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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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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공의 수공으로 춤을 새긴, 우봉(宇峰) 이매방(李梅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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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 아픔은 옹이가 된다. 그 옹이는 관솔 자국으로 남는다. 송판을 들여다볼라치면 하얀 속살들이 관솔 주변에서는 급류처럼 촘촘한 결을 이루며 가파르게 지나간다. 양재동 자택에서 만난 춤꾼 이매방 선생의 삶이 그랬다. 춤에서 보이듯이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에 몰아치는 세파는 참으로 가파른 것이었다. 모든 것이 현대를 향하고 화려한 치장으로 변해갈 때 올곧은 전통춤을 부여안고 무용계의 변방에서 걸어온 세월, 그 사이 여기저기 옹이가 촘촘히 박혔다. 그래서 말이 거칠고 화급하고 우격다짐 같은 육담과 패설이 있다. 그러나 나무의 멋이 옹이의 문양이듯, 상처는 삶의 문양이 되었다. 상처를 품은 조개가 진주를 게워내듯, 옹이는 송판의 화룡정점이 된다. 생의 매듭을 풀 듯 춤을 추었고 그래서 맺어지고 풀리는 그것은 응어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춤에서 특히 두드러지던 맺음과 풀림의 기법, 삶에서 터득되었기에 각별한 것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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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욱 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남자가 춤을 춘다는 것에 대한 편견이 말이죠. 그럼에도 춤을 선택하셔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춤꾼의 한 분이 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 춤의 과정은 어떠셨는지요.
나는 1927년 5월 5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어. 목포시 양동 24번지고 호적으로는 대성동 18번지로 되어 있지. 어릴 적에 집안 부모님들이 흥이 많은 분들이었는데, 마침 우리 옆에 진도 조도에서 온 함국향이란 분이 있었어. 국악을 하고 창을 하신 기생이라고 왜 있잖어 예술 예(藝)자, 기녀 기(妓)자, 예기(藝妓)지. 그분이 어머니에게 권한거지. 내가 어릴 적에는 규태거든 이규태. "애는 하는 짓이 춤을 가르치면 싹수가 있겠어요" 하면서 어머니를 부추긴 거지. 자랄 때 곡식 될 것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러잖어. 애기 때부터 팽이치고 제기차고 남자답게 논게 아니고 계집애처럼 노니까 아버지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늘 호통이었는데, 어머니는 그저 귀여운 막내니까 철없고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데 그런다고 하며 나를 두둔했어요. 세 살 때 어머니 경대에서 누이들의 저고리 입고 치마 두르고 내 입방구로 혀를 쯧쯧 차면서, 거기 맞추어 춤을 추드라는 거여, 커서 누님들한테 들은 소리지, 요새말로 징그럽지 우습고. 그러다 보니 결국 춤의 외길로 나간 것이지. 함국향씨가 권번으로 안내할 때, 그때가 일곱 살 무렵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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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은 당시 우리 전통예술이 학습 유통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당시 목포권번의 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당시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6칸 기와집이었어요. 지금도 감나무 대추나무는 살아있던데, 집은 많이 변화했지. 당시 소리선생은 오수암선생이 있었지. 김소희 누님이 짝사랑하고 그랬지. 그래서 내가 심부름도 하고 그랬어. 춤으로는 이대조 선생이 있었지. 그때 목포권번 대단했지요. 장월중선, 함동정월, 김강남월 등이 오고갔지. 