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페 2009. 1. 27. 04:31
푸틴 "美-러'관계 조심스레 낙관"
[연합뉴스] 2009년 01월 26일(월) 오후 11:15   가| 이메일| 프린트
블룸버그 TV와 인터뷰에서(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 러시아 최고 실력자인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출범과 관련, 미래 양국 관계에 대해 낙관론을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

푸틴 총리는 25일 블룸버그 TV와 인터뷰에서 조지 부시 전 행정부가 추구한 외교 정책의 부정적 결과를 나열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동유럽 미사일방어(MD)계획,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등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신호들을 보내오고 있기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 아래서 미국과의 미래 관계를 `조심스럽게' 낙관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 주변에서 MD 계획을 서두를 필요가 없으며 좀 더 분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우리는 그런 발언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MD 계획의 실효성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다.

부시 전 행정부는 이란과 북한 등 소위 `불량국가'의 잠재적 미사일 위협에 맞서 MD 계획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여왔고 러시아는 이 계획이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 지난해 말 폴란드 인근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 단거리 요격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푸틴 총리는 또 "`오바마 팀'이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의 나토 가입만이 이들 국가의 안보를 확보하는 길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는 것도 반가운 신호"라면서 "우리는 국제 안보에 최선의 방안을 찾는 일이라면 어떤 논의도 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는 지난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 속에 나토 가입 전단계인 회원국행동계획(MAP) 승인을 추진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눈치를 본 일부 서방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와 함께 푸틴 총리는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분쟁을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 부시 행정부와 유럽연합(EU)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hyunho@yna.co.kr

백년전에 갔다온 중국 일조시 취재여행




배타고 떠나는 여행(22)/평택-일조 항로를 가다
C&훼리 KC레인보우호 타고 산동성 여행
세계 문화유산 공묘, 태산 등 볼거리 풍성

▲ 평택-일조간을 운행하는 C&훼리의 KC레인보우호
평택-일조간 카페리를 타고 일조시와 곡부, 태산을 둘러보게 된 것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한강 유람선이나 단거리 카페리 이외에 타보지 못했던 기자에게 갑자기 찾아온 평택-일조 카페리 취재기행은 단순한 해외 취재 여행보다 거대한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통해 떠나는 최초의 바다여행이었다. 해외로 간다는 것, 말로만 듣던 태산을 올라간다는 것, 공자의 사당을 방문한다는 것보다, 거대한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통해 여행을 간다는 것이 기자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몇 시간의 단거리 항해가 아닌 선상에서 숙박한다는 사실이 다른 취재기행, 다른 해외여행과 달리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다.

기자는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4박 5일간 C&훼리의 협조로 평택-일조간을 운행하는 C&훼리의 KC 레인보우호를 타고 일조시와 산동성 일대를 돌아보고 왔다. 일조항과 산동성의 물류 환경, 항만 현황, 산업분포 등 산술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배타고 떠난 여행’에 대한 감상을 주로 서술하고자 한다.

■ 부드러운 출항, 시원한 바람
이번에 같이 일조를 방문하게 된 해운전문기자단은 C&훼리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타고 평택항에 도착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니 평택항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교통정체가 약간 있기는 했지만 평택항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약간 늦은 점심을 먹고 KC 레인보우호에 승선했다. KC 레인보우호는 총 길이 170m, 폭 25m, 총톤수 2만 4946톤, 여객정원 785명이고 컨테이너는 210teu까지 적재할 수 있으며 평균 25노트의 속력으로 평택과 일조간을 매주 3항차 운항하는 카페리선이다.

평택항 여객터미널에서 출국절차를 받은 후 직접 승선해보니 작은 호텔 로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안내실에서 키를 받아 숙소로 이동하면서 배 특유의 구조적인 특성과,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편의시설이 조화를 이루어 선상 호텔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C&훼리측에서 로열스위트 룸을 기자단에게 배정해 주었는데 방 규모가 약간 작은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호텔의 트윈 룸과 다르지 않았다.

▲ 서해대교를 뒤로하고 일조로 출항했다.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니 풍경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자가 약간 둔감한 편이긴 하지만 배는 출항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부드러운 출항을 했다. 급히 카메라를 챙겨 선미 갑판으로 나와 멀어지는 평택항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맞고 있자니 배타고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선상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훌륭했다. 일반 식사와 함께 스테이크가 제공되었는데, 가격은 일반 식당가격인 5000원이었다. 평소 멀미가 심한 기자는 멀미걱정에 속을 비울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다 먹어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멀미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였다.

