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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그린페 2009. 5. 13. 01:17

이슬람교 (Islam)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메트(이슬람어로 무하마드)가 완성시킨 종교를 일컸는다.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여기서 무스림(Muslim)이란 '복종하는 자', '이슬람에 자신을 봉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스람(Islam)은 '승인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봉헌하다'는 동사의 부정형에서 파생한 명사로 순종, 복종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쿠란을 최종 계시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사의 자료는 Hadith(전승집), 예언자의 전기로 구성된다.

  ⑴ 알라와 《코란(쿠란)》: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마호메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 ·제도, 마호메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 ·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귀의(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경전(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 ·희사(喜捨) ·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오주(五柱):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증언 또는 고백(샤하다; Shahada):“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예배(살라트;Salat):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이는 쿠란에는 없으나 무함마드 생전이 관례가 된 것이다. 재계의식 후 무릎깔개를 펴고 서서 기도후,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멕카 향해 절을 한 후 알라를 찬미하고 복종을 맹세, 다시 서서 알라를 찬미, 그리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면서 알라를 찬미, 그 후 경건히 앉아서 간청, 마지막으로 다시 엎드린다. 그 동안 "알라는 가장 위대하다" Allah akbar 낭송한다.

  ③ 희사(자카트;Zakat) 또는 천과(天課):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단식(샤움;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 ·흡연 ·향료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순례(하주;Haji):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대순례를 위해 먼저 정화의례를 한다. 남성들은 삭발, 이흐람이라는 옷 걸침, 여성은 몸매를 감출 수 있는 허름한 옷을 걸친다. 성스러운 달의 여덟 번째 날, 멕카 동쪽 9마일 Arafat로 이동하고, 도중의 Mina에 정오에 도착 후 밤을 샌다. 다음날 아라파트 평원에서 의식에 참여하고 명상, 천천히 걷는 의식을 수행한다. 해 지면 소란하게 멕카로 돌아오며 도중의 Muzdalifa에 달려가 노천에서 다시 밤을 샌다. 해 뜬 후 미나로 가며 산 비탈길 세 장소에 일곱 개의 조약돌 던지며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전능하다" 라고 외친다. 이 대순례 후 대축제에 참석하여 제물을 바치고 함께 먹고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 다음 3일 동안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면서 먹고, 떠들고, 즐겁게 놀고, 마지막으로 멕카로 돌아와 카바를 한 번 더 돈다. 성지순례는 건강하고 빚을 지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경우에만 수행한다. 순례 중 죽은 사람은 샤히드(순교자)로 간주된다. 메카 순례는 이슬람 신학, 신비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홍해(紅海)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族)이었으며 마호메트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마호메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으므로 어린 마호메트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자신은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호메트가 메카 근교의 힐라산(山) 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入信)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어 주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40명, 10년 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 인사가 다른 유럽 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마호메트의 운명과 이슬람의 장래는 이 헤지라를 통하여 일변하였다.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무하지룬)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인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마호메트는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메카군과 싸워 630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神殿)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인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의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 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마호메트는 죽기 직전 설교에서  "모든 무슬림은 모든 무슬림과 형제"임을 천명했고, 죽기 전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 caliph(계승자)로 선출했다.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이지만 마호메트가 죽은 뒤에는 그것만으로는 교의상 판단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그러한 때에는 ‘수나(마호메트의 언행)’로써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수나를 중요시하여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派)라고 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는데,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아라비아의 원시 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딪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流派)가 생겨났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꾼을 그 주축으로 하는 하리지파(派)가 그 최초의 것인데,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등지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아들 계통으로 전해졌는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파(派)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슬람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支派)로 분열되어 극단파를 낳았는데, 개중에는 이미 이슬람교로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도 있다. 이같이 이단 종파는 상당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 %에도 못 미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또는 수피파)은 원래 원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 ·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사람을 심판하는 이슬람법에 대한 반동에서 발전한 것으로,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 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⑴ 이슬람권의 확대:마호메트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에스파냐)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江)의 싸움에서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天山南北路]의 투르크족(族)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人)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西)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逆征服)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人)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왕조는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공략, 비잔틴 제국(帝國)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인터넷"http://www.homoreligiosus.net/religion/r-67.html"

 

이슬람 문화 /한국 이슬람교 역사

 

황금의 나라 신라

이슬람측의 역사기록에 나타난 한반도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땅이었다. 1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슬람이 다시 찾았을 때 한반도는 한국전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 참전 터키 군인들은 이 땅에 평화의 종교 이슬람의 씨앗을 뿌리는 선구자가 됐다. 70년대 오일쇼크의 와중에 對중동외교의 중요성을 절감한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서울 이태원에 중앙성원을 짓고 중흥기를 맞으며 교세를 확장했다.

