 (박정희 형 박상희의 딸의 남편)/ 김종필
: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
◈박근혜 여동생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
: 육영재단 이사장, 육영재단 수천억원의 부동산 소유
◈박근혜 남동생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
◈박근혜 사촌언니의 남편(박정희 형 박상희의 막내딸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
: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박근혜 사촌언니의 동서(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 허영자
: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
: 허영자 오빠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
◈박근혜 이모의 아들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 장덕진
: 박정희 정권하 장관
◈박근혜 이모의 아들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또다른 사위)/ 정영삼
: 한국민속촌 회장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
: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
: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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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체육관

개관일자
2001. 2. 15
시설규모
- 대지 : 48,543㎡(14,684평)
- 건축면적 : 6,909㎡(2,090평)
- 연건평 : 16,518㎡(4,996평)
- 건물구조 : space frame 돔형 (지하1층, 지상3층)


주경기장
- 넓이 : 1,925㎡(582평) - 바닥재(압축건조 너도밤나무 후로링)
- 공연 및 행사용 가변무대(15M×4.5M×1.0M)
- 풀칼라 메인 전광판(표출부 10M×4.2M), 보조전광판(5.2M×1.55M) - 4개
- 좌석수 : 6,277석(고정석 4,830 가변석 1,312 기타 135)
- 경기가능종목 : 농구, 배구, 핸드볼, 배드민턴, 씨름 등 모든 실내경기
보조경기장
- 위치 : 지하1층
- 넓이 : 680㎡(34M×20M, 221평) - 2개소
- 경기가능종목 : 농구, 탁구, 배드민턴 등 실내경기
부대시설
- 조명 · 음향시설
- 냉난방시설
- 화물전용 승강기 1대
- 웨이트 트레이닝장
- 선수대기실(4개소), 감독 · 코치실(2개소), 심판실(2개소), 샤워장(2개소), 각 사무실 등 편의시설
- 주차시설 : 474대
시설이용
흐름도
구비서류 : 구미시체육시설사용허가신청서 1부, 사업계획서 1부
접수문의 : 관리계 (전화 450-5785)
사용시간
사용시간
구분 하계 동계
조기 05:00 ∼ 08:00 06:00 ∼ 09:00
주간 08:00 ∼ 19:00 09:00 ∼ 18:00
야간 19:00 ∼ 23:00 18:00 ∼ 23:00
대관료(전용사용료)
대관료(전용사용료)
구분 평일 공휴일
(토,일,조기,야간)
초과
사용료
(시간당)
체육경기 체육경기외 체육경기 체육경기외
박정희
체육관
주 경기장 주간 100,000원 300,000원 150,000원 400,000원 10%
가산
보조 경기장
(1면기준)
주간 50,000원 100,000원 80,000원 200,000원
유료입장 입장수입의 10% 입장수입의 10%
대관료(상행위사용료)
대관료(상행위사용료)
구분 하계 사용료 비고
선전 또는
부착 광고물
게시면적
1㎡당(일)
공개입찰
(단, 부득이한 경우에는 수의계약을 할 수 있다.)
※ 중계방송료는 주최측에서 부담한다.
부양광고물
(에드벌룬 등)
1일 1개 7,000원
프로그램 및 선전
책자등의 판매행위
판매부수
및 단가
판매부수×단가×20%
영화촬영 주간
야간
40,000원
60,000원
중계 방송료 구분 텔레비전 라디오
체육경기 국내
국제
40,000원
60,000원
20,000원
40,000원
체육경기외 국내
국제
100,000원
120,000원
50,000원
60,000원
녹화 또는 녹음 중계방송료의 반액
경기 또는 행사촬영 중계방송료와 동일
대관료(부속시설 사용료)
대관료(부속시설 사용료)
구분 동계 비고
전기료 기본료+실사용료
전광판 기본료+실사용료+기본시설사용료(20,000원)
냉난방 냉방 기본시설사용료(25,000원)+연료대(가스료)
난방 기본시설사용료(25,000원)+연료대(가스료)
음향시설 기본시설사용료(20,000원)+(마이크수×5,000원)
수도료 실사용료
박정희체육관 안내도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