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뉴스엔 이미혜 기자]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장 뒷모습이 깜짝 공개됐다.
‘선덕여왕’ 공식 홈페이지의 ‘선덕퀸의 생생 블로그’와 ‘김기자의 대중문화타임’에 공개된 사진을 통해 촬영장의 따끈한 현장소식을 접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고현정 전노민 독고영재 임호 송옥숙 문회원이 뻥튀기를 먹고 있는 사진. 신라시대 의상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뻥튀기를 나눠먹는 모습이 친근하다. 블로그에 따르면 고사 때 막걸리를 손수 협찬했던 전노민이 뻥튀기를 잔뜩 들고 왔다고.
다음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통화를 하고 있는 전노민의 모습이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정부이자 병부의 령인 설원 역을 맡고 있는 전노민은 갑옷을 모두 갖춰 입고 촬영 중간 짬을 내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깜짝 포착됐다.
또 임호와 고현정이 촬영을 하다 잠시 짬이 난 틈을 타 몸을 푸는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근엄한 진지왕을 연기하던 임호는 고개를 숙이고 팔을 모았고, 고현정은 얌전히 오므리고 있던 다리를 쭉 뻗으며 임호를 향해 말을 건네는 모습이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훗날 진평왕(조민기 분)이 백정왕자의 아역을 맡은 강산. 촬영 중간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강산은 어린이날 포함 벌써 3일째 강행군이라고. 게다가 강산은 올해로 13세로 마지막 어린이날을 촬영을 하면서 보냈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졌다.
한편 26일 방송된 ‘선덕여왕’ 2회는 극적인 긴장감과 스토리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25일 방송된 첫 회보다 상승한 전국시청률 16.6%(TNS미디어코리아 집계)를 기록했다. 또 수도권 시청률도 17.8%까지 치솟으며 또 하나의 대박 드라마 탄생을 예감케 했다.
(사진출처=MBC ‘선덕여왕’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이미혜 macondo@newsen.com
‘익산미륵사지의 재발견’ 학술대회개최
올해초 국보급 유물이 대량 발굴된 익산 미륵사지에 대한 학술대회가 연이어 개최되고 있는 가운데 5월 16일 전북도와 익산시, 고려사학회의 공동 주최로 ‘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학계와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 300여명이 참석해 원광대학교 60주년 기념관 아트스페이스홀에서 개최됐다.
고려대 박현숙 교수는 ‘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란 발제문에서 “미륵사 창건의 발원주체는 무왕과 당시 큰 세력을 확보한 사택씨라고 볼 수 있다”며 “신라와 전쟁 패배 후 위기에 몰린 정권돌파를 위해 백성들과 함께 미륵사를 통해 희망의 징표를 삼고자 했을 것”이라며 미륵사 창건주체를 선화공주가 아니라 무왕이라 밝혔다.
이어 그는 “사리봉안기를 보면 기해년인 639년이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해이다”며 “사리장엄을 1층 심초석 심주에 한 것으로 보아 동탑까지 축성되는 미륵사 완공은 의자왕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김상현교수 역시 “사리장엄기에 기록된 백제왕후가 조성한 가람은 미륵사 전체를 의미한다”며 “ 때문에 미륵사 3원 가람에 각각 다른 발원자가 있다는 견해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기존 견해를 재주장했다. 그 예로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의 경우 모두 대성어간이 주도해 경덕왕때 창건한 점을 미루어 미륵사 3원 가람도 불국사와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수원대 양정석 교수는 “탑 쌓는 효율적 시간이용을 위해 기중기를 사용한 것이 확실하다”며 “하지만 높이가 올라갈수록 하단부가 받는 하중에 대한 건축공학적 계산이 적용돼야 한다. 건축 당시 이미 서탑 하단부는 붕괴조짐이 보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발굴된 유물을 통해 미륵사 내부변화를 유추할 수 있지만 터를 잡은 시점, 완공에 걸린 시간, 동원 인력수, 완공시점 등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전남대 나경수 교수는 “사리장엄기 발굴로 서동설화가 거짓임을 드러났지만 문학적 의미까지 퇴색시키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이번 발굴이 서동설화를 역사적으로 부활시켰고 찬란한 옷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역사적 기록물과 마찬가지로 서동설화에서 당시 백제 지배세력의 무의식, 기대가치를 투사 받을 수 있다”며 “산산이 부서진 미륵사에 비해 창건설화는 지금까지도 창의적 발전을 거듭하며 완전한 작품으로 거듭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천명부부인)는 진평왕의 딸로, 친자매입니다. 그런데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이 첫째인지 둘째인지 가지고 말들이 많더군요.
정사에서는 선덕여왕을 맏딸로 보고, 천명공주를 둘째딸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덕만(선덕여왕)을 장녀로 보고, 천명공주를 차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만 천명공주를 장녀라고 보고, 선덕여왕을 차녀로 보고 있습니다.
천명공주는 천명부인으로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과 결혼을 해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를 낳습니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니까 사촌지간이겠네요.
