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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더화-천수이벤-리비아(까치호랑이)

그린페 2009. 9. 12. 10:18
"류더화 비밀결혼은 삼합회 협박 때문"
[조선일보] 2009년 09월 11일(금) 오전 11:31   가| 이메일| 프린트

23년 동안 교제해온 주리첸(43)과 작년에 비밀결혼식을 올리고도 이 사실을 숨겨 남자답지 않은 처신을 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온 홍콩 스타 류더화(劉德華·48). 그가 애인의 존재를 철저히 감춰온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동정을 사고 있다고 스포츠한국이 중화권 언론을 인용해 11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중국신문 등 중화권 언론은 10일 홍콩 연예계 소식통을 인용, 류더화가 자신을 노려온 암흑가(삼합회)의 위협에서 주리첸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짓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소개했다.
홍콩영화가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킬 당시 현지 영화산업은 삼합회에겐 ‘달러박스’였기 때문에 류더화는 그들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400만 홍콩달러를 들여 제작한 작품도 류더화가 주연을 맡으면 당장 두 배인 800만 달러의 판권료를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삼합회는 사람을 보내 류더화에 협조를 할 것을 요구하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지만 류더화는 ‘검은 거래’를 단호히 거부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한번은 두목이 갱영화에 나와달라는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조직원들이 몰려와 류더화의 머리에 네 자루의 권총을 들이대는 사태까지 빚어졌다고 한다.
삼합회는 계속 말을 듣지 않는 류더화에게 “당신의 애인이 사는 곳을 알고 있다”며 주리첸에 위해(危害)를 가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고, 주리첸의 신변보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류더화는 한층 조심하면서 삼합회의 말을 일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스포츠한국은 보도했다.
류더화가 중국 TV에 나가 삼합회 협박을 받은 일을 털어놓은 직후에는 조직원들이 주리첸에게 “입을 닫지 않으면 해치겠다”는 노골적인 경고도 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후 류더화는 애인이 언론과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움직였고 삽합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도 ‘독신선언’을 해야만 했다는 전언이다.
주리첸은 극비결혼한 사실이 지난달 뒤늦게 폭로된 뒤 류더화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자신을 지키려다가 고통을 당하게 됐다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폭력의 뒷골목에도 '공동체'는 존재한다
 
타이완 천수이볜 前총통 부부 종신형
[서울신문] 2009년 09월 12일(토) 오전 03:45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신문]재직 중 뇌물수수와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천수이볜(왼쪽·58) 전 타이완 총통이 11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부인 우수전(오른쪽)도 같은 혐의로 종신형이 선고됐으며, 아들 천즈중도 돈세탁 혐의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일가가 중형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날 타이베이 지방법원은 천 전 총통 부부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종신형과 함께 5억 타이완달러(약 187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법원 대변인 황춘민은 “천 전 총통은 타이완에 큰 피해를 끼쳤고 우 여사는 영부인으로서 부패 혐의에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종신형이 선고됐다.”고 밝혔다.
천 전 총통은 공모자와의 증거조작, 도주 등의 우려가 있다는 검사 측 주장이 받아들여져 지난해 12월부터 타이베이 교외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이번 재판에 천 전 총통과 그의 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법원 판결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판결을 거부하고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천 전 총통의 지지자 수백명은 법원 밖에 모여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천 전 총통은 재임기간(2000~2008년) 세금 315만달러(약 38억원)를 ‘특별기금’ 명목으로 횡령하고 국유지 협상 등과 관련해 최소 900만달러의 뇌물을 받아 스위스의 은행 등을 통해 세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전 총통은 그러나 비밀외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금을 쓴 것일 뿐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타이완의 독립을 주장, 중국과의 양안관계를 대결구도로 몰아갔다. 2008년 집권한 마잉주 현 총통은 양안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다. 천수이볜은 이번 판결이 마 총통의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마 총통과 사법부는 이번 판결은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타이완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천 전 총통의 주장을 일축했다.
외신들은 타이완 국민들이 천수이볜이 일정 부분 유죄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2008년 치러진 총선에서 민진당이 현재 집권당인 국민당에 패배한 원인으로는 양안관계 악화에 대한 우려 외에도 총통 가족의 부정부패가 거론됐다. 이미 자녀들이 거액의 재산을 해외에 은닉했다는 혐의가 임기 중에도 불거졌었다. 지난 1월에는 천즈중이 해외 돈세탁 혐의를 인정, 18억 7000만 타이완달러가량의 해외자금을 국고에 귀속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황제를 매료시킨 여인 왕소군