선내에는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이 있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설은 바다를 바라보며 탕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사우나 시설이었다. 기자단은 객실마다 욕실이 있어서 이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반 이코노미 룸이나 비즈니스 다다미 객실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이외에도 노래방, 편의점, 면세점, 체육시설 등의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선상에서도 쾌적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 선내를 돌아보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선박여행만의 매력을 즐길 수 있었다.

■안개 자욱한 일조항
금요일까지 업무를 마치고 토요일 바로 출발했기 때문에 약간 피곤했던 기자는 악명이 자자한 배멀미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약간씩의 움직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KC 레인보우호가 규모가 있는 카페리선이라 파도와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아 선내 생활은 육상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침에 일어나 선미 갑판을 나와보니 어느덧 저 멀리 육지가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일조항의 모습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침 바다는 안개가 자욱했으며, 안개 너머로 벌크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크레인들은 하역작업의 여념이 없었다.

일조시는 2003년에 평택과 항로가 개설된 항만도시로 약 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중소 도시이다. 그러나 일조시가 가지고 있는 항만 및 해양관광 인프라 덕분에 최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도시로 2003년에 'China Top Tourist City'로 선정된바 있다.  여객선 전용 부두가 없어 일반 부두에 정박했는데 아직은 항만 자체에 정비가 덜 되어 있어 환경은 많이 열악한 편이었다.

▲ 홍보관 옥상에서 바라본 일조항 갠트리크레인
기자단은 곧바로 일조항 홍보관을 방문 일조항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일조항관계자는 일조항이 컨테이너보다는 벌크화물의 처리량이 더 많은 항만이지만 최근 선진적신 시스템과 컨테이너 하역장비를 확충해 컨테이너 처리량을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2006년 컨테이너 처리량은 약 25만teu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100% 증가한 50만teu가량을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보관 옥상 전망대에서 일조항의 거대한 갠트리크레인을 보고 있자니 일조항의 힘찬 발걸음이 느껴지는 듯 했다. 기자단은 일조항 항만국 맹칭뺘오부국장, 일조시 여행국 장롱잉 부국장과 일조시내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C&훼리 홍보 총괄 명재곤 상무는 “일조시 정부가 C&훼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준데 감사한다”며 “초기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일조시 덕분에 현재 평택-일조간 항로가 정상화 될 수 있었다”며 감사했다. 이에 장 부국장은 “C&훼리 덕분에 일조시도 발전할 수 있었다”며 “일조시와 C&훼리의 발전을 위해 상호 노력하자”고 말했다.

■ 곡부 가는길
기자단은 일조시를 뒤로 하고 곡부로 향했다. 곡부는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의 무덤인 공묘, 공자 가족의 묘지인 공림, 그리고 공자 후손들이 살던 공부로 구성되어 있다. 일조에서 곡부까지 거리는 약 300km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약 3시간 정도면 곡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 일조와 산동지방을 연결하는 일동고속도로. 교통흐름은 원활했다.
곡부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일동고속도로(日東高速道路)로 차량 흐름이 많지 않아 교통 흐름은 수월했다. 다만 교통인프라만큼의 교통인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상당히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우선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과적 차량이 많았다. 일반 트럭은 대형트럭까지 엄청난 화물을 적재하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연식이 오래된 차량이 많아 한 번에 사고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과속 차량이 상당히 많았다. 화물차량과 달리 일반 승용차량들은 높은 품질의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기자가 탄 버스가 약 100km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일반 추월 차량들이 순식간에 버스를 추월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어도 150km이상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버스들도 비슷했다.