이슬람이 한반도와 처음으로 접촉하는 시기는 기록상 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에 가까웠다. 이슬람이 성립된 7세기 중엽부터 이슬람 문화의 주체들인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끊임없이 중국대륙과 접촉해왔고 그들의 활동영역이 9세기경에는 해로를 통해 통일신라기의 한반도에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해주는 최초의 아랍측 기록은 지리역사학자 이븐 후르다드비가 서기 845년에 편찬한 “왕국과 도로 총람”이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신라로 묘사된 한반도는 쾌적한 자연조건과 풍부한 산물로 인해 매우 살기 좋고 풍요로운 나라이며 특히 금(金)이 많은 곳이었다. 더욱이 이 책은 많은 무슬림들이 이러한 훌륭한 생활조건에 매료되어 한반도에 영구 정착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구체적인 이슬람 종교의 영향을 시사해주는 흔적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교역되던 많은 물품들과 이슬람 문화권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미술·공예 같은 부분적인 문화적 실체들이 신라 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무슬림들의 직접적인 방한이나 중국을 통한 간접경로를 통해 두 문화가 일찍부터 조우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에 직접적인 발단이 된 계기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무슬림 군인들의 참전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다국적군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들은 전선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로 명성을 날렸고 후방에서는 ‘앙카라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적인 모범을 보였다.

(http://monthly.joins.com/orgwin/199812/win43067.html)

우리나라와 이슬람의 교류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60년 전, 아라비아 반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함맏의 선교가 시작되어 634년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키고 세계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어 642년에는 페르시아에, 651년에는 당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멀리 이제 막 통일을 이룬 한반도와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무슬림들이 한반도와 접촉한 최초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서력 661-935)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당과의 협력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또한 그만큼이나 당나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게에서 광범위하게 고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당시 중국의 남동부지역에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무슬림들은 지역적인 근접성을 이유로 바다 건너의 신라와 접촉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역사에 기록된 것은 우선 신라 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서이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에 의해 쓰여진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은 한반도에 무슬림 진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이상의 기록에서 추론되어지는 가정 중에 하나는 처용에 관련되는 것이다. 곧 처용이 무슬림 상인이었다는 설인데, 위의 기록과 삼국사기등에서 처용은 4명의 일행과 함께 외국에서 상륙하여 나머지는 사망하고 처용만이 생존한 실제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여 처용의 무슬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상의 이슬람측 기록과는 달리 한국측 기록에 나타난 무슬림들과의 최초 접촉시기는 11세기초 고려시대 초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5년 (1024년) 9월에 열라자(Al-Raza)등 100여명, 다음 해 하세라자(Hassan Raza) 등 100여명과 정종 6년 (1040년) 11월에 보나합(Barakah)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9월에 Tashi라는 이방국에서 Hasan, Raza와 다른 수 백 여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

이들은 대식(중국음으로는 Tashih로서 아랍어의 타-지르-상인-에서 유래한 당송시대의 음역)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전형적인 무슬림들이다.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중국음으로는 Hui-Hui)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는 데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 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칭이 오늘날 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http://pencil.kyobobook.co.kr/pencil/20012002/3au/1101/sundaymorning_history.html)

