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한국진출 노리는 화교巨商 열전
홍콩의 땅재벌, 대만의 PVC왕, 태국의 돈황제 홍콩의 이가성(李嘉誠), 대만의 왕영경(王永慶), 태국의 진필신(陳弼臣)은 화상(華商)의 주요산업인 부동산개발, 석유화학, 금융업을 대표하는 세계적 부호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양필승 건국인문대 교수·중국사
화 상(華商)들은 최근 세계를 두 차례나 놀라게 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가 80년대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그 주역이 화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계는 그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시아 1000대 기업 중 517개가 화상들의 소유다. 이들의 총자산 5500억달러는 중국대륙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인 것이다.
아시아가 외환위기로 비틀거릴 때, 대부분의 화상들은 건재하다는 사실에 세계는 또다시 놀랐다. 특히 서양학자들이 동아시아 위기의 근원으로 진단하는 금융부문에서마저도, 전당포에서 다국적 은행에 이르기까지 화인(華人) 금융기관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함으로써, 화상에 대한 흥미는 한층 커졌다.
마침 외환위기를 직접 경험했던 우리도 화상과의 전략적 제휴에 적극 나섰다. 환란이 한창이던 98년 여름, 정부는 대규모 투자유치단을 화교 금융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싱가포르에 파견했으며, 정부출연 연구 기관 등을 중심으로 학계에서도 화상에 대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최근 들어서는 화교자본의 유치에 그치지 않고, 한국 내 유일한 소수민족 집단인 화교(華僑) 자체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몇몇 지방단체가 차이나타운 설립을 추진함으로써, ‘차이나 타운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씻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랜 세월 워낙 배타적으로 살아 왔던 우리에게, 화교나 화상의 존재는 아직도 현실로 크게 다가오지 않고 있다. 특히 화상에 대해서는 객관적 근거 없이 무조건 폄훼하거나 막연하게 경계심을 품는 바람에 그 거리감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한국인들은 화상이란 단어에 얽매여 그들을 중소기업인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업가적인 마인드보다는 단기적인 이익에 급급한 장사꾼에 불과하다고 비하하면서 그들의 최근 성과를 일시적인 것으로 과소 평가해버린다. 화상은 특별한 기술력 없이 교역이나 부동산 투기에 주력하기 때문에, 단기 차익만을 노리고 한반도에 진출할 거라는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본을 유치하기를 아예 기피해버린다. 또 화상은 가족이나 동족 경영으로 지극히 폐쇄적이어서 그들과는 장기적인 제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끝내는 우리가 이용만 당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그들과의 전략적 제휴도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이와 같은 편견이나 무지는 오랫동안 화상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 않고 일본의 경제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을 이해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마저도 화상과의 전략적 제휴를 21세기의 생존전략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정도로, 화상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제법 활발하다. 무엇보다 국경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화상을 세계화의 첨병으로 이해하려는 긍정적인 시각이 점차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나무 네트워크’
일부에서는 화상 네트워크를 ‘대나무 네트워크(bamboo network)’라 부른다. 대나무가 특별히 함축하는 의미는 없으며, 단지 동양의 이미지 또는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뜻에서 쓰이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가운데, 대나무 네트워크는 특정 지연 또는 동족관계 등의 혈연, 나아가 보다 큰 테두리로 중국문화라는 문화적 유대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진행되면서, 대나무 네트워크의 결속력은 오히려 강화되는 느낌을 주었다. 예를 들어, 97년 말 중국 광둥(廣東)의 산터우(汕頭)에서는 제9회 국제 차오저우(潮州) 관련단체 연합회가 성대하게 열린 가운데 20여개 국가와 지역에서 모두 3000명이 모여, 마치 한달 전 홍콩증시의 주가폭락으로 이들 화인기업가들이 30~50%의 자산을 잃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매우 들뜬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글의 이가성이나 진필신이 바로 차오저우 출신이다.
지연 또는 혈연에 기반을 둔 화인들의 각종 세계대회는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것만 해도 17개에 달한다. 최근에는 지연과 혈연관계를 초월한 범세계적인 화상대회도 매우 활발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는 10월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로, 싱가포르 리광요 총리의 제창에 의해 격년제로 세계 각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대나무 네트워크 형성 움직임도 활발하다. 싱가포르 중국인 상공회의소에서는 1997년 7월 화상 인터넷 홈페이지 http://wcbn.com.sg를 개통시켰다. 개통 즉시 매월 50만명 이상이 조회하며, 53개국 10여만 화상에 관한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하루 20통 이상의 새로운 비즈니스 정보가 뜨며, 사용자의 지역적 분포는 중국 홍콩 대만 및 동남아 지역이 50%, 한국과 일본이 20%, 그리고 나머지 30%는 구미지역이 차지하고 있다.