그때 권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여섯 있다던데, 모두 다 활동은 그만 두었어. 80이 넘었으니 죽을 날만 기다리겠지. 한번은 목포극장 건너편 죽동 쪽 포교당 절 앞에다 가설무대를 지어 가지고 무대가 꾸며졌는데, 그때 이대조 선생이 한성준씨 보고 "이 눔아 너는 경성 올라가서 출세했다. 기가 막힌 고까(옷) 입고..."하고 놀리더라고. 한성준씨는 명주 활비당으로 바지저고리 두루마기를 빼입고 우리 선생인 이대조 선생은 돈이 없어서 무명베로 입고 있었고, 그러니 사람 나면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때 우리 이대조 선생은 이동백씨의 소리에 북을 쳤고, 한성준씨는 이화중선의 장구를 치드만 이화중선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물을 가득 담아서 바가지를 없어놓고 육자배기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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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 춤을 전한 가장 중요한 분은 이대조 선생으로 할아버지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는지 춤의 스승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내 스승 이대조 선생은 친할아버지가 아니라 항렬로 할아버지뻘이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인물이 참으로 미남이었지. 허우대도 좋고, 춤 잘 추고 소리 잘하고, 특히 소리 장단이 아주 좋아요. 그리고 상모놀음도 일품이었는데, 상쇠놀음 특히 부포를 노는 윗놀음이 기가 막혀요. 딱 챙기고 나가면 좋아요, 일품이지요. 가까운 할아버지뻘이지만, 오히려 엄했어요. 권번의 기강이 있었으니까. 나는 애당초 소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목이 낮은 바닥청이라, "천상 너는 춤이다" 그래서 춤을 선택하게 된 거지. 그리고 나는 방학이면 여기저기를 다니며 배웠어요. 이번 여름에는 광주권번을 가볼까, 전주권번에 가볼까. 내가 목포권번에서 춤 배운다는 것을 연줄 연줄로 다 아니까. 춤의 욕심 때문에 여기저기를 다닌 것이지. 박영구 선생은 광주 권번에서 만났어요. 그분 고향은 화순 능주 쪽이지. 선생은 발을 좀 절어요. 애기 때 도랑을 건너다가 허리를 젖혀 척추를 다쳐서 다리를 절었지. 춤가락도 좋은 데가 있지만 주로 북을 배웠지. 북가락이 색다른 게 있고 일품이었어요. 이창조 선생에게 검무도 배웠죠. 그분은 장성분이지. 당시 학채(수업료) 낼만한 형편도 못되어 어깨너머로 배우고 선생은 그런 내가 귀여우니까 가르쳐주고 그랬지. 뿐만 아니지, 좀 잘 한다 내가볼 때 좋다 하는 사람은 다 배우고 좋은 가락을 땄지. 전주권번에 가니까 정형인이 가르치더라고 그러나 내게는 안 맞아, 서울에서 한성준씨가 가르치는 것을 봤지 내게는 안 맞아. 그러나 이대조, 박영구는 정말 좋았지. 그러나 그분들은 지금 말해도 누군지 잘 몰라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지. 지금이나 그때나 서울 와야 출세하는 거여. 당시 선생은 목포를 헤어나지 못해서 그런 거지. 왜정 때 방학 때 한번씩 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잠을 잤지.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춤추는 이들도 있었어요. 권번과 비슷해요. 지금 보니까 집이 적어, 그때는 큰 것 같았는데. 당시 출입하는 이들은 모두다 나보다는 선배고, 동료 중에는 한일섭, 정철호, 장영찬 이런 사람들이 오가고 그랬지. 또 한성준이 한성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지. 지금의 동아일보 본사 건물 옆 소방서 자리에 있었지. 안비취, 한산월, 한영숙, 강선영, 강산월이 배우고 있더라고. 당시 서울에서 춤 가르치는 사람이 당시에는 한성준 밖에 없었어요. 참 여러 군데를 다녀본 거지. 서울은 방학 때 한번씩 큰맘 먹어야 올라왔지. 방학 때, 열 몇 시간 덜커덕거리며 역이란 역은 다 들리고 오는 기차 타고 목포에서 서울 올라오면 차비가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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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은 당시로서는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아닌데 소학교에 언제 입교하였고 정식 학업은 학교는 어디까지 공부를 하셨나요.
