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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민화

그린페 2010. 7. 28. 10:15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누구?
2006-01-30 14:11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작곡을 공부한 뒤 동경 대학에 진학해 현대 작곡가 아놀트 쇤베르크의 모더니즘 이론에 심취했다.
 1956년 유럽 여행 후 독일에 정착한 그는 처음에는 아방가르드 음악 예술을 추구했다. 하지만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존 케이지와 조지 마키우나스를 만난 뒤 '플럭서스', 즉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위예술 운동에 빠져들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미국 뉴욕으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긴 백남준은 1969년 샬롯데 무어맨과 함께 공연을 하며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70년대와 80년대 그는 다른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을 알리는 교육자, 행동주의자로 영역을 넓히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비디오 아트와 더불어 이 시기 그의 활동에는 전위예술가 로리 앤더슨,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 작곡가 존 케이지, 무용가 머스 커닝햄 등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협력 작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84년 파리와 뉴욕을 통신위성으로 연결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 지휘하기도 했다.
 백씨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마비되는 큰 시련을 겪는다. 그럼에도 독일 비디오조각전(19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40년 회고전(미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박물관, 2000)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1996년 10월 독일'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고, 2000년엔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백남준의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20세기 어떤 예술가도 한국이 낳은 백남준 만큼 비디오-TV 아트를 창조적으로 구현하는 데 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백남준을 소개했다. < 이재훈 기자 sisyphe@>
 
주방가구 전문기업 넵스에서 운영하는 갤러리 넵스페이스에서는 6월 29일까지 ‘오복을 부르는 장식, 민화’ 전(이하 민화전)을 선보인다. 
민화가 가구를 만났을 때

주방가구 전문기업 넵스에서 운영하는 갤러리 넵스페이스에서는 6월 29일까지 ‘오복을 부르는 장식, 민화’ 전(이하 민화전)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넵스페이스가 관람객과 더 가까이에서 감성 터치를 하기 위해 여는 ‘생활 속의 아트 전’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로, 전통과 현대가 행복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 넵스(www.nefs.co.kr)



조선후기에 등장한 민화는 유료로 대표되는 양반의 정서와 가치관, 철학의 반대편에 있었다. 구도의 자유로움, 허세와 가식이 없는 필치, 생활 중심의 리얼리즘 정신, 그리고 기존의 질서와 전
혀 다른 미의식 등 모든 면에서 전혀 새로운 그림이었다. 나비가 꽃을 표현한 화접도, 연꽃이 만발한 연화도, 풀벌레가 함께하는 초충도 등 현대의 미의식과 상상력으로 되살아난 민화는 회화를 뛰어 넘는다. 이는 콘솔과 같은 가구와 만나기도 하고, 쿠션과 커튼 등 생활 소품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또한 민화는 그림이 품고 있는 다산과 풍요, 무병장수, 부귀 영화 등의 의미를 지녀, 눈으로 하는 예술적 감상에서 나아가 마음으로 한번 더 감상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번 전시에는 민화를 가구에 접목하여 유래 없는 멋을 선사하는 전통색채연구가 강은명 작가(오색채담 대표)를 비롯, 전통 민화의 얼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고광준 작가, 카드로 변신한 민화를 통해 주고받는 민화를 선보이는 홍경희 작가, 그 외에도 임경란, 김명화, 박지윤, 김희영, 김정희, 김여진 등 총 9명의 작가들이 풍성한 이야기 꽃을 피운다. 백남준과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 바 있는 이우환은 민화에 담긴 정신과 현대성을 긍정하며 시대에 맞는 변용과 재해석을 강조하였다. 전시회 기간 중 넵스 홈페이지와 넵스페이스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2476   조기현   2010-01-01
  [가가 신년기획초대]경인년 백호의해에 만나는 주성준의 HAPPY-HOYA   453


주성준 호랑이전 [HAPPY-HOYA]
전시기간 : 2010. 1. 6(WED)~1. 19(TUE)
초대일시: 2010. 1. 6(WED) PM 6:00
가가갤러리[인사동사거리]
www.gagagallery.com

북주(北洲) 초대展


2010. 1. 6(wed) ~ 1. 19(tue)


가가갤러리(인사동4거리)

문의 725-3546

2010년은 경인(庚寅)년, 즉 백호의 해이다. 하얀호랑이는 서방 금(金)을 뜻하고 이는 돈을 상징하기도한다. 전통적으로 까치호랑이는 ‘기쁨의 기운과 소식’을 전한다고 믿어왔었고 정초에 민간의 대문이나 방안에 매년 붙여져 왔었으나 서양사상과 건축, 의류등이 수입되면서 민화의 고즈넉한 맛은 현대인의 집 구조와 색감, 사람들의 의식에 부적합한 면이 많다고 여겨져서 더 이상 그려지지 않게 되었다.