화상 네트워크는 인위적이라기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중국인의 해외진출 역사는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인 이민사는 17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대량의 해외탈출(exodus)은 19세기 아편전쟁 이후이며, 이때 무려 1000만명 이상의 중국인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새로운 삶의 터를 일구었다. 자연히 혈연이나 지연을 통해 이주와 정착이 진행되고, 그들의 생활 반경이 점차 국경을 넘어서자 자발적으로 대나무 네트워크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언어가 다양하여 같은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산둥(山東) 말과 광둥 말, 그리고 베이징(北京) 표준어는 마치 영어 독어 불어와 같은 관계를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혈연이나 지연에 기초한 네트워크에 자연스럽게 힘이 실렸던 것이다. 더욱이 다른 다국적기업과 마찬가지로 화상도 해외진출시 현지정보 부족과 언어 장벽에 부딪히기 십상이었고, 이 경우 화상은 국경을 초월한 화교사회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불행히 우리나라는 대나무 네트워크에서 소외됐다. 우선 한국의 화교, 즉 한화(韓華)는 전국을 통틀어 고작 1만8000여명에 그쳐, 수적으로 열세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산둥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한국의 화교는 국제 화교사회의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무엇보다 주류인 남방의 광둥이나 푸젠(福建) 출신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배화(排華) 감정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일제의 이간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광복 후에도 여전히 재산권 행사 등에 제약을 받은 화교들이 상당수 이 땅을 등지고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그 결과 소공동을 중심으로 제법 번창했던 서울의 차이나타운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그런대로 활기를 띠었던 차이나타운들이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쇠락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한 경제논리보다는 문화적 연계성을 앞세우는 ‘대나무 네트워크’와 ‘접속’하기 위해서도, 차이나타운 건립이든 인터넷 구축이든 서둘러야 한다. 현재 수적으로 얼마 안 되는 한화는 다른 나라의 화교들에 비해 대체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못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화상의 역사를 검토해볼 때, 반드시 화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대나무 네트워크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 화교는 물론 한국인도 함께 동참하여 화교자본의 유치나 그들과 전략적 제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인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문명의 공동 기반을 향유해 왔기 때문에, 대나무 네트워크와의 연계는 상대적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이 글은 화상, 즉 화인 기업가 몇몇 개인에 대한 소개보다 화상사회 전체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는 취지에서 감히 열전(列傳) 형식을 채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우리로 하여금 화상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화상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열전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우선 지리적으로 홍콩 대만 동남아라는 화상의 활동무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이가성(李嘉誠), 왕영경(王永慶) 및 진필신(陳弼臣) 세 사람을 대상으로 꼽았다. 이들 세 사람은 화상의 주요 산업인 부동산개발, 화학산업 및 금융업을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미 한국과 제휴할 마음이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했다. 진필신의 장남이자 현재 홍콩 중화 상공회의소 회장인 진유경(陣有慶)은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드러냈다. 이가성도 연 18%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전략을 이미 세워 놓은 상태다. 왕영경은 미래의 신규사업으로 전기자동차를 설정했기에 자동차가 주산업인 한국경제와 동반상승을 위한 전략적 제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미스터 머니' 이가성(李價誠), 홍콩의 슈퍼맨 |
홍 콩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매 1 홍콩달러(787원) 중 5센트는 이가성의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이가성의 존재는 홍콩인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이가성의 거대자본이 형성된 첫 출발점은 1950년 설립한 플라스틱 조화와 완구를 생산하는 소규모 플라스틱 제품 생산공장. 당시 투자 규모는 자신의 저축과 친구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합친 5만 홍콩달러에 불과했다.