 한국이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들은 이상과 같이 국제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부르는 당시의 명칭 곧 대식으로도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여말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 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의식들이 그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뒤바침할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나 주위 한국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적 핵심요소들이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결혼을 통한 접촉과 동화의 예는 흔히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회회인 삼가(Samga)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의 부인이 된 원 공주를 따라 1274년 한국에 온 시종들 중에서 아랍인(혹은 위구르인이라는 설도 있다) 삼가라는 인물이 있었는 데,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한국 여인과 결혼해서 충렬왕에 의해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결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화된 무슬림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선조가 되었고 당시 이름은 1277년 왕명에 의해 바뀌어 지게 되었다. 지금도 덕수 장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가문의 선조가 아랍에서 온 무슬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 가문의 후손들은 50.00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삼가라는 인물의 출처에 관해 그가 아랍인이었는지 터키계 위구르 무슬림이었는지에 대해 의견들이 있다. 위구르 무슬림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조선 초의 기록들에서 보이는 무슬림들의 궁중 의식 참여와 사역원의 외국어 시험 과목이 위구르어 였으며 공식 외국어로서의 위구르어가 교습되었음을 감안한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당시 사회에 이슬람적 영향을 끼쳤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이슬람력(히즈라)의 도입과 사용의 흔적이다. 세종이 농업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역법을 정비하고자 했을 때 종래 중국의 역법은 낡고 오차가 심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중국에서 회회역법(이슬람력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여법을 완성하니 그것이 바로 순 태음력인 칠정산외편이다. 다시 말하면 칠정산외편은 세종이 완비한 한국식 이슬람력법인 셈이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과학기기 발명과 과학 서적 편찬에 관련된 많은 이슬람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후 한반도와 이슬람의 교류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고 만다. 이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 무역권의 쇠퇴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명의 건국에 따른 유교 사상의 부흥이 있었는 데 이와 함께 무슬림들의 상대적 역할 감소가 두드러졌다. 한국과 중국과의 긴밀한 역사적 유대관계로 볼 때 이같은 중국 대륙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1427년 유교주의 이념에 따라 이질적 문화요소에 대한 일대 소탕이 이루어 졌고 여기서 무슬림들의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중국에 등장한 청조의 무슬림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해상세력이 무슬림 세력을 압도하는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도 한반도에서의 무슬림들의 고립화와 단절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절연의 시기는 20세기 초의 개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http://muslimkorea.net/historyofislam.htm

도입기

한국 전쟁(1950. 6-1953.7)의 폐허속에 이슬람의 씨가 이땅에 뿌려지기 시작하였으니, 유엔 평화 유지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의 주베르 코치와 압둘라흐만 형제는 북한 공산당과 전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천막으로 이슬람 성원을 세우고 한국인에게 이슬람 복음을 전하고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가르쳐 주었다.

터키군의 지원으로 서울 이문동에 퀀세트 임시성원과 텐트 3동으로 청진학원을 개원하고 예배근행과 아울러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불우 청소년 약 120명에게 중동과정 교육과 이슬람 교육을 병행 실시하였다.

준비기

초기 한국 이슬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조직화하기 위하여 "한국 이슬람교 협회"가 발족되고 초대 회장에 우마르 김진규 형제를 추대하였다.

한편 이슬람 국가와의 유대강화와 협조체제를 이룩하기 위하여 임원진이 이슬람국가를 순방하고 최초로 말레지아 클랑 무슬림 대학에 무슬림 지도자들의 내한을 적극 추진, 이슬람 선교기반을 마련하였다.

말레지아 성원의원 우바이둘라를 단장으로 한 14명의 이슬람 사절단이 당시 이슬람성원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라자크 부수상부처, 국회의장 하지 무함맏 노아 형제등 정부 차원의 인사들이 내방하였으며, 특히 하지 무함맏 노아 형제는 한국에 항구적인 이슬람 전파를 위하여 본국 정부에 건의함으로써 말레지아 정부는 성원건립 기금으로 미화 33,000달러를 희사하였다.(1963)

당시 전후 한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한정된 재원으로는 성원 건립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어 한국 무슬림들의 부푼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정착기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새로운 지역에 선교기지를 확보하고 정착시키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듯이 한국 이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도 초기 한국무슬림 형제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깊은 신앙을 키우며 헌신과 희생으로 한국 이슬람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재정비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를 설립 한국 정부에 설립 인가를 받았다.(허가번호 114호 67.3.13)

이로써 체계적인 한국 이슬람 선교의 기틀을 세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도약기

한국 무슬림의 오랜 숙원이었던 중앙성원이 준공되었다.(1976) 중앙성원과 이슬람센터의 개원은 현재까지의 한국 이슬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20여 이슬람국가에서 온 55명의 대표들이 개원식에 참석하여 한국인 사회에 이슬람 붐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 장엄한 개원식의 결과로써 이슬람에 귀의하는 형제들이 급격히 증거하였다.

