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제주가당미술관

그린페 2011. 3. 13. 09:55

제주 기당미술관 미술관여행

2007/07/16 17:08

 

복사 http://lee-yongjae.com/120040168814

 

 


김한섭은 가업을 잇고자 송정공업중학교(현 목포공고)에서 건축을 전공한다. 김교수 집안의 대하드라마는 그대로 한국 근, 현대 건축사를 대변한다. 대한민국 건축사에서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유일무이한 집안의 다큐멘터리다. 돈도 안되는 건축을 업으로 삼다니. 1940년 전후 대동아 전쟁에 골몰하던 왜놈들은 한국인 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한다. 만주로 끌려간다. 요새말로 하면 건축사보쯤 된다. 연필이나 깎는다. 일본고공출신 국장이 꼬신다. 큰 일을 하려면 대학 나와야 된다. 1년만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검정고시로 일본고공에 진학한다. 4년 만에 귀국 박길룡건축연구소에 입사한다. 아쉽게도 입사 2년 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박길룡은 지구를 떠난다. 일본이 싫었나보다. 만날 술만 드시다가.

일제말기다. 고향인 광주로 낙향해 모교인 목포공고에서 건축과 학생들 가르친다. 여운형 계열의 비밀결사에 참여한다. 고생길이 시작된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까지 돌볼 여력이 없다. 제주도의 뜻있는 젊은이들은 삼지창 들고 일본군 무장해제에 들어간다. 제주도는 정부의 도움 없이 자율적인 해방을 맞는다. 피바람을 예고한다. 1948년 4월 3일 서북청년단이 쳐들어온다. 깡패들이다. 젊은이들 다 죽어 나간다. 수만명이 죽어나가지만 억울함을 호소할데도 없다. 60년이 흐른 지금에야 노무현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시작한다. 제주도 4.3사건 희생자 가족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1945년 갑자기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일본인 건축기사도 다 도망간다. 학교에 사직서 내고 전라남도 영선계장으로 부임한다. 전남 재건에 착수한다. 조선대학교 설립에 참여하면서 아예 건축과 교수로 눌러 앉는다. ‘금성건축’설립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연이어 6.25동란이다. 취직은 했는데 학교 갈 일이 없다. 어느 날 보니 동네에 빨간 깃발이 걸린다. 좌파지만 나서지 않는다. 변화시대에 나서면 다친다. 큰 일 할 사람은 숨어 있어야 된다. 생각은 좌파지만 행동은 보수다. 다시 어느 날 보니 태극기가 내 걸린다. 부역으로 낙인 찍힌다. 끌려간다. 큰아버지가 돈 써서 빼온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든다. 좋은 나라 만들기가 이리도 힘든가.

빨치산이 무등산 근처 변전소를 폭파한다. 모든 주민은 마을 공터로 다 끌려 나간다. 순경은 장총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다 나와. 갓난아기를 들쳐 업은 산모가 애처롭다. 단지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순경은 장총을 발사한다. 이 한 많은 세상에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기의 머리가 터진다.

가업을 이으라는 부친의 명에 김홍식은 홍익대 건축과에 입학한다. 하라는 건축은 안하고 김홍식은 만날 실학파와 어울려 민족의 자긍심을 외치고 다닌다. 데모다. 당시 홍익대 건축과 교수로 있던 부친 김한섭은 입장이 난처하다. 아들이 반체제니. 중앙대로 옮긴다. 아들이 웬수다. 아니 부전자전이다. 1970년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논문을 쓴다. 제목이 웃긴다. ‘실학파의 건축사상연구’. 지도교수도 지도를 포기한다. 뭐라. 실학에 건축사상이 있다고나.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니 혼자 써라. 건축학회에서 전화가 왔다. 학회지에 수록한단다. 제목이 웃겨서 그런가. 건축사협회는 연락도 없이 수록한다. 뜬다.

문화재청에 들어간다. 고향인 제주도를 3년간 걸어 다니면서 샅샅이 뒤진다. 민가의 도면화 작업에 착수한다. 대한민국 최초다. 양반가옥은 어느 정도 자료가 있으나 민가는 자료가 없다. 부인도 함께 다닌다. 물들 텐데. 남편 강요로 제주여고 선생님 1년 만에 사직한다. 골동품 수집한다. 이거 재밌네. 아예 홍익대 공예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1980년 ‘금성건축’은 사촌형에게 넘기고 명지대 건축과 교수로 부임한다. 설계를 하기 위해 설계하기는 싫다. 천천히 가야지. 강의하면서 맘에 드는 것만 골라 설계한다. 부인은 아현동에 골동품 가게 차린다. 90년 인사동으로 진출한다. 진품은 아까워서 못파니 만날 적자다. KBS방송이 ‘진품 명품’을 신설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공예품을 감정하는 차분한 인상의 전문가가 바로 김홍식교수의 부인이다.

