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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독-삼성전자방문

그린페 2009. 10. 7. 00:04
언론재벌 머독, 삼성전자 방문한다
[디지털데일리] 2009년 10월 06일(화) 오후 06:59   가| 이메일| 프린트
- 최지성 사장 면담 예정…7일 방한
[디지털데일리 윤상호기자]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7일 하루 일정으로 방한한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포스트 타임스 등 신문과 폭스TV 등 방송 및 20세기폭스 등 영화사 등을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재벌이다.
업계에 따르면 머독 회장은 7일 전용기편으로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을 예정이다. 이어 판문점을 방문해 남북관계 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듣고 중국으로 출국한다.
삼성전자에서는 최지성 사장을 만나 모바일 사업 관련 논의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전무 면담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한편 머독 회장이 한국에 오는 것은 지난 1998년 이후 11년만이다.
<윤상호 기자>crow@ddaily.co.kr
 

머독, 이재용 전무·남용 부회장 면담

브로드밴드 TV-콘텐츠 협력 가능성…종편 진출 여부 '촉각'

연합뉴스 | 입력 2009.10.08 00:34 | 수정 2009.10.08 00:36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 7일 한국을 찾은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최지성 사장과 남용 LG전자 부회장을 잇달아 만나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날 하루 일정으로 방한한 머독 회장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아 이 전무와 최 사장을 만났고, 오후에는 남 부회장과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면담 내용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만남의 성격상 삼성전자, LG전자와 뉴스코퍼레이션사가 브로드밴드 TV와 콘텐츠 부문에서 협력하는 방안이 논의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LG전자는 최근 독일 최대 VOD(주문형 비디오) 서비스 사업자인 맥스돔과 제휴했다.
LG전자는 내년 상반기 독일 시장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서 7개 시리즈의 제품을 출시해 내년에만 유럽 시장에서 300만대 이상의 브로드밴드 TV를 판매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국내에서는 주문형 비디오 기능을 갖춘 LED TV를 판매하고 있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아직 제휴를 통한 시장 확대 계획은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LG전자 관계자는 "최고 경영진과 만나기는 했지만, 특정 사업과 관련된 깊숙한 얘기보다는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머독 회장의 한국 방문은 지난 4일 일본 교토에서 뉴스코프의 자회사인 다우존스가 주최한 콘퍼런스에 참석한 데 이어지는 것으로, 8일에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머독 회장이 외국인 지분이 20%까지 허용된 종합편성 사업에 뛰어들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한국 방송 시장 진출 시도는 오래전부터 계속돼왔다.
그는 지난 2000년 자신이 갖고 있던 스타TV가 참여한 한국위성방송(KSB)을 통해 위성방송사업권을 획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2003년에는 스카이라이프 지분참여도 시도했지만 좌절됐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미디어 규제가 완화되는 시점에 머독 회장이 방한한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머독 회장은 폭스TV와 스타TV 등 글로벌 방송미디어와 세계 최대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타임스 등 신문, 20세기폭스 영화사 등을 거느린 미디어 재벌이다.
minor@yna.co.kr
 


*허브 미용솔트 종류와 사용방법*
 


허브솔트는

예로부터 전래되어온 소금목욕과 박하목욕 방법에서 착안하여 수공예로 만든 허브소금으로 첨단시설에서
재배한 허브식물과 전남 서해안 청정지역의 천일염을 800℃로 구워낸 뒤 불순물을 제거하여 허브추출물과 분말을 이상적으로 배합한 알칼리성염 입니다.

허브소금은

삼투압 작용으로 피부에 있는 노폐물도 빼주며, 지친 피부를 생기있고 부드럽게 가꾸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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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성 : 페퍼민트 솔트, 로즈마리 솔트, 황토 솔트, 스페셜 솔트


전신마사지

샤워나 목욕후 몸이 적어 있는 상태에서 1티스푼(5g내외) 분량의
마사지 소금을 손바닥에 덜어 부드럽게 마사지 합니다.

부분마사지
1).종아리나 둔부,허벅지,아랫배 등 뭉치거나 피로한 부분에 마사지 합니다.

2).
발 뒷꿈치나 무릎등에 마사지합니다. 발목부터 허벅지로 끌어 올리듯 마사지 합니다.

3)
은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약간의 마사지 소금을 묻혀 부드럽게 마사지 합니다

4).
얼굴마사지
소금 1티스푼(5g내외)분량의 마사지 소금을 손바닥에 덜어 물에 살짝 적시거나 젖은 얼굴에 부드럽게 소금을 녹이듯 마사지 합니다.

5).
콧망울과 모공의 피지제거
콧망울에 마사지 소금을 가볍게 바르고 1~3분간 그대로 둡니다.
모공이 열리면서 모공을 통해 폐지가 제거되도록 손가락이나 손톱의 끝으로 부드럽게 마사지 합니다.

마사지후 미지근한 물로 말끔히 닦아 냅니다.

 

 


★주위사항★

마사지는 1분 내외로 마사지 하는 것이 좋습니다.
눈에 마사지 소금이 들어 가지 않도록 주의 하세요.
피부에 맞지 않을 경우 즉시 사용을 중지합니다.
눈에 들어가거나 민감한 부위를 피하며 상처부위에 문지를 경우 따가운 증세가 있을 수 있으며
이런 경우 즉시 씻어 냅니다. 

