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석유산업
홍성민(종합경제사회硏, 원장)
1. 머리말
우리에게 '대수로공사'로 잘 알려진 리비아는 OPEC의 유가정책에서도 이란, 알제리와 함께 강경파 국가로 대별되는 나라이다. 지난 9월 18일 동아건설이 리비아 정부로부터 51억 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3단계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단일 공사로는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를 한국이 맡게 됐다. 동아건설은 이번에 3단계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대수로 공사에서만 1단계 공사에 37억달러, 2단계 공사에 65억달러 등 모두 153억 달러의 수주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건설을 제외한 한국-리비아 관계는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1969년이후 집권한 까다피 정부의 정치적 문제와 1986년 미국에 의한 경제 제재조치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대리비아 제재조치는 까다피 집권이후 계속돼 왔다. 1971년 BP의 국유화를 시작으로 행해진 '국유화'(nationalist)로 리비아에 이권을 갖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은 이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OPEC 회원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OPEC내에서도 '저생산 고유가' 정책을 주장하는 강경파 국가의 기수가 되고 있으며, 서방 국가들에게는 국제 테러리즘 지원국가로 분류됨에 따라 항상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1986년 1월 미국은 까다피의 국제 테러행위 지원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인과 미국 기업의 리비아 여행금지 및 거래중단 등의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4월 미국은 트리폴리를 공습함으로써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은 1988년 하반기에 리비아가 국제법상 사용이 금지된 화학무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1991년에는 1988년 270명의 사망자를 낸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리비아인 2명을 지목하고 이들의 인도를 리비아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드디어 1992년 1월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UN 안보리는 리비아에게 항공기 폭파범 인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동년 3월 31일 대리비아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여 현재까지 이 조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여파는 리비아에서 조업중인 한국 건설업체들에게도 외국인(특히 태국인) 인력수급에 어려움을 제공하고 있다.
석유산업이 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리비아는 OPEC 회원국중 7대 산유국으로 분류된다. 다행히 리비아의 원유생산은 제재조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과거 미국으로의 수출물량 이상을 유럽으로 수출함으로써 1987년 이후 생산량 및 수출량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리비아 석유산업이 당면한 석유산업의 현안은 거의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는 신규매장량 확보를 위한 석유개발을 활성화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리비아와 한국은 1975년 KOTRA 무역관을 트리폴리에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8년 2월에는 한 리비아간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여 동년 4월 트리폴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을 개설하였으며, 1981년 1월 5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으로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본고에서는 리비아의 일반개황, 정치약사, 경제동향 및 석유산업의 역사 및 그 개발 등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2. 일반개황
1986년 4월이후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라는 정식 국명으로 알려진, 리비아는 대서양(the Atlantic Ocean)에서 홍해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의 광활한 고원의 일부를 형성한다. 북아프리카의 최북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리비아는 동으로 이집트와 수단, 서로는 튜니시아 및 알제리 그리고 남으로는 니제르 및 차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해안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국토는 사막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용 가능한 면적은 매우 적다.
리비아는 서부의 Tripolitania 지역, 동부의 Cyrenaica 지역 및 남부의 Fezzan 지역으로 크게 세지역으로 나눠진다. 285,000 sq km의 면적을 갖고 서부에 위치한 트리폴리타니아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점차 높아지는 구릉이 연속되며, 해안 평야라 불려지는 Jefara와 급경사로 이루어진 Jabal이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수도 트리폴리와 함께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돼 있는 지역으로 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지대를 형성한다. 최남단은 중앙 사하라 산맥을 형성하며 해발 3,500m의 고원 지대를 형성한다. 키레나이카 지역은 다양한 지중해를 따라 북쪽에 해발 600m의 협곡으로 된 고원을 형성하며, 북쪽의 고지대는 '푸른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 Jabal Akhdar가 있다. 이곳에 인구가 모여 살며 중요한 두 도시, 벵가지와 데르나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Jabal Akhdar 서쪽은 Sirte만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연결되고, 동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이집트까지 연결된다. Jabal Akhdar의 남쪽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낮은 지역을 형성하며 주로 사막지대 이곳 저곳에서 Aujila, Jalo, Jaghbub와 규모가 가장 큰 Kufra와 같은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지역이 '沙海'(the Sand Sea)이다. 이 지역의 남쪽에 중앙 사하라 산맥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훼잔 남쪽과 계속 연결되는 Tibesi 산맥이 차드까지 연결된다. 훼잔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으로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졌다.