문제는 선화공주라는 사실입니다. 서동요로 잘 알려진 무왕의 이야기에서,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딸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 서동요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선화공주는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의 동생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왕은 의장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무왕은 끊임없이 신라와 전쟁을 하였고 성을 뺏고 빼앗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무왕이 진짜로 진평왕의 사위였다면, 장인의 나라에 무차별한 공격을 퍼부었을까요? 서동요에 대한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화공주라는 인물에 대해서 정확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화공주는 서동요(삼국유사의 내용에만 등장함)에만 등장할 뿐, 역사서 그 어디에서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전설일 뿐이라는 사실이죠.
역사가들은 선화공주를 익산의 호족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천도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거든요.
그리고, 서동을 백제의 무왕으로 보지 않고 무령왕의 아버지가 되는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때에 신라와 백제를 결혼동맹이라는 것을 맺거든요. 두 왕국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해보자는 의도에서 말이죠.
동성왕의 왕비는 공주가 아닌 이찬 비지라는 인물의 딸인데... 그럼 그 사람이 선화공주일까요? 아무튼 역사란... 그 속을 알면 알수록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병약한 몸이고 보니 신경이 나약해지고, 출사에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유사는 처음 고조선의 이야기를 다룬다.그리고 마한,부여,가야등의 고대의 여러 나라와 고구려,백제,신라등의 삼국의 여러 가지 설화를 소개한다.
먼저 고조선의 이야기에서는 단군신화가 나온다. 천상(天上)의 상제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자 참을성이 강한 곰을 여자로 만들고 그녀의 아들이 단군왕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다. 이것이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이다. 과학적인 것만이 인정되는 현대에서는 위의 단군신화는 너무나 허무 맹랑한 것이지만 그 깊은 내면적 의미를 통찰해야 한다. 먼저 천상의 아들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한 것은 우리 민족은 자주적인 민족이고 자랑스런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작자 일연의 의도가 숨어있다.
위의 단군신화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산림 지대에 거주하며 농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환웅부족이 태백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주위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며 지배한 것이다. 그리하여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결혼을 통해 환웅 부족과 연합하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그들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고려시대 까지 구전되며 과장되어 위와 같이 된 것이다.
마한과 동부여,북부여의 이야기는 간단히 나와 있다. 그러나 북부여의 시조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나라르 열었다든지, 북부여에서는 돌 밑에서 금빛깔의 아이가 자라서
금와태자가 되었다는 등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단군신화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렇
게 고대의 역사가 허무맹랑한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고 하물며 설화와 야사를 적은 삼국
유사는 심하다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를 보자. 동부여의 금와가 왕위에 오른뒤 우발수 강
가를 지나다가 아리따운 한 젊은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인데 천
재의 아들 해모수에게 사통(私通)을 당해 부모의 미움을 사서 그곳에 귀양 오게 되었다고
했다. 금와는 유화를 데리고 가서 으슥한 방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그녀는 잉태하게 되었다. 다섯달이 지나 유화는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 부터 재주와 힘이 뛰어나며 사람들이 주몽을 잘 따랐으나, 이 에 왕의 자리를 빼앗길 까봐 두려운 왕은 그를 없애려 하고 그 낌새를 알라차린 주몽은 평소부터 길러둔 말을 타고 도망쳤다. 그래서 주몽은 졸본주(卒本州) 그곳을 도읍으로 나라를 열어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북부여의 유민이라는 것을 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또한 단군 신
화와 주몽 신화는 두 신화의 기틀은 흡사하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군의 탄생이 천재의 아들과 웅녀와의 신혼(神婚)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주몽은 유화가 낳은 알에서 깨어 나왔다는 점에서 두 신화의 다른점이 있다. 또한 주몽이 말을 타고 도망 온 것을 볼때 그들이 유목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부여에서의 갈등과 불화를 박차고 나와 새 왕조를 새운 것은 힘차고 씩씩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주는듯 하다.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하루는 여섯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그 자제를 데리고 알천 냇가에 모였다. 그들은 그들을 다스릴 군주가 없음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그 때,남쪽으로 서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 서기가 드리워진 곳에 흰 말 한마리가 알에 절을 하고 있었다.그 알에서 아이가 나와서 동천샘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서 하늘과 땅이 울렁이고 해와 달의 빛이 더욱 청명해졌다. 그래서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으로 불렀다. 또한 같은 날, 알영정 우물가 에서 한마리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그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목욕을 하나 부리가 빠지며 입이 나와 이름을 발천(發川)이라 했다. 그리하여 남산에 궁궐을 지어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혁거세는 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성을 ‘朴’이라 하고 여자아이의 이름은 우물의 이름을 따서 閼英이라 했다. 이 들이 열살이 되던해에 혁거세는 왕으로 알영은 왕후로 추대 되어 국호를 ‘서라벌’이라 했다. 이 신화는 신라의 개국신화로서 그 시조 역시 하늘의 자손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하늘로 부터 서기가 드리워 진다든지 그곳의 백마가 알에 절을 하고 알에서 아이가 나온다든지 모두 혁거세가 하늘의 인물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왕후까지 신성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 철저한 남존여비의 시대였던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비추어 볼때 좀 특이하다.