[출처] 허브 미용솔트 종류와 사용방법|작성자 조달인

 

이매방 (李梅芳 1927∼)단어장에 추가

요약
승무·살풀이 예능보유자. 전라남도 무안 출생.
설명
승무(僧舞)·살풀이 예능보유자. 전라남도 무안(務安) 출생. 7세 때 목포 권번(券番)에서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뒤 1935년 조부 이대조(李大祚)에게서 호남류의 승무를 익히고, 이창조에게서는 호남 검무를, 박영고에게서는 법고를 전수받아 춤의 기초를 쌓았다. 1949년 광주극장에서 첫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68∼1978년 세계주요무용페스티벌 20여 회 참가, 1981년 케네디센터 공연, 1982∼1985년 국악대공연 승무 출연, 1986년 미국과 일본을 순회공연하였다. 1987년 승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살풀이춤이 제9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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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도공의 수공으로 춤을 새긴, 우봉(宇峰) 이매방(李梅芳)
삶에 있어 아픔은 옹이가 된다. 그 옹이는 관솔 자국으로 남는다. 송판을 들여다볼라치면 하얀 속살들이 관솔 주변에서는 급류처럼 촘촘한 결을 이루며 가파르게 지나간다. 양재동 자택에서 만난 춤꾼 이매방 선생의 삶이 그랬다. 춤에서 보이듯이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에 몰아치는 세파는 참으로 가파른 것이었다. 모든 것이 현대를 향하고 화려한 치장으로 변해갈 때 올곧은 전통춤을 부여안고 무용계의 변방에서 걸어온 세월, 그 사이 여기저기 옹이가 촘촘히 박혔다. 그래서 말이 거칠고 화급하고 우격다짐 같은 육담과 패설이 있다. 그러나 나무의 멋이 옹이의 문양이듯, 상처는 삶의 문양이 되었다. 상처를 품은 조개가 진주를 게워내듯, 옹이는 송판의 화룡정점이 된다. 생의 매듭을 풀 듯 춤을 추었고 그래서 맺어지고 풀리는 그것은 응어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춤에서 특히 두드러지던 맺음과 풀림의 기법, 삶에서 터득되었기에 각별한 것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욱 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남자가 춤을 춘다는 것에 대한 편견이 말이죠. 그럼에도 춤을 선택하셔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춤꾼의 한 분이 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 춤의 과정은 어떠셨는지요.

나는 1927년 5월 5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어. 목포시 양동 24번지고 호적으로는 대성동 18번지로 되어 있지. 어릴 적에 집안 부모님들이 흥이 많은 분들이었는데, 마침 우리 옆에 진도 조도에서 온 함국향이란 분이 있었어. 국악을 하고 창을 하신 기생이라고 왜 있잖어 예술 예(藝)자, 기녀 기(妓)자, 예기(藝妓)지. 그분이 어머니에게 권한거지. 내가 어릴 적에는 규태거든 이규태. "애는 하는 짓이 춤을 가르치면 싹수가 있겠어요" 하면서 어머니를 부추긴 거지. 자랄 때 곡식 될 것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러잖어. 애기 때부터 팽이치고 제기차고 남자답게 논게 아니고 계집애처럼 노니까 아버지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늘 호통이었는데, 어머니는 그저 귀여운 막내니까 철없고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데 그런다고 하며 나를 두둔했어요. 세 살 때 어머니 경대에서 누이들의 저고리 입고 치마 두르고 내 입방구로 혀를 쯧쯧 차면서, 거기 맞추어 춤을 추드라는 거여, 커서 누님들한테 들은 소리지, 요새말로 징그럽지 우습고. 그러다 보니 결국 춤의 외길로 나간 것이지. 함국향씨가 권번으로 안내할 때, 그때가 일곱 살 무렵이었지.
권번은 당시 우리 전통예술이 학습 유통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당시 목포권번의 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당시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6칸 기와집이었어요. 지금도 감나무 대추나무는 살아있던데, 집은 많이 변화했지. 당시 소리선생은 오수암선생이 있었지. 김소희 누님이 짝사랑하고 그랬지. 그래서 내가 심부름도 하고 그랬어. 춤으로는 이대조 선생이 있었지. 그때 목포권번 대단했지요. 장월중선, 함동정월, 김강남월 등이 오고갔지. 그때 권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여섯 있다던데, 모두 다 활동은 그만 두었어. 80이 넘었으니 죽을 날만 기다리겠지. 한번은 목포극장 건너편 죽동 쪽 포교당 절 앞에다 가설무대를 지어 가지고 무대가 꾸며졌는데, 그때 이대조 선생이 한성준씨 보고 "이 눔아 너는 경성 올라가서 출세했다. 기가 막힌 고까(옷) 입고..."하고 놀리더라고. 한성준씨는 명주 활비당으로 바지저고리 두루마기를 빼입고 우리 선생인 이대조 선생은 돈이 없어서 무명베로 입고 있었고, 그러니 사람 나면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때 우리 이대조 선생은 이동백씨의 소리에 북을 쳤고, 한성준씨는 이화중선의 장구를 치드만 이화중선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물을 가득 담아서 바가지를 없어놓고 육자배기를 했지.
선생님에 춤을 전한 가장 중요한 분은 이대조 선생으로 할아버지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는지 춤의 스승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내 스승 이대조 선생은 친할아버지가 아니라 항렬로 할아버지뻘이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인물이 참으로 미남이었지. 허우대도 좋고, 춤 잘 추고 소리 잘하고, 특히 소리 장단이 아주 좋아요. 그리고 상모놀음도 일품이었는데, 상쇠놀음 특히 부포를 노는 윗놀음이 기가 막혀요. 딱 챙기고 나가면 좋아요, 일품이지요. 가까운 할아버지뻘이지만, 오히려 엄했어요. 권번의 기강이 있었으니까. 나는 애당초 소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목이 낮은 바닥청이라, "천상 너는 춤이다" 그래서 춤을 선택하게 된 거지. 그리고 나는 방학이면 여기저기를 다니며 배웠어요. 이번 여름에는 광주권번을 가볼까, 전주권번에 가볼까. 내가 목포권번에서 춤 배운다는 것을 연줄 연줄로 다 아니까. 춤의 욕심 때문에 여기저기를 다닌 것이지. 박영구 선생은 광주 권번에서 만났어요. 그분 고향은 화순 능주 쪽이지. 선생은 발을 좀 절어요. 애기 때 도랑을 건너다가 허리를 젖혀 척추를 다쳐서 다리를 절었지. 춤가락도 좋은 데가 있지만 주로 북을 배웠지. 북가락이 색다른 게 있고 일품이었어요. 이창조 선생에게 검무도 배웠죠. 그분은 장성분이지. 당시 학채(수업료) 낼만한 형편도 못되어 어깨너머로 배우고 선생은 그런 내가 귀여우니까 가르쳐주고 그랬지. 뿐만 아니지, 좀 잘 한다 내가볼 때 좋다 하는 사람은 다 배우고 좋은 가락을 땄지. 전주권번에 가니까 정형인이 가르치더라고 그러나 내게는 안 맞아, 서울에서 한성준씨가 가르치는 것을 봤지 내게는 안 맞아. 그러나 이대조, 박영구는 정말 좋았지. 그러나 그분들은 지금 말해도 누군지 잘 몰라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지. 지금이나 그때나 서울 와야 출세하는 거여. 당시 선생은 목포를 헤어나지 못해서 그런 거지. 왜정 때 방학 때 한번씩 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잠을 잤지.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춤추는 이들도 있었어요. 권번과 비슷해요. 지금 보니까 집이 적어, 그때는 큰 것 같았는데. 당시 출입하는 이들은 모두다 나보다는 선배고, 동료 중에는 한일섭, 정철호, 장영찬 이런 사람들이 오가고 그랬지. 또 한성준이 한성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지. 지금의 동아일보 본사 건물 옆 소방서 자리에 있었지. 안비취, 한산월, 한영숙, 강선영, 강산월이 배우고 있더라고. 당시 서울에서 춤 가르치는 사람이 당시에는 한성준 밖에 없었어요. 참 여러 군데를 다녀본 거지. 서울은 방학 때 한번씩 큰맘 먹어야 올라왔지. 방학 때, 열 몇 시간 덜커덕거리며 역이란 역은 다 들리고 오는 기차 타고 목포에서 서울 올라오면 차비가 대단해요.
권번은 당시로서는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아닌데 소학교에 언제 입교하였고 정식 학업은 학교는 어디까지 공부를 하셨나요.