최초의 한국 이슬람 중앙성원의 개원을 시작으로 한국에 급속한 이슬람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한국 무슬림은 이슬람 신앙을 고취시키고 무슬림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1979년 성지순례단을 구성하여 맥카 순례를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중동건설붐(1974-1980)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관심도를 고조시켜 이슬람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현황

1. 서울 중앙 모스크(용산구 보광동 )

2. 부산 모스크

3. 광주 모스크

4. 대구 모스크

5. 안양모스크

6. 이슬람 문화센터(서울 중앙 모스크)

7. 이슬람 문화센터

from http://www.koreaislam.or.kr/history2.htm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전과 같이 적당하게 내리시리라"(요엘 2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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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교 1300년 피의 역사 유럽

2007/03/16 11:37

복사 http://blog.naver.com/sweetie74/40035471963

기독교와 이슬람교 1,300년 피의 역사
 
문명의 충돌을 넘어 문명간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조차 그 과정에서 종종 이슬람권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거나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권을 해석해 대화가 다시 충돌로 이어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회들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고 보통 시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서구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슬람 사상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미친 인물들을 선정할 때 항상 무하마드를 꼽는다. 하지만 실제로 서구는 무하마드와 이슬람을 오랜 기간에 걸쳐 집요하게 왜곡했다.

역사적으로 살피자면 서구는 중세 시대부터 이슬람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일으킨 십자군 전쟁 역시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극단적인 열등감이 폭발한 결과였다. 현재의 국제상황을 문명충돌로 보는 견해도 이런 서구인들의 왜곡 가운데 하나다. 이슬람 문명은 서구 문명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자체 규범과 법을 가지고 있고, 타 문화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관용적 문명이기 때문이다.

중세부터 시작된 서구의 이슬람 왜곡

7세기에 시작된 이슬람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 세계로 전파된 역동적인 종교이며 문화다. 610년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아 시작된 이슬람교는 무하마드가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며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무하마드 사망후 정통 칼리프 시대(632~61)에 세확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되어 이슬람 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아랍제국인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통일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 왕조(750~1258)를 건설했다.

문명공동체로서의 이슬람 문명권은 이 압바스왕조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아 압바스 왕조가 무너진 뒤 중앙집권적인 통일 이슬람 제국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슬람교의 부단한 전파와 더불어 도처에 이슬람 국가들이 세워져 이슬람 문명권은 점점 퍼져 나갔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북으로 뻗어나가 7세기 초반에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 결과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방이 이슬람화 되었고, 13세기에는 소아시아반도가 이슬람 영역이 되었다.

<!--img2--><!--img2end-->그보다 앞선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이란고원을 석권했고, 8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대륙의 북서부까지 진출하였다. 8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키르키스스탄의 탈라스에서 격파해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권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동쪽으로 중국의 수도인 장안 및 내륙지방은 물론 만주와 한반도까지 무슬림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슬람을 전파했다. 한편 해상 실크로드인 뱃길을 통하여 남방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은 13세기 이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및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까지 그 위력을 떨쳤다.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7세기 후반에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리비아·튀니지·알제리 및 모로코로 뻗어나갔다.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슬람은 이 대륙의 해안과 내륙지방으로 나아가 동쪽 해안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케냐·탄자니아·잔지바르·모잠비크·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고 서쪽해안으로 모리타니아·세네갈·감비아·니제르 및 나이지리아로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차드·수단·우간다에도 뿌리를 내렸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석권한 것은 이슬람 초기였으나 동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으로 진출한 것은 14, 15세기 이후였다.  


유럽을 석권한 이슬람

8세기 초에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를 전진기지삼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정복하고 프랑스까지 침략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슬람은 700년 이상이나 그곳에서 권세를 누렸다. 이후 13세기부터 기독교 세력의 재정복에 밀리다 17세기 초에는 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9세기에는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였다. 특히 846년 시칠리아에서 출발한 무슬림 해군은 티베르 강을 따라 이탈리아의 로마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잇따른 무슬림 군대의 침략은 기독교 세계의 반격을 불러왔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대의 수많은 시도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후 유럽에서 보여준 기독교 세계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11세기말 시칠리아에서 무슬림들을 축출하였고 1492년에는 스페인을 재정복했다. 7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무슬림 통치를 끝내기 위한 서구인들의 오랜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승리는 기독교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향해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들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237~40년 킵차크 공국으로 알려진 타타르족이 유럽의 동부 지역과 러시아를 정복하였다. 1252년 왕을 비롯해 부족 전체가 공식적으로 이슬람에 귀의하자 여러 동부 유럽의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는 무슬림 통치 아래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른바 타타르의 굴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킨 15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인들은 무슬림의 통치를 받았다.