이 박혁거세 신화 외에도 탈해왕 신화라든지 알지왕 신화등 많은 신라왕의 신화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이것으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상당히 신라를 예찬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 당시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세력까지 축출한 신라의 자주정신을 본받기 위해 신라를 강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만하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바위 하나가 해초를 뜨고 있던 연오랑을 싣고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바닷가에 도착했다.그 나라 사람은 그를 신비롭게 여겨 왕으로 추대했다. 세오녀는 남편이 집에 돌아 오지 않자 바닷가에 나가 보니 다시 그 이상한 바위가 나타나 세오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그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는 다시 만났으나 신라에선 해와 달이 빛을 여겼다.그래서 신라 왕은 사신을 보내 그 부부를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연오랑은 세오랑이 짠 명주를 주었다.그것을 가져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일본으로 간 연오랑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 가서 앞선 문화 수준으로 일본을 다스렸음을 의미한다.그래서 왕까지 되고, 신라에게 명주를 주어 해와 달의 빛을 되찾게 한것은 신라와 상호 협조하였음을 의미한다.이 부분에서도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주변국가와 신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17대왕 내물왕때,왜왕은 백제의 죄과를 신라에 성토하기 위해 성의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물왕은 세째 왕자 미래를 보냈으나 일본은 그를 볼모로 잡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내물왕의 아들 맏아들 눌지왕은 고구려와 화친의 표시로 그의 동생 보해를 고구려로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보해를 볼모로 잡고 10년이 흘러 눌지왕은 깊이 심려되었다.그래서 재상을 시켜 고구려로 모래 잠입시켰다. 그 재상은 보해를 만나 몰래 고구려의 바닷가를 빠져 나왔다.그 때 추격하던 고구려 군사들은 평소 보해를 사모했음으로 그를 살려보내었다.보해가 돌아오자 눌지왕은 왜구에 잡혀있는 미해가 걱정되었다.그러자 재상은 일본으로 가서 몰래 미해를 만나 탈출을 시키고 자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일본에 남었다. 왜군에 붙잡힌 재상은 자신이‘왜군의 신하다’ 라고 말하면 푸려날 수 있었지만 끝내 충절을 지켜 죽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유교적 사상에 비추어 볼때 정말 대단한 충신전(忠臣傳) 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잠시 굴복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신라로 탈출 했을것이다. 그 때 굴복하여도 신라에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각도 중요하고 무었보다도 본능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생각일뿐 이 재상은 그런 모든것을 초탈하여 충절을 지킨것이고 그런 선조들이 있기에 20세기 초에 일제 치하에 있을때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열사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보해와 미해를 국가의 권위로써 떳떳히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신라의 국세(國勢)가 약했음을 드러낸다. 실제 내물왕과 눌지왕 시절 즉,4~5세기는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국가의 힘은 약했으나 그 잠재적인 힘인 개인들은 용감했고 슬기로왔다. 그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민족의 풍습의 유래도 나와 있다.보름 약밥의 유래가 그 한예이다. 신라21대 왕 비처왕 때의 일이다. 어느날 왕은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했다.
그 때,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왕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기사를 시켜 따라가 보게 했더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타나 편지 한 통을 주어 편지를 보니 겉봉에 이렇게 써있었다. ‘이 편지를 열면 두 사람이 죽을것이요,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에 비처왕은 두 사람이 죽는것 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일관이 열지 않아 죽는 한 사람이 왕일 것이라고 했다.그러자 왕은 편지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써있었다.그래서 화살로 거문고 갑을 쏘게 했더니 그 안에서 온갖 불사를 맡아 하는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 때 부터 매녀 정월달의 첫 해일(亥日), 첫 자일(子日), 첫 오일(午日)에는 백가지 일을 삼가 함부로 행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으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풍속이 생겨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또 신라 25대 왕 사륜왕때에 도화랑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왕은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사통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지아비를 두고는 죽어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지아비가 없어진다면 어떻겠냐고 왕이 묻자 그녀는 되다고 하였다. 왕은 그녀를 돌려 보내고 그 해에 죽었다. 사륜왕이 죽은 후3년뒤,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아 죽은후 열흘후 밤에 사륜왕이 생시의 모습으로 도화랑의 방으로 찾아와 도화랑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사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도화랑은 이일을 부모에게 의논하여 허락을 받아 사륜왕은 7일간 도화랑의 방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도화랑은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이라고 지었다.당시의 임금은 그 비형을 데려다 길렀다.그런데 비형은 밤만되면 밖에 나가 도깨비들과 놀다오곤 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를 불러 도깨비들 가운데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물으니 비형은 길달이라는 자를 추천하였다.그리하여 왕은 길달에게 벼슬을 주고 임종에게 양자로 삼게 하니 임종은 길달을 양자로 삼았으나 어느날 여우로 변하여 도망갔다.비형은 도깨비들을 시켜 기달을 죽이게 했다.그 뒤 도깨비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도망가게 되었다.
