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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그린페 2008. 12. 14. 03:45



도시인의 고독한 사랑 혹은 섹스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enardo Bertolucci)
주연 마론 브랜도(Marlon Brando), 마리아 슈나이더(Maria Schneider)

소외된 현대인의 파행적인 인간 관계를 변태적이고 충격적인 성행위 묘사를 통해 그려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대표작. 이탈리아에서는 개봉 후 며칠만에 상영금지가 되어 87년에 와서야 해금되었다. 수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불후의 명작으로 손 꼽고 있으며, 평론가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새로운 발견이 계속되는 그런 영화다. 이중 우리 일반의 가슴에 쉽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원초적 성을 정신적 슬픔으로 끌어 올렸다는 대목일 것이다.

자살한 아내를 둔 중년의 남자. 더구나 그 아내는 한 건물 내에 정부를 두고 살았고 자살한 이유조차 알 수가 없다. 그 남자는 자신이 살 임대아파트를 구하러 가서 처음 만난 젊은 여자와 변태적 섹스를 계속한다. 그리고 결국엔 그 젊은 여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스토리 만으로 연상한다면 지독히도 야한 포르노 영화로 오해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오해 때문에 영화가 나왔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었고, 23년만인 96년 겨울에 수입 개봉되었다. 미국과 영국에선 X등급 판정을 받았고, 미국의 극장 개봉 때는 성행위 묘사 장면 몇군데를 삭제하고 별도의 'R' 등급 버젼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래 나는 한쌍, 즉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촬영을 하며 윤곽이 잡혀갈 무렵 문득 내 자신이 고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고독이 영화의 가장 심오한 내용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 작품의 최종적 의미는 항상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에로티시즘에 관한 영화이지만 성을 소재로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그리고 현대인들이 감추고 살아가는 본능의 발톱을 상징과 은유로서 보여주는 베를톨루치의 수작이다. 문명과 산업의 발전은 현대인들에게 성적인 억압을 주었고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을 감추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을 표출하지만 체제로부터 혹은 사회적 윤리와 자신이 설정한 가치관에 의해 제재 당하고 때론 공호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피폐한 현대 서구 문화의 정신적 황폐를 경고한 작품

베르톨루치가 서른두 살 때 만든 이 영화에서 우리는 에로티시즘의 외관을 빌어 기존의 영화사의 흐름을 종합하려는 천재 감독의 거창한 기획을 엿볼 수 있다. 소외된 현대인의 파행적인 인간 관계를 변태적이고 충격적인 성행위 묘사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하지만 베르톨루치의 스승인 영화 기인(奇人) 파졸리니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는 하부 문화(Subculture)의 산물인 것 같다. 베르톨루치는 뭔가를 그리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새디즘(Sadism)에 대해 새로운 게 뭐가 있는가?”라는 악평을 하기도 했다. 또한 성에 대해 책임 회피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말하자면 프로이드적 변명, 마르크스주의적 포장으로 우리의 성적 꿈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가 이 영화를 통해서 독특한 표현 양식을 빌려 뛰어난 미학적 장치를 마련한 것만을 확실하다. 또한 등장 인물의 배경으로부터 베르톨루치가 나타내려 했던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미국인으로서 권투 선수, 배우, 멕시코에서의 혁명당원, 신문 기자 등을 거쳐 여관을 하는 돈 많은 여자와 결합해 파리에 정착한 폴을 통해, 베르톨루치는 미국이라는 자유 및 기회 균등주의가 자본주의적 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프랑스 육군 대령으로 알제리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잔느를 통해서는 전형적 부르주아 정신이 정신적 금치산자이고 사회적 반항아인 폴을 만남으로 해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혼돈을 야기시키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잔느를 자신의 영화적 스타일 연습을 위한 피사체로 취급하고 있는 약혼자 톰을 통해서는 그의 기능적이고 현학적인 속물 정신이 인간 관계를 얼마나 메마르게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베르톨루치 감독은 현대 서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전형을 추출하여 그 구성원들의 비극적 교류를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파헤치고, 나아가 현대 서구 문화의 정신적 황폐를 경고하고 있다.