한편 오스만 터키 제국은 아톨리를 정복하고 15세기 중반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발칸 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빈을 두 차례나 공격하여 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터키 제국의 이슬람 세력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옛유고슬라비아의 남부지역 및 그리스를 석권했다. 이들은 코카서스 반도로도 뻗어나가 옛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과 코카서스 지방도 이슬람권으로 만들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3세가 유럽 문화의 교두보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터키 무슬림들은 이후 근세 400년 동안 문화적 야만인으로 규정한 유럽인들을 지배하고 호령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시대를 누렸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파되어 공간적으로는 주변 문화의 수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고대문화까지 재생시켜 이슬람 문화라는 종합문화를 창출하였다. 이렇게 이슬람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었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하여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선 지역에서 그리스·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방대한 지역을 처음에는 군사적, 정치적 권력으로 통치했고, 그후 훨씬 오랜 기간 아랍어와 믿음을 통하여 한 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그러므로 아랍인들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문명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는 서로 맞서던 두 문화, 즉 그리스·로마 및  다양한 지중해 문화와 인도·중국문화와 오랜 기간 접촉했던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인종·신앙 및 문화가 이슬람 영역 내에 공존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생성된 것이다. 역사학·지리학은 물론 철학·천문학·대수학·물리학·화학·의학·연금술 등이 이슬람 세계에서 독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이 암흑의 상태에 있을 때도 세계 문화의 정체를 막았다. 이슬람 학문과 과학이 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8~16세기 동안 육·해상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활동한 무슬림은 이슬람 문화를 동서로 퍼뜨렸고 결과적으로 세계 문화의 다양화와 일체화에 이바지했다.

이슬람 문화가 만든 유럽의 르네상스

유럽이 암흑의 중세 시대를 맞기 전부터 이슬람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통해 그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7세기 이슬람 대제국이 건설되었을 때만 해도 유럽은 후진 지역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은 빠짐없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한 이슬람 문명은 13세기를 전후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어 낙후된 유럽으로 다시 전달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지리학·천문학·의학·수학 등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읽히게 되었다.

<!--img3--><!--img3end-->이슬람 문화가 유럽 문화에 얼마나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라비아 숫자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인도 숫자다. 이 인도 숫자를 아랍인들이 수입하여 여기에 ‘영’의 개념을 정립하여 십진법을 완성하였고 이 숫자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현재까지도 인도 숫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로 불린다. 이러한 과정을 계기로 유럽은 잃었던 문명의 전통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르네상스를 맞아 급기야 근대에 와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유럽이 암흑기를 벗어나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을 때조차 막강한 이슬람 제국에 대한 예전의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은 이 당당하고 역동적인 문화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불안하고 열등하게 만드는 존재에 대한 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떨어진 이슬람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이슬람교도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으며, 심지어 같은 유럽인들에게조차 충격적인 대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후 이슬람교도들은 신성한 곳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더러운 기생충으로 간주되었다. 십자군 사이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부르는 공식 은어는 ‘더러운 쓰레기’였다.

그러나 12~13세기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그후 오스만 터키는 유럽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서구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에 대해 도저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슬람교에 대한 두려운 환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신들의 불안이 반영된 이슬람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의 영적 지도자 무하마드는 어머니들이 말 안 듣는 아이를 겁주기 위해 써먹고는 했던 이른바 악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십자군전쟁 당시 불려진 ‘롤랑의 노래’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연원을 갖는 무하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증오와 불신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불안감과 문화적 열등감의 표현이었다.

이후 이슬람권은 유럽에 역전되어 18~19세기 들어서는 모두 유럽의 식민지가 된다. 20세기 들어 지금의 나라로 독립했지만 서구 제국주의의 분할통치 전략으로 수십개의 왕정으로 갈라진 상태다. 이 왕정국가들은 대부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구에 굴종하면서 제대로 국민 편에 선 적이 없다.

이들 국가는 크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로 나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가 완전히 망가졌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국가들은 거개가 독재로 흘렀다. 결국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체제를 다 해보았으나 둘 다 제대로 안 됐으므로 이제는 이슬람식으로 하겠다는 정서가 일반적이다. 이런 정서를 서구에서는 원리주의라고 싸잡아 얘기하고 있다.