이때 자신의 공장을 처음으로 가지면서 선택한 명칭이 바로 장강(長江)이었다. 장강은 중국대륙의 양자 (揚子)강을 가리킨다. “장강이 지류들을 취사선택하지 않아야 비로소 모든 지류가 바다에 이를 수 있다”고 그가 훗날 술회한 바처럼, 세상을 자신의 그릇에 담고자 하는 포부를 일찍부터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이렇듯 중소 플라스틱 조화 제조업체인 ‘장강공업 유한공사’를 ‘장강실업(長江實業)’이란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가성은 단순히 하나의 성공한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자기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인간이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는 능력
1928년 중국 남부 광둥의 차오저우에서 출생한 이가성은 어린 시절 부친이 소학교 교장이었던 관계로 생활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1940년 일본의 침략을 피해 일가가 홍콩으로 이주한 후 2년 여가 지나면서, 부친이 폐병으로 쓰러지고 집안은 점차 기울어 결국 13세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완구회사의 판매원으로 세상과 처음 대면한 이가성은 모든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불과 5년 만인 17세 에 총지배인이 될 수 있었다. 다시 5년 후인 1950년 독립해 ‘장강’이란 명칭의 소규모 플라스틱제품 제조공장을 탄생시키면서 자신의 웅대한 포부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1950년대 후반은 구미에서 플라스틱 조화의 열풍이 불었던 때로, 박리다매 전략을 통해 장강은 나름대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가성은 이를 토대로 1958년 홍콩 부동산업계로 과감히 진출했다. 이가성이 예측한 대로, 홍콩은 1960년대에 들어 세계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인 개발붐이 일었다. 그 결과 신규로 부동산업계에 진출한 장강실업은 급속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가성은 1977년 영국계 회사인 ‘화기황포(和記黃?: Hutchson Whampoa)’를 사들였다. 1828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영국식민지 자본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중국인이 이를 매입했다는 점에서 이가성의 지위는 단숨에 올라갔다.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중국인이 영국계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수과정에 세계적인 금융기관인 홍콩상하이 뱅크(HSB)가 적극적으로 이가성을 거들어줌으로써, 이제 그는 국제적인 기업인으로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가성은 ‘화기황포’를 중심으로 1980년대 들어 국제화와 다원화에 대한 구상을 착착 실현시켜 나갔다. 그는 이미 홍콩의 발전을 주도했던 부동산업이 종국에는 홍콩경제발전에 장애물로 등장할 것이며, 고부가가치 고기술산업과 과감한 해외투자를 통한 외화획득만이 21세기를 맞는 홍콩기업의 발전전략임을 간파했다.
“홍콩 내부경제에 대한 부동산업의 영향력은 지대하지만, 부동산업의 해외투자는 홍콩 해외투자의 5%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서는 외화 획득은커녕 외자의 도입도 기대할 수 없다.”
미래지향적인 이가성의 기업관은 자신의 그룹에 그대로 반영됐다. 현재 장강실업은 전세계 24개 국가와 지역에 투자하고 있으며, 고용인원은 8만명에 달한다. 업무의 포괄범위는 부동산, 호텔, 컨테이너, 제조 및 소매, 통신, 기초시설건설, 에너지분야 등 광범위하다. 마침내 1985년 홍콩전력을 인수, 홍콩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자리를 굳혔다.
중국 대륙을 향해
1982년은 이가성에게 새로운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다. 연초에 “홍콩이 앞으로 15년 후 중국으로 귀속될 것”이라는 소식이 나돌자 홍콩 사회가 일순간 공포에 빠져 들었다. 이 해 약 2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일시에 홍콩을 빠져나갔고, 반환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에는 폭동방화 약탈이 자행되면서 홍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해에 몰아닥친 세계불황은 홍콩경제를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빠뜨렸다.
이때 이가성은 위기상황을 기회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대륙진출에 나섰다.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홍콩경제의 불황으로 말미암아 주요 사업기반인 부동산이 침체상황에 빠지자, 그는 심각한 현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때 이가성은 대륙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덩도, 이가성이 필요했다. 장기적으로 이른바 ‘1국2체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홍콩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건재해야만 했기 때문에, 홍콩의 거물기업가인 이가성과의 밀월은 바람직했던 것이다.
사실 이가성과 중국정부의 밀월은 이보다 앞서 시작됐다. 덩 샤오핑이 개방을 선언하자마자, 1979년 이가성과 미국인이 합자한 홍콩의 시멘트 공장에 국영 중국은행이 대출을 해줬던 것이다. 그러나 1982년의 베이징 면담을 계기로 비로소 이가성과 대륙의 관계는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자금사정이 안 좋았지만, 이가성은 대륙은 물론 홍콩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이는 홍콩시장의 혼란에 대한 덩샤오핑의 우려를 앞장서서 불식시켜 주는 동시에 대륙의 개방의지에 대한 홍콩자본가들의 지지를 가시화 시켜 주는 성과를 가져옴으로써, 이가성과 중국 정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1989년 이른바 ‘6·4 천안문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이가성은 적극적으로 대륙에 진출했다. 아울러 1985년부터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함으로써 대륙과의 정치적인 유대도 한층 강화시켰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일단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1992년까지 중국대륙은 물론 해외투자 전반에 걸쳐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섰으나 다시 중국정부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대륙투자는 물론, 중국기업이 해외로 진출하는 데 아낌없는 조언과 자금을 제공해왔다.
아시아 외환위기의 성공적 극복
이가성이 추구한 국제화와 다원화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홍콩경제가 추락하여 도산 또는 경영 부진에 빠진 기업이 급속히 증가했던 상황에, 경영이윤을 높여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장강그룹의 1997년과 1998년도 세후(稅後) 순이익이 각기 171억 홍콩달러와 62억 홍콩달러를 기록해, 비록 절대액 측면에서는 감소되는 양상을 나타냈으나, 금융위기의 역풍 속에서도 여전히 경영이익은 확보할 수 있었다.