학교는 목포북교소학교와 목포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왔지. 원래 1926년생인데, 호적이 한해 늦게 되어 1927년생이 되었고 소학교는 남보다 1년 늦게 들어갔지. 권번에서 춤을 배우다 학교를 간 거지. 학교를 파하면 권번에서 춤을 배웠지. 원래는 소리를 하고 싶었는데, 상청이 질러지지 않아서 작파하고 춤만 추었지. 그래도 웬만한 남도민요는 다 하고 토막소리도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춤에 거름이 되었지. 그러다 1학년 2학기 때 만주 대련으로 가족이 이사를 했지. 형님이 운수업으로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모신 것이지. 그래서 나도 그곳으로 전학을 갔어요 1학년 2학기 때. 만주 대련의 정포(靜浦)소학교, 일본말로 시즈우라, 일본학교였고 한국인이라고는 나와 가네시로란 아이와 둘 뿐이었지. 재작년 동경에서 공연 갔다가 주간잡지에 이매방이란 이가 만주 대련의 정포 소학교의 동창생이 궁금하다 살아있으면 연락하라 했더니, 참 빨라요. 300여명이 모였어요. 63년 만에 만난 것이지. 사람은 늙으면서 다 변하지만 눈동자가 안 변해요. 그것을 보고 찾는 거지. 정포 소학교를 다니면서도 여름과 겨울의 방학 때는 목포에 와서 춤을 배웠지. 그러다 5학년 2학기 때 다시 목포 북교소학교로 와서 1년을 다니고 졸업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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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방이란 독특한 예명은 중국의 경극배우 매란방의 영향을 받아서 지어진 듯 합니다. 북경에 있는 매란방에게서 춤을 배우기도 하셨다는 데, 어떤 연유로 춤을 배우시게 된 건지.
북경에 누님이 살았는데, 폭이 크고 활달한 사람이예요. 3, 4 학년 방학 때 누님의 소개로 북경에 가서 매란방 학원에서 배웠죠, 매란방의 조교가 가르치고 매란방은 가끔 코치만 했지. 춤은 여성끼가 좀 있어야 하는 데, 얘가 여성끼가 있어 싹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매란방이 어떤 사람입니까. 중국에서 애들이 울다가도 매란방이 온다하면 울음을 그치는 경극배우로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죠. 일본 천왕이 오라해도 네가 데리러 와도 내가 갈까 말까하다고 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죠. 매란방의 거처를 매란방궁이라고 했죠. 수많은 제자들이 모시고 보필하는 성, 화려한 무대를 내려오면 곧바로 애라샹을 타고 자기 궁으로 들어가 버렸지. 지금 내게 춤을 가르친 매란방의 조교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요. 그때 장검무를 배우고, 등불을 물지게처럼 어깨에 매고 추는 춤, 꿩털을 가지고 퉁기면서 추는 춤 등을 배웠는데, 다 잊어버리고 장검무만 기억해냈지. 그래서 우리 음악을 쓰고 의상은 매란방의 의상과 비슷한데 중국냄새 안 나게 고쳤지. 내 이름은 매란방이 이름 중에서 란초 란(蘭)자를 빼고 예명으로 썼지. 매란방은 이름은 예쁘잖아. 23살에 작명가에게 갔더니 좋다고. 연극이나 배우는 안 어울려도 무용가로서는 격이 맞고 좋다고 하더구만, 이(李), 매(梅), 방(芳), 셋 다 꽃이기에 무용으로는 적격이라고 말야. 88올림픽 때 중국에 가니까 한국가지 말고 자기네에게 검무를 지도해 달라고 하더라고 자신들은 문화혁명 때 옛것들을 다 버리고 살라버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매란방에게 배웠다니까 달려들어서 검무라도 지도해 달라한 거지, 혹시 이것들이 나를 북한으로 데려갈려는가 싶어서 깜짝 놀라 도망치다시피 와버렸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도 뭐도 춤 외에는 난 아무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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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학습이 탄탄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첫 무대를 서게 되는 것으로 아는데 공식적인 데뷔의 첫 무대를 상기하신다면