원래 까치만두마리 그려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의미로 그려지다가 후에 중국에서 까치에 표범을 같이 넣었고,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고대 한국 예맥족의 호랑이 예경신앙과 결합하면서 한 그림에 표범무늬와 호랑이 무늬가 동시에 같이 쓰이면서 까치호랑이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기쁨호랑이(喜報鵲虎,HAPPY HOYA)에는 소나무를 배경에 넣고 벽사(辟邪)호랑이는 대나무를 태울때 터지는 소리에 잡귀가 도망간다고 하여서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두 종류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려지는 것이므로 본인의 호랑이 이름을 HAPPY HOYA로 이름 붙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는 까치호랑이는 황호(黃虎)가 거의 대부분이며 옛것을 모방하여 양산 할 뿐이었으나 본인의 이번 전시에서는 이론적인 소재는 전통에서, 구도나 사물의 대소, 대비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재료는 서양의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작업하였다. 까치와 백호(白虎)를 그린 ‘희보작호도(喜報鵲虎), 벽사작호도’를 그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화에 대한 논의에 있어 `위기`라는 단어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다. 백남준이 서양에서 ‘한국미술오천년전’이라고 해서 기대를 가지고 가보았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교수며 작가들 그림이 전부 중국식, 일본식 그림들만 걸려있어서 너무 실망하고 왔다고 한다. 이는 유교의 문인화 이론과 사대주의 사상의 잔재와 함께서양과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한국 강단에 서면서 시작된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중국, 일본화식 그림’을 한국화의 정통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세기 한국 미술계에 있어 한국화에 대한 민족의식은 곧 정체성 문제와 직결될 만큼 소중한 개념이다.



도화서등의 조선공무원 화가들의 그림은 ‘궁중회화’이지 민화 범주에 넣지 않는다. 그러나 각종 미술관들의 전시에 궁중화원들의 그림 형식을 가진 그림들이 민화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전시관계자들의 무지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민화를 민중의 그림으로 해석할 때 선사시대, 고구려, 신라, 조선, 현대의 이중섭 박수근... 등에 까지 이어온 독창성은 물론 한국화를 대표할 만하다.




44군자와 남이 써놓은 필치와 금석문을 모방하며 문자향(文字香)을 즐기는 문인화적 성향 보다는 민화의 붓 가는 대로 그리는 창조적 드로잉의 경향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남종화라는 고유한 불교적 의미와 도가적 그림에 가깝다고 하겠다.


조선 최고의 서화가로 인식되고 있는 추사 김정희나 안평대군, 겸재 정선도 골법용필(骨法用筆)과 기운생동(氣韻生動)등의 중국의 화관과 작품을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중국의 아류(亞流)라는 흠을 면하기 어렵다. 金正喜(김정희)의 세한도나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정선의 진경산수 등이 한국에서만 잘 알려져 있지 세계회화사에서 끝내 일류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성을 기반으로 한 그 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독자적 예술세계가 아닌 중국적 화관을 모방했다는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한국전통회화에는 사물의 대소나 시점, 그 시대의 격을 무시하는 파격의자유와 창조적 현대성, 해학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본인 그림이 그려하였듯이 본인의 12회 개인전 또한 고구려벽화 조선민화에 이르는 한국적인 회화의 맥락 속에서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작업하였다.



北洲 주성준

북주(北洲) HOYA

북주의 야심작 해피호야(happy hoya) 제목의 호야(虎爺)란 전통적인 영물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범은 서방의 금에 속하므로 능히 사람을 보호하여 돈을얻게 하기 때문에 토지공(土地公)에 배속시킨다고 한다. 이것을 호자야라한다. ”는 작가의 인증이 이채롭다.


주성준은 오랫동안 민화의 현대화, 민화도상의 해학화, 민화사상의 정예화를 추구했다. 민화의 현대화에서는 화제(畵題)를 초월한 신선한 상징적 해석과 민족적 정서를 대변하면서도 옛 민화를 연상케하는 해석이 돋보인다. 호랑이의 주제는 주성준에서 화수분처럼 언제나 샘솟는 영감과 해학의 원천이다. 세상만물과 인간사가 호랑이만 대입되면 회심의 미소를 짓거나 혹은 박장대소를 할만큼 아기자기한 해학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민화사상에 있어서 주성준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민화박물관의 민화논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정치하고 깊이 있는 민화연구를 보여준 바 있다. 이를테면 이론과 실기, 그리고 민화라는 민족적 도상을 민족적 정기와 한국인의 기상이라는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것이다.