최근 화인기업은 다원화라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사업분야인 부동산개발업무로부터 정보통신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산업으로의 신속한 전환을 꾀하고 있으며, 국제화라는 측면에서 중국 북미 유럽 등 성장 지역에서 시장 확대를 추진하는 큰 흐름이 이미 형성돼 있다. 이것이 바로 ‘성장사업영역으로의 다원화’ ‘성장사업지역으로의 전환을 통한 국제화’로 표현되는 장강그룹의 경영전략 요체라 할 수 있다.
결국 장강그룹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풍랑 속에서 기념비적인 실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가성은 미국의 ‘포브스’지가 매년 자산규모를 기준으로 발표하는 세계 기업가 순위에 97년 15위, 98년 13위, 그리고 올해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10위에 랭크되었다. 이처럼 자산규모 순위가 지속적으로 상승한 예는 아시아에서 유일하다. 반면 홍콩의 대표적인 대부호 이조기(李兆基), 곽병상(郭炳湘) 형제는 금융위기의 와중에 엄청난 자산 손실을 경험했으며, 99년 현재에도 아직 96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산규모면에서 이가성은 97년 수준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대 부호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성장세는 그가 금융위기가 아직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오히려 위기를 호기로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냉철한 판단력과 더불어 추진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8년 2월, 홍콩정부는 금융위기 발생 이후 최초로 토지경매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는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홍콩의 주요산업인 부동산업과 관광업이 혼돈에 처해 있었던 상황이며 중국 본토와 접경지역인 신계(新界)의 호텔부지 경매에 소극적인 기업이 많았다. 장강실업은 이 부지를 1평방피트당 200홍콩달러라는 싼 가격으로 낙찰받았다.
당시 일부 매스컴에서는 “농업용지 가격으로 호텔용지를 취득했으니, 이것은 장강실업과 홍콩정부의 유착”이라고 몰아붙였다. 이가성은 곧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론을 펼쳤다.
“부동산 가격이 바닥으로 하락했고, 관광업계가 도산하고 있는 와중에 만약 홍콩정부가 이 낙찰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면, 매스컴은 이번에 아마 역으로 홍콩정부가 지가를 높게 유지해 관광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도덕적 무장과 ‘1달러의 철학’
비정한 경쟁원리가 작용하는 기업세계에서 이가성은 비록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도덕적 가치관을 중시한다. 몇 년 전, 장강실업이 빌딩을 구매하는 과정에 구매담당자는 계약 당일 상대방이 측량을 누락했음을 발견, 장강이 1000만 홍콩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이가성의 변호사도 “계약이 곧 완료될 것이고, 측량누락은 상대방의 실수기 때문에 계약 효력의 발휘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가성은 상대방의 실수일지라도 부족분인 1000만 홍콩달러를 지불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와 거래상대 사이에는 끈끈한 신뢰관계가 형성됐고, 현재까지도 그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 이렇듯 그는 ‘인(仁)·의(義)·덕(德)’을 기업 경영 모토로 삼고 있으며, “불의로 취한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늘 말한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날로 증가하는 현시점에 이가성은 당연히 해야 할 일과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할 일의 구분을 강조한다. 그 원칙이 파나마 투자에서 드러난 바 있다. 비행장 호텔 골프장 등 종합적 투자를 통해 파나마 최대의 해외투자자로 등장했던 그에게 파나마 대통령은 감사의 대가로 카지노 허가권을 내줄 뜻을 내비쳤다. 기실 카지노는 많은 투자자들이 허가받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약속했듯이 돈벌이된다고 아무 사업이나 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를 정중히 거절하면서 스스로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결국 파나마정부와 타협해 호텔 밖에 독립된 건물을 세워 제3자로 하여금 경영케 하고, 자신은 임대수익만을 취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1997년 10월, 홍콩주가가 폭락한 후 이가성은 1억 홍콩달러를 사용해 장강실업 주식을 사들였다. 얼마 후 98년 2월 주가가 회복되자 매스컴에는 그가 앉아서 이익을 챙길 수 있게 됐다고 비난하는 글이 등장했다. 그는 이에 대해 기자회견을 통해 부에 대한 소신을 재천명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내 돈이라면, 1달러를 떨어뜨려도 반드시 그것을 줍는다. 내 돈이 아닌 경우, 누군가가 1000만 달러를 집 앞에 두어도 절대로 집어들지 않는다.”