리비아는 1,761,132 sq km의 총면적에 인구 490만명(1994년 기준)을 소유한 인구 소국이다. 주요 도시의 인구에는 Tripoli에 175만명, Benghazi에 95만명, Misurata에 50만명, Zuwarah에 35만명, Al-Khums에 23만명 및 Sebha에 22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표준시는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2시간 빠르며 한국보다는 7시간이 늦다.
기후는 건조함과 다양한 온도 변화가 특징이다. 산맥에 의한 장벽이 부족하기에 사하라,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겨울철 북쪽 지역은 언덕에 눈이 내릴 정도로 춥다. 여름철 트리폴리타니아의 Jefara 지역은 40-45도 까지 온도가 올라가며 매우 덥다. 남쪽 지역은 더위가 심각하며 49도까지 올라가지만, 겨울철에는 이곳에도 눈을 볼 수 있다. 북부의 키레나이카는 여름철 비교적 시원한 27-32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지만, 해안 근처는 매우 높은 습기를 유지한다. 특징적인 것은 무덥고 건조한 바람인 ghibli이다. 이는 몇 시간 동안 15도나 심지어 20도까지 온도를 상승시키며, 1월에는 때때로 20-25도까지 기온을 상승시킨다. 이 건조한 모래 바람은 1년중 어느 때라도 불수 있지만, 봄과 가을이 가장 빈번한 계절이다. 이 때문에 농작물에 대한 상당한 패해가 발생하며 종종 인간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언덕은 300-500 mm의 강우량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약 200 mm를 밑도는 강우량을 유지한다. 빼놓을 수 없는 기후적 특징은 매 5-6년마다 한 번씩 뚜렷하게 가뭄이 찾아오며, 때때로 계속해서 두 계절동안 지속된다. 따라서 실제적인 강우량은 믿을 수 없고 변덕스럽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기준 리비아의 총인구는 490만명이며,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3.0%이다. 1992년 현재 도시화율이 70%이며, 평균 수명은 남자가 66세, 여자가 77세로 매우 높은 편이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며 영어와 이태리어도 소수 이용된다. 종교는 이슬람이 국교이며 순니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리비아의 일반개황은 <표 1>과 같다.
<표 1> 리비아의 일반개황
국명 |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 인민 공화국' (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
인구밀도 |
6명/m2 |
인플레이션 |
15%(1994) |
면적 |
1,761,132 km2 |
실질GNP성장율 |
0%(1994) |
수도 |
트리폴리(Tripoli) |
1인당 GNP |
5,700달러(1993) |
인구 |
490만명(1994년) |
GNP중 국방비율 |
11.1% |
기후 |
해안지대는 지중해성기후, 내륙지방은 사막기후 |
평균수명 |
남자66세, 여자 77세 |
언어 |
아랍어( Arabic, 95%), Tuareg어(3%), 기타 소수 언어 2% |
통화 |
리비아 디나(LD)=1,000dirham |
도시화율 |
70% |
산업 |
농업 4%, 공업 55%, 서비스업 41% |
종교 |
이슬람(순니 97%), 기타 3% |
인종 |
아랍인 및 Berber인 89%, 기타 11% |
인구증가율 |
3.0% |
문맹율 |
36% |
자료; The World of Information; Middle East Review, 1996, EIU, Country Profile 1996-97 및 PC GLOBE, 1992에서 작성
3. 정치약사
1951년 11월 리비아는 UN의 후원하에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중 최초로 독립이 보장되는 국가가되었다. 최초의 독립 정부는 이드리스 1세 왕권하에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및 훼잔 등 세지역의 연방으로 탄생되었다. 그 이전까지 리비아는 이태리의 정복에 의하여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는 영국에 의하여, 그리고 훼잔 지역은 프랑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1969년 9월 권력을 장악한 혁명정부는 이들 세지역을 새롭게 명명하였다. 즉 트리폴리타니아는 서부지역, 키레나이카는 동부지역 그리고 훼잔은 남부지역으로 명명되었다. 정치 및 경제의 수도는 트리폴리이다. 하지만 1988년 과격한 지방분산정책의 일환으로 두 개의 인민위원회 사무국이 기타 모든 지역에 재배치되었다.