씁쓸하면서 일탈적인 분위기가 영상 곳곳에 담겨 있어

이 영화의 라스트, 폴이 잔느의 총을 맞고 죽어가며 “Our Children, Our Children”하고 중얼거릴 때 우리는 감독의 경고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폴에게는 자식이 없다. 즉, 그 방백은 다음 세대를 일컫는 것이고 “오늘의 서구 사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정신적 자산을 물려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비판적 독설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씹던 껌을 베란다 난간에 붙이고 죽어감으로써 더욱 확연히 제시된다. 씹고 난 껌이란 폐기물이자 공해다. 즉,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자산은 폴의 세대에 의해 남겨진 황폐한 정신 공해밖에 없다는 은유다.
그 공허한 황폐를 나지막이 조성해주는 것이 가토 바르비에리(Gato Bar-bieri)의 테너 색소폰 소리다.「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음악은 영화만큼이나 당대에는 앞선 감각이었다. 1934년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Rosario)에서 출생한 바르비에리는 젊어서부터 지역적인 이동을 거듭함과 아울러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섭취해 나갔었다. 62년에는 로마에 있었고, 이듬해에는 파리로 갔다. 그리고 프리재즈적 성향에서 벗어나 라틴 음악 지향적인 접근을 발전시켜 나아갔었다. 그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음악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데, 탱고를 비롯한 중남미의 음악과 재즈를 융합시키려 했던 그의 주된 열정이 영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탱고는 현실이 우울하고 절망적일수록, 삶이 어려워질수록 커지는 이상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그런 점에서 탱고는 인간의 근원적인 것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특히 유럽에서 탱고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탱고가 상류 계급의 위선을 폭로하는 솔직하고 저항적인 예술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그 씁쓸하면서 일탈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레 베르톨루치의 영상에 담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체제의 혁명 문제에서 개인의 혁명 차원으로 전환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거쳐간 베르톨루치 감독은 그 자신의 말대로 ‘시대를 요약하는 영화의 이미지를 잡기 위해’ 작업을 한다. 베르톨루치는 복잡한 인생의 현실을 영화에 담기 위해 현실에 끌려다니기 보다는 그 대세와 맞서 싸우기 위해 미학적 통로를 발견하려 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된 주제는 고독이라든가 폭력, 악의 밑바닥의 단편들이다. 그가 영화라는 표현 수단을 통해서 표현해 오고 있는 주제는 ‘인간의 자기 탐구’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회화적, 시적, 음악적 요소들이 진지하고 진보적인 주제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영화가 소설이나 연극보다도 시나 음악에 더 가까운 것이다라는 그의 영화관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베르톨루치는 영화 속에서 소외되어가는 인물의 내면을 통해 정치적인 문제가 개개인의 미세화되고 혼란한 행동과 다를 바 없음을 시사해준다. 그가 초반 작업에서 시도했던 체제의 혁명 문제에서 개인의 혁명 차원으로 넘어오게 한 작품이 바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다. 이 영화는 계급과 체제를 불문하고 순수한 나눔이 가능한가라는 공상적인 질문을 던진 유럽의 ‘68세대’의 씁쓸한 패배주의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베르날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정치적인 독약이며 포르노를 위장한 도시 게릴라와도 같은 영화이다. 이미 당신은 이 영화가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론브란도의 과격한 정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리아 슈나이더가 전신 누드로 헤어를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장면(이 장면은 국내에서는 뿌옇게 화면처리 될 것이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소문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이 영화를 포르노로 알고 있다면 당신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의 절반,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을 보게 될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이 영화에서 유럽의 음산한 망령과도 같은 저주를 불러내고 있다. 그는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보수반동세력들이 세상의 대세를 틀어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의 자폭하는 듯한 심정으로 그 한계까지 밀어 나아간다. 그렇다. 베르톨루치는 자신을 '실패한 좌파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60년대까지만 해도 변혁을 빋었다. 그러나 68년 5월 파리혁명이 무참한 실패로 끝나고 동구의 봄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소련에 실망한 베르톨루치는 세상에 대한 그 모든 신념을 포기한다. 그는 종말론적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베르톨루치는 7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유럽의 출구가 가로막힌 절망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이 틀려버린 유럽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기분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베르톨루치는 이 지옥과도 같은 육체의 세계를 마치 돼지우리를 연상시키게 만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면서 돼지처럼 꿀꿀거리기도 한다. 잔느는 두가지 가치 사이에서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어느 한쪽을 거부하지도 못한다.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육체라는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위대한 거부의 몸짓은 없다.

그래서 심지어 폴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는 그 새로운 의지에의 힘에 대해 오히려 완강히 거부한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총살형으로 끝맺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우리 동세대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기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들 부모 아래서 태어난 너희들은 모두 사생아들이라는 저주를! 아마도 이보다 더 과격하고 절망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형이상학적' 포르노는 달리 없을 것이다

평론가들에 의해서 영화 역사상 '베스트 10'에 꼽히는 명작이다. 첫 장면에 나타나는 폴의
비명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이래 자장 전율적인 소리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개된 후 23년만에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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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의 고독한 사랑 혹은 섹스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enardo Bertolucci)
주연 마론 브랜도(Marlon Brando), 마리아 슈나이더(Maria Schneider)