이와 같은 ‘1달러의 철학’은 몇 년 전 골프장의 일화에서 실제로 증명됐다. 차에서 내리는 중에 1달러짜리 동전이 주머니에서 떨어졌고, 세계적인 대부호 이가성은 이 동전을 주우려고 애썼다. 이때 인도계 종업원이 그를 도와 동전을 찾았고, 그는 이에 감사하며 그 종업원에게 200 홍콩달러를 주었다. 200배의 대가로 1달러짜리 동전을 돌려받은 그는 “자신의 돈은 1달러라도 소중히 해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후계자 이택거
현재 71세인 이가성은 99년 1월 장자인 이택거(李澤鉅)에게 장강그룹 회장직을 이양하고, 자신은 ‘화기 황포 유한공사’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장강그룹이 여전히 이가성의 감독하에 있으면서 한편으로 이택거의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자 이택거는 1986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홍콩으로 돌아와 이가성의 후계자가 되는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장강그룹과는 무관하게 가족의 개인투자형식으로 캐나다 밴쿠버에 107억 홍콩달러 규모의 ‘콩코드 퍼시픽 플레이스 (Concord Pacific Place: 萬博豪園)’라는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실패시 장강그룹에 미치는 타격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이가성의 조심스러움과 함께 후계자로 성장시키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부자 3년 가지 못한다”는 말을 진리로 믿고 있는 이가성으로서는 자신의 후대를 책임져야 함을 숙명처럼 느끼고 있었고, 이 때문에 불과 22세에 지나지 않는 혈기왕성한 자신의 장남에게 대규모사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당시 홍콩인의 캐나다 투자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이택거는 200여 차례의 공청회를 개최하고, 2만여명을 만나면서 대중을 이해시키는 방법을 취했으며, 마침내 90년 ‘콩코드 퍼시픽 플레이스’를 성공리에 분양했다.
1996년은 이택거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그를 보좌하던 감경림(甘慶林)의 계획하에 중국전문 투자업체인 장강기건(長江基建)을 그룹에서 분리해 상장시켰다. 당시 약 25배에 달하는 이윤을 남겼으며, 이에 아버지 이가성은 대단히 만족해 했다.
이가성은 장강기건의 상장 4개월 후, 자신이 2년 후인 1998년에는 물러날 것임을 표명했으며, 이후 장강 그룹 관리는 점차 장자에게로 이양됐다. 현재 장강그룹은 이택거가 대표이사로서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가성은 명예직인 회장직만 지니고 있다.
'PVC의 왕' 왕영경(王永慶), 타이완의 세계적 거부 |
우 리나라처럼 기업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못한 타이완에서 존경받는 소수의 기업인 가운데 하나인 왕영경(王永慶)은 1999년 현재 자산이 미화 58억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거부로 자리잡았다.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조깅을 하는 등 왕성한 체력과 강건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타이완 플라스틱 (台塑, Formosa Plastics Corp., Ltd) 그룹을 관장하고 있다. 이미 타이완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주요 생산품인 PVC 원료의 연간 생산량 98만t은 단일품목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다. 이제는 전기자동차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면서 자동차산업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PVC의 P자도 몰랐던 그가 오늘날 세계 굴지의 석유화학기업을 소유하기에 이르렀고, 고령의 나이에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업분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인 왕영경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존경은 단순히 기업 규모의 거대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도만을 고집하는 그의 기업가 정신에 기인한다.
“유년시절의 어려움은 하늘이 준 복”
왕영경은 1917년 1월18일 타이베이(臺北) 근교에서 태어났다. 수백호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인 이곳은 가난하지만 비교적 인심이 좋아 ‘정이 가득한 마을’이라 불렸다. 본래 왕씨 집안은 청나라 후반기에 대륙 남부 푸젠(福建)에서 건너와 정착했다. 왕영경의 부친 왕장경(王長庚)은 조그만 차밭을 가진 빈한한 농민으로,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고 왕영경이 맏이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왕영경은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부친 덕택에 10km나 떨어진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3학년이었던 아홉살 때 부친이 병마로 쓰러지면서 주경야독의 고달픈 삶이 시작됐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왕영경은 15세에 고향을 떠나 숙부의 소개로 타이완 남부 자이(嘉義)란 도시로 옮겨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이듬해 200달러를 자본으로 자신의 쌀가게를 열었다. 이것이 그의 첫 사업이었다. 이후 정미소, 벽돌공장, 목재소를 거쳐 1953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이완 플라스틱 유한공사(臺灣塑膠工業股 有限公司)를 자기자본 미화 50만 달러와 미국원조 67만 달러로 설립했다.
이런 과정에 ‘어려움을 참아내며 노력한다’는 인생의 좌우명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는 1975년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교육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따라서 별로 장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이것을 오로지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함으로써 보충하고자 하였다. 이제 그 결과 곤란을 극복하는 용기와 정신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유년시절의 어려움은 하늘이 나에게 준 복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세계적인 거부로 성공한 왕영경은 성공이야말로 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만큼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는 운이란 개념을 ‘뜻을 가지고 노력하고 대비하는 자에게만 성공으로 이끄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고 풀이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타이완의 기업가들이 점술에 의존해 앞날을 내다보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과거의 인생은 스스로 경험하고 살아왔던 것이고, 미래의 인생은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인 것을 믿을 뿐이다.”