고대 북아프리카 지역의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지역은 페니키아, 누미드, 그리스 로마, 반달 및 비잔틴에 의해 수 차례 정복당했다. 643년 8세기이상 아랍 통치의 시작을 알리면서 최초의 아랍 침공이 이루어졌다. 스페인의 훼르디난드(Ferdinand) 기독교 왕이 1510년 트리폴리를 장악했지만, 1551년 오스만의 시난 파샤(Sinan Pasha)가 다시 정복하였다. 계속된 오스만 통치도 이 지역을 모두 장악할 수 없었으며, 1711년이후 이 지역은 국내의 카라만일(Karamanlis)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1835년 유럽의 압력으로 카라만일 왕조는 쇠퇴하였고, 오스만 통치가 재개되었다. 19세기동안 이 지역, 특히 부족적인 키레나이카 지역은 싸누시(Sanusi) 종교단체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1870년대까지 싸누시 교단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훼잔과 사하라 사막에 까지 펼쳐지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싸누시는 유럽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에 쐐기를 밖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결국 1911년 트리폴리는 이태리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다.
이태리 군은 1925년까지 트리폴리타니아를 진압할 수 없었으며, 오마르 알 묵타르(Omar al-Mukhtar)에 의해 주도된 저항 때문에 키레나이카도 1930년대까지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다. 이태리의 식민지 정책은 리비아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중요한 전쟁터가 되었을 때인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전후 리비아는 원칙적으로는 싸누시의 족장 모함메드 이드리스 알 싸누시(Mohammed Idris al-Sanusi)인 이드리스 왕하에서 독립이 되었을 때인 1951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군사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다. 독립된 리비아 왕국은 소수의 부족과 주로 키레나이카 출신의 그룹 및 영국 및 미국의 고문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독립한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중 하나였다. 1954년 World Bank 보고서에 의하면, 리비아의 주요 수출품은 아프리카 나래 새(esparto grass)와 과거 전쟁중 나온 폐고물 등이었다. 그러나 1961년 추가적인 원유가 발견되었고, 1964년 원유 수출이 연간 4천만 톤을 상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자산에 의해 형성된 갑작스러운 부(富)는 효과적으로 분배되지도 않았고, 고용기회도 제공하지 못했다. 낫쎌주의(Nasserism)와 아랍통합(Arab Unity) 사상이 중동 전역을 휩싸고 있을 무렵, 리비아는 왕정하의 부패가 만연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확산되었다. 리비아 정부의 친 서구적인 태도는 사회적인 불안을 가중시켰고, 1967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후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9년 리비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이드리스왕이 터어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던 그해 9월 1일, 28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무암마르 까다피(Muammar Qadhafi) 대위(현재는 대령)는 왕을 폐위시켰다. 왕은 그 자신이 이태리 통치기에 유배당했던 카이로로 유배되었고, 198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카이로에 머물렀다. 새로 선포된 '리비아 아랍공화국'(Libyan Arab Republic)은 처음에는 문민정부였으나, 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쎄르에 의해 고무되어 무암마르 까다피에 의해 주도되는 12명의 군장교로 구성되는 '혁명사령부위원회'(Revolutionary Command Council; RCC)로 대치되었다. 1971년 또다른 낫쎌주의 운동으로 유일한 정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Arab Socialist Union)이 구성되었고, 1972년 압델 쌀람 잘로드(Abdel-Salam Jalloud) 소령은 까다피 대령의 부사령관 겸 수상으로 부상하였다.
리비아의 정치제도는 국회의 소집과 함께 1976년부터 급격히 변화되었다. 국회(General National Congress)는 1년후 '인민의회'(General People's Congress; GPC)로 바뀌었고, 동시에 국명도 대중 국가인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The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으로 선포되었다. 아무튼 '대중의 국가'(state of masses) 혹은 Jamahiriya로 대변되는 리비아의 정치제도는 세계에서는 유일한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는 까다피의 유목적인 생활기반에 근거한 사회주의와 이슬람이론을 혼합한 그 자신의 저서 Green Book에서 잉태된 [제3세계론](The Third Universal Theory)에 따라 1977년 확립되었다. 한편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따라 1986년 국가의 공식 명칭 앞에 '위대한'이 덧붙여져 현재의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 되었다. 이러한 리비아의 정치 약사는 <표 2>와 같다.