호랑이는 우리에게 민족정기, 나아가서는 한국인의 대명사이다. 88올림픽의 호돌이를 생각해보라. 호랑이 민족이라 불러 자랑스러운 민족은 아마 한민족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 오늘날 주성준으로 하여금 마치 한국인처럼 그리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호랑이는 단군신화에서 웅녀와 함께 굴에 들어갔다가 절반쯤 호랑이 탈을 벗고 도망간다. 그래서 한국인은 곰 새끼라고 해야겠지만 한국인은 민족정기라 하면 호랑이의 기상을 먼저 떠올린다. 인간이 되다만 호랑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상고시대 동이족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산해경에 나오는 서왕모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 호랑이 이빨, 표범의 꼬리, 머리에 빗을 꽂고 가끔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노파는 곤륜산 산신이자, 출산을 도와주었던 산파할머니의 신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산신할매, 혹은 삼신할매로 해석될 수도 있는 소지가 있다.


흐뭇한 호랑이와 함께 등장하는 두 마리 토끼는 오늘날 중국으로 불리는 대륙의 상고시대에 있었던 하우씨의 전설이 담겨 있다. 하우씨가 일년을 열 달로 나누면서 동물들에게 달 이름을 지어주었다. 1월은 임금이 바른 마음으로 정사를 돌보리라 다짐하는 달이라 ‘바를 정(正)자’ 정월이라 했다. 그 영예로운 첫 달이 인월(寅月)이고, 그 상징동물이 호랑이였다. 호랑이가 입이 찢어질 만 하다. 그 좋던 시절에 2월인 묘월(卯月)을 맡은 두 마리의 토끼가 ‘존경하옵나이다. 호랑이 형님’하고서 지극한 존경을 담은 길고 긴 장죽을 호랑이에게 물려 드린다. 그것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그 좋던 세월이었고 오늘날 민화에서 이묘봉인도(二卯奉寅圖)라는 형식으로 전승되어 온다.


희보작호도에서 까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민족을 표상 하는 호랑이에게 이 세상에서 하늘이 내려주는 복록을 누리다가 다시 하늘로 오르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옛날 섣달 그믐에 문을 닫았던 시전(市廛)은 호랑이달 호랑이날인 모충일(毛蟲日)에 문을 열었다. 호랑이 털처럼 빽빽하게 손님이 들끓고, 호랑이 털만큼 돈을 벌게 해 주십사 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호랑이는 한국인의 민족정기이자, 대명사이자, 기쁜 소식이었다. 북주 주성준의 호랑이는 그렇게 민족정서와 이론과 사상, 그리고 도상적 재해석을 거친 21세기 한국인의 민족찬가라 할만하다. -철학박사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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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은 삼국유사가 대변해주듯이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다. 그런 판타지를 죽 이면 안 된다. 외국에서 한국미술오천년전(韓國美術五天年展)이라고 해서 가 보았는 데 한국의 판타지는 다 죽여 버리고 맨 중국적인 것만 진열해 놓았다. 매우 잘못된 전시였다. 한국 민화의 콜랙션이나 해석에 있어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는데 부끄러운 일이다”.


이 말은 세계적인 비디오 매체 작가 백남준이 했던 말이다. 백남준이 속하였었던 모임중에 하나였던 플럭서스 즉 아나키즘 사상은 미술에 있어서 비유하자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질서의 파괴, 혼돈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에 있어서 민중미술의 자발성을 통하여 현존의 억압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함으로서 인간의 본래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사상으로써 스페인 혁명을 통하여 그것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일반적으로 한국화에 대한 논의에 있어 `위기`라는 단어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며 문제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화를 민중의 그림으로 해석할 때 선사시대, 고구려, 신라, 조선까지 이어온 독창성은 물론 민족을 대표할 만하다. 백남준의 언급에서도 보이듯이 서양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중국적인 그림에는 눈길한번도 주지 않는다. 억압적이고 일률적인 예술 정신에 반발에 의한 조선후기 시정 민화가들의 자유로운 그림형식과 걸림 없는 표현들은 억압적 국가의 유교적인 중국풍 예술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존의 억압적 화법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적인 그림의 질서를 세우려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고구려벽화 조선민화에 이르는 한국적인 회화의 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오죽하면 현실의 화론은 고대 암각화나 고구려벽화 고려불화 민화라고 불리는 조선의 채색화의 맥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며 한국에서 내려오는 채색의 맥의 연계성과 그에 대한 연구자료 및 논문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일제에 유학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교편을 잡은 대부분의 화가들이나 학자들이 퍼트린 이론들로 일본이 말하는 한국의 예술문화는 이어져오는 맥이 없고 쪼가리 문화라는 일제의 이론과도 상통한다. 민화를 계승한 대표적 작가로는 이중섭과 박생광, 박수근, 이왈종, 김병종 등이 있으나 미술이론가들은 이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고 있다.