도화녀와 사륜왕의 이야기에서 신라인의 정조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지아비가 살아 있느한 여자는 왕에게도 몸을 허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아비가 죽으면 가능하다는 것은 과부의 재혼이 가능 했다는 것이다. 도화랑이 부모에게 사륜왕과의 동거를 허락을 받고 한것을 보면 재혼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나 어느정도 가능했을 것이다.또 도화랑의 방에 찾아온 사륜왕은 진짜 사륜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형의 영특함에 후세에 구전되며 도화랑의 재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유가 사상이 과부의 재혼을 절대 금지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결국 우리의 전통적인 정조관은 신라인의 것처럼 자유로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이 이야기의 발단은 도화랑이 오직 아름답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신라인들은 신체(身體)의 미(美)를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일이 아닌가 한다.
김유신은 신라 제2의 관등인 이간(伊干)을 지낸 무력의 손자이자 각각 서현의 손자로 진평왕17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검술이 능하여서 화랑이 되었다.당시 그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백석이란 자가 고구려로 잠입해서 내정을 살피자고 하여 길을 떠났다. 가던 도중 밤에 그들은 여자로 분한 세 신령을 만났다.그들은 백석이 적군이라고 유신 한테만 말하자 유신은 핑계를 데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백석을 결박하고 문초하였다. 그러자 백석은 김유신이 원래 억울하게 처영당한 고구려의 복술가 추남이 다시태어난 것이라는 대신의 말을 듣고 복수의 화신인 김유신을 죽이러 왔다고 했다.김유신은 백석을 죽이고 신령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큰 제사를 올리었다.고구려에서 김유신을 죽이려 한것은 그가 신라 군의 핵심적 인물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첩자를 보내 그를 유인해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이 추남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것에서 불교의 윤회사상을 느낄 수 있다.
김유신과 친구지간이자 처남이된 김춘추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춘추 역시 귀족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문흥대왕으로 추봉된 용수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출세할 수 있었던것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했음을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김춘추의 이야기를 통해알 수 있다. 문희의 언니 보희는 어느날 서악(西岳)에 올라가 방료를 하니 온 서울에 오줌이 가득한 꿈을 꾸고 그 예기를 문희에게 말했다. 문희는 그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샀다. 그 유신과 춘추가 공놀이를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이 떨어져 유신의 집으로 갔다. 유신은 보희에게 옷고름을 꿰매달라고 했으나 문희는 그런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하며 거절하였다. 그것이 보해가 꿈을 판 효과일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운은 꿈을 산 문희에게 갔다. 유신은 문희에게 옷고름을 달게하고 그 뒤 춘추와 문희는 가까워져 문희는 임신하게 되었다.이것은 그 당시에도 어느정도 남녀간의 성관계가 자유로왔음을 의미한다.왜냐하면 결혼도 않한 처녀가 임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은 문희를 부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낸뒤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산책나오갈 기다려 불을 질러 연기를 내었다. 까닭을 알은 선덕여왕은 즉시 춘추를 시켜 문희를 구하게 하고 혼인 시켰다.
삼국유사에는 많은 시가 나온다. 헌화가(獻花歌)가 그것들 중 하나이다. 그 유래를 볼것 같으면,순정공은 강릉태수로 부임받아 그곳에 그의 부인 수로부인과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절벽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래서 그꽃을 꺽어달라고 하니 어느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따주고 헌화가를 불렀다.그리고 어느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순정공은 노래를 불러 막대기로 땅을 두들기니 용은 부인을 바다에서 내보냈다.아마도 이용은 바다해적일 것이다. 수로부인이 아주 예버서 그녀를 납치했을 것이다.
충담사의 사뇌가들도 역시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시가이다. 경덕왕 24년,왕은 길에서 영복승 한분을 데려오라고 하였다.그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어 신하들이 그를 접견시켰으나 왕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번에는 납의(衲依)를 입고 있는 중이 있어 그를 접견시키니 그가 바로 충담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것은 첫번째 승려는 차림새가 화려하고 주위 사람들로 부터 지혜와 덕망이 높다고 칭송을 받으니 이는 불교가 세속화되고 타락하여 승려들이 제물과 명예를 중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말기적 현상인 것이다. 왕도 그것을 경계하여 첫번째 승려는 영복승이 아니라고 한것이다.그리고 왕은 일찍이 충담사의 기파랑을 찬양하는 사뇌가를 들은 바가 있어 충담사에게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하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한다. 그래서 충담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린다.삼국유사에는 안민가 말고도 찬기파랑가등 향가 14수가 전한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당나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는 전한다. 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으로 그는 허안왕의 사위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귀가 당나귀의 귀와 같이 커져 버렸다.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족두를 만드는 사람밖에 없었으나 그는 사실을 죽을 대 까지 말할 수 없어 답답하였다.그래서 그는 죽음이 입박해 오자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쳤다. 이야기에서 복면을 만드는 장인은 왕의 귀가 당나귀 귀라고 그토록 하고 싶어하던 말을 토설한다.이를 문학에서는 ‘정화’와 ‘배설’이라 한다.