학교는 목포북교소학교와 목포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왔지. 원래 1926년생인데, 호적이 한해 늦게 되어 1927년생이 되었고 소학교는 남보다 1년 늦게 들어갔지. 권번에서 춤을 배우다 학교를 간 거지. 학교를 파하면 권번에서 춤을 배웠지. 원래는 소리를 하고 싶었는데, 상청이 질러지지 않아서 작파하고 춤만 추었지. 그래도 웬만한 남도민요는 다 하고 토막소리도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춤에 거름이 되었지. 그러다 1학년 2학기 때 만주 대련으로 가족이 이사를 했지. 형님이 운수업으로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모신 것이지. 그래서 나도 그곳으로 전학을 갔어요 1학년 2학기 때. 만주 대련의 정포(靜浦)소학교, 일본말로 시즈우라, 일본학교였고 한국인이라고는 나와 가네시로란 아이와 둘 뿐이었지.
재작년 동경에서 공연 갔다가 주간잡지에 이매방이란 이가 만주 대련의 정포 소학교의 동창생이 궁금하다 살아있으면 연락하라 했더니, 참 빨라요. 300여명이 모였어요. 63년 만에 만난 것이지. 사람은 늙으면서 다 변하지만 눈동자가 안 변해요. 그것을 보고 찾는 거지. 정포 소학교를 다니면서도 여름과 겨울의 방학 때는 목포에 와서 춤을 배웠지. 그러다 5학년 2학기 때 다시 목포 북교소학교로 와서 1년을 다니고 졸업했지.
이매방이란 독특한 예명은 중국의 경극배우 매란방의 영향을 받아서 지어진 듯 합니다. 북경에 있는 매란방에게서 춤을 배우기도 하셨다는 데, 어떤 연유로 춤을 배우시게 된 건지.

