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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기병대

그린페 2009. 8. 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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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열전 ]《 나폴레옹 기병대의 용장, 요아킴 뮈라( Joachim Murat ) 》

2009.08.14 14:21 | ☆Military★ |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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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킴 뮈라
  "내가 한 외모 좀 하지. 안 그렇나?"
요아힘 파이퍼 SS 중령  그야말로 소총과 포병, 창이 뒤섞이던 최대의 전쟁 중 하나인 나폴레옹 전쟁기는 여러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요아킴 뮈라에 대비될만한 전쟁영웅은 누가 있을까?
  필자는 그와 이름이 같은 무장 친위대의 요아힘 파이퍼 SS 중령을 으례 떠올린다.
  물론 마을 우체국장 아들과 바트 퇼츠에 소재한 친위대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어지간해서는 두 사람 모두 공통점이 많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야 말 다했고 돈주고 계급을 구입해 장군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만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서 웰즐리, 나폴레옹의 해군을 격파한 넬슨 제독은 둘째치더라도 게프하르트 블뤼허나 전쟁론의 저자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 등 그야말로 숱한 영웅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져갔다.
  그 중 나폴레옹의 휘하 원수들 중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한 명 있으니 바로 요아킴 뮈라가 되겠다.
  사실 그는 나폴레옹의 휘하 원수들 중 이렇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인데 오죽하면 두산 백과사전에조차 이렇게 간편하게 언급될 정도니 말이다.
  "프랑스의 군인, 원수. 기병대의 가장 우수한 지휘자로서 중요한 싸움에서 나폴레옹을 따라 활약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였을 때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와 교섭을 벌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발췌 : 두산백과사전 ━
  무엇보다 그의 이름인 요아킴( Joachim )을 보는 순간 퍼싱의 전쟁영화 이야기를 드나드는 방문자 분들 중 으례 한 인물을 떠올릴 것이다.
  요아힘 파이퍼( Joachim Peiper )!!
  육군 원수와 친위대 중령을 비교하는 것은 뭔가 급이 안맞겠지만 두 지휘관 모두 대단히 저돌적이며 일단 전투에 임하면 날카로운 눈빛과 치밀함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아서 웰즐리점이 꽤 많다.
  "돈주고 계급사서 승진한 점은 일반 직업군인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영국군에서 확실하게 승진하려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니까!"
  약관의 나이에 장성의 길에 들어선 아서 웰즐리, 이른바 초대 웰링턴 경
  하지만 그가 이렇게 쾌속 진급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거액의 금액을 지불하고 '별'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에서 대위 계급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4억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고 하니( 월급은 484만원 정도? ) 직업 군인하기가 참으로 힘들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요아힘 파이퍼 SS 중령에 비견될 정도라 할 수 있는 요아킴 뮈라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냐? 하면 1767년 마을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난 뮈라는 1787년 21세에 기병대에 입대해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원사로 진급했다.
  그러한 뮈라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눈에 든 것은 바로 1793년에 일어난 반혁명 무장봉기인 방데미에르의 반란이었다.
  반란 진압 임무를 맡은 나폴레옹은 파리 시내로 밀려들어오는 폭도들의 기세 앞에 그야말로 대략난감 그 자체였지만 이 때 뮈라가 이끄는 기병대가 신속하게 파리 교외에 비치되어 있던 대포들을 확보하여 나폴레옹에게 인계함으로써 상황이 역전되었다.
  뮈라가 넘겨준 대포 덕분에 나폴레옹은 이들을 신속하게 고층 건물 옥상에 거치하는 기막힌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폭도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 공으로 뮈라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요아킴 뮈라와 나폴레옹의 인연은 이 진압으로 한층 두터워졌고 이후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원정에 동행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 참전한 뮈라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그 중 그의 명성을 드날린 것이 바로 1799년 7월 25일의 아부키르 기병 돌격전이었다.