 중국에서는 4대미인 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때의 왕소군(王昭君), 위촉오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때의 양귀비(楊貴妃)를 든다.
 그런데 이들 네명의 공통점이라면 역사에 한결같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시는 오왕부차를 유혹하여 끝내 나라를 패망하게 하였으며, 왕소군은 흉노족에 끌려간 비련한 여인으로 묘사되며, 초희는 여포를 파멸로 몰고갔으며, 양귀비역시 당현종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게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이 과연 여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왕소군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국을 등지고 끝내 흉조족의 땅에서 쓸쓸하게 목숨을 거둔 가련한 여인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중국적인 관점에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녀가 흉노족땅에 끌려간 것이 불행한 일이었을까?

중국의 유명한 고전시인 이태백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昭君拂玉鞍
원제의 궁녀 소군, 치맛자락으로 구슬 안장 건드리듯..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빰이 우네

今日漢宮人
오늘까진 한궁의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부턴 오랑캐의 첩(妾)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등에 보이긴하지만, 그 내용은 600자 정도에 불과할 정도이다. 

 오히려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등으로 재창조되면서, 역사속의 왕소군(王昭君)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


불행했던 한여인

왕소군은  서한(西漢)말기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로도 잘알려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파를 매우 잘 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18세의 나이에 한(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궁녀가 된 여인도 수천여 명... 나라일도 운영해야 되었던 황제로서는 그 많은 여인들의 용모를 일일히 살펴볼 수 없었기에,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많은 궁녀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王昭君)은 집안이 빈천하여  뇌물을 바치지 못하였다. 이에 화가난 모연수(王昭君)는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러니 한원제의 눈에 그녀의 초상이 눈에 띌리 없었고, 그 후 왕소군은  5년간이나 궁녀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전혀 다른 곳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흉노족의 왕을 뜻함)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의 형 질지골도(支骨都)는, 동생이  선우가 된것과 친중국정책등에 반발하여 북흉노를 성립시켰다. 이때 한나라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呼韓邪)를 환대하자, 호한야(呼韓邪)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한나라는 흉노제국의 묵특선우와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전통적으로 황실여인들을 보내왔다. 흉노제국이 과거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궁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원제는 이런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호한야의 제안을 수락한 한 원제는, 호안야를 접대하기 위해 궁녀들중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한나라의 다채롭고 매력적인 문화를 보여주어, 그를 좀더  한문화에 동화시키고자하 하였던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호한야를 매혹시킨 것은 한나라의 호사스런 문화가 담긴 연회가 아니라, 황제의 총애를 한번도 받지 못한체 연회장의 무희로 나왔던 한궁녀였다. 바로 왕소군이었던 것이다.《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그녀는 후궁이 된 뒤 몇 년이 지나도 원제가 찾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흉노에게 출가하기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그녀를 보자 마자 호안야는 한원제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라, 저 궁녀들 중 한 명을 택해도 좋습니다."

가장 큰 고민거리중 하나인 황실공주 착출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니, 한원제는 즉시 호안야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호안야가 선택한 왕소군의 용모를그제서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한원제로서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데다 얼굴에 커다란 점까지 그려져 있지 않은가? 결국 모연수(毛延壽)는,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천하절색의 왕소군을 잃은 아쉬운마음까지 달랠 수 없었다. 결국 한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3일간 혼례를 연장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한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동안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날아가는 기러기도 날개짓을 잊고....