북경에 누님이 살았는데, 폭이 크고 활달한 사람이예요. 3, 4 학년 방학 때 누님의 소개로 북경에 가서 매란방 학원에서 배웠죠, 매란방의 조교가 가르치고 매란방은 가끔 코치만 했지. 춤은 여성끼가 좀 있어야 하는 데, 얘가 여성끼가 있어 싹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매란방이 어떤 사람입니까. 중국에서 애들이 울다가도 매란방이 온다하면 울음을 그치는 경극배우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죠. 일본 천왕이 오라해도 네가 데리러 와도 내가 갈까 말까하다고 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죠. 매란방의 거처를 매란방궁이라고 했죠. 수많은 제자들이 모시고 보필하는 성, 화려한 무대를 내려오면 곧바로 애라샹을 타고 자기 궁으로 들어가 버렸지.
지금 내게 춤을 가르친 매란방의 조교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요. 그때 장검무를 배우고, 등불을 물지게처럼 어깨에 매고 추는 춤, 꿩털을 가지고 퉁기면서 추는 춤 등을 배웠는데, 다 잊어버리고 장검무만 기억해냈지. 그래서 우리 음악을 쓰고 의상은 매란방의 의상과 비슷한데 중국냄새 안 나게 고쳤지. 내 이름은 매란방이 이름 중에서 란초 란(蘭)자를 빼고 예명으로 썼지. 매란방은 이름은 예쁘잖아. 23살에 작명가에게 갔더니 좋다고. 연극이나 배우는 안 어울려도 무용가로서는 격이 맞고 좋다고 하더구만, 이(李), 매(梅), 방(芳), 셋 다 꽃이기에 무용으로는 적격이라고 말야.
88올림픽 때 중국에 가니까 한국가지 말고 자기네에게 검무를 지도해 달라고 하더라고 자신들은 문화혁명 때 옛것들을 다 버리고 살라버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매란방에게 배웠다니까 달려들어서 검무라도 지도해 달라한 거지, 혹시 이것들이 나를 북한으로 데려갈려는가 싶어서 깜짝 놀라 도망치다시피 와버렸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도 뭐도 춤 외에는 난 아무것도 몰라.
예전에는 학습이 탄탄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첫 무대를 서게 되는 것으로 아는데 공식적인 데뷔의 첫 무대를 상기하신다면

임방울씨가 목포 역전에서 <명인명창대회>를 열었지. 그런데 그때 승무를 추는 박봉선씨가 바빠서 광주에서 못 내려왔어. 박봉선이라고 있잖아. 박초선의 언니, 박영구선생의 손녀지. 조지훈씨가 그 누님이 하는 승무를 보고 승무 시를 지은 거야. (필자 :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조지훈씨의 승무는 1939년 김은호씨의 그림을 보고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사정을 자신이 쓴 '시의 원리'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아니예요. 조지훈씨는 박봉선 누님의 승무를 보고 쓴 거야. 내가 그걸 봤어요. 지금 자네처럼 그렇게 춤추는데 와서 적고 그랬어요. 조지훈씨는 내가 대한항공 10주년으로 외국공연 갈 때 단장으로 갔으니까 그때도 친숙히 그렇고 했어요. (필자: 예, 알겠습니다.)
하여튼 <명인명창대회>에 막이 올라가면 승무부터 올라가는데. 그래서 목포 권번에 이대조에게 부탁을 한 거지. 그때 목포에서 승무는 김연술 누님이 잘했고 성산호도 잘했어, 그런데 모두 바빴어. 민간의 회갑잔치에서 승무니 검무를 추거든. 목포는 시니까 그런 행사가 많았어. 모두 거기를 가고 사람이 없어. 선생님이 "규태야 목포역전에 가설극장 한 달 간 하는데 네가 나가면 어떠냐" 그러기에, 펄쩍 뛰며, "의상도 장삼도 없고 악사도 없는데..." 그랬더니 "걱정마라, 그대로 추면 된다." 그래서 연수누님의 남색 입고 췄다니까. 그것이 첫무대인 거지.
응 그리고 배구자가 대련에 온 적이 있어. 나 소학교 4학년 때. 정포의 보관극장에서 한 일주일 정도를 공연을 했었지. 그때 북경 살던 누님이 마침 시댁인 정포에 와 있을 때였어. 누님이 한국에서 종합예술단이 왔다고 해서 나를 극장에 데려 간 거지. 그리고 분장실에 가서 배구자에게 애가 동생인데 목포권번에서 춤 배웠고 춤을 춘다고 나를 소개한 거지. 4학년 때지. 누님이 남자처럼 폭이 큰 사람이고 사교가였지. 그랬더니 배구자가 막간에 아동춤을 넣으면 재밌겠다 생각해서 춤을 공연할 때 춤을 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요새말로 즉흥적인 '입춤'을 추었지 쾌자를 입고, 양악밴드에 맞추어 '노들강변'이든가 '양산도'든가 해서 춤을 추었지. 1978년 조지훈씨가 단장이 되어 대한항공 10주년 기념 공연을 갈 때, 하와이 공항에 갔더니 빨간 봉투를 동생 배한라 편에 보냈더라고 언니가 옛날 생각나서 보낸다고 몸이 안 좋아 직접 나오지는 못하고.
선생님이 춤을 배우고 나서 공업학교를 마치고 난 때는 당시 일제 말이었는데, 그리고 해방 그리고 전쟁, 가파르게 흘러간 시간이고 가장 뜨거운 나이였을 텐데 그때의 활동을 설명해주시죠.