이와 더불어 고속도로에서의 역주행, 무단횡단 등 자칫하면 대형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문화혁명과 개발제한의 곡부

▲ 내성과 외성을 구분하는 곡부성벽과 통행문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곳이며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으로 산동지방의 관광명소이자 자랑이다. 중국 남부 사람들이 ‘남부엔 많은 기인이사가 있다’고 자랑하면 산동사람들은 ‘산동엔 한명의 천재가 있다’고 답한다고 한다. 바로 그 한명의 천재가 바로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만든 공자이다. 그래서 곡부는 산동 지방의 자랑이다. 하지만 곡부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탈 유교사상 운동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상당수 많은 문화재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 되었는데, 문화재 파괴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바로 공묘의 바로 옆에 있던 곡부사범대학 학생들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중국정부에서 수립한 개발제한 정책으로 인해 개발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어 지역민들은 불만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곡부는 우리 작은 군 소재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성벽을 기준으로 내성과 외성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공씨 가문과 관련이 있거나 공직에 몸담고 있던 상류층이 살던 사는 내성지역은 현재 완전한 개발제한 정책으로 2층을 초과하는 건물을 건립할 수 없게 되어있는데 비해, 중하층민들이 거주하던 외성지역은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되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여 양 지역의 위치 역전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 곡부사범대학. 내성에 위치해 있다.
기자단이 묶었던 숙소는 내성 공부인근에 위치해 있는 궐리빈사였는데 2층짜리 호텔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2층의 단조로운 모습에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었지만 내부에 들어가니 리조트형식의 깔끔하고 포근한 호텔이었다. 마침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관광객들이 같이 투숙해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호텔이었다.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은 후 젊은 기자들끼리 내성을 둘러보았다. 호텔을 나오자마자 인력거꾼들이 한국말로 ‘천원’을 외치고 있었다.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인력거였는데 뭔가 어색함에 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든다. 숙소 인근에 곡부사범대학이 있어서인지 대학입구 주변으로 많은 옷가게와 미용실 등이 영업을 하고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한류의 영향인지 상점들에선 한국가요를 틀어놓고 있는 등 전통관광지다운 모습이라기 보단 대학가 같은 모습이었다. 도로에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택시, 마차, 인력거 등이 요령껏 잘 피해가고 있었다.
든든한 저녁을 먹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벼운 복장으로 이국의 활기찬 저녁산책을 즐겼다.

■ 곡부에서 杏壇聖夢은 봐야 한다.

▲ 조명과 음향시설이 훌륭한 행단극장
일몰 후 기자단은 곡부 외곽에 행단극장(杏壇劇場)에 행단성몽(杏壇聖夢)을 보러 갔다. 행단성몽은 공자의 사상인 인(仁)을 소재로 인류가 모두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자는 주제의 집단 무용극인데 200~300명의 대인원이 출연하는 거대한 공연으로 곡부에 오면 꼭 봐야 하는 필수 코스라는 가이드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공연을 관람한다고 했을 때 기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워낙 기자가 무용 등 예술분야에 대한 조예가 부족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며, 더군다나 관광지의 그저 그런 패키지 관광코스쯤으로 과소평가했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관람하고 나서 기자의 짧은 식견과 편견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게 되었다.

▲ 행단성몽 중 견우와 직녀
공연이 진행되는 행단극장은 호텔에서 자동차로 약 5분여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산책 겸 해서 극장까지 걸어가는 게 더 좋을 듯 했다. 행단 극장은 야외극장으로 약 100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극장이었다. 야외극장의 특성상 우천 시나 동절기에는 공연을 안 하는데 운 좋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대는 200여명이 동시에 올라설 수 있을 만큼 거대했는데 조명시설이 잘 되어 있었으며 음향시설도 수준급이었다. 무대 양측에 위치한 대형 멀티비전에는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설명이 나와 공연의 순서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연은 매우 훌륭했다. 공자의 사상을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화려한 조명과 함께 쉴 사이 없이 진행되는 공연은 웅장하며 아름다웠다. 집단체조와 기예. 화려한 소품, 역동적인 율동 등의 화려함과 이를 뒷받침하는 웅장한 음악 및 조명에 결국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이라 해도 허름한 도시의 모습에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기자에게 가장 훌륭한 관광 인프라는 문화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입장료는 약 80위안으로 중국 노동자 평균 임금의 1/10이나 하는 비싼 가격이지만 그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야시장에서 커다란 번데기를 먹다
기자단은 공연을 관람한 후 여운을 즐기고자 호텔 앞에 있던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은 일반 잡화를 파는 상점들, 길거리 포장마차 등이 주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호객하는 상점 주인들과 가격을 흥정하고 물건을 사는 이용객들로 매우 활기가 넘쳤다. 기자단은 노상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는데 포장마차에서는 살아있는 안주들을 구비해놓고 주문하면 바로 조리해주는 방식이었다.