내용:
눈부신 개울 햇살. 앙상한 철교의 아치. 고가 선로 밑 보도에는 사람들이 묵묵히 오가고 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40대 남자와 20대 여자.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에 슬픔을 씹고 있다. 여자는 도발적인 걸음걸이로 싱싱한 육체를 감추고 있다. 남자의 이름은 폴(말론 브란도 분)이고 여자의 이름은 잔느(마리아 슈나이더 분)다.
세느강 위를 달리는 열차, 교각 아래 한 중년의 신사(폴, Paul: 마론 브란도 분)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괴로운 듯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 비명은 기차의 기적 소리에 이내 파묻혀 버린다. 허탈하게 허공을 보고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그 남자 뒤로 걸어오는 젊은 여인(잔느, Jeanne: 마리아 슈나이더 분)은 그의 눈물을 보지만 그냥 지나치고 그 역시 무관심하게 스쳐간다.

영화감독인 약혼자 폴((Tom: 쟝-피에르 러드 분)에게 전화를 걸려고 들어가던 잔느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폴과 다시 마주친다. 얼마후 그 둘은 허름하지만 오래되어 다소 운치가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또 마주친다. 집과 가구를 둘러보는 잔느를 벽에 몰아붙인 채 키스를 퍼붓는 폴. 잔느도 열렬히 응하고 둘은 이름도 모른 채 짐승들처럼 격렬하게 정사를 나눈다.

섹스가 끝난 뒤 둘은 인사도 없이 서로 모르는 남남으로 거리를 나선다. 잔느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사랑에 빠진 얼굴로 약혼자에게 안기고 폴은 아내가 자살한 여관방으로 향한다. 장모(Rosa's Mother: 마리아 미치 분)는 폴에게 딸의 자살 이유를 묻지만 폴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며 소리친다. 폴이 알고 있는 것은 아내가 위층에 세들어 사는 마르셀이란 남자에게 자신과 똑같은 파자마, 똑같은 술, 똑같은 육체를 제공하며 살았다는 것 뿐이다.

혼란에 쌓인 그는 허탈해하며 아파트로 돌아간다.
임대아파트에서 다시 만나는 뽈과 잔느. 둘은 당연한듯이 정사를 나눈다. 폴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잔느에게 소리친다. "나는 너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는 이름도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거야."
폴의 고독감에 짓눌린 잔느는 약혼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약혼자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폴에게 매력을 느끼고 다시 아파트를 찾는다.
그러나 이미 폴은 이사를 가버렸고 잔느는 빈방에서 흐느낀다. 처음, 아파트를 나서면서 남남으로 돌아섯듯이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세느강변을 걷는 잔느. 그녀에게 다가가는 폴. 폴은 도망가려는 잔느를 따라 탱고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는 홀로 들어서며 그동안 그렇게도 거부해 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잔느는 대화보다 둘이 정사를 나눌 수 있는 호텔을 원한다.
이들은 탱고 경연장에 간다. 이들은 술을 마신다. 탱고 경연대회에 끼여들어 대회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폴은 잔느를 업고,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곳으로 걸어나가 미친듯이 파격적인 춤을 추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엉덩이를 까보이기까지 한다.
젊지 않은 남자와 젊은 여자는 객석에 않는다. 여자는 주인공의 음경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다가 정액을 닦아내고 도망간다.

폴의 슬픔과 삶에 대한 분노를 이해할 필요가 없는 잔느는 폴의 파행적 행동에서 도망가고 싶은 뿐이다. 잔느는 폴을 버려둔 채 있는 힘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 뒤를 쫓아 달리는 폴. 드디어 폴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잔느를 붙잡는다. 비명을 지르며 폴의 손을 뿌리치는 잔느. 잔느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손에 쥔다. 뒤따라 들어온 폴은 잔느에게 다가가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너는 도망갔지만 나는 끝까지 너를 쫓아왔다. 너는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여자는 남자(껴안으려는)를 향하여 잔느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폴은 비틀거리며 테라스로 나가 난간에 자신이 씹던 껌을 붙이고는 쓰러진다. 폴의 죽음을 보면서 잔느는 미친듯이 중얼거린다. "난 저 사람을 몰라. 저 사람이 날 쫓아왔어. 날 겁탈하려고 했어.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야. 난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누군지 몰라..."….”


어느 45세의 미국인이 파리의 어느 아파트에서 전혀 모르던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둘의 갑작스런 성관계는 보는이를 불편하게 말들 만큼 , '불안정된 자세(체위?)'로 관계를 맺는다. 이는 이 후, 그들 의 불행한 종국을 애초부터 가늠짓는 암시를 주게된다.