여윈 거위의 교훈
왕영경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독특한 경영철학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고객을 왕으로 여기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의 경영, 원가절약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영, 이론과 실무의 결합을 중시하는 경영을 통해 기업의 최종책임은 경영자에게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왕영경은 자신의 사업으로 처음 시작한 쌀가게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객을 중시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먼저 고객이 쌀가게에 와서 구입하던 기존 판매형태에서 직접 집으로 배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그 집의 가족 수와 쌀 소비량을 조사한 후, 쌀이 떨어질 때를 예측하여 배달하는 능동적인 판매전략을 세웠다.
수금하는 데 있어서도 고객의 편의를 고려했다. 즉 직종별 월급날을 조사 분류한 다음 월급을 받은 후에 쌀값을 청구했다. 아울러 주문하면 언제든지 배달해 준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악천후도 가리지 않았으며, 새벽 2시에도 배달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영경의 이런 혁신적 판매기법은 고객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 인해 1~2년 후 매출량이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왕영경은 경영기법 핵심은 효율을 추구하고 원가를 낮추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원가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실제로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 그는 공장 건설비용 절약, 인원의 합리적 조정, 생산능력 제고, 자원 절약의 네 가지를 강조했다.
이와 같은 원가 절약과 효율성 추구는 비록 사소하기는 하지만 엘리베이터의 유지보수문제와 관련한 일화에서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왕은 골칫거리였던 엘리베이터의 유지보수를 위해 내부의 공무부가 책임지는 대신 이제까지 외주를 주던 20만달러를 당해 부서 직원 7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따라서 이들의 연봉이 일시에 갑절로 느는 효과를 가져오는 동시에, 회사로서는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얻은 셈이 된다.
왕영경은 하천의 원류를 찾아가듯 문제의 근본부터 끝까지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얻어진 결과는 다시 경제적 효율을 바탕으로 재검토됐다. 따라서 학력보다는 실력을 강조하고 있다. 즉 모든 일에 실제적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실무는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경험이야말로 최고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기업의 기층부터 경험하는 것을 경영자의 성공요건으로 인식해 장남인 왕문양(王文洋·50)은 밑바닥부터 경험토록 훈련시켰다. 그러나 그가 학문과 지식을 무조건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지식과 독서는 명확한 목적의식과 실제 문제를 통해 검증했을 때 비로소 효과가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험을 통해, 그는 기업의 성패에 대한 최종책임은 경영인에게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1942년 전쟁과 흉년으로 새로 시작한 벽돌공장마저 경영난에 빠지자 부업으로 거위를 키웠다. 그는 바싹 여윈 거위를 산 후, 버리는 채소잎과 뿌리를 정미소의 부산물과 섞어 사료로 제조해 먹여 통통한 거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그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사람이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은 못 먹어 여윈 거위와 같으니, 인내력을 키워 기회가 오면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거위가 여윈 것은 거위 탓이 아니라 거위를 키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기업 경영의 부실은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자가 올바른 경영전략을 선택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도(正道) 경영의 기업인
타이완에서 왕영경은 존경받는 극소수의 기업인 중 한 사람으로 정부 관리도 공개적으로 그를 칭송하는 데 그 이유는 기업가로서 정도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버는 데도 정도가 있고, 쓰는 데도 정도가 있음을 강조한다. 기업은 비록 개인이 만들었지만, 발전과정에 사회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결코 개인이 맘대로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생활태도와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지(明志)공전이란 직업학교와, 장경(長庚) 기념의원이란 비영리 의료기관, 명덕(明德)재단 산하에 생활개선연구소를 설립했다. 학교는 학생 전체가 기숙사에 숙식하면서 지식교육과 생활교육을 동시에 습득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아울러 타이완 플라스틱 그룹과 산학협동을 통해 현장실습과 노동을 통한 학자금 획득 기회를 제공해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숙시키기 위해 설립했다. 병원은 의료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王長庚)를 기념하여 수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소는 타이완 사람들이 경제발전으로 물질적 측면에서 는 향상이 이루어졌지만, 생활의 질적인 측면은 그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비영리 연구단체이다.
이외에도 자신의 경영관리기법을 중소기업에 전수하는 사업을 1985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업을 통해 왕영경은 자신이 얻은 이익을 사회로 환원하고 있으며, 이 점이 바로 그가 일반인으로부터 존경받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왕영경은 솔직하고 담백하여 허례를 거부한다. 한 장의 타월을 무려 27년간 사용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는 “저명인사들이 부모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하는 것은 허례”라고 비판하면서 절약을 강조했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는 과도한 접대도 싫어한다. 외빈 접대는 거의가 그룹에 속한 초대소에서 행해진다. 그 내용도 검약한 성품을 반영해 다른 초대소에 비해 청결하고 위생적일 뿐, 적절한 양의 중국음식을 서양식으로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왕영경의 재미있는 식생활습관 한 가지. 시간절약을 위해 수박이나 포도의 씨를 골라내지 않고 그대로 먹는 습관이 있는 그는 일본인이 복숭아를 먹을 때 껍질을 벗겨 잘라 먹는 습관은 낭비라고 비난한다.