열아홉에 일본 해군으로 진해에 가서 훈련을 받았어,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너무 힘들고 맞지를 않어. 그래서 삼 개월 만에 동료 둘과 도망을 나왔지. 산꼭대기로 도망을 갔는데, 진해 시내가 뒤집어 졌지. 우리를 잡으려고. 맨발로 부산으로 동래 온천장에서 소리 가르치는 강창범, 최장술 형님을 만나서 여비를 얻어서 목포를 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중선배를 타고 비금도로 가서 숨었어. 그렇게 섬에 꼼짝 않고 박혀 있는데, 해방되기 몇 일 전 일본군인들이 삽과 총을 바다에 던지더라고. 자기들끼리는 무슨 연락을 받은 게지. 우리는 섬이라 알 도리가 있어야지. 그래서 해방된 후 이틀 후 알아서 목포로 나왔지. 오니까 그간 우리 때문에 소동이 말도 아니었더라고.
해방되고는 목포 권번에 나갔지. 위로 선배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동기들 가르치기도 하고 그랬지.
그러다 해방 후 삼년이나 됐을까. 전라남도 경찰국에서 주관으로 선무공작반에 들어갔지. 그래서 전라남도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지.(필자 : 이것을 전쟁 후라고도 하는데, 선무공작반이라는 이름과 당시 상황으로 보아 1948년 여순반란 이후 흉흉한 남도의 민심을 달래려는 의도로 조직된 단체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목포에 있다가 만났지. 그래서 당시 목포에 예술하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공산군이 점령해서 무용연맹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물러간 후 대구에가 태평로의 육군본부 군예예술대에 들어갔다. 소대별로 나누어져있었는데, 1소대장이 황해, 2소대장이 연극배우 이영일, 3소대장이 허장강이었는데, 각 소대별로 활동을 달리 했는데, 그중 내가 속한 1소대는 대도시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한 것이지. 그때는 쑈무용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양악 밴드에 맞추어 내가 만들어 춤을 추고했지.
선생님의 이력은 지금의 무용가와 같이 어느 극장에서 언제 무슨 공연을 하였다로 말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가령, 유랑의 <명인명창대회>라든가, 국극단과의 협연 등이 주 이력일텐데, 주로 학원을 경영하면서 활동하셨습니다. 그 학원의 이력이 선생님의 춤 이력의 중요한 점일 것 같습니다.

군예대에서 나와서 군산으로 가서 영화동에서 처음 학원을 열었지. 그리고 임방울 씨와 단체를 하다가 영주동에서 해체되자 부산에 머물러 활동하게 됐어. 이왕손이 6·25 때 피난한 가옥을 빌려서 학원을 했지. 그러다 1954년 무렵 서울로 올라가서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연구소를 했어. 그때는 신익희씨의 딸 신영균씨와 손잡고 종로5가 동일 치과 옆에서 했지. 이때가 내 초기 제자들로 한순호, 한순서, 김진홍, 이경록 등이 배웠지. 사실 서울에서 신익희씨가 출마했을 때 꿈이 컸지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지. 그때 내가 돌아가신 것을 알아서 그 집에 가서 아버님 돌아가셔서 지금 신문의 호외가 돈다고 그랬지. '워매' 하고 놀랬지. 약속이 있었거든. 외국도 가고 공연도 하고 꿈이 컸었는데, 낙담을 하고 광주로 갔지요. "에이 그냥 광주로 가자." 그랬더니 권번으로 6,7명이 따라왔어요. 광주 권번에 방이 많으니까 끓여먹고 자고 한 이년인가 있다가 부산으로 갔지요. 부산에서 한 5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 구자훈, 김미혜, 홍민혜 등이 배웠고. 1961년 서울 서대문으로 갔지. 교남동에서 그때 전황의 딸 전미례가 4,5살 때 배우로 왔었지. 김자순, 이현옥 등이 배웠고 회현동으로 자리를 옮겨서 학원을 하다가, 1966년에는 비원 앞에서 박귀희, 김소희씨와 함께 학원을 운영했는데 두 분은 빠져나가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나에게 운현궁을 1400만원에 불하를 맡으라고 해서 포기했지. 결국 덕성여대에서 가져갔지. 그러니까 1968년까지 한 3년 한 거지. 그러다가 일본공연을 가게 되었어. 노래하는 고복수씨와 김정구씨와 함께 신향원이란 요리집에서 술을 먹다 난간에서 떨어져서 뼈가 부러져서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고베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와서 부산에 머물면서 학원을 했지. 그러다가 77년에 서울에서 마포, 그리고 지금 여기는 97년에 양재동 지금 이곳으로 옮겨 여기서 하고있지. 한 7년 되네, 아휴 징하지.
숱한 공연을 하시다가 제대로 된 큰 무대를 가지게 된 것은 부산에서 인 것으로 압니다. 그때 첫 창작공연을 하신 것인데, 어떤 공연이었습니까.