<표 2> 리비아의 근대약사
☆ : 고대 국가 페니키아, 누미드, 그리스, 로마, 반달 및 비잔틴에 의해 수차례 정복당함
☆ 643 : 아랍인에 의해 정복
☆1510 : 스페인 훼르디난드(Ferdinand) 왕 트리폴리 점령
☆1551 : 오스만 제국의 시난 파샤(Sinan Pasha) 점령
☆1911 : 이태리 군 트리폴리 점령
☆1942 : 1942-43년 영국 및 프랑스 군 독일과 이태리인 축출
☆1951 :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중 최초로 이드리스 왕하에서 독립(영국과 프랑스가 이때까지 지배)
☆1969 : 무암마르 까다피(Muammar Qadhafi) 대위(현재는 대령)는 이드리스 왕을 폐위시킴
☆1972 : 리비아, 이집트와 아랍연방 구성에 합의하였으나 좌절
☆1973 : 리비아 군이 차드 북부의 우라니움(Uranium) 점령
☆1974 : 리비아, 튜니시아와 통합에 합의하였으나 좌절
☆1975 : 차드 북부 사하라사막 합병
☆1977 : 대중 국가인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The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선포
☆1981 : 시리아와 합병에 합의하였으나 좌절
☆1986 : 미국에 의한 경제제재조치 부과,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따라 1986년 국가의 공식 명칭 앞에 '위대한'이 덧붙여 현재의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선포
☆1987 : 퇴각기간중 10억달러 이상의 군시설을 포기한 채 차드로부터 철수
☆1988 : 리비아, 튜니시아와 대륙붕에 대한 공동 탐사에 관한 협정에 조인(5월)
☆1991 : 미국 리비아에 대한 무역제재조치를 지속하기로 결정 |
자료 : EIU, 1996, Country Report, Country Profile 및 KOTRA, 헤외시장; 리비아 각호에서 작성
4. 경제 동향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중 하나였던 리비아는 1961년 원유를 수출하기 시작한 이후, 1991년 기준으로 사우디 아라비아보다도 1인당 GDP가 높은 고소득 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석유수입(oil revenue)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1980년 일량 214억 바렐로 최고 수준)에 급속히 증대하였다. 그러나 1985년말 국제 원유가의 하락으로 1986년 석유수입이 64억 달러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1990년 리비아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유가 상승으로 횡재의 수익을 올렸다. 따라서 동년 원유 수출로 인한 수익은 98억 달러로 증대되었고, 1991년에는 10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유가는 걸프전 종전 이후 다시 하락하였고, 연간 석유수입은 1993년 73억달러에서 1994년에는 69억 달러로 다시 감소하였다.
리비아 경제는 과거 1970년대 GDP의 약 60%를 차지하던 석유부문이 현재는 국민총생산의 약 1/3을 구성하고 있는 석유부문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총외환소득의 95%이상도 이 석유부문으로부터 나온다. 1961년 석유가 수출된 이후 농업부문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여전히 식량의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1994년 식량수입은 총수입의 거의 30%를 차지하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불모지 사막으로 이루어진 리비아의 가경지는 국토의 약 1.2%밖에 되지 않으며, 이중 1% 미만이 경작된다. 농업생산의 80%이상은 해변지역인 트리폴리와 벵가지 주변에서 이루어진다. 키레나이카에 있는 Jabal al-Akhdar와 트리폴리타니아의 Jefara 평원이 유일한 유일한 농업지역이며, 리비아는 강은 없지만 지하수는 풍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리비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의존하였으나, 석유 수출이 본격화되자 이농현상이 급증하여 현재는 총인구의 약4%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60년대 까지 GDP와 수출의 각각 60%를 차지하던 농업이 현재는 GDP의 3% 미만에 불과하여 농업 수요의 80%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리비아의 주요 농산물은 보리, 밀, 기타 곡물, 올리브, 감자, 토마토, 담배 및 대추야자 등이다.
리비아 연해에는 참치, 정어리 등 수산물이 풍부하며, 특히 대륙붕에는 해면(海綿)이 풍부하다. 1978년부터 어업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아랍동맹 14개국이 설립한 아랍수산업 합자회사에 15%를 출자하여 아랍 공해상에서 출자비율 만큼의 어업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정부가 공업부문을 집중 육성하고 있으나, 그 수준은 아직 미약하여 농산품의 가공, 건축자재, 종이, 직물 및 비누 등의 생산에 머무르고 있다. 주요 부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는 관계로 노임이 비교적 높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밖에 1979년 9월 착공한 Misurata의 제철단지가 있으며, 건설수요의 급증으로 시멘트 생산이 증대되고 있다.