제1차 아부키르만 전투
아부키르만 전투
  명백한 프랑스 함대의 참패로 끝이 난 제1차 아부키르만 전투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아부키르 전투에서의 뮈라
  1799년 7월 25일, 제2차 아부키르만 전투에서 과감한 기병돌격을 감행해 투르크군 2만명을 궤멸시킨 요아킴 뮈라
  그는 전형적인 기병대 스타일이었고 그의 기병돌격은 대부분 승리로 끝이 났다.
브뤼메르 쿠데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끝난 이후 영국 함대는 기세좋게 나폴레옹 함대를 격멸했던 아부키르만에 세이드 무스타파가 지휘하는 투르크군 20,000명을 상륙시켜 교두보를 구축했다.
  프랑스군으로서는 이 골칫거리를 격멸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공세를 감행했지만 2중으로 구성된 견고한 방어선으로 인해 1차 방어선만 돌파한 상태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제 무능한 당신들은 필요없어~! 조용히 정계에서 물러나시지!!"
  이집트 원정 이후 11월 9일, 마침내 총재 정부를 붕괴시켜버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군사 쿠데타
  이 쿠데타에서도 뮈라는 기병 대신 척탄병들을 이끌고 500명에 달하는 의원들을 제압함으로써 다시금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이 견고한 방어선을 단숨에 격파한 것이 바로 요아킴 뮈라였던 것!
  방어선의 투르크 병사들이 기어나와 방치된 프랑스군 부상병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전우들은 치를 떨었지만 이를 기회로 활용한 것이 바로 뮈라였던 것이다.
  "돌격~!! 나를 따르라~!!!"
  뮈라는 과감한 기병 돌격을 감행해 투르크군이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바로 제2차 방어선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순식간에 이뤄진 이 돌격으로 인해 투르크군 지휘관인 세이드 무스타파도 졸지에 뮈라의 포로가 되어버렸고 투르크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제1차 전은 영국 함대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2차전은 육군 강국 프랑스의 완승이었던 것요아킴 뮈라
  "비켜라 졸개들아! 뮈라님이 나가신다~!!"
  전장에서의 뮈라의 활약은 워낙 대단해 그가 지휘한 기병돌격은 대부분 성공했고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패하기 직전에서도 승세를 역전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뮈라의 활약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한 나폴레옹은 11월 9일,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붕괴시키고 500인 의원들을 해산시켜버리는 과정에서 뮈라는 기병대 대신 척탄병들을 인솔하여 이 임무를 신속하게 수행함으로써 다시금 그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뮈라의 활약으로 나폴레옹은 마침내 그의 여동생 캐롤린 보나파르트를 뮈라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1800년 )
  이처럼 뮈라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는 30대를 보냈지만 그에게는 적잖은 결함이 있었다.
  우선 뮈라는 기병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매우 탁월했지만 정작 고위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작전 지휘 능력과 신중함은 상당히 결여되예나 전투에서의 뮈라어 있었다.
  "장비나 관우도 내 용맹은 못 따라올 걸?! 모두 목숨이 붙어있는한 무조건 돌격하라!!"
  예나 전투에서 호쾌한 기병돌격을 지휘하고 있는 요아킴 뮈라
  그는 군사적인 지식이나 전략, 병참, 행정에서는 무능함을 드러냈을지는 몰라도 이처럼 전투에 임하면 공격제대의 최선두에서 지휘한 용장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지시를 받으면 신속하게 치고 나가 적들이 1만명이건 10만명이건 상관없이 저돌적인 기병 돌격을 감행해 그들을 여지없이 박살내었지만 정작 단신으로 단위 제대를 지휘하고 관리하는 분야에서는 여지없이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제대로된 정규 사관학교 교육을 이수한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보기에 결코 그를 장성으로 임명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그가 기병대를 지휘하면 일단 승리의 관문을 열어주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에게 보병이나 포병 대신 기병 병과만을 담당하도록 조치했고 이 조치는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요아킴 뮈라의 기병대가 있는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요아킴 뮈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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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프랑스 경기병대  기병대만을 전담한 뮈라는 일단 행정적인 면이나 작전 분야는 참모들에게 사실상 일임하고 지휘에만 전념했는데 적어도 그의 참모나 부하들이 뮈라가 아무리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아닐지라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는 그의 용맹성이 한몫을 차지했다.