부산에서 박혀서 살자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했었지. 그러다가 1976년 문예진흥원에서 창작 진흥기금을 받아서 첫 번째 창작공연을 했지.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공연을 했는데, 일부에는 검무에 내 제자들, 그리고 은방초, 최현, 김진걸, 정명숙, 한영숙이 출연했고 나는 삼현승무를 추었지. 제2부가 창작이었는데, 제목은 신검(神劍)으로 남도굿의 사설을 무용극으로 구성한 것인데,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춤으로 한 것이지 우리의 예술이 다 굿에서 나왔잖아요. 그것을 마치고 서울에 정병호가 불러서 YMCA에서 <승무>와 <살풀이 춤>을 발표했지. 그리고 나중에는 <명무전>공연에서 춤을 추고 그렇게 점점 알려졌었지.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로 지정을 받고 <살풀이 춤>은 1990년도에 받으셔서 당대 최고의 전통춤꾼이 되셨고 아마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우리 전통 춤의 생존하는 교과서가 되셨습니다. 우리 춤은 어떻게 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춤의 특징이 정중동(靜中動)이 생명이라 했잖아. 무식한 말로 발레나 현대에는 정(靜)자가 없어, 전부 동(動)자 일색이야, 그래서 전부 숫놈이고 전부 대낮처럼 밝어. 정(靜)자는 달밤이야. 내 춤에는 남녀가 있잖아. 서구의 춤이 박력있고 강하고 활발하고 선이 크고 그렇지. 그러나 요염함이 없잖아. 일본 춤이나 우리 춤은 정중동이 생명이다. 나는 유달리 양우선을 강조하니 곡선이 유다르지, 양우선은 손이 올라가지만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손이 내려오면 손끝은 위를 향하는 그런 거지. 그리고 내 춤은 방안 춤으로 무대화되어서 사선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향해 추는 것이지. 사방으로 손님이 있으니까 모두를 보면서 하지. 옛날 춤 그대로 하지. 내 춤은 공간이 좁아. 무대에 2층 무대를 만들고 병풍을 세워서 무대를 좁히지 무대가 넓잖아 그러면 춤이 죽지.
<살풀이 춤>은 일종의 즉흥무여, 전라도 말로 맘 꼴리는 대로 추는 것이여, 자기 멋으로 한으로 아량으로 머리로 추는 즉흥무라고 그것이 오래되니까, 문화재로 지정이 된 거지. 민속춤에서는 <승무>와 <검무>가 민속무용에서는 대작품이죠. <승무> 안에 장단이 6번 변하잖아 염불장단.... 타령 도드리, <검무>에도 마찬가지로 장단이 변하는데 보통 법무로 말하는 것이고 민속무용에서 춤의 상왕이지. <승무>, <검무> 그것을 권번에서 다 떼고 나면 즉흥무여, 문화재를 받아서 즉흥무라고, ‘살풀이’라고 해서 무속에 비해서 이야기하는데, 아니여 원래 살풀이장단이 있어 원래 6박인데 사이사이 빼서 4박으로 추는데, 계면조이고 슬프고 시나위제로 하잖아. '살풀이'는 곡이 비성곡 슬프잖아. 부여잡은 수건을 때에 따라, 애인, 부인, 자식, 부모를 상상해서 상대를 만들어서 춤 출 때도 있고, 웃길 때는 정(靜)자를 죽이고 동(動)자에 신경을 쓰지 그럼 손님이 좋지, 나는 될 수 있으면 동(動)자보다는 정(靜)자여 여자가 있어야 생명 있지. 자식을 낳고, 밤이 있어야 잠을 자고 그러잖아. 내 춤은 춤, 장단, 감정 삼합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음악이 생명이거든. <살풀이 춤>은 '과거를 잘못을 후회하거나 옛날 친구가 그립다' 이런 구체적인 감정을 상상하며 춤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춤추다가 살풀이 수건에 음악이 찌르면 춤은 가라앉고 낮으면 춤이 올라가고 그렇지. 장단대로 바로 따라가면 우습게 되지. 내가 어릴 때 소리공부를 했어요. 귀명창이거든. 그래서 음악을 알고 추니까 춤이 나오지.
그렇다면 <승무>는 어떻게 추어야합니까. 아마도 선생님이 여러 가락을 합하여 선생님만의 독특한 것으로 창안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춤가락은 선생님가락이지, 내 춤은 왜 독특하잖아. 여성기가 정중동은 유달리 내가 딱딱 박아서 하니까 춤이 돋보이지. 선생들은 '덩'에 이렇게(손끝에 힘을 들이지 않는 흉내) 손을 올린다면 난 박력을 넣어서 강하게 떵하니 춤이 하늘과 땅으로 변하지, 원래 선생에게 받은 것은 가락이 길고 많은데, 간략하게 좋은 걸 빼서 만든 거지, 그러니까 추던 가락이 반복이 없지. 배우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어렵겠지.
내가 선생들에게 들은 말을 자네에게 인계하자면 전라남도 옥과출신 신방초 선생이 <승무>의 시초로 지금으로 보면 400년의 역사가 된다고 하더구만. 문헌에는 없고 전하는 말로,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지. 나는 그 신방초의 12대다, 13대다, 8대, 7대, 어떤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 그분의 집안 내력이 무속이지, 재인청이란 이야기지. 무속이라면 인간차별로 멸시했단 말이지, 하지만 다 예술가들이었지. 목포의 눈물 부른 이난영 누님도 다 따지자면 다 그런 집이지. 나도 따지면 그렇게 봐야지.
염불은 그야말로 얼른 말하자면, 내 표현그대로 하자면 그 속세에서 떠나서 죄를 사해주십사는 표현이 염불이고 그런 감정이고 그런 표현을 해야 격이 맞고 장단이 발라지면 감정이 변하지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굿거리 즐겁다. 북은 자기 하소연이지 다치고는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나중에 합장하고 인사하지. 나는 그렇게 감정을 잡고 하거든. 그리고 승무는 박력을 많이 넣어야 해. 고이 접어서 나비일레라 뿌릴 때는 하늘이 낮다 할 정도로 뿌리고 내릴 때는 사뿐이, 고요하면서도 뼈 안에 박력이 있어야지 그것이 생명이고 장삼처리가 좋아야 하는 것이지.
지금에 와서 생을 돌이켜 반추해본다면 춤을 선택한 삶이 어떻습니까.