1983년 부친의 의형제인 강민범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미술관 하나 설계해 주라. 역시 제주도 건축은 제주도 건축가가 하는게. 제주도 토박이로 서예계의 원로인 기당(奇堂) 강구범의 아들이 일본에서 번 돈을 고향에 환원하는 프로젝트였다. 제주대에 10억, 서귀포시에 3억 기부한다. 제주도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우성(宇城) 변시지(1926- )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 

미술관에 붙어 있는 변시지선생의 소개 글을 보자.

 


‘우성 변시지 선생은 1926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932년 부친을 따라 도일 오사카에서 성장한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던 선생은 1948년 일본 양대 공모전중 하나인 <광풍회>전에서 최연소의 나이인 23세 때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화단의 주목을 받는다.

변선생은 1957년 서울로 귀국하면서 이전의 인물 위주의 소재에서 벗어나 <비원>의 고궁과 같은 화려한 전통적인 대상에서 한국미를 탐색하는 사실적 풍경화에 열중한다. 그러던 중 1975년 고향인 제주로 회귀하면서 선생의 화풍은 또 한 번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황갈색의 색채와 마티에르, 자아상과 같은 외로운 남자와 소나무, 말 까마귀, 초가집, 작렬하는 태양, 배 등의 상징적인 소재들을 통해 변 선생은 <제주화>라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

  

서귀포시 서흥동 삼매봉 아래에 터 구입한다. 남제주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망루다. 현상설계를 시행한다. 당선작 없음. 모든 참가작이 경사지를 전부 깎아냈다.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말 것. 그러면서 제주적인 건축을 보여줘야 됨. 어렵다. 그래 ‘눌’로 간다. 추수가 끝난 후 볏짚을 쌓아 놓은 것이 ‘눌’이다. 야적방식이다. 스파이럴이다. 원형계단을 올라가듯이 돌아가면서 야적시킨다. 무너지지 않게 좁은 공간에 가장 높이 쌓을 수 있는 선현들의 지혜다. 폼만 산이지 여기 흙은 죄다 뻘이다. 지내력이 약하다. 매트기초로 보강을 해도 단층 이상은 불가능하다. 기초를 수미터 간격으로 세우는게 아니라 바닥 전체에 철근을 깔아 바닥판 전체를 기초로 하는 공법이 매트기초다. 물론 돈 많이 들어간다.

 
그래도 자꾸 내려앉는다. 건물 자체의 무게를 최소화해야 된다. 경사지를 이용해 단층을 쌓아간다. 테라스 하우스 개념과는 다르다. 눌의 스파이럴 개념이다. 그래 원형계단을 돌다 보면 어느덧 상설 전시실이고 어느덧 중정이고 어느덧 일반 전시실이다. 간단하다. 기승전결이다. 물이 흐르듯이 동선이 흘러간다. 아니 돌아간다. 헷갈리네. 어찌됐든 돌다보면 관람 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수풀을 헤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걸어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이듯이. 이런 게 건축이다.

외장재는 당연히 현무암이다. 검은 화산재 말이다. 판석을 쌓아간다. 가공이 어려워 화강석 보다 비싸다. 물론 제주도 밖으로의 유출은 불법이다. 너무 어둡나. 하얀색 띠를 한 번 준다. 또 쌓아간다. 지붕 역시 제주도 초가집 느낌을 재현한다. 육지의 초가지붕이 갓모양의 옆으로 돌아간 느낌이라면 제주도 초가지붕은 유선형이다. 거센 바닷바람을 이겨내기 위한 선현의 지혜다. 지붕재도 현무암이다. 3차 방수 후 작은 현무암을 쌓아간다. 저 멀리 파도가 친다. 파도가 부딪치며 150미터 삼매봉 위로 하얀 거품이 인다. 김교수의 아들 역시 건축과를 나와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딸아 우린 건축하지 말자. 너무 센 집안이 많으니 피해가자. 다친다. 

 
 
  [출처] 제주 기당미술관|작성자 이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