백제의 제30대 왕 무왕의 원래 이름은 장인데 그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고 하나 그는 아버자가 없는 사생아 였거나 전쟁에 아바지를 잃은 아이였을 것이다.그는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하는 보잘것 없는 신분이었는데 그런 그가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굉장한 신분 상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선화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많은 황금으로 인심을 얻은 이유가 있지만 그렇게 되것은 그가 굉장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설화가 과장된 것이라면 원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고 난 생각한다. 선화공주는 행실이 부정하여 귀향가게 되었고 그 때 산적활동으로 재물을 쌓아둔 서동과 눈이 맞든지 아니면 서동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하여 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니 난라가 잘 돌아갈니 없고 극기야 그 다음왕인 의자왕때는 백제가 망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어쨋거나 야사인 만큼 그 사실성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삼국유사의 중요한 가치는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유사에는 없는 신화, 전설, 시가 등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는 데에 있다.그래서 신라,고구려,백재,가야 등의 고대국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숭선전은 가락국 시조수로왕과 왕비 허씨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화를 받드는 전각이다.
이 전각은 국조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신숭영전, 기자의 숭인전,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숭덕전, 탈해왕의 숭신전, 알지왕·문무왕·경순왕의 숭혜전, 백제 시조 온조왕의 숭열전, 고려 시조왕의 숭의전과 함께 팔전의 하나이다.
숭선전 대제는 춘추향 2회로
춘향은 음력 3월 15일, 추향은 음력 9월 15일이며
시간은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 거행된다.
당초에는 정월 3일과, 7일, 5월5일, 8월5·15일에 년중 5회의 묘향을 받들기시작하여 제10대 구형황 12년(532)까지 334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신라에 합병된 이후에도 제향은 계속되었는데 신라 30대, 문무왕 즉위년 (661)에는 제금을 내려 종묘제례로 계속 시키는 한편 수로왕묘 근처의 왕위전 30규를 바치고 가야군에 소속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에 가락국 시조 수로왕능 춘추시향의 전교가 내려져 이로부터 매년 춘추대제 축문은 조선국왕의 명의로 고하여 향폐등 육품은 예조에서, 의성 등 53품은 김해부에서 마련하고 능감을 설치하여 수호하게 함 바 있으며 이밖에 설,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에도 제례를 올리고 있다.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기능보유자는 김병수이다.
제례의 15일 전에 제관을 정하며 10일 전에 제주를 담고 제복을 점검한다.
7일 전에 제물을 구입하고 5일 전에 제기를 살피며 3일 전에는 전각을 청소한다.
제례날에는 오전 8시에 모든 제관이 모이며 행사가 시작되면 헌관과 제관들 4배하고 왕과 왕후의 신위 앞에 삼상향(三上香)한 뒤 폐백을 한다.
이어서 초헌례로 왕과 왕후의 신위에 헌작(獻爵)한 다음 축문을 읽는다.
그뒤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의 순서로 진행된다.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9) 원성왕과 향기나는 미인 김정란
고향 그리던 여인의 恨, 인동초로 피었을까
/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의 괘릉. 솔숲과 돌로 만든 사자 문인 무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김경신(신라 38대 원성왕)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은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마치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꿈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과 비슷하다.
신라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죽자 왕위 계승 1순위 김주원이 장마로 북천(지금의 보문단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지 못하자 왕위 계승 2순위 김경신이 왕이 된다. 그가 신라 38대 원성왕이다.
# 몸에 향내나는 여인
6월 초의 날씨가 여인의 마음만큼 변덕스럽다. 엊그제는 여름같이 후텁지근했고 서울,부산은 한여름 날씨라는데 신라의 경주는 왜 이리 선선할까. 한 번 왔다가 떠날 줄 모르는 감기 때문에 병원과 약국에 먼저 갔다가 모화행 시내버스에 올라 괘릉(38대 원성왕릉) 입구에 내렸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아픈 몸보다도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미인 김정란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매력이 넘쳐 흘렀고,굽이굽이 솔밭길이 아름답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 |
|
![]() | |
![]() |
혼자서 행복의 오르가슴을 느끼며 김정란을 생각하면서 솔밭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고상한 향기가 스며든다. '원성왕 8년(792)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는데 그녀는 나라에서 제일 가는 미인으로 몸에 향내가 났다.'(삼국사기) 아직까지 영원한 섹스 심벌로 남아 있는 매릴린 먼로야 샤넬 넘버5로 향기를 풍겼다지만 몸에서 향내가 난다는 신라 제일의 미녀 김정란은 누구였을까.