이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전통 이슬람이 부패 무능하여 무슬림 사회가 쇠퇴 몰락하자 이를 재생 부흥하겠다는 개혁 차원에서 18세기 중엽 자발적으로 시작된 흐름이다. 서구 열강의 중동 진출 이후 외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슬림 국가 대부분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또는 그 영향권에 들어가 사회적으로 파탄에 이르자 이 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그 구호는 원래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즉, 이슬람의 원점이며 법원인 꾸란(코란)과 하디스(무하마드 언행록)·이즈마(합의)·끼야스(유추) 등에서 해결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법원에 입각하여 해석상 문제가 없으면 수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시대적 요청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후 이 현상은 시대 변화에 따라 부흥주의·개혁주의·급진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부흥주의자들은 비이슬람권 세계와 상관없이 이슬람 사회를 스스로 분석 비판하여 그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는 이슬람이 가장 완벽한 체제라는 인식 아래 사회 모든 곳에 이슬람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었다. 따라서 이 경향은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종교적 정신을 특히 강조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슬람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비 무슬림 국가보다 낙후되어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이슬람 공동체의 단점을 보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이슬람 정신에 유럽의 앞선 기술적 분야를 접목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슬람 급진주의는 부흥주의와 개혁주의가 정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억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위의 둘을 혼합하였으며 지하드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와 같이 개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압력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의 욕구가 증가하는 원인은 의료시설의 확충으로 인한 인구 급증과 젊은층의 비중이 높아진 탓이다. 정부의 권력남용과 부정행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일반화된 것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불만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나라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한 나라

서구가 지목하는 문제의 원리주의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급진주의적 원리주의다. 이 원리주의집단은 극소수다. 따라서 이슬람 정신을 강조하는 모든 단체들을 급진주의적 원리주의 단체로 오인하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급진적 원리주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슬림들이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로 여겨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사실상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길지 않다. 현대 미국의 퇴폐적인 성문화나 극단적인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반감도 이유 중 하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중동 지역은 서구 유럽 제국주의 시절 대부분 유럽 식민지로 전락하여 그들의 식민통치를 맛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이 지역에 진출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보다 크다.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그 역사적 관계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기원 후 2세기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난 이후 십자군 원정 기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른바 ‘안티 세미티즘’(반유대주의)을 국내 통치수단의 하나로 도입해 유용한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런 박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라는 자구책을 찾게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터키 제국내 아랍연방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성서에 기록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지속적으로 정착촌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국가건설 준비를 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반터키 운동을 촉발시켰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이중의 비밀 약속을 맺은 것이다. 전쟁후 이러한 비밀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령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대규모 유대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두 진영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 지역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후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의결했다. 아랍인들은 미국이 이러한 과정을 주도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할이 유대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이 지역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와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은 난민 지위로 떨어지게 되어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날 전쟁이 터졌는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 후 발생한 4차 전쟁 때까지 아랍 진영은 여지없이 그들의 자존심을 구기게 된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결과가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 때문이라고 여기며 그 반감을 키워 나갔다.

이는 아랍인들의 자부심에 대한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아랍 세력은 15~16세기 정도까지는 유럽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군림하다 그 후 유럽에 역전되기 시작하여 18, 19세기에 들어 최악의 상태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지금의 나라로 독립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여러 개혁사상들이 나왔으나,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성공하여 정착되지는 못했다. 서구의 정치·경제에 예속된 데 대한 분노와 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당하자 아랍 세력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아랍인의 자존심 무참히 짓밟은 이스라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연히 반정부적 성격을 띠게 되어 집권 세력들과 갈등을 빚으며 탄압받게 된다. 이 탄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혹독해졌다. 자연히 원리주의 단체들도 지하로 숨어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행동 방법으로 게릴라식 테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충돌처럼 보이는 요즘의 사태들도 따지고 보면 아랍 국민들의 감정을 제대로 대변해 주지 못하는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일차적이며, 그 부패하고 나약한 현 정권을 뒤에서 도와주는 서구 세력에 대한 반감이 이차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 세력의 대표주자인 미국에 대한 반감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연유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근본 배경에는 이슬람의 정교일치 사상이 깔려 있다.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미국과 이란의 갈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미국과 리비아의 갈등,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갈등,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갈등, 소련과 체첸의 갈등,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레바논 내전, 프랑스와 알제리 이슬람 세력의 갈등,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갈등의 배경에는 바로 이슬람세력과 서구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압제를 경험한 신생 아랍 국가들은 독립 후 채택한 사회주의 이념과 경제체제가 더 이상 국제경쟁력이 없고 국민 복지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은 서구와의 협력관계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친서방 성향의 온건 왕정국가들 조차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에서 서서히 민주주의와 인권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요르단·모로코·시리아·바레인에서 젊은 국왕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슬람권 전역에서 세대교체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강경한 반미국가인 리비아도 최근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경제제재를 철폐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란은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정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권과 서구의 갈등을 예단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서구의 제3세계 지배 음모론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문명간 대화’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창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스스로도 이탈리아와 바티칸 교황청 방문을 시발로 유럽·서구 국가들과의 관계증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타미의 이런 노력도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국내에서 도전받고 있다. 부시 정권은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이슬람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의 영향으로 세계는 제1세계와 제3세계간에 심각한 갈등과 적대감에 직면해 있다. 반테러리즘이라는 이름 하에 인종차별과 억압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악순환도 깊어지고 있다.  