임방울씨가 목포 역전에서 <명인명창대회>를 열었지. 그런데 그때 승무를 추는 박봉선씨가 바빠서 광주에서 못 내려왔어. 박봉선이라고 있잖아. 박초선의 언니, 박영구선생의 손녀지. 조지훈씨가 그 누님이 하는 승무를 보고 승무 시를 지은 거야. (필자 :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조지훈씨의 승무는 1939년 김은호씨의 그림을 보고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사정을 자신이 쓴 '시의 원리'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아니예요. 조지훈씨는 박봉선 누님의 승무를 보고 쓴 거야. 내가 그걸 봤어요. 지금 자네처럼 그렇게 춤추는데 와서 적고 그랬어요. 조지훈씨는 내가 대한항공 10주년으로 외국공연 갈 때 단장으로 갔으니까 그때도 친숙히 그렇고 했어요. (필자: 예, 알겠습니다.) 하여튼 <명인명창대회>에 막이 올라가면 승무부터 올라가는데. 그래서 목포 권번에 이대조에게 부탁을 한 거지. 그때 목포에서 승무는 김연술 누님이 잘했고 성산호도 잘했어, 그런데 모두 바빴어. 민간의 회갑잔치에서 승무니 검무를 추거든. 목포는 시니까 그런 행사가 많았어. 모두 거기를 가고 사람이 없어. 선생님이 "규태야 목포역전에 가설극장 한 달 간 하는데 네가 나가면 어떠냐" 그러기에, 펄쩍 뛰며, "의상도 장삼도 없고 악사도 없는데..." 그랬더니 "걱정마라, 그대로 추면 된다." 그래서 연수누님의 남색 입고 췄다니까. 그것이 첫무대인 거지. 응 그리고 배구자가 대련에 온 적이 있어. 나 소학교 4학년 때. 정포의 보관극장에서 한 일주일 정도를 공연을 했었지. 그때 북경 살던 누님이 마침 시댁인 정포에 와 있을 때였어. 누님이 한국에서 종합예술단이 왔다고 해서 나를 극장에 데려 간 거지. 그리고 분장실에 가서 배구자에게 애가 동생인데 목포권번에서 춤 배웠고 춤을 춘다고 나를 소개한 거지. 4학년 때지. 누님이 남자처럼 폭이 큰 사람이고 사교가였지. 그랬더니 배구자가 막간에 아동춤을 넣으면 재밌겠다 생각해서 춤을 공연할 때 춤을 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요새말로 즉흥적인 '입춤'을 추었지 쾌자를 입고, 양악밴드에 맞추어 '노들강변'이든가 '양산도'든가 해서 춤을 추었지. 1978년 조지훈씨가 단장이 되어 대한항공 10주년 기념 공연을 갈 때, 하와이 공항에 갔더니 빨간 봉투를 동생 배한라 편에 보냈더라고 언니가 옛날 생각나서 보낸다고 몸이 안 좋아 직접 나오지는 못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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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춤을 배우고 나서 공업학교를 마치고 난 때는 당시 일제 말이었는데, 그리고 해방 그리고 전쟁, 가파르게 흘러간 시간이고 가장 뜨거운 나이였을 텐데 그때의 활동을 설명해주시죠.
열아홉에 일본 해군으로 진해에 가서 훈련을 받았어,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너무 힘들고 맞지를 않어. 그래서 삼 개월 만에 동료 둘과 도망을 나왔지. 산꼭대기로 도망을 갔는데, 진해 시내가 뒤집어 졌지. 우리를 잡으려고. 맨발로 부산으로 동래 온천장에서 소리 가르치는 강창범, 최장술 형님을 만나서 여비를 얻어서 목포를 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중선배를 타고 비금도로 가서 숨었어. 그렇게 섬에 꼼짝 않고 박혀 있는데, 해방되기 몇 일 전 일본군인들이 삽과 총을 바다에 던지더라고. 자기들끼리는 무슨 연락을 받은 게지. 우리는 섬이라 알 도리가 있어야지. 그래서 해방된 후 이틀 후 알아서 목포로 나왔지. 오니까 그간 우리 때문에 소동이 말도 아니었더라고. 해방되고는 목포 권번에 나갔지. 위로 선배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동기들 가르치기도 하고 그랬지. 그러다 해방 후 삼년이나 됐을까. 전라남도 경찰국에서 주관으로 선무공작반에 들어갔지. 그래서 전라남도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지.(필자 : 이것을 전쟁 후라고도 하는데, 선무공작반이라는 이름과 당시 상황으로 보아 1948년 여순반란 이후 흉흉한 남도의 민심을 달래려는 의도로 조직된 단체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목포에 있다가 만났지. 그래서 당시 목포에 예술하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공산군이 점령해서 무용연맹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물러간 후 대구에가 태평로의 육군본부 군예예술대에 들어갔다. 소대별로 나누어져있었는데, 1소대장이 황해, 2소대장이 연극배우 이영일, 3소대장이 허장강이었는데, 각 소대별로 활동을 달리 했는데, 그중 내가 속한 1소대는 대도시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한 것이지. 그때는 쑈무용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양악 밴드에 맞추어 내가 만들어 춤을 추고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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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이력은 지금의 무용가와 같이 어느 극장에서 언제 무슨 공연을 하였다로 말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가령, 유랑의 <명인명창대회>라든가, 국극단과의 협연 등이 주 이력일텐데, 주로 학원을 경영하면서 활동하셨습니다. 그 학원의 이력이 선생님의 춤 이력의 중요한 점일 것 같습니다.