▲ 곡부 야시장의 고단백 매미유충튀김. 번데기 맛이다.
위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에 기자단은 '야시장 포장마차'를 즐기기로 했다. 술은 지역 특산 공부가주(孔夫家酒), 안주는 과일과 양고기 꼬치, 그리고 매미유충 튀김이었는데, 대륙답게 상당히 큰 매미유충이었다. 맛은 번데기 맛이었는데 쉽게 즐길 수 있는 음식문화는 아니었다.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을 보고, 미래를 보려면 학교를 보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현재는 매우 활기찬 모습이었다. 자본주의의 도입이후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데, 이 같은 성장은 비단 제조공장, 항만순위 등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단은 중국의 급성장 한가운데서 고단백 매미유충을 먹으며 중국의 경제와 활기를 느꼈다.

■ 공묘, 공부, 공림 - 황제와 동급
다음날 아침 공묘와 공부, 공림을 돌아보았다. 마침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더욱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공자께서 남기신 문화유산을 감상 할 수 있었다.
공묘는 공자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으로 노(魯)나라 시기에 처음 새워진 이후 확장을 거듭해 청대에 현재의 규모에 이르렀다. 거리는 남북이 1120m, 동서가 140m, 면적은 약 10만㎡나 되는 거대한 건축군으로 규모만큼 화려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 황제의 상징인 용이 조각된 용주.
공묘는 특이하게 숫자 9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겹 묘당에 9줄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중앙의 대성전 전면에는 용이 조각된 용주(龍柱)가 있는데 숫자9와 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위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공묘에 사용되었으니 공자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특히 대성전 전면 용주는 그 조각의 화려함이 너무 뛰어나 황제가 공묘에 참배하러 왔을 시 질시를 피하기 위해 붉은 천으로 가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 이외에도 많은 비석들,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원수 하나, 계단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비석들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정치논리에 따른 어두운 과거가 아쉬움을 남겼다.

5만㎡규모에 장원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공부는 약 500여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면의 집무실과 후면의 생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청시대의 황실과 버금갈 만큼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면에 집무실이 위치해 있으며 좌측에는 가족묘가, 우측에는 공부하는 학당이 마련되어 있다. 맨 후면에는 내실이 위치해 있는데 명, 청 시대에는 이 후원에 7세 이상의 남자가 발을 들이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내실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협소한데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같은 이유는 우선 공부의 여인들이 이 길을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몸매를 유지 할 것을 당부하기 위함과, 외인이 침입했을 시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 내원으로 가는길. 매우 협소하다.
공자의 후손들은 중국의 4대 명문가로 명성을 누렸는데 이 같은 생활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공자의 75대 직손인 공상희(孔祥熙)는 미국 예일대 유학파 출신으로 남경정부 공상부장(工商部將), 중앙은행 총재 등을 지내는 등 근대 중국의 엘리트계층 이었다. 손문의 혁명운동에 동참했으며 차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2인자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남경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자 중국 본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상희는 장개석 정권에서 지주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형적인 관료자본가로 평가 받는 등 공산화된 중국에서 거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상희의 아내는 송애령(宋靄齡)으로 장개석의 아내인 송미령과 자매간이다. 이 같은 이유로 현재 생존하고 있는 공자의 76대 직손 공덕성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으며 공부는 주인은 없이 객들만이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공자의 직손이 예일대학을 나온 은행총재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공묘에서 약 10분 거리에 떨어진 세계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씨족묘인 공림은 2만㎡규모에 약 10만여개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공부에서 약 2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묘지가 성벽으로 둘려 쌓여 있다. 이 묘지에 입묘할 수 있는 사람은 공씨성을 가진 남자로 제한되어 있으며, 공씨성을 가진 여성과, 공씨가문에 시집온 여성은 성벽 안에 입묘할 수 없다고 한다. 당나라때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됨에 따라 공자의 묘는 왕릉이 되어 있으며 비석에는 大成至聖文宣王墓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황제가 참배할시 격이 낮은 왕에게 참배한다 하여 분노를 살까봐 후손들이 커다란 돌로 왕(王)자의 맨 밑변을 가려 간(干)자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 후손들은 공자를 왕(王)에서 방패(干)로 만들어 버렸다.
기자단은 아침부터 내리는 부슬비 속에서 공묘와 공부, 공림을 돌아보며 화려함과 웅장함에 말을 잃어버렸다. 약 2500년간을 이어온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기엔 반나절의 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태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지 못하다.
기자단은 곡부에서 약 70km 떨어진 태산으로 이동했다. 태산은 산동성에 위치한 오악(五嶽)중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기자단은 애석하게도 태산의 명물 7412계단으로 태산에 오르지 못했다. 정해진 시간동안 돌아보는 여행의 일정상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되었으며, 차후 계단을 통해 오르겠다는 목표가 되었다. 태산은 특이하게 케이블카를 타는 승강장까지 일반 차량이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즉 산 입구 주차장에 일반 차량을 주차한 이후 태산관리관청에 속한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이동한 이후 케이블카를 탑승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관광객에겐 불편할 수 있지만 지역민 고용효과와 관광산업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시스템이었다. 케이블카는 4인이 탈 수 있는 곤돌라형 이었는데 설비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깨끗하고 안전해 보였다. 이날 비가 오고 바람이 약간 불어서 진동이 느껴져 마치 어트랙션을 타는 듯 한 스릴이 느껴지기도 했다. 케이블카는 산 정상에서 약 1시간정도 떨어진 지역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시간상으론 약 10여분을 이동하는데 구름이 짙어서 아무것도 안보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 정상의 벽하사(碧霞祀)까지 가는 길에는 수많은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이 있었다. 길은 전부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전혀 등산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마침 이날 노동절 연휴를 맞아 수많은 중국인들이 벽하사로 참배를 드리러 가고 있었다. 등에 향을 매고 지전을 들고 가족단위로 벽하사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름에 가려 천하를 굽어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태산에서는 모든 길이 다 포장되어 있었다. 등산로는 전부 계단으로 되어 있었으며, 평지는 전부 돌길을 만들어 등산에 불편이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같은 시설은 전부 인력으로 이루었다고 했는데, 케이블카 승강장에도 강철 케이블을 들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중국 인민 앞에 뫼이로다.