사실 지금의 한국화의 전통을 망치고 있는 사람들은 현직에 있는 미술관련 교수들과 평론가들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우들도 대학에서 배운바가 없기에 한국화와 동양화의 차이를 구별하는 자가 드물다. 민화는 물론 한국에서 생겨난 전통 혁필화도 나는 학부에서 배운바가 없다. 먹이나 한지 등의 재료로서의 구분이 아니라 유화나 아크릴화를 그려도 한국적 정서와 전통,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이며, 현대적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수용해 나갈 때 한국화의 발전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박제화 된‘유교적 미(美)’속에서 중국식의 ‘전통산수, 계자원 화보의 사군자, 서양화된 일본화식 채색화’를 한국화의 정통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 문인화를 그리면 자신이 양반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므로 각 대학에서는 물론, 화실에서도 예술성을 떠난 신분상승의 욕구로 문인화를 답습한다. 이는 한국화의 발전을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유교의 패습을 욕하는 2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 4군자와 남이 써놓은 필치와 금석문을 모방하며 문자향(文字香)을 즐기는 문인화적 성향 보다는 민화의 붓 가는 대로 그리는 창조적 드로잉의 경향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남종화라는 고유한 불교적 의미와 도가적 그림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림 또한 혜능의 남종선과 같이 화법(畵法)이나 지식으로는 예술의 오묘함을 터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 최고의 서화가로 인식되고 있는 추사 김정희나 안평대군, 겸재 정선도 골법용필(骨法用筆)과 기운생동(氣韻生動)등의 중국의 화관과 작품을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중국의 아류(亞流)라는 흠을 면하기 어렵다. 金正喜(김정희)의 세한도나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정선의 진경산수 등이 한국에서만 잘 알려져 있지 세계회화사에서 끝내 일류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성을 기반으로 한 그 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독자적 예술세계가 아닌 중국적 화관을 모방했다는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화가 나가야 될 중요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왕권과 중세 국가의 묵시적인 예술검열, 감독, 정책을 통하여 봉건국가는 국가의 통치, 종교적 이념에 반하는 모든 자유로운 과학 예술 활동을 억제하고 이러한 억압을 국가의 의무로 선전해 왔다. 진정한 미술 혁명은 그 시대의 정치적 권력이나 유행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화라고도 불리는 그림의 한 장르는 이러한 측면에서 기존의 숨 막히는 중국위주의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입각한 미술형식들에 대한 파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가 관아제 조영석(1686~1761)의 ‘사제첩(麝臍帖)’에서는 제목 바로 옆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물시인 범자 비오자손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준엄한 경고를 해놓은 것도 바로 그 쟁이 적인 장식성 때문이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中에서는 이러한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예술과 기능을 천시한 당시 선비들에게 이쪽에 종사하거나 그러한 재주를 보이는 것은 흠이 되기 때문에 조영석도 그 점에서 상당히 조심 했었으며 그림을 그려 먹고 사는 것은 천한 프로화가 즉 다른 말로 환쟁이 취급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 18세기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기고, 과거나 공무원고시를 생각지도 않는 일반 신흥 상공인들에게 공무원시험을 위한 그들의 중국적인 틀에 박힌 그림은 그리 필요성이 깊지 않았고 민간신앙이 깃들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붉은색과 갖가지 채색 다양하고 재미있는 그림이 더욱 흥미를 끌어 당겼다.


그리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그림이 공무원들의 그림을 닮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길한 상징을 지닌 화공의 정성담긴 그림이 집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엄격한 신분제에 따른 부작용과 기예(技藝)를 천시하는 풍조는 조선사회의 부정적 측면이었다. 문인화가들이 묵향(墨香)과 문자(文字)향을 거론하면서 민화의 이러한 장식성 때문에 천박하다고 하는데 이는 프로의식이 결여된 조선사회의 병폐였다.