괘릉의 솔밭길에서 나는 향기는 김정란의 향기일까. 발길이 향기 나는 곳으로 향하니 새하얀 미색 인동초 꽃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터질 듯한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이팝나무의 꽃 향기라더만 지금 흐르는 인동초 꽃의 고상한 향기는 분명 신라 때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김정란의 향기일 것만 같다. 신라와 미인과 향기에 취해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뻐꾸기 울음이 현실임을 일깨워준다. 입구에 다다르자 문화유산해설사 아가씨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 하염없이 왕릉에 앉아서
능 안으로 들어섰다. 빽빽했던 예전의 소나무는 태풍 매미에 많이 쓰러졌는데 그 공간에 소나무들을 옮겨 심었다.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힘찬 무인상이 역동적인 자세로 몸을 비틀고 주먹을 치켜올리고 있는데 마치 히딩크의 골 세리머니 같다. 사자 네 마리는 다리를 힘차게 곧추 세우고 각기 맡은 동서남북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왕릉 주위에는 난간석을 둘렀고 그 안에는 북쪽에는 쥐,남쪽엔 말 등의 12지신상이 시계방향으로 빙 둘러 자기 방위를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지금의 숭복사지)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비문(유명한 사산비명 중 하나)이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곡사가 있었고 절을 옮겨주고 그 자리에 이 왕릉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을 옮길 때 처음에는 그대로 곡사라 하다가 885년 헌안왕이 대숭복사라 하였고 여기서 절을 옮길 때는 사람들이 자진하여 기왓장,서까래 등을 옆사람에게 넘겨가며 운반했다. 사람들의 행렬이 5리까지 이어졌다 했는데 저 아래 말방리에 지금도 그 대숭복사지의 석탑은 그대로 있고,비신을 받쳤던 귀부는 경주박물관 뜰에 있다.
그런데 이 왕릉에 곡절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경주김씨문중이 이 왕릉을 삼국통일의 주역인 문무왕릉으로 여기고 제사지냈다. 1966년 '동경잡기'에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어 그 곳을 메우고 왕릉을 마련했는데 왕릉 내부인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는 기록을 억지로 끼워 맞춰 문무왕릉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왔던 1985년에는 진종일 나 혼자 이 왕릉 앞 잔디밭에 앉아서 생각을 글로 쓴 적이 있는데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그때는 향기 나는 여인 김정란을 몰랐지만 지금은 여인 김정란이 내 가슴에 스며있다. 사람은 변함없이 같은 '나'인데 그때는 20대 말의 청춘이었지만 지금은 중년의 사나이가 되어버렸다.
김정란은 얼마나 이 왕을 원망했을까. 한 무제가 미인 왕소군을 북방의 흉노 추장에게 보냈다. 봄이 와도 왕소군에게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오랑캐 땅에는 꽃도 피지 않고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라에 바쳐진 김정란도 꽃 피고 새 울고 바람 불어도 고향 생각에 눈물로 지새웠을 것이다. 지금 부는 바람도 눈물로 지새운 김정란의 원망의 바람일까. 그 한숨이 서늘한 바람이 되어 내 가슴에 안기고 왕릉 주위의 소나무를 뿌리채 뽑았는가. 김정란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이 인동초 고상한 향기와 같았을 것이다.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라던 박정대 시인의 시구가 꽃 향기를 따라 흐른다.
입력시간: 2006. 06.08. 09:44
블로그
-
(서프라이즈) 저녁 6시 봉하로 내려 갑니다 - 김정란 교수 2009-05-24
(서프라이즈) 저녁 6시 봉하로 내려 갑니다 - 김정란 교수김정란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울먹임에.. 말씀을 잇지 못하십니다. 봉하마을에 가야하는데 혼자 어떻게 가야할 지 모르시는 분 함께 가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blog.daum.net/rwk0215/16904755 블로그명: 禪偈非佛
1,527위
호랑이 이야기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다. 범 이야기만으로 <천일야화>나 <데카메론> 같은 책을 꾸밀 수 있을 정도다.” 육당 최남선의 말이다. 우리나라처럼 호랑이(범) 이야기가 흔한 나라는 드물다. 조선 후기의 정수동은 옛날얘기를 해 주는 조건으로 노자를 얻어 금강산을 다녀왔는데, 수십일 동안 줄곧 호랑이 이야기만을 해댔다고 한다. 그만큼 호랑이 얘기는 무궁무진하게 이 땅 위에 널려 있다.
신라 원성왕 때 김현이라는 화랑이 탑돌이를 하다가 한 처녀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김현이 처녀의 집에 따라가보니 그곳은 호랑이 굴이었다. 처녀는 “오빠들이 사람을 많이 해쳐 하늘의 노여움을 샀기에 대신 벌을 받고자 한다”며 “다른 사람보다 당신의 손에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내일 성 안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잡는 이에게 나라에서 상을 내릴 것이니 그때 죽이라는 부탁이었다. 김현은 차마 못하겠다고 했으나 처녀가 대신 절을 세워달라고 설득해 마침내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맹호가 성 안을 휘젓자 왕은 벼슬을 상으로 내걸고 잡으라 했고, 김현이 쫓아가자 범은 처녀로 변신한 뒤 칼을 뺏어 스스로 찔러 죽었다. 그후 벼슬에 오른 김현은 호원사라는 절을 세워 범의 명복을 빌었다.