  3일 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昭君)에는 흉노족에 가서도 한나라를 빛내는 여인이 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王昭君)이 한나라의 수도 장안을 떠나던 날,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슬픈마음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王昭君)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흉노족은 미개한 북방민족이란 선입견이 당시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었고, 한나라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왕소군은 흉노족 여인이 된 다는 것 만으로 큰 불행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3일간의 동침은 오히려 한원제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흉노의 여인이 된지 3개월만에, 한 원제는 왕소군을 잊지 못하다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호한야역시 노쇠하였던 탓에, 둘 사이에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왕소군과 혼인 2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그런데 다음 혼인 상대자가 호한야의 장자 복주루(復株累)였다. 한나라의 문화에 익숙했던 그녀로서는, 친자는 아지지만 복주루의 여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복주루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복주루는 아버지의 모든 권한 심지어는 후궁들까지도 그대로 계승하게된다.

 흉노의 여인 왕소군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궁녀로 들어가서 5년간의 독수공방과 한원제와의 억지스런 3일밤, 과연 그기간 동안 그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만약 그녀가 계속 한나라에 있었다면, 끝내 평범한 궁녀중 한명으로 살다가 이름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흉노의 땅으로 간 것은,  행복과 자유 그리고 명성과 권력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 함께 말을 타고있는 복주루와 왕소군의 모습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 딸 둘도 낳으며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였지만, 왕소군의 나이 35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왕소군은 혼자 생활하였으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그녀의 사망연대를 왕망정권성립과 결부시켜, 그녀의 죽음역시 비극적인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왕망정권성립이 과연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가 있었을까? 후한서에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평생 궁녀로서 황제의 은총만을 바라는 삶보다는, 보다 자유로우며 주목받을 수 있는 흉노족의 삶을 그녀는 더 원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장성한 아들은 왕이되고 딸들은 모두 명문귀족집안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그 삶이 불행한 것인가? 또 그녀가 원하기만 하였다면 선우에게 간청하여, 고국에 한두번쯤은 방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진정으로 흉노족의 삶에 만족하였으며, 한나라에서보다 더 큰 행복과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또한 북방흉노족과 한나라 간의 평화관계를 상당기간 이어주었다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녀의 삶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뿐 아니라, 평화의 사절로서도 그이름 처럼 흉노의 땅에서 충분히 빛나는 삶을 산 것이다.

**** 왕소군 사후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유럽대륙의 흉노계열 국가로 알려진 헝가리의 선조가 바로 이들이라고 한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중국 내몽고 후허호터에 있는 중국4대미녀 중 한명인 왕소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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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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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화를 현대인이 쉽게 이해하고 대중 미술로 승화 되어지는데 노력하는중.

민화의 아름답고 해학적이며 서민적인것이 민화다. 그 대표가 까치호랑이를 떠울린다.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한편으론 까지는 서민이며 호랑이는 양반을 뜻하기도 한다. 하여 우리네 선조들을 이해 하는데 너무 재미있어 옛그림을 그리게 된다.
까치와 호랑이가 대화를 하는 그림에서 호랑이 눈을 보라. 어디 호랑이 처럼 기세 등등한 호랑이인가! 다정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듯 익살스러우며 정감있는 한국 호랑이 그림속에 한국인의 민족력이 담겨있어 외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우리 전통의 그림이 민화다. 이것이 민중민 그림화이다. 일본호랑이나 중국호랑이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이애란
(원로/중견작가)
작가보관함
까치호랑이


까치 호랑이 전통적인 한국의 까치호랑이다. 까치는 기쁨을 전하는 매체이고 호랑이는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도 함께하고있다,까치는 서민 민중이며 호랑이는 왕이며 양반이라고도  표현한다. 왕이 행복해 하는모습 등 여러가지로 해석을 할수있는것이 바로 우리민화인것이다. 벽사로  대문이나 문앞에  붙여 잡 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까치호랑이
이애란
700,000원
까치호랑이
이애란
300,000원
목단
이애란
300,000원
화조도
이애란
800,000원

 

작품 상세보기 : 고미술/민화 - 까치호랑이 [현재창]
까치호랑이. 까치 호랑이 전통적인 한국의 까치호랑이다. 까치는 기쁨을 전하는 매체이고 호랑이는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도 함께하고있다,까치는 서민 민중이며 호랑이는 왕이며 양반이라고도 표현한다. 왕이 행복해 하는모습 등 여러가지로 해석을 할수있는것이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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