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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강

그린페 2009. 4. 26. 01:01

'장자 or 형제?' 후계구도 '안갯속'
[50대기업 완벽 大해부] 동국제강③ 경영승계 어디까지?
2009년 04월 24일 (금) 11:15:15 이광표 기자 pyo@newsprime.co.kr

[프라임경제] 50년이 넘도록 철강종가집의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동국제강은 장경호 창업주와 장상태 2대회장에 이어 3세경영 체제가 완료된 상황이다.

장상태 2대회장이 별세한 뒤, 장 전 회장의 장남인 장세주(56) 회장을 오너로 하는 동국제강 계열과 창업주의 5남인 장상건(74) 회장의 동국산업, 6남인 장상돈(72) 회장의 한국철강 계열 등으로 분리되며, 형제간 분할 구도도 이미 매듭지어진 상태다.

   
 
동국제강은 유니온스틸을 비롯해 동국통운, DK유아이엘 등 국내 1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장세주 회장은 동국제강의 최대주주로서 현재(금융감독원 전자자공시 기준 '08.12.31'일자)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27.1%의 지분 중 15.26%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장 회장은 핵심계열사인 동국제강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한 계열사 출자를 통해 그룹 지배력을 높이고 있다.

한편 장 회장의 친동생이자 그룹 부사장으로 형제경영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장세욱 부사장은 지주회사 격인 동국제강의 지분 10.21%를 보유하며 2대주주에 올라있다.

◆ 선익씨, 4세시대 개막?

한편 2001년 그룹 회장에 오른 장 회장이 아직 왕성한 경영활동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후계구도를 논하기에 이른감이 없지 않지만, 동생 장세욱 부사장과 장남인 선익(28)씨와의 후계 경쟁구도가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동국제강은 3세경영 체제까지 이어져오는 동안 장자승계 원칙이 고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선대 회장들의 타계에 따른 불가피한 경영승계였다고는 하지만 이 같은 원칙이 또 한번 이어진다면 선익씨로의 경영승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선익씨는 지난 2006년 동국제강 신입사원 연수에 ‘인턴사원’으로 참가하며 눈길을 끈 바 있다.

당시 연세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익씨는 4대째 내려온 가업 체험을 통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인턴사원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했었다.

아직 동국제강으로 입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지만 그룹은 이미 입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남은 공부를 마친 뒤 그룹 내에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선익씨가 동국제강에 입사할 경우 동국제강그룹은 회사를 세운 창업주인 장경호 회장과 고 장상태 회장, 장세주 회장에 이어 ‘4세 시대’를 알리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선익씨는 그룹 지주회사격인 동국제강의 지분 0.24%를 보유하며 서서히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그룹 안팎에서는 현장의 경험을 중시하는 동국제강의 전통을 미뤄볼때 선익씨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차근차근 승진 단계를 밟아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실제 장세주 회장도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뒤 경리부·일본지사·인천제강소장·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1998년이 되서야 대표이사에 오른바 있다.

   
<3세경영 체제가 완료된 동국제강의 향후 후계구도를 두고 엇갈린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장세주 회장(왼쪽)과 장세욱 부사장.>
◆ 형제경영이 형제승계로?

일각에서는 그룹 안방 살림을 맡고 있는 장회장의 친동생 장세욱 부사장으로의 후계구도도 조심스레 점치고 있다. 선익씨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점과 지분으로 보나 회사에 끼친 공적으로 보나 장 부사장이 가장 유력하다는 이야기다.

재벌 오너일가의 경영권 세습이 대부분 부자세습으로 이뤄진다 하더라도 두산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등 형제승계를 통해 성공적인 후계구도를 안착시킨 곳도 없지 않기 때문에 형제승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육사 41기인 장 부사장은 지난 1970년 소령으로 예편한 후 동국제강에 입사해 부사장에 까지 올라왔다. 현재 장 부사장은 장 회장에 이어 동국제강의 2대 주주이자 명실상부한 2인자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국제강 후계구도에 대한 엇갈린 전망 속에 향후 후계구도에 대한 재계 안팎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있는 아이들 50여명이 배운 것 중의 하나가 `기부'라고 한다.
`기부천사' 문근영을 따라 잔돈을 돼지저금통에 모은 뒤 이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아이들의 온정이 2년째 이어지고 있다.