군예대에서 나와서 군산으로 가서 영화동에서 처음 학원을 열었지. 그리고 임방울 씨와 단체를 하다가 영주동에서 해체되자 부산에 머물러 활동하게 됐어. 이왕손이 6·25 때 피난한 가옥을 빌려서 학원을 했지. 그러다 1954년 무렵 서울로 올라가서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연구소를 했어. 그때는 신익희씨의 딸 신영균씨와 손잡고 종로5가 동일 치과 옆에서 했지. 이때가 내 초기 제자들로 한순호, 한순서, 김진홍, 이경록 등이 배웠지. 사실 서울에서 신익희씨가 출마했을 때 꿈이 컸지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지. 그때 내가 돌아가신 것을 알아서 그 집에 가서 아버님 돌아가셔서 지금 신문의 호외가 돈다고 그랬지. '워매' 하고 놀랬지. 약속이 있었거든. 외국도 가고 공연도 하고 꿈이 컸었는데, 낙담을 하고 광주로 갔지요. "에이 그냥 광주로 가자." 그랬더니 권번으로 6,7명이 따라왔어요. 광주 권번에 방이 많으니까 끓여먹고 자고 한 이년인가 있다가 부산으로 갔지요. 부산에서 한 5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 구자훈, 김미혜, 홍민혜 등이 배웠고. 1961년 서울 서대문으로 갔지. 교남동에서 그때 전황의 딸 전미례가 4,5살 때 배우로 왔었지. 김자순, 이현옥 등이 배웠고 회현동으로 자리를 옮겨서 학원을 하다가, 1966년에는 비원 앞에서 박귀희, 김소희씨와 함께 학원을 운영했는데 두 분은 빠져나가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나에게 운현궁을 1400만원에 불하를 맡으라고 해서 포기했지. 결국 덕성여대에서 가져갔지. 그러니까 1968년까지 한 3년 한 거지. 그러다가 일본공연을 가게 되었어. 노래하는 고복수씨와 김정구씨와 함께 신향원이란 요리집에서 술을 먹다 난간에서 떨어져서 뼈가 부러져서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고베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와서 부산에 머물면서 학원을 했지. 그러다가 77년에 서울에서 마포, 그리고 지금 여기는 97년에 양재동 지금 이곳으로 옮겨 여기서 하고있지. 한 7년 되네, 아휴 징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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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공연을 하시다가 제대로 된 큰 무대를 가지게 된 것은 부산에서 인 것으로 압니다. 그때 첫 창작공연을 하신 것인데, 어떤 공연이었습니까.