불투명한 후계구도
왕영경은 부인이 셋인데, 둘째 부인에게서 2남 3녀, 셋째 부인에게서 4녀를 두고 있다. 이들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대단히 엄격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녀들이 의존심을 가지지 않도록 교육했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독립시켰다. 이런 점에서 왕영경은 자식들에게 아르바이트로 용돈벌기의 기회를 주는 미국 부모들의 습관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은 이제 50세가 된 장남 왕문양을 필두로 왕영경의 자식들은 모두 장년층에 접어들었고, 오랫동안 함께 그룹을 이끌어 왔던 5년 연하의 동생 왕영재(王永在)와도 새롭게 관계를 정립해야 할 시점에 있다.
현재 그룹은 왕영경, 왕영재, 그리고 왕영경의 셋째 부인인 이보주(李寶珠)의 삼각구도로 정립되어 있는 상태다. 일찍이 왕문양을 미국에 보내 실무경험을 쌓게 한 바 있으나, 아직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지 않는 등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후계구도에서 선두주자격인 장남 왕문양은 17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24세에 화공학 박사와 MBA를 동시에 취득한 수재로, 학위취득 후 3년간 미국의 화학회사에 종사하면서 투자분석과 과정설계 분야의 실무경력을 쌓았다. 1980년에 타이완 본사에 과장급으로 진입한 후, 1년간 실무 경험을 쌓은 뒤 곧이어 경영자 레벨로 뛰어 올랐다.
현재 왕영경은 중국 진출을 위해 중국 남부공업지역에 설립한 굉인(宏仁)그룹의 총재로 활약하고 있다.
태국의 진필신(陳弼臣), 차오저우 인맥의 대부 |
태 국의 최대부호 중 한 사람인 진필신(陳弼臣·친 소폰파니치, Chin Sophonpanich)의 사업은 1998년 그가 사망한 이후 홍콩 및 해외투자부문은 장자인 진유경(陳有慶·Robin Y.H. Chan)이, 방콕은행 등 태국의 금융업무는 차남인 진유한(陳有漢·챠트리 소폰파니치, Chatri Sophonpanich)이, 기타 업무는 둘째 부인인 요문리(姚文莉)와 그의 소생인 영덕(永德), 영건(永建), 영명(永名), 영립(永立) 등이 계승했다. 이들 진씨 집안이 소유하고 있거나 지분참여 형태로 있는 기업은 150개를 상회하고 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화교기업인 진필신은 천부적으로 탁월한 숫자개념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함께 흡수하여 창조적으로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서구적인 금융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통적인 화교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동시에 활용할 줄 아는 독창적인 전략으로 오늘날 동아시아의 거대한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13년 중국 남부 차오저우(潮州) 지방 출신인 부친과 태국인 모친 사이에서 출생한 진필신은 5세 때 방콕에서 중국 차오저우의 항구도시인 산터우(汕頭)로 보내져 어린 시절을 홀로 보냈다. 빈곤한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17세에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초기 막노동, 주방일, 상점 점원, 목재상 경리, 건축회사 경리 등을 전전하면서 저축한 소규모 자본을 갖고, 목재 철물 통조림식품 미곡 등을 취급하는 아주무역(亞洲貿易)이란 회사를 설립하면서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켜 갔다.
자수성가의 전형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지만, 위기는 오히려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보잘것없는 학력에도 불구하고, 서류정리 업무와 숫자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일본군의 주둔과 더불어 나타난 살인적인 인플레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업을 금 거래 분야로까지 확대시켜 갔다. 당시 금 시세의 폭등은 진필신이 일개 경리에서 대자본가이자 대금융가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드디어 1944년 12월, 오늘날 진씨들의 가족 비즈니스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방콕 은행을 차이나타운에 설립함으로써 일대 전기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방콕은행은 자본금 미화 16만달러, 직원 23명에 불과한 소규모였으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태국 최대 은행으로 자리잡았다. 국내의 240여개 지점과 함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지역은 물론이고,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지 40여개의 지점에 2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거대 국제금융자본으로 대변신을 이루었다. 1984년 포브스지는 그를 세계 12위의 금융가로 랭크하면서 ‘자수 성가한 화인의 전형적인 인물 중 하나’로 높이 평가했다.
