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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장학회
그린페
2009. 7. 22. 01:07
십시일반 장학금이 52억 서천이 ‘깜짝’

2006년 참여 붐 일어
군수는 매달 100만원 내놓고
제휴기업 63곳·회원 2200명
낙전이체에 부조금도 보태
충남 서천은 보령과 전북 군산 사이에 있는 작은 군지역이다. 이 곳은 우리 역사에서 한번도 중심이 되거나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인 장항제련소의 높은 굴뚝이 랜드마크였던 이 땅에 새로운 기부 문화가 뿌리 내려 6만여 군민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고 있다.
군민들의 희망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서천사랑장학회의 ‘장학금 100억원 모으기’ 사업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장학금 얘기만 나오면 서천군민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묻어난다. 10년 묵은 꿈을 곧 이룰 것이라는 기쁨 때문이다.
서천사랑장학금은 지난해 말로 총 모금액이 50억원을 넘어섰다. ‘50억원을 모았는데 100억원을 못 모으랴’ 싶어 웃음이 절로 난단다. 21일 현재 6개 통장에는 52억9천만원이 들어 있다. 이 장학금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99년이다.
“서천에 뭐가 있슈? 사람이라도 키워 고향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마음에서 장학금 모금운동을 벌였쥬.”
서천사랑장학회 나우찬 총무이사는 “시작할 때 2억원 정도 모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1천여명이 참여해 5억원을 모았다”고 10년 전의 열기를 전했다. 모금 초기에 장학회를 향한 군민들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그 뒤 몇년 동안 기금이 넉넉하게 모이지는 않았다.
장학금 붐이 일어난 것은 장학회가 2차 군민회원 모집에 나선 2006년부터다. 마침 한산모시문화제, 전어축제, 광어축제, 꼴갑(꼴뚜기와 갑오징어)축제가 활발해지면서 주민과 상인들이 얻은 수익의 일부를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나선 것이다.
나소열 서천군수가 취임 직후부터 월급에서 매달 장학금으로 1백만원씩을 내놓고 있다는 것도 이때 군민들에게 알려졌다. 그가 처음 군수에 당선된 2002년 “장학금 100억원을 모아보자”고 제안하자 “젊은 군수가 꿈같은 얘기를 한다”며 설마하던 군민들은 “우리가 해보자”라며 힘을 보탰다.
6월 말 현재 매달 기금을 내는 정기회원은 1200명, 지역기업 등 제휴회원은 63개사에 이른다. 여기에 애·경사 등 가정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비용을 아껴 출연하는 비정기회원이 1000여명을 넘어서면서 지난해에는 순수한 기금 모금액만 13억여원에 달했다. 서천군청 기금업무 담당 이은정씨는 “2~3년 사이 기금이 눈덩이 불어나듯 늘었다”며 “지난해 50억원을 넘어서자 지역 직장인들 사이에 1만원 이하 낙전 장학금 이체운동도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군 전체에 장학금 모으기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정기회원인 이온숙(주부·서천군 한산면)씨는 “장학금 100억원을 만들자는 목표를 이루려고 형편되는 대로 5천원이든 1만원이든 내는 군민이 늘고 있다”며 “장례 치르고 부조금을 쪼개 기금을 내는 이들, 연말이면 동전을 모은 저금통을 통째로 내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말했다.
장학회는 올 4월 고교생과 대학생 111명에게 1억7010만원을 지급하는 등 10년 동안 서천지역 학생 747명과 13개 체육팀에 7억666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금은 장학회 이사와 읍·면 지부장 등 30명이 성적우수 학생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으로 나눠 대상자를 정한다.
김중원 장학회 이사장은 “군민의 바람대로 장학금으로 공부한 지역 인재들이 각 분야 전문가가 돼 고향으로 돌아와 일하는 꿈을 꾼다”며 “이들이 돌아와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일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라고 말했다.
서천/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선덕여왕' 드디어 밝혀진 '출생의 비밀'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의 천명(박예진)의 '출생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다.
21일 18회에 접어든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는 마침내 덕만의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임을 알게된다.
천명공주는 소엽도의 행방을 조사하던 중 자신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이 덕만이 아닐까 의심을 하지만 덕만이 남자라고 생각해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덕만이 소엽도와 관련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여기게 된 천명은 이러한 사실을 김유신(엄태웅)에게 알리게되고, 덕만이 여자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김유신은 크게 놀라며 천명에게 덕만이 여자임을 알렸다.
최근 방송분에서 '선덕여왕'은 초반의 긴장감있는 전개와는 대조적으로 덕만의 정체에 대한 여러가지 단서들을 보여주는 과정이 다소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덕만의 정체가 밝혀진만큼 향후 인물들 사이에 만들어질 새로운 역학관계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벌써부터 시청자 게시판에는 "(덕만이) 공주마마라는 말을 들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관련기사]
☞ 박홍균PD가 말하는 '선덕여왕' 관전포인트는?