그 중년 남자는 얼마전 아내가 자살을 해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젊은 여인은 사귀는 젊은 남자가 있지만, 중년 남자의 흡인력-- 이를 테면 오랜 경륜과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데서 오는 신뢰감, 그리고 중년의 통찰력 -- 에 발이 묶여버린다 . 그 둘은 섹스후, 급히 헤어지는데, 그 후 그들의 행보를 카메 라는 이렇게 잡고 있다. 그녀는 도로를 건너고, 그는 도로위의 고가인도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그의 머리위로 고가전철이 다닌 다. 즉 그녀의 위에 그가 있고 그의 위엔 사회가 있는것이다.

이후,그 두 남녀는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그 와중에 그는 젊은 애인과 결혼선언을 하고말지만 그녀는 중년남자의 기억을 져버 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중년이 그녀에게 다정다감하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녀의 이름을 알 고 싶어하지도 않고, 자신의 이름마저 물어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이름 뿐 아니라 서로의 기본적인 신상을 철저히 베일에 가린 채 그녀의 육체만을 탐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다. 그녀 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유년시절을 영상화하려는 젊은 감독이다. 말하자면 그 젊은 애인은 그녀의 모든것을 알고싶어 한다. 중년 남자의 태도와는 상반된 경우인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중년 남자 의 침묵과 무뚝뚝한 매너, 가변적인 성격에 오히려 맘을 빼았기 고 만다.

영화의 끝은 마지막으로 탱고를 친 그 중년과 젊은 여 인이 헤어지게 되는데, 발단은 그녀의 이별선언(!)에서 비롯한다 . 그는 영화의 서두에서와는 달리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함께 다 시 시작할 것을 말하지만,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이름을 묻지만 그녀는 그를 총살(?)하고 만다. 그리곤 이 '헷갈리는' 영화는 끝 난다. 그를 죽인 그녀는 뜨문 뜨문 되내인다. " 난 그를 몰라. 그의 이름도 몰라. 그는 날 강간하려했어..." 중년남자는 여자의 이름도 모른채 죽고 만다.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것은 폴이라는 남자의 고독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마져 자살해 기억을 상실하게 된 남자 마론 브란도가 파리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여자를 알게 되고 격렬한 육체 관계를 나누게 된다. 그는 상대의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고 상대방의 생활에 관해서도 알고 싶지 않다. 오직 이 낮선 여자와의 정기적인 관계만을 원한다. 생물적 본능의 즐거음과 쾌락은 좌절한 삶에서 가장 저조한 시기에 처한 평범한 사람의 최대의 도피처가 된다. 하지만 삶의 공허함은 육체적인 욕망으로만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자살한 아내 로자의 시신 앞에서 폴이 약 6분간의 긴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은 말한다. 우주진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의 속마음은 200년을 같이 살아도 모를 거라고….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누구냐고.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

그 장면은 로자에게 길거리의 여자같이 화장을 했다고 비난하는 걸로 시작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폴로 끝난다.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외로운 숙명과 본원적 고독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미국의 시골에서 태어나 세계 각지를 전전하다 중년의 나이에 파리의 허름한 여관에 힘들게 정착한 폴의 인생과 그가 받은 상처에 가슴이 져며왔다. 폴이 받은 상처는 그를 변화시켰고, 그것은 잔에게로 날아갔다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결국은 폴을 쓰러뜨렸다.

폴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걸까?

폴(말론 브란도)은 아내와 살았으나 그 아내가 생전에 같은 아파트에 자신의 정부를 두고 있었는지도, 왜 자살하게끔 되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미칠 듯한 울분과 싸늘한 냉소와 허망한 욕정만이 남았다. 잔느(마리아 슈나이더)를 만나 관계를 가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것은 너무도 허망하고 끔찍하리만큼 우울했다. 처음에 잔느는 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만, 폴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폴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잔느는 오히려 대화가 아닌 육체적 관계만을 원할 뿐이었다. 잔느는 점점 폴의 절망과 분노,변태적인 행위에서 오히려 도망치고 싶어하고 종국에는 폴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다.
두 사람, 여자와 남자, 혹은 인간들의 모든 관계, 진정한 소통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관계에서의 완벽한 괴리와 소통의 부재, 오히려 그 관계들이 가져다 주는 죽음과 같은 고독과 끔찍한 허망함들. 마지막에 잔느는 폴을 죽이고 말한다. '나는 그를 몰라..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가 쫓아왔어,,, 나는 그가 누군지 몰라.."
같이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모든 것을 공유하는 완벽한 공존이라는 것은, 이토록 허무한 것일까.(폴이 아내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처렴, 혹은 잔느가 폴의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처럼) 과연 나는 당신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 것인가. 알고 있다고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만 적막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아닌, 그 환영들을 사랑하고 공유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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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좋은현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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