■ 만월이 귀국을 인도하다
마지막 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카페리를 타기 전 일조시의 명물 만평구해안관광구에 들렀다. 고운 하얀 모래사징이 장장 60km나 펼쳐진 중국의 3대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만평구해안관광구는 아침 일찍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기자단이 찾은 날이 마침 5월 1일 노동절 연휴 기간이라 정말 셀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해수욕장에서 가족단위로 연휴를 즐기고 있었다. 여름에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피서객이 온다고 하는데 향후 천혜의 해수욕장을 지원할 수 있는 배후 관광단지 개발을 완료 한다면 최상급의 관광지로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평택-일조간 항로를 이용해 한국내 피서객들도 이곳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아직까지 완벽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 못해 향후 개발추이를 지켜봐야 할 필요는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일조시를 중추관광도시로 개발하기 위한 정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향후 일조시의 모습이 기대되는 바이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다시 KC레인보우호에 탑승했다. 4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려 했기 때문인지 은근한 피곤이 몰려 왔었다. 하지만 배를 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이기에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다른 여행과는 많이 틀리다. 기자는 많은 여행을 해왔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여행은 효율적인 시간배분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요즈음 한중간에 항공요금은 국내요금보다 저렴한 상품이 있을 정도로 저렴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하루를 보내는 선박여행은 효율성 측면에서 뒤쳐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를 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행이 된다. 선박을 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선내에서 선상생활을 만끽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여행이 되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잠깐 앉아 있다 내리는 행위는 이동일 뿐 여행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기자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의미는 공자의 자취를 밟아본 것도, 태산에 오른 것도, 일조항만을 둘러본 것도 아닌 배를 타고 다녀왔다는 점이다. 아니 배를 타고 갔다 온 것이 아닌, 배를 탄 여행이었다는 점이다.

돌아오는 길은 마침 음력 15일 이었다. 여행의 흥분과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어 선미 갑판에 나와 보니 밤바다에 달빛이 가득 차 있었다. 낭만이 가득한 여행길을 만월이 배웅하고 있었다.

-------------------------------------------------------------------------------

언제더라... 제작년에 선배기자들과 함께 갔다온 중국 취재여행기사.

뭐 술먹은 기억밖에 안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