  ◀ "뮈라 장군님이 지휘하는한 우리는 최강이다! 모두 장군님을 따르라~!!"
 
요아킴 뮈라가 지휘하는 동안 프랑스 기병대는 주변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기병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었다.
  비록 두뇌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머리가 안되면 몸으로라도 때우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던 것
  뮈라는 전투에 임함에 있어 위장이나 기도비닉 유지, 은폐·엄폐와 같은 현대전의 생존방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군인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을 명예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적 기병의 칼에 맞아 죽더라도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법!"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뮈라는 항상 전장에 나설 때마다 기병대의 최선두에 섰고( 요즘 사단장들이 이렇게 나섰다가는 참영국군 기병대모들이 뜯어말리면서 난리가 나려나? ) 어지간해서는 적 저격수나 포병의 집중 목표가 되지 않기위해 화려한 복장을 삼가하던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당당하게 휘황찬란한 군복을 입고 기병도를 휘두르며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을 목표로 돌격을 지휘했던 것이다.
  "뮈라의 기병대에게 당한 복수다. 어디 한번 견뎌봐!!"
  프랑스 포병대와 보병을 덮친 영국군 기병대가 무차별로 학살을 감행하고 있다.
  요아킴 뮈라가 기병대를 지휘하지 않을 경우 벌어지는 참사 중 하나였다.
  적이나 아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 없겠지만 이게 전장에서 보여준 심리적인 효과가 컸는지 그가 이끄는 기병 돌격은 대부분 성공했고 나폴레옹은 패할 뻔한 위기 상황 하에서도 뮈라의 맹렬한 돌격 덕분에 역전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프랑스 기병대
  "돌격 앞으로~!!"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던 아일라우 전투에서 요아킴 뮈라의 지휘 하에 돌격하는 프랑스 기병대
  뮈라는 나폴레옹 전쟁기 중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 중 하나를 아일라우 전투에서 감행했다.
아일라우 전투
뮈라의 기병대  2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혈전이었던 아일라우 전투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뮈라의 활약으로 간신히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퍼싱의 전쟁영화 이야기에서는 그 중 나폴레옹 전쟁기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 중 하나인 아일라우 전투를 선정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워낙 맹렬하게 돌격하다 보니 사실상 쌩얼을 노출하는 센스( ? )를 발휘했던 뮈라의 활약으로 나폴레옹이 승전한 이후 이듬해 1807년 2월, 프랑스군은 동프로이센의 아일라우에서 러시아군과 격돌했다.
  사실 아일라우 전역은 처음부터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끝날 뻔한 전투였다.
  예나 전투 당시에도 익숙치 못한 동유럽의 지형으로 적잖은 고전을 한 판국에 이 아일라우 일원은 아예 제대로된 지도조차 없던 문자 그대로 프랑스군에게 생소한 지역이었던 셈
  여기에 적을 찾기 위해 문자 그대로 병력을 분산해버려 41,000명에 불과한( 너희가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다케다군이냐? ) 프랑스군의 눈 앞에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 63,000명이 대포 460문을 앞세운 채 모습을 드러내었고 졸지에 전황은 전투 개시 2일째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밀려들었고 방어선이 붕괴되어 졸지에 나폴레옹 본인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나폴레옹은 즉시 뮈라를 호출했다.
  "더 두고볼 것 없다! 이반(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성 이름으로 주로 경멸조의 호칭이다 ) 녀석들의 종심을 뚫고 들어가 박살내 버려!!"죽음의 돌격이 시작되는 순간!
 
앞서 기술한대로 일단 나폴레옹이 정확한 명령을 내려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는 뮈라의 용맹은 바로 여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좋아! 가자~!! 이반 놈들아! 이 뮈라님이 나가신다~!!"