부산에서 박혀서 살자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했었지. 그러다가 1976년 문예진흥원에서 창작 진흥기금을 받아서 첫 번째 창작공연을 했지.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공연을 했는데, 일부에는 검무에 내 제자들, 그리고 은방초, 최현, 김진걸, 정명숙, 한영숙이 출연했고 나는 삼현승무를 추었지. 제2부가 창작이었는데, 제목은 신검(神劍)으로 남도굿의 사설을 무용극으로 구성한 것인데,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춤으로 한 것이지 우리의 예술이 다 굿에서 나왔잖아요. 그것을 마치고 서울에 정병호가 불러서 YMCA에서 <승무>와 <살풀이 춤>을 발표했지. 그리고 나중에는 <명무전>공연에서 춤을 추고 그렇게 점점 알려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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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로 지정을 받고 <살풀이 춤>은 1990년도에 받으셔서 당대 최고의 전통춤꾼이 되셨고 아마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우리 전통 춤의 생존하는 교과서가 되셨습니다. 우리 춤은 어떻게 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춤의 특징이 정중동(靜中動)이 생명이라 했잖아. 무식한 말로 발레나 현대에는 정(靜)자가 없어, 전부 동(動)자 일색이야, 그래서 전부 숫놈이고 전부 대낮처럼 밝어. 정(靜)자는 달밤이야. 내 춤에는 남녀가 있잖아. 서구의 춤이 박력있고 강하고 활발하고 선이 크고 그렇지. 그러나 요염함이 없잖아. 일본 춤이나 우리 춤은 정중동이 생명이다. 나는 유달리 양우선을 강조하니 곡선이 유다르지, 양우선은 손이 올라가지만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손이 내려오면 손끝은 위를 향하는 그런 거지. 그리고 내 춤은 방안 춤으로 무대화되어서 사선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향해 추는 것이지. 사방으로 손님이 있으니까 모두를 보면서 하지. 옛날 춤 그대로 하지. 내 춤은 공간이 좁아. 무대에 2층 무대를 만들고 병풍을 세워서 무대를 좁히지 무대가 넓잖아 그러면 춤이 죽지. <살풀이 춤>은 일종의 즉흥무여, 전라도 말로 맘 꼴리는 대로 추는 것이여, 자기 멋으로 한으로 아량으로 머리로 추는 즉흥무라고 그것이 오래되니까, 문화재로 지정이 된 거지. 민속춤에서는 <승무>와 <검무>가 민속무용에서는 대작품이죠. <승무> 안에 장단이 6번 변하잖아 염불장단.... 타령 도드리, <검무>에도 마찬가지로 장단이 변하는데 보통 법무로 말하는 것이고 민속무용에서 춤의 상왕이지. <승무>, <검무> 그것을 권번에서 다 떼고 나면 즉흥무여, 문화재를 받아서 즉흥무라고, ‘살풀이’라고 해서 무속에 비해서 이야기하는데, 아니여 원래 살풀이장단이 있어 원래 6박인데 사이사이 빼서 4박으로 추는데, 계면조이고 슬프고 시나위제로 하잖아. '살풀이'는 곡이 비성곡 슬프잖아. 부여잡은 수건을 때에 따라, 애인, 부인, 자식, 부모를 상상해서 상대를 만들어서 춤 출 때도 있고, 웃길 때는 정(靜)자를 죽이고 동(動)자에 신경을 쓰지 그럼 손님이 좋지, 나는 될 수 있으면 동(動)자보다는 정(靜)자여 여자가 있어야 생명 있지. 자식을 낳고, 밤이 있어야 잠을 자고 그러잖아. 내 춤은 춤, 장단, 감정 삼합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음악이 생명이거든. <살풀이 춤>은 '과거를 잘못을 후회하거나 옛날 친구가 그립다' 이런 구체적인 감정을 상상하며 춤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춤추다가 살풀이 수건에 음악이 찌르면 춤은 가라앉고 낮으면 춤이 올라가고 그렇지. 장단대로 바로 따라가면 우습게 되지. 내가 어릴 때 소리공부를 했어요. 귀명창이거든. 그래서 음악을 알고 추니까 춤이 나오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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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승무>는 어떻게 추어야합니까. 아마도 선생님이 여러 가락을 합하여 선생님만의 독특한 것으로 창안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춤가락은 선생님가락이지, 내 춤은 왜 독특하잖아. 여성기가 정중동은 유달리 내가 딱딱 박아서 하니까 춤이 돋보이지. 선생들은 '덩'에 이렇게(손끝에 힘을 들이지 않는 흉내) 손을 올린다면 난 박력을 넣어서 강하게 떵하니 춤이 하늘과 땅으로 변하지, 원래 선생에게 받은 것은 가락이 길고 많은데, 간략하게 좋은 걸 빼서 만든 거지, 그러니까 추던 가락이 반복이 없지. 배우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어렵겠지. 내가 선생들에게 들은 말을 자네에게 인계하자면 전라남도 옥과출신 신방초 선생이 <승무>의 시초로 지금으로 보면 400년의 역사가 된다고 하더구만. 문헌에는 없고 전하는 말로,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지. 나는 그 신방초의 12대다, 13대다, 8대, 7대, 어떤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 그분의 집안 내력이 무속이지, 재인청이란 이야기지. 무속이라면 인간차별로 멸시했단 말이지, 하지만 다 예술가들이었지. 목포의 눈물 부른 이난영 누님도 다 따지자면 다 그런 집이지. 나도 따지면 그렇게 봐야지. 염불은 그야말로 얼른 말하자면, 내 표현그대로 하자면 그 속세에서 떠나서 죄를 사해주십사는 표현이 염불이고 그런 감정이고 그런 표현을 해야 격이 맞고 장단이 발라지면 감정이 변하지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굿거리 즐겁다. 북은 자기 하소연이지 다치고는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나중에 합장하고 인사하지. 나는 그렇게 감정을 잡고 하거든. 그리고 승무는 박력을 많이 넣어야 해. 고이 접어서 나비일레라 뿌릴 때는 하늘이 낮다 할 정도로 뿌리고 내릴 때는 사뿐이, 고요하면서도 뼈 안에 박력이 있어야지 그것이 생명이고 장삼처리가 좋아야 하는 것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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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생을 돌이켜 반추해본다면 춤을 선택한 삶이 어떻습니까.