나는 후회는 안 해. 이름이 나든 안나든 춤을 원했고, 선생님의 춤이 내 정신에 들어와 버렸지, 아마 살아있으면 120~30살 정도지. 예술은 척도가 없잖아. 자부심, 만족은 썩는 것이지. 얼, 역사, 피 모두가 춤에 결부되어 있지. 그런데 요즘 춤은 그렇지 않어. 옛 노인이라면 요즘 춤을 보고 간질병이라 하겠지. 색을 구별해서 추라 이거지. 내 춤은 변형시키지 말고 노랑은 노랑, 거멍은 검정.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방송 중에 문화센타에서 춤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투스텝 쓰리스텝 그러더라고 엄연히 우리나라 말 비디딤, 쓰리스텝 까치발, 지꾸자꾸 잉에걸이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 여자를 가르친 학교 무용과 교수가 몰랐다 이거지. 사실 앞으로 춤이 걱정입니다.
선생은 요즘 등받침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마침 등받침이 컸던 모양이다. 재봉틀을 가져와 가위를 잘라내고 재봉을 한다. 안경너머의 눈이 영민하게 빛난다. 바늘자국이 촘촘하게 박힌다. 저렇게 한땀한땀 춤을 엮었다. 마치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청자 상감을 새기듯 허공에 춤을 인화한 것이다. 선생의 긴 세월을 간단한 이력으로나마 정리하기가 힘들다. 이제 지나간 시간이 한꺼번에 어른거리는 나이 때문에 연도가 불확실하다. 훗날 보다 명확해지기를 바라며 우선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926년 전남 목포시 대성동에서 출생
1932년 여섯살 무렵 할아버지 뻘 되는 이대조에게 목포권번에서 춤을 사사
1934년 북교소학교 일학년 때 만주 대련의 정포소학로 전학. 5학년에 다시 목포로 옴
1941년 열다섯에 목포 역 앞 임방울 단체의 가설무대에서 첫 무대가짐
1944년 해군에 징용되어 훈련도중 도망 비금도로 도피 해방을 맞음
1950년 전시에 군에대에서 공연 활동을 함
1953년 전후 단체생활을 군산, 서울, 광주, 서울 부산으로 옮겨다니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함
1977년 서울 YMCA 대강당에서 <이매방 전통무용공연>을 통해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함
1978년 프랑스 렌느 민속에술제 한국대표팀으로 참가
1982년 <한국명무전>에서 살풀이춤 공연
1984년 이매방 무용공연 50주년 기념 <북소리> 공연
1985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2> 공연
1986년 '86아시안 게임 축하공연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
1988년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참가공연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인정
1990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 3> 공연 / 이매방의 호 우봉을 따 '우봉전통춤보전회'가 결성됨
1994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4> 공연
1995년 이매방 무용인생 70년 무용대 공연
1996년 용인대학교 무용과 대우교수 임명
2003년 세계무형문화재 초청 시리즈 여형 중 <승무>와 <살풀이 춤>공연 등 활발한 전수와 공연 활동중이다.


인터뷰 진행, 정리 진옥섭

팔순 기념공연 준비하는 한국춤 명인 이매방 선생
 
2007-01-18 03:00 2007-01-18 09:34
100년 넘은 재봉틀 “요즘도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떠다가 오전 한두 시까지 바느질을 합니다.” 한국춤의 명인 이매방 선생이 팔순 기념공연을 앞두고 제자들의 무대 의상을 손수 짓고 있다. 그는 “바느질이 잘못되면 금방 터지고, 옷의 색깔이나 모양이 잘못 나오면 춤을 잘 춰도 때깔이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이 재봉틀은 100년도 넘은 거예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왔던 것이지.”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빌라. 한국춤의 명인 우봉 이매방(80) 선생은 햇빛이 따스하게 비껴드는 거실 베란다 창문 옆에 놓여 있는 미제 ‘싱거(SINGER)’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늘 공연을 앞두고 제자들의 의상과 소품을 손수 준비해 온 노()무용가는 요즘도 오전 한두 시까지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다.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무대는 무서운 곳이란 생각이 들어. 요새 애들은 소꿉장난같이 생각하지만 예인()에게 무대는 사형대나 마찬가지야. 무대를 준비하려면 춤만 잘 추면 되는 게 아니라 바느질부터 음악준비까지 다 잘해야지. 내가 죽으면 이런 거 직접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매방 선생 사진더보기



25일 오후 7시 반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인 이매방 선생의 팔순기념 공연 ‘무선()님께 드리는 헌무()’가 열린다. 승무, 기원무, 입춤, 살풀이춤, 장검무, 승천무, 대감놀이, 사풍정감, 3북, 5북 등 예인으로 살아온 선생의 춤 인생을 집약하는 무대다.
5년 전 위암에 걸려 위의 3분의 2를 절제해야 했던 선생은 60kg의 몸무게가 44kg까지 줄어든 상태. 긴 병치레로 쇠약해진 그는 “목욕탕에 있으면 해골이 서 있는 것 같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죽으면 이틀 만에 뼈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고 씁쓰레해한다.
이번 공연은 원래 제자들이 스승에게 헌정하는 무대로 기획됐다. 그러나 그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무대에서 ‘승무’와 ‘입춤’을 추기로 했다.