 
매서운 바람이 살결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치러진 전투였지만 뮈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아일라우 전투는 천재적인 기병 지휘관인 뮈라에게도 난제였는데 우선 그가 지휘할 기병이 무려 11,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이었다( 요즘처럼 무전기가 있지도 않은 시대였으니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그렇지만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떻게든 승리해야 했다.
  그리고 뮈라에게 있어 전투는 무조건 돌격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는데 그는 11,000명의 기병들을 80개 제대로 재편성해 이들을 둘로 나누었다.
  그 다음은 맹렬한 돌격이었는데 우선 뮈라의 기병대는 러시아 보병대를 관통한 다음 적 보병들의 집중 사격을 동프로이센의 거센 안개와 바람을 이용해 피하는 기염을 토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프랑스 기병대  여기에 다시금 기병대를 정비해 제2차 돌격을 감행해 러시아 보병대를 휩쓸어버림과 동시에 프랑스군의 2배가 넘던 460문에 달하는 러시아군 포병대 진지까지 휩쓸어버렸다.
  보로디노 전투( 1812 ) 당시 프랑스 기병대의 대규모 돌격도 요아킴 뮈라가 지휘했다.
  순식간에 11,000명에 달하는 기병대의 대규모 돌격을 받아 정신이 없던 러시아군으로서는 포병대까지 초토화되어버려 공세가 사실상 곤란해졌고 이 와중에 뮈라의 기병대 역시 1,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었지만 돌격은 성공했다.
  때마침 이렇게 뮈라의 기병대가 러시아군의 총공세를 저지해준 덕분에 프랑스군의 증원부대가 전장에 도착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반격을 명령했고 마침내 베니히센 장군은 퇴각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은 각각 2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나폴레옹은 하마터면 참패로 끝날 뻔한 전투를 뮈라의 활약으로 승리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요아킴 뮈라는 나폴레옹의 주요 전투 중 기병 돌격을 대부분 지휘하는 맹활약을 펼쳤고 1812년 9월 7일의 보로디노 전투에서도 과감한 기병 돌격을 감행해 용명을 떨쳤다.
보로디노 전투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프랑스 기병대
  이 기병 돌격은 비록 라이프치히나 아일라우 전투에 비해 규모가 작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규모로 이뤄졌고 이 돌격을 지휘한 인물 역시 뮈라였다( 혼자서 대규모 기병 돌격을 다 해먹은 셈이다 )
나폴레옹의 근위 기병대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나폴레옹과 뮈라는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워털루 전투 
그렇지만 뮈라의 말년은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워털루 전투에서 몰락하고 만 프랑스 기병대
  만일 이 기병돌격을 뮈라가 지휘했다면 전투의 최종 승패를 떠나 전황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1812년 보로디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막대한 병력 손실 외에도 프랑스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전열을 정비한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말았다.
  이 때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히고 연합군에 붙었는데 연합군 입장에서는 천부적인 기병 지휘관인 뮈라의 재능이 탐이 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전혀 함량미달인데다 한번 배신한 자는 또다시 배신한다는 법칙에 따라 결국 그의 유일한 지위였던 나폴리의 왕위마저 박탈당하는 신세에 놓였다.워털루 전투에서의 영국 기병대 돌격
  결국 뮈라는 세인트 엘바섬에 유배되어 있던 나폴레옹을 찾아가지만 비겁한 배신자인 그를 나폴레옹이 만나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결정이 의외로 큰 손실로 다가왔는데 하필이면 나폴레옹이 세인트 엘바섬을 탈출해 다시금 권력을 회복하면서 부터였다.
  나폴레옹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을 주축으로한 연합군이 다시금 프랑스로 진군했고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마는데 이 때 기병대의 지휘를 뮈라가 맡았더라면 전황이 또다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사실상의 유랑자 신세가 되어버린 뮈라는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로 이주했다가 칼라브리아섬에서 나폴리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총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나이 49세, 한때 나폴레옹 기병대의 용장이었던 명성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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