설화 속의 호랑이를 들춰보면 공포와 친근감이 혼재한다. 남녀의 연을 맺을 정도로 밀접하고, 성 안이 벌벌 떨 정도로 두려운 존재다. 신화의 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동거해 온 호랑이는 잦은 출몰만큼 무수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그 많던 호랑이는 사라지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만 옛날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서울동물원이 기르고 있는 한국 호랑이들이 국제 혈통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이다. 시베리아 혈통을 인정받아 외국 호랑이와 혼삿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 혈통 속에 흐르는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도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태관 논설위원>
윤석 울산생명의숲 사무국장은 “문수산은 운동복 차림으로 가볍게 오를 수도 있고, 등산장비를 갖춰야 하는 가파름도 있다.”면서 “시민들이 문수산을 많이 찾는 이유는 근접할 수 없는 화려함보다 삶에 활력을 주는 소박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수산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5~3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숨결은 거리의 반비례로 진하다. 율리농협과 영축마을을 출발해 문수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사를 거쳐야 한다. 문수사는 1300년 전 신라 원성왕 때 연희국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당시에는 조그마한 암자였다고 한다. 이후 통도사 청하 스님과 롯데 신격호 회장 등의 노력으로 지금의 대가람을 이뤘다. 고려 때는 라마교의 전당으로도 불려졌다. 신라 때는 문수보살이 산세가 청량하고 아름다워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의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경순왕이 백척간두에 선 신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해 문수산을 찾았다고 한다. 태화강을 건너 무거동에 도착했을 때쯤 한 동자승(문수보살 현신)이 마중을 나왔다. 그 동자승은 잠시 길을 함께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순왕은 이를 보고 ‘하늘이 나를 저버렸구나.’하고, 경주로 돌아가 신라를 고려에 받쳤다고 한다.
문수사는 1999년부터 등산객을 상대로 점심을 공양하고 있다. 평일엔 200명, 주말엔 600~1000명에 이른다. 또 문수사 대웅전 앞에는 법당과 연결한 유리막사가 눈에 들어온다. 벼랑 위의 대웅전이 좁아 법회 때 많은 불자들이 대웅전 밖에서 비바람과 추위에 떠는 것울 막아 주기 위한 배려다.경주 원성왕릉, 관광명소로 새 단장[데일리안 대구·경북 박정우 기자]사적 제26호인 신라 제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 주변이 새롭게 단장됐다.
괘릉(원성왕릉) 주변을 새롭게 정비해 관광 명소화 하고자 총 사업비 11억 8000여 만원을 들여 지난해 1월부터 추진해온 이 사업이 착공 1년여만에 완공됐다고 경북 경주시가 12일 밝혔다.
◇ 말끔히 단장돼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난 경주 괘릉. ⓒ 경주시 제공
경주시는 원성왕릉을 찾는 관광객들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관람객들의 관람효과를 높이고자 원성왕릉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을 비롯한 삼문을 철거해 새롭게 정비했다.
시는 또 왕릉 앞 사유지(8229㎡)를 새로 매입해 기존 주차장을 이곳으로 이설하고 1330㎡ 부지에 대형14, 소형13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과 1145㎡의 광장을 조성했으며, 기존 화장실을 철거하고 주차장 측면에 현대식 화장실을 설치해 관광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시는 관광객들의 접근성을 쉽게 하고 지역주민들의 교통편익을 위해 길이 174m, 넓이 6m의 도로를 확장했다.
한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에 위치한 괘릉(掛陵)은 신라 내물왕의 20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 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주변 환경도 말끔히 정돈됐다. ⓒ 경주시 제공
괘릉은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했다는 속설에 따라 이름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다.
이 돌에 12지 신상이 조각돼 있고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 문인석 한쌍, 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데일리안 대구경북 = 박정우 기자]
中 쓰촨성 계곡에 나체욕장 문 열어험준한 계곡 웅덩이를 욕탕으로 개조(베이징=연합뉴스) 권영석 특파원 = 중국 쓰촨(四川)성 계곡에 있는 삼림 나체욕장이 풍기문란이라는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폐업 7년 만에 다시 개장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9일 삼림 나체욕장인 톈티(天體)욕장이 지난 6일 쓰촨성 메이산(眉山)시 훙야(洪雅)현 위핑산(玉屛山)풍경구에서 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위핑산의 험준한 절벽 사이 위쉐이(玉水)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이 나체욕장은 4개의 물 웅덩이를 1㎞ 길이의 천연 초대형 욕탕으로 개조해 만든 것이다.
계곡 주변에는 탈의실과 정자 등으로 쓰이는 목조건물 몇 채가 들어서 있었으나 아직 날씨가 시원한 탓인지 나체욕장을 찾는 손님은 없고 구경꾼들만 몇명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구경에 나선 사람들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나체목욕에 대해 질문하자 조심스럽게 "아직은 나체로 목욕하는 것이 겁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루완캉바오(盧婉抗暴)의 전설'을 들으며 자라난 이 마을 주민들은 어려서부터 나체목욕을 즐기며 자라왔기 때문에 나체목욕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루완캉바오의 전설이란 옛날 위핑산에 옥과 같이 어여쁜 미녀 루완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산적에게 납치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폭포에서 뛰어내려 생사를 알 수 없었다는 전설.
위핑산 산촌 주민들은 대대로 루완을 추모하기 위해 계곡에서 나체목욕을 하며 자기 몸의 순결성을 과시했으며 추모의식은 이제 산촌 주민들의 습관이 됐다는 것이다.
위핑산풍경구 책임자인 리쥔(李軍) 사장은 "루완캉바오의 전설 때문에 우리는 톈티욕장이 문을 연 것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통념이 많이 바뀌어 중국은 이제 7년 전과는 달리 나체목욕을 즐길 준비가 됐으며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 "나체목욕은 예술의 한 형식"이라고 강조했다.