진필신의 성공비결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작은 것이 크게 변한다’는 신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방콕은행의 설립 초기에 고객은 대부분 소상인인 태국의 화교들이었는데 당시 태국 내 대규모 은행들은 소상인들과 관련된 업무를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박리다매 마케팅 전략은 주효했으며 동시에 화교라는 자신의 신분을 백분 활용, 화교사회의 커다란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전략은 그가 서구의 선진적인 금융기술을 꾸준히 연구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서구 은행들은 일반인의 소액계좌를 적극 유치해 고객예탁금을 높이는 동시에 저축에 대해서는 낮은 이자율을 적용한다. 반면 대출에는 아주 높은 이자율을 부과, 은행의 수익성을 향상시키는 게 일반적인 경영비법인데 진필신은 이를 화교사회에 적용했던 것이다. 또한 단순히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객유치를 위해 월 3%의 이자율과 하루 단위로 이자를 계산하는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펼침으로써 방콕은행은 비교적 빠르게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차오저우 네트워크
중국 남부 광둥의 성도인 광저우(廣州)에서 북동쪽으로 270km 떨어진 산터우와 차오저우 두 도시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두 지역 모두 차오저우 방언을 쓰기 때문에 한데 묶어 차오저우 지방이라 부른다. 이들 차오저우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광둥 사람으로 분류하는 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독특한 문화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조직에 대한 충성과 단합력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해외 화교 거부의 상당수가 차오저우 출신으로, 이들은 지연을 매개로 다국적기업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해외 화교사회에서 객가(客家) 집단과 함께 핵심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진필신이 금융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태국내 화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차오저우인들은 물론 동남아 각국에 있는 차오저우인의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방콕은행과 홍콩에 설립한 아주상업은행(亞洲商業銀行)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싱가포르 대만을 필두로 아시아와 구미지역 차오저우계 은행의 주요 지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갔고, 결국 진씨 일가의 기업 그룹은 거대한 차오저우인의 금융창구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던 셈이다.
차오저우 출신 인물 중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성장한 진필신은 1998년 사망하기 전까지 태국 차오저우 단체의 회장직은 물론이고, 화교 단체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현(縣) 단위 친목단체인 차오양(朝陽) 출신 모임을 주도했으며, 아울러 홍콩 내 차오저우계 상공회의소 종신회장이라는 명예도 누렸다.
진필신의 성공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와 태국 군부의 관계다. 본래 방콕은행은 이후 1947년의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핀 쿤하반 장군 등 태국의 실세들의 출자에 의해 건립됐다. 그가 핀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36년 핀의 양자인 우다네와 교분을 맺으면서부터였다. 우다네는 진필신과 같은 차오양 출신으로, 경리업무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던 그를 핀에게 소개했다.
일본군이 진격하면서 방콕을 비워야 했던 핀 장군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군수물자나 건축자재 또는 금과 같은 귀금속 거래를 맡길 대리인이 필요했고, 진필신이야말로 적임자였다. 1942~1945년의 짧은 기간에 핀장군의 후원을 등에 업고 암시장의 재정관리는 물론 무역상사 건설회사 보험회사를 통한 합법적 경제활동도 활발히 펼쳤으며, 방콕은행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57년의 군부 쿠데타 실세인 사리트 장군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자, 홍콩에서 5년간 망명생활을 꾸려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방콕은행은 실세 중 하나인 프라파트 재무장관의 후원 하에 계속 번창했다. 1963년 사리트의 사망 후 귀국한 그는 방콕은행 회장직을 프라파트에게 넘겼으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로서 방콕은행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진유경과 진유한
진필신의 실질적인 후계자는 전처 소생인 진유경(67)과 진유한(65)으로, 장남인 진유경에게는 상업은행, 차남인 진유한에게는 방콕은행을 각각 운영토록 미리 후계구도를 짜놓았던 것이다.
현재 방콕은행은 진씨 가족의 최대 자산이 되고 있으며,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50%를 상회한다. 이 가운데 약 4분의 1이 진유한 소유다.
진유한은 무엇보다 ‘인적 자원, 기술, 능률’ 이 3대 요소가 은행이 고품질의 서비스와 경쟁력을 지니기 위한 기본 요소임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방콕은행을 단순히 태국 내의 최고 은행이 아닌 세계적인 금융기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아울러 앞으로는 전자은행의 추진과 더불어 방콕을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홍콩에 정착했던 진유경은 동생 진유한보다 사업면에서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그가 홍콩 내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아주금융집단(亞洲金融集團), 아주상업은행(亞洲商業銀行), 아주보험유한공사(亞洲保險有限公司)는 규모면에서 중형 금융기관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최근 중국정부는 대륙내 외자은행의 설립을 총자산 미화 200억달러 이상의 기업에만 허가하고 있으며, 홍콩 내의 금융기관도 외자은행으로 보기 때문에 진필신이 독자적으로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데는 다소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유경은 정치적 활동에 비교적 적극적이다. 현재 홍콩중화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홍콩은 물론 전세계 화교사회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서 중국과 끈끈한 관계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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