 

박태식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상무는 5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한 뒤 "직접적인 영향은 없겠지만, 한반도 긴장 고조와 국제신인도 하락 우려로 기업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이미 남북관계에 따라 한국의 경제평가가 디스카운트 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면서도 "국내에 유입된 투기자본들이 불안을 틈타 들어왔나 나갔다를 반복할 수 있고, 시장이 요동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해정 현대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시 "북한의 로켓발사가 한국의 경기침체 회복속도가 지연돼 침체 국면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며 우려했다.

이 연구원은 "북한의 로켓발사에 따라 경제 부문에서는 남북 경협의 축소 및 중단 가능성이 증가되고, 경제 위기에 안보 위기까지 겹쳐 한국 경제의 회복 지연과 침체 중장기화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떡썰기와 글쓰기(한석봉증유여장서첩)

여러분은 어머니가 밤중에 등잔불을 끄고 떡을 썰면서 아들에게 글씨를 쓰라고 시켰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 바로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지요. 옛날에는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서 글씨를 어떻게 쓰는가를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모든 글들은 직접 써야 했기 때문에 글씨를 잘쓰는 사람을 존경했지요. 다른 나라와 교역할 때에도 직접 쓴 글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너무 글씨를 함부로 쓰지는 않나요? 자신의 마음을 담아 예쁘게 써보세요.


조선시대의 글씨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많았습니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권근·황희·맹사성 등이 있었으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은 글씨만 잘쓴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 능하였으며 예술 전반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습니다. 조선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 한호를 들 수 있습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숙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부터 우리 나라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가서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혔습니다. 글씨를 쓰는 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서법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나라의 학술은 다양하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석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김정희, 신위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한석봉(한호)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서예가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손꼽히는 한석봉은 일찍이 어머니의 격려로 글씨에 힘을 기울여, 왕희지의 필법을 익혔으며 모든 글씨체에 뛰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힘으로 결국 스물다섯 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나라의 문서를 바른 글씨로 쓰는 사자관이란 벼슬을 얻은 그는 점차 그 명성이 높아져 갔습니다. 한석봉은 명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그 정묘한 글씨체로 명성을 떨쳤으며, 우리 나라 서예계에서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중국의 글씨체를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 나름대로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습니다. 선조도 한석봉의 글씨를 특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있고, 그가 쓴 비문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등이 있습니다


한석봉의 서첩

조선 중기 명필 한석봉(1543~1605)의 노년 작품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실제로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던 <유금강산기> 친필본(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첩이 공개됐습니다. 가로 20㎝, 세로 25.5㎝의 한지에 모두 12쪽으로 구성된 이 서첩은 해서와 행서로 단정하고도 부드럽게 씌어져 있는게 특징입니다. 전반부 여섯쪽엔 1603년(선조 36) 8월에 금강산을 함께 여행한 한석봉과 최립의 금강산 감상이 실려있습니다.

한석봉 서첩

후반부 여섯쪽은 이호민이 한석봉과 최립 일행의 금강산 여행 이야기를 전해듣고 함께 가지 못했음을 애석해하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몇몇 전문가들이 말로만 전해져오던 한석봉의 <유금강산기>가 틀림없다고 말했지만 아직 한석봉의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그러나 만약 한석봉의 글이 맞다면 국보급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랍니다. 한편 몇몇 한석봉 연구가들은 이 작품이 친필본이 맞을 경우 한석봉의 남아 있는 작품일 것이라 합니다. 한석봉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 등 10여 점이 남아 있으며 이중 《한석봉증유여장서첩》이 보물 제1078호로 지정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