○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선생은 인터뷰를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제자들의 연습을 지도했다. 굿거리장단에 맞춰 장삼자락을 휘날리는 그의 춤사위에선 암 투병을 했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춤 지도를 마친 선생은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매섭게 호령한다.
“내가 죽으면 다들 제 맘대로 춤출 놈들이야. 그렇게 배우려고 하다가도 문화재 ‘이수증’만 타면 더는 안 오는 놈들이 하나 둘이 아니야. 나처럼 평생 외길로 춤만 생각해도 될까 말까 한데. 다들 어떻게 하면 박수를 받을까, 명예를 얻을까, 돈을 벌까 궁리만 해. 그런 정신 갖고 무슨 춤을 춘다고 해.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운 법이여.”
‘욕쟁이’로 소문난 선생은 말문이 터지자 거침이 없었다. 그는 무형문화재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비난했다.
“일본 사람이 그러더라고. 한국에는 무슨 무형문화재가 그리 많으냐고. 정말 너무 엉터리 가짜 문화재가 많아. 어떻게 춤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선생의 춤 보유자로 지정받느냐고. 어느 게 진짜 문화재야? 얼마 전에는 한 스님이 내게 두세 달 배우고 가더니 ‘승무’로 지방에서 문화재로 지정받더군. 차라리 무형문화재 제도를 없애는 게 낫지. 나도 내놓고.”

○ 한국춤의 아름다움은 정중동

“한국춤의 아름다움은 ‘정중동()’에 있어. 우리 몸에서 배꼽이 중()이지. 배꼽 밑은 정()이고, 위는 동()이지. ‘정’은 여자고, 밤이고, 음이라면, ‘동’은 남자고, 낮이고, 양이야. 인생에 낮만 필요한 게 아니야. 밤이 있어야 술도 마시고, 섹스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잠도 자고 하지.”
그는 한국 전통춤의 멋은 기와지붕이나 한복의 선처럼 곡선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그는 “직선의 움직임이 기본인 서양춤이나 최승희류의 신무용은 명랑하고, 활발하고, 밝고, 박력은 있지만, 한국 전통춤에서 볼 수 있는 뭔가 찌르르하고, 요염하고, 이상야릇한 기운이 없다”고 말했다.
“‘승무’도 500여 년 전에 신방초 선생이 창작한 춤이에요. ‘장검무’는 매란방에게 배운 춤사위를 바탕으로 제가 창작했고요. 한국춤의 발전을 위해 창작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우리의 전통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입니다.”

■ 이매방 선생은b

1927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해 7세 때부터 목포 권번에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대조 선생에게서 승무, 박용구 선생에게서 승무북, 이창조 선생에게서 검무를 배워 춤의 바탕을 닦았다. 1960년대 ‘3고무, 5고무, 7고무’ 등을 창안해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84년 옥관문화훈장, 1998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무용가인 부인 김명자(65·승무살풀이춤 전수조교) 씨와의 사이에 딸 현주(33·승무살풀이춤 이수자) 씨를 두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박수연 회장, 12일 발표회
[미주한국일보] 2009년 09월 10일(목) 오전 03:08   가| 이메일| 프린트
한국전통예술협회 회장인 무용가 박수연씨(사진)가 ‘이수자’ 선정을 기념하는 발표회를 뉴욕시립대(CUNY) 대학원센터에서 12일 개최한다. 박수연 회장은 지난 6월에 동포 무용가로는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이매방류 승무춤의 ‘이수자’로 선정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박 회장의 승무 공연과 함께 월드 뮤직 전문가인 하주용 박사가 승무와 기생 문화에 관한 흥미 있는 강연회도 진행될 예정이다.
승무춤을 통한 이번 이수자선정은 지난 200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선정에 이은 박 회장의 두번째 타이틀이다. 박 회장은 인간문화재 ‘이매방’ 명인으로 부터 살풀이춤과 함께 승무춤을 지난 10여년간 사사했다.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한다. ▲장소: Elebash Recital Hall, The Graduate Center, CUNY. 34st & 5 Avenue. <박원영 기자>
내달 1일 한·중·일 합동 현악 공연-경향신문
작성일 : 2006-10-23 작성자 : 관리자





실(絲)로 만든 악기로 한·중·일 3국이 만나는 연주회가 열린다. 중앙대(총장 박범훈)와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이사장 신현택)은 다음달 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아시아의 실소리’라는 제목으로 한·중·일 합동 현악공연을 펼친다.

3국의 연주자 156명이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동아시아 현악기의 대향연이다. 1993년부터 열리고 있는 아시아 문화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행사. 이례적으로 대학 총장이 지휘를 맡은 박범훈 총장은 “이번 합동연주회를 아시아 문화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에서 오는 고토(箏) 연주자 안도 마사데루(도쿄예술대학 교수), 중국의 구정(古箏) 연주자인 조우왕이 가장 눈에 띄는 연주자들이다. 고토와 구정은 우리 가야금과 흡사한 악기들이다. 이밖에 일본 무용연맹 하나야기 순토 부회장, 중국 인민해방군 가무단의 안무자인 덩린 등이 내한해 행사에 참여한다.

모두 3부로 짜여진 이번 합동공연의 1부는 각국의 전통 실내악이 연주되는 무대다. 3국의 합동 현악연주는 1부의 후반부에서 펼쳐진다. 북한지역에서 많이 불려온 민요 ‘돈돌나리’, 일본의 민요 ‘사쿠라’, 중국 민요 ‘모리화’를 3국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한다.

2부에서는 한·중·일의 합동무용인 ‘하늘다리’가 공연된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아시아 3국의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창작무용이다. 안무를 맡은 무용가 채향순씨는 “칠월칠석과 견우·직녀 이야기의 보편성을 통해 세 나라가 하나로 만나자는 염원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공연의 마지막은 현악합주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단장을 지낸 박범훈 총장과 현재 단장인 김재영씨의 지휘로 펼쳐진다. 연주곡은 25현 가야금을 위해 창작된 가야금 협주곡 ‘가야송’. 김일륜이 가야금을 연주한다. (02)820-6013~4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