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자와 중국의 식인습성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 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저며서 말린 고기), ‘자’(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포,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 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 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 로서 매를 맞은 후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논어의 향당편을 보면 공자님의 밥상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온다. 가히 내용과 형식, 실천을 중요시한 공자답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공자가 '싫어하지 않으셨다'는 '膾'는 고기육(肉=月)변이 들어갔듯 생선회라기보다는 육회를 의미한다. 조와 기장이 사대부들의 주식이었고 흰 쌀밥은 매우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취급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볼때, 공자는 이 육회를 '싫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별미로 즐겼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膾'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쇠고기로 만든 육회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자 다음을 읽어보자. [나의 추천 글]
사 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ㅡ주나라 이전의 왕조ㅡ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의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인 '해', 저며서 말린 고기인 '포(脯)', 구운 고기인 '자(炙)'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자, 눈치가 빠른 블로거들은 알아챘으리라 생각한다. 공자가 즐겨 먹었다는 육회는 바로 사람고기였던 것이다. 공자는 이 '해'가 없이는 식사를 안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가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져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지자 공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나.
이럴 수가, 인의와 예의를 중요시했던 공자가 사람고기를 먹었을리가 없다..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식인문화는 중국에서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근대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정사(正史)에만 220여 차례 기록되어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러한 식인은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거나 충성심이나 효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행되기도 했는데, 급기야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었으며 송대에서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인육 요리책까지 출판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나타나 있다.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에는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 사회에 만연한 식인의 사회상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 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 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