중국에도 민화는 있으나 달력 판화로서 그 판본이 약간 있으며, 한국은 판가 아니었으므로 대중예술로서 99%의 그림 판매량을 자랑하는 입체적인 그림 등, 생활전반에 걸쳐 다양한 수십만장의 그림들이 그려졌었으므로 한국에서 꽃핀 한국 고유의 프로화가들의 그림이다. 1%의 중국식 문인화는 취미(여기)화가들의 그림으로서 그림을 팔은 예가 없으며 오직 지인들의 선물용으로만 쓰였다. 이1%가 현재 한국화의 맥을 지배하고 있으며 아직 중국의 식민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도화서의 공무원화가들의 그림 또한 국가가 원하는 틀에 박힌 그림만을 그릴 수 박에 없었고 창조적 민화는 그릴 수 없었다. 민화는 사실 공무원 화가들의 그림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공무원은 프로화가가 아니다. 말 그대로 공무원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을 한, 백성들의 프로들의 그림이 진정한 민화이며 한국화이다. 나는 야나기가 명명한 민화라는 말보다 한국화라는 말을 민화에 쓰고싶다. 중국식 문인화류는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화이다. 그래서 대학생성초기에 한국화과라는 말을 교수들이 쓰지 못하고 동양화과라고 썻었으며, 2000년을 전후하여 한국화과라고 이름을 바꾼 학과들이 몇 있으나 내용과 교수진은 똑 같은 수업을 하고 있다.


장식과 채색은 우리 민족의 순수한 미적 정서일 수밖에 없다. 창작의 기본은 모두 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어떠한 법칙과 관습에 의거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예술관은 기존의 모든 이론과 화법을 배제한 상태에서 화가 자신만의 직관에 의한 조형세계를 세우며 진정한 나의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


고대의 여러 사상가들, 유교의 인의예지, 제도, 법 등 인위적인 규칙을 모두 배척하고 무위자연을 주장한 노자나, 권력을 뿌리치고 속세와의 단절 속에서 해탈을 추구한 석가, 자연권에 입각하여 특권의 폐지와 노예해방을 주장한 소피스트인 엘리스의 히피아스( Hippias ), 소피스트를 비판한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로서 영혼의 자유를 주장한 쾌락주의자 아리스티푸스 (Aristippus), 견유(犬儒)란 ‘개 같은 ’이라는 뜻인데 견유犬儒학파의 창시자로서 반국가주의적인 입장에서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안티스테네스(Antishens), 그 제자인 디오게네스(Diogenes),등은 이러한 예술정신을 보여준 실 예라고 볼 수도 있다. 견유학파로서 으로 술통에 살던 자신을 찾아와 부탁을 하라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볕을 막지 말라”고 하여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권력의 틀에 빌붙어 예술행위나 철학을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


미술의 순수성과 창조성의 경우 그 사상의 뿌리가 일부사상가나 운동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인들의 그림 자체에 그 가치와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 시대의 활자나 메스컴이 그 예술의 가치를 점수 먹여 왔고 진실은 관아제 조영석의 경우처럼 수 백년을 은폐되어 온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조영석이 문인화를 그리던 조선시대는 물론 2000년대 현실의 학계정론 또한 일부미술이론가나 미술운동가에게 그 뿌리를 고정시키고 있기에 다른 이론과 창조적인 그림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현실이다.

-北洲 주성준-

北洲 주성준 [프로필]

1994~ :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학사) 및 동 대학원 (석사)졸업
2007.3~ :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과 강의역임
2009~: 인천시민대학교 출강
2006 : 미술은행 공모 당선(인천문화재단)
2006 : 조선민화박물관 민화논문공모 대상 수상
2006 : 조선민화박물관 민화공모 최우수상 수상
2006 : 민화의 재명명과 분류 학술 워크샵 기획 및 진행(인천문화재단후원)
2007: ( 방송위원회, 2007년 방송콘텐츠제작지원 공모당선) 백남준, 세계에 한국을 심다 기획. 미술,효과 담당.
2008:celebrate the Beijing olimpic games international fineart big exhibiton은상수상(중국 서안 양보루 미술관)
1997~ : (사)한국미협회원
11회 개인전 및 단체전다수

*작품소장처: 경희대학교 박물관. 인천문화재단.


조선민화박물관. 빛갤러리. 메이준갤러리

2009.12.5~12.11 : 2009 불우환자돕기 함께하는 마음전 (서울 현대아산병원갤러리)
2009.11.19~1.23 : 한중수교 17주념기념 한중미술국제교류전

(중국 절강성 항주 서호 엑스포박물관)
2009.9.26~9.30 : 인천 시립미술관 건립참여전 (인천 종합문예회관 인천미협초대전)
白狐의 해에 만나는 주성준의 ‘해피 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