나는 후회는 안 해. 이름이 나든 안나든 춤을 원했고, 선생님의 춤이 내 정신에 들어와 버렸지, 아마 살아있으면 120~30살 정도지. 예술은 척도가 없잖아. 자부심, 만족은 썩는 것이지. 얼, 역사, 피 모두가 춤에 결부되어 있지. 그런데 요즘 춤은 그렇지 않어. 옛 노인이라면 요즘 춤을 보고 간질병이라 하겠지. 색을 구별해서 추라 이거지. 내 춤은 변형시키지 말고 노랑은 노랑, 거멍은 검정.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방송 중에 문화센타에서 춤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투스텝 쓰리스텝 그러더라고 엄연히 우리나라 말 비디딤, 쓰리스텝 까치발, 지꾸자꾸 잉에걸이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 여자를 가르친 학교 무용과 교수가 몰랐다 이거지. 사실 앞으로 춤이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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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요즘 등받침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마침 등받침이 컸던 모양이다. 재봉틀을 가져와 가위를 잘라내고 재봉을 한다. 안경너머의 눈이 영민하게 빛난다. 바늘자국이 촘촘하게 박힌다. 저렇게 한땀한땀 춤을 엮었다. 마치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청자 상감을 새기듯 허공에 춤을 인화한 것이다. 선생의 긴 세월을 간단한 이력으로나마 정리하기가 힘들다. 이제 지나간 시간이 한꺼번에 어른거리는 나이 때문에 연도가 불확실하다. 훗날 보다 명확해지기를 바라며 우선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926년 전남 목포시 대성동에서 출생 1932년 여섯살 무렵 할아버지 뻘 되는 이대조에게 목포권번에서 춤을 사사 1934년 북교소학교 일학년 때 만주 대련의 정포소학로 전학. 5학년에 다시 목포로 옴 1941년 열다섯에 목포 역 앞 임방울 단체의 가설무대에서 첫 무대가짐 1944년 해군에 징용되어 훈련도중 도망 비금도로 도피 해방을 맞음 1950년 전시에 군에대에서 공연 활동을 함 1953년 전후 단체생활을 군산, 서울, 광주, 서울 부산으로 옮겨다니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함 1977년 서울 YMCA 대강당에서 <이매방 전통무용공연>을 통해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함 1978년 프랑스 렌느 민속에술제 한국대표팀으로 참가 1982년 <한국명무전>에서 살풀이춤 공연 1984년 이매방 무용공연 50주년 기념 <북소리> 공연 1985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2> 공연 1986년 '86아시안 게임 축하공연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 1988년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참가공연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 예능보유자로 인정 1990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 3> 공연 / 이매방의 호 우봉을 따 '우봉전통춤보전회'가 결성됨 1994년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4> 공연 1995년 이매방 무용인생 70년 무용대 공연 1996년 용인대학교 무용과 대우교수 임명 2003년 세계무형문화재 초청 시리즈 여형 중 <승무>와 <살풀이 춤>공연 등 활발한 전수와 공연 활동중이다.
인터뷰 진행, 정리 진옥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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