리 사장은 "위쉐이계곡 안의 나체욕장에는 남탕과 여탕이 자연적으로 구분돼 있으며 보안 요원들이 철저하게 경호를 하고 있어 사진에 찍힐 가능성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는 관광객들에게 자연과 친하게 접촉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행복을 주기 위해 나체욕장을 개장한 것이지 여론에 도전할 의도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일부 누리꾼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찬성론을 펴고 있지만 대다수는 시각적 오염이라며 결사 반대하는 등 찬반 논란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이는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며 "외국에 누드욕장이 많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공공장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풍기문란 행위이며 몰염치한 행동"이라고 지적하고 "풍경구를 보호하고 비문명적인 행동을 막아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yskwon@yna.co.kr
Restaurant : Restaurant Al Saraya ( Palace Restaurant)
해외 여행을 하게되면 동서남북을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동, 잠자리도 중요하지만, 본인에게 닥치는 문제이며, 나중에도 공통의 화제가 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먹거리가 문제일 것이다. 여행담의 정사이지만 야사로서도 중요한 화제거리일게다.
Restaurant Al Saraya ( Palace Restaurant)에서 4월 16일 저녁을 했다. 이 자리는 혁명전, 그러니까 1968년 이전에는 정부기관이 있었던 자리였다고 한다. 카스바가 보이는 자리 건너편에 새로 지은 식당으로 심지어 불란서 관광단이 저녁을 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 아닌 은퇴한 사람들의 내외들인 듯이 보였다.
식당메뉴는 이태리음식과 리비아화된 이태리 음식이였다. 메뉴에 보이는 음식들은 그리 눈에 서먹한 것은 아니였다. 여기저기서 들어 본 낯익는 것들이었다. 재미있는것은 서두에 Dessert가 먼저 보인다는 것이다. 순서가 꺼꾸로된 것이 오래 이 지역에 익숙한 내게도 서먹했다. 아랍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는 하지만 메뉴시작 순서도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일뿐이지만 새삼 신기하게 느꼈다.
메뉴에 보이는 가격은 10LD ~ 25LD로 사실 상대적으로 끔직하게 비싼 수준은 아니였다. 그러니까 환율이 $1= 1.33LD정도이니까 7천원 에서 만5천원정도니까. 전채에서 디저트까지해도 3만원정도이니까. 이 정도 식사와 서비스수준에서는 비싼편은 아니였다.. 만약에 비용이 신경쓰이는 경우라면, 메인 하나정도에다 음료수하나면 충분할 수 있다. 음료수도 2LD정도니 상대적으로 싸니까 문제가 없을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공짜빵을 실컷즐길 수있으니 말이다. 사실 기본 밑반찬처럼 내 놓는 것이 빵과 올리브, 버터, 또 얼큰한 하리사( 마치 고추장처럼 생긴것으로 실제로는 숙성하지 않은 상태)도 나오니, 음료수 하나에다 메인하나면 충분할 게다. 메인도 눈에 익는 스파게티로 한다면 더 경제적인 식사가 될게다. 아, 주방장도 현지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니까, 아마도 이태리인일 게다. 이정도면 시설, 분위기, 음식 질과 맛, 그리고 품나는 주방장은 폼을 다함께 즐감할 수 있다.
그리고 기대해도 좋을 만한것이 바로 빵이다. 빵은 이집트도 만만치 않게 잘 만들지만, 그거그렇게 생긴 빵들이 정말 식욕을 당긴다. 잘못하다간 먼저 그냥 내주는 빵만 즐기다가는 정말 중요한 메인을 먹기도 전에 전채에서 배가 벌써 부르게 된다는 거다. 여러번 그런 뼈아픈 경험을 했으니 빵맛은 믿어도 좋다.
정말 맛있던것은 리비아 산 올리브를 작신작신 다진 것으로 처음에는 철갑상어 알인 줄 알았다. 리비아산 올리브가 명성대로 맛있었다. 혁명전에도 올리브수출품중 튀니산이 일품이었는데 사실은 리비아산 올리브를 튀니지에서 방학온 학생들이 수확해서 튀니지에서 가공하여 유럽, 특히 이태리로 수출했었단다. 별로 올리브를 좋아하지 않았었건만, 완전히 이 올리브맛에 반해 버렸다. 물론 올리브만 먹은 것은 아니다. 어울려서 버터대신 올리브를 얹어 먹었다.
세계 최고의 수박
말나온김에 리비아 수박은 정말 일품이다.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리비아산 수박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정말 그랬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대추야자는 알제리산을 먹었다고한다. 내가 알기로는 물론 들은 바로는 알제리이 Biskra에서 난 대추야자가 가장 맛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생김새도 맛나게 생겼다. 이집트에서 보이는 대추야자는 떫기만 하다.
대추야자는 prophet Mohamed가 라마단을 금식기간중에 낮동안의 금식을 끝내고 여섯알인가 대추야자와 우유한 컵을 먼저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그리 따라하는 교도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