☞ MBC '선덕여왕' 4주 연속 30% 안착..월화극 1위
히틀러와 골프
2009-04-21 l 조회수 1688 l 추천수 2
1936년 베를린올림픽은 히틀러가 독일의 국위를 세계에 과시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갖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올림픽사상 전무후무한 거액을 들여
베를린 교외 그루네발트에 10만명 수용 규모의 스타디움을 건설했고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를 1500여명의 주자들이 이어 달려
대회장으로 운반하는 오늘날의 성화 봉송도 고안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베를린 대회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목의 경기가 치러지도록 하라!” 그의 명령은 신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1900년과 1904년 대회에서만 등장했다가 사라진 골프도 3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골프 경기는 각국 2명이 한 팀으로
출전해 72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각 팀은 감독과 코치 그리고 예비선수 1명으로 구성됐다. 대회 장소는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검은 숲’이라 불렀던 프랑스 국경 근처의 고급 휴양지 바덴바덴의 18홀짜리
골프장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은 49개국에서 4000명이 참가한 엄청난 규모였고
골프경기에만 22개국이 출전했다. 독재자 히틀러는 골프를 하지 않았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골프는 울화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귀족적인 취미라고
하면 절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골프 경기 우승국에 수여할 트로피를 특별 제작할 것을 지시했다.
이 트로피는 현재 영국 골프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언젠가 런던의 한 백화점에서
전시되었을때 9억원에 구입하겠다는 수집가의 제안이 들어올 만큼 순은제의 트로피는
완성도가 높았다. 바덴바덴에 결집한 22개국 선수단은 이틀간의 연습라운드를 마치고
추첨에 의해 두팀 4명을 한 조로 묶어 경기를 펼쳤다. 주최국 독일은 당시 골프가
가장 취약한 종목이었다. 그런데도 한스 리터, 크루즈 로하 등 두 선수의 선전으로
3라운드까지 영국에 5타차 선두를 달렸다. 독일 국민들의 시선이 ‘검은 숲’으로
집중되자 선동가인 히틀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별 열차를 준비해 다음날 시상식에 출석해 직접 트로피를 수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다음날 아침 히틀러는 수십명의 장성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베를린 출발후 얼마 안돼 연락장교로부터 9번홀을 마친
상태에서 독일이 영국과 비기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히틀러는 달리던 열차를 세우고
다시 결과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린트하겐에서 특별 열차는 멈춰섰고 히틀러는 말없이 역 구내의 플랫폼을
서성거렸다. 곧이어 “아쉽게도 우리 독일팀이 3타차로 패퇴하였습니다”라는 치명적인
보고를 듣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변한 히틀러는 독일골프협회의 폰헨켈 회장에게
트로피를 수여할 것을 명령한 뒤 곧바로 열차를 베를린으로 되돌렸다.
변호사· 보나법무법인 대표 sodongki@bonalaw.com
삼고자 했던 갖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올림픽사상 전무후무한 거액을 들여
베를린 교외 그루네발트에 10만명 수용 규모의 스타디움을 건설했고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를 1500여명의 주자들이 이어 달려
대회장으로 운반하는 오늘날의 성화 봉송도 고안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베를린 대회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목의 경기가 치러지도록 하라!” 그의 명령은 신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1900년과 1904년 대회에서만 등장했다가 사라진 골프도 3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골프 경기는 각국 2명이 한 팀으로
출전해 72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각 팀은 감독과 코치 그리고 예비선수 1명으로 구성됐다. 대회 장소는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검은 숲’이라 불렀던 프랑스 국경 근처의 고급 휴양지 바덴바덴의 18홀짜리
골프장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은 49개국에서 4000명이 참가한 엄청난 규모였고
골프경기에만 22개국이 출전했다. 독재자 히틀러는 골프를 하지 않았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골프는 울화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귀족적인 취미라고
하면 절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골프 경기 우승국에 수여할 트로피를 특별 제작할 것을 지시했다.
이 트로피는 현재 영국 골프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언젠가 런던의 한 백화점에서
전시되었을때 9억원에 구입하겠다는 수집가의 제안이 들어올 만큼 순은제의 트로피는
완성도가 높았다. 바덴바덴에 결집한 22개국 선수단은 이틀간의 연습라운드를 마치고
추첨에 의해 두팀 4명을 한 조로 묶어 경기를 펼쳤다. 주최국 독일은 당시 골프가
가장 취약한 종목이었다. 그런데도 한스 리터, 크루즈 로하 등 두 선수의 선전으로
3라운드까지 영국에 5타차 선두를 달렸다. 독일 국민들의 시선이 ‘검은 숲’으로
집중되자 선동가인 히틀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별 열차를 준비해 다음날 시상식에 출석해 직접 트로피를 수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다음날 아침 히틀러는 수십명의 장성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바덴바덴으로 향했다. 베를린 출발후 얼마 안돼 연락장교로부터 9번홀을 마친
상태에서 독일이 영국과 비기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히틀러는 달리던 열차를 세우고
다시 결과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린트하겐에서 특별 열차는 멈춰섰고 히틀러는 말없이 역 구내의 플랫폼을
서성거렸다. 곧이어 “아쉽게도 우리 독일팀이 3타차로 패퇴하였습니다”라는 치명적인
보고를 듣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변한 히틀러는 독일골프협회의 폰헨켈 회장에게
트로피를 수여할 것을 명령한 뒤 곧바로 열차를 베를린으로 되돌렸다.
변호사· 보나법무법인 대표 sodongki@bonala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