西歐의 양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봉사와 희생과 인내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1세기 동안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그 자원을 배경으로 선진 공업국으로 또 경제·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한 서구의 양보가 필요하다. 21세기를 맞아 서구는 빼앗긴 자들의 권리와 억울한 응어리에 좀더 유연한 자세로 접근하여 그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동시에 무슬림들도 중동의 근세 역사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에 걸맞은 방향으로 체제를 개혁하고 의식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이미 서구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와 대항보다 전통적인 이슬람 규범 속에서 새로운 발전과 변화를 수용하자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서구식 제도나 체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슬람적인 틀에 바탕을 둔 내적 혁신과 적절한 재해석의 방법을 통해 사회의 발전과 현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도 이제 그들의 한을 털어 버리고 지난 세기까지 수많은 사상, 종족, 문화 등과의 접촉을 이루어왔고 그 시대에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점을 나름대로 치유해 왔듯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그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믿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아무리 굳건히 지킨다 해도 세상에는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종교의 표현 형식으로 나타난 다른 문화와 문명도 인정할 수 있고 문명의 공존과 대화에 대한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인류에게는 9·11 테러 사건과 같은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희생과 인내가 절실하고 시급한 시대다. 

[출처] 기독교와 이슬람교 1300년 피의 역사|작성자 스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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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뉴시스】MBC가 특별기획한 드라마 '선덕여왕'이 14일 오후 5시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지역유관기관...월까지 방영될 예정이다. 극본 김영현, 박상연, 연출 박홍균, 선덕여왕역 이요원, 미실역 고현정을 비롯해 박예진, 엄태웅, 조민기...

고선지 장군의 무용담 생생 ‘실크로드의 왕~’

본지 신춘문예 작가 차경화 씨 장편소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서역을 정벌했던 장수 고선지.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나들며 72개국을 정복했고, 당나라의 땅을 중앙아시아까지 넓혀, 실크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한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군이다. 세계 4대 발명품의 하나인 종이가 중국에서 서양에 전해진 것이 고선지 장군의 서역 정벌 때였다. 그가 세계 문명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실크로드의 왕 고선지>(차경화/ 솔지미디어)1, 2권은 고선지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고선지는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이었던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에 가서 유격장군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다. 740년경 병력 2000명을 이끌고 톈산 산맥 서쪽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가 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에 올랐다. 747년과 750년 1, 2차 서역원정에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위협하던 토번족과 그의 동맹국인 소발률국 및 타슈켄트 지방의 석국 등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여 명성을 떨쳤다. 751년 서역 각국과 사라센의 연합군이 석국 정벌을 보복하려고 쳐들어오자,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탈라스 대평원으로 제3차 원정에 출전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르룩 군에 의해 배후에서 공격을 받고 섬멸당해 후퇴했다. 귀국 후 하서절도사로 전임되어 우우임군대장군에 임명된 후, 755년 밀운군공에 봉해졌다. 그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로 출전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방어 담당지역인 섬주(陝州)를 떠나 동관으로 이동한 사실을 감군(監軍)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모함해 진중에서 참형(斬刑)되었다.

이 책은 이와같은 세계사의 영웅, 고구려인 고선지 장군의 생생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한반도에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끌려 간 고구려인들. 나라를 잃고 낯선 나라의 백성이 되어 슬픈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서러움은, 이 소설을 쓰게 한 촉매제가 되었다”고 소설을 쓰게된 이유를 밝혔다.

작가 차경화는 2008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돼 현재 소설 강의와 창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본지 <여시아문>필자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