경제구조는 석유와 특히 1977년 정부가 '대중의 국가'(state of masses) 혹은 Jamahiriya를 선포한 이후 정치적 변화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1977년 수립된 '인민의회는 국가예산과 개발계획의 통제권을 갖고 있지만, 까다피 대통령은 경공업, 서비스업 및 그 자신의 개념인 '소매무역'(retail trade)을 육성하기 위한 시도에 실패하였다. 까다피가 고안한 소매무역은 전통적인 노사관계와 profit-making의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임금 노동자가 아닌 당사자'(partners not wage-earners)의 개념을 말한다. [그린북](Green Book)은 이러한 제휴관계가 착취와 이윤을 제거하며 바터 시스템과 화폐의 대체가 가능할 것이라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냉담할 뿐이다.
1988년초부터 리비아는 '자유화'(liberalization)를 추구하여 현재는 소매무역에서는 민간기업 그리고 소규모 기업 및 농업부문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수출입 회사의 철폐는 여전히 국가의 구매회사에 의해 통제되는 자동차와 같은 대량의 구매품을 제외한 소비재 무역에 한정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국가 자산의 매각 및 경제에 민간부문 참여를 허용하는 '사유화 법'이 1992년 9월 통과되었다. 새로운 법을 개정함에 있어 진보가 거의 없는 옛날 것들은 개정이 되었다. 더욱이 경제의 골격인 석유부문과 주요 산업 및 미수라타(Misurata) 철강단지 및 '大人工江'(Great Man Made River)과 같은 농업 프로젝트는 인간, 보건 및 교육 서비스가 일률적으로 삭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까디피의 훈령뿐만 아니라 사유화를 배제하였다.
까다피가 권력을 잡은 이후, 1981-85년도를 마지막으로 개발계획이 반복적으로 개정돼 왔다. 1986년부터 시작되기로 한 5개년 계획도 포기되었다. 개발의 우선 순위는 농업의 자급화, 중공업 및 정유능력의 개발, 주택보급 및 기타 사회간접시설의 구축 등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산업에 있어서 기존 능력의 제고와 자립을 목표로 1994년 1월 3개년 계획이 발표되었지만, 이것 역시 포기되었다.
경제의 변모는 높은 수준의 수입을 유발하였다. 유가가 하락했을 때, 이러한 경향은 리비아의 대외 지불능력에 어려움을 안겨주기 시작했으며, 수입도 점진적으로 감소하였다. 사무국은 무역 부채의 비지급(non-payment)에 호소하거나 현금 순환을 완화하기 위하여 바터협정에 의지하였다. 대외 부채의 비지급이 리비아의 대외적인 신용도에 커다란 손상을 입힌 반면, 수입제한조치는 식량부족을 초래하였다. 경제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1988년 시작된 까다피의 '푸른 개혁'(green perestroika)은 소비재 수입을 유도하였다. 리비아의 주요 경제지표는 <표 3>과 같다.
<표 3> 리비아의 주요 경제지표
경제지표 |
1991 |
1992 |
1993a |
1994a |
1995a |
GDP(현시세 10억 LD) |
15.8 |
18.02 |
24.41 |
34.97 |
46.36 |
인구(백만명) |
4.33 |
4.51 |
4.70 |
4.90 |
5.11 |
제품 수출 FOB(10억 달러) |
10.55a |
9.68a |
8.01 |
7.52 |
7.96 |
제품 수입 FOB(10억 달러) |
8.25 |
8.12a |
6.98 |
6.28 |
7.29 |
당좌계정(백만 달러) |
560a |
-144a |
-762 |
-491 |
-1,162 |
원유생산(백만b/d) |
1.46 |
1.48 |
1.37 |
1.38 |
1.41 |
환율(평균) LD:$ |
0.268 |
0.301 |
0.325 |
0.360 |
0.345 |
주) : a EIU 추계,
자료: EIU, 1996, Country Report, Libya, 3rd Quarter, P.3.
5. 리비아의 석유산업
1) 석유산업의 역사
리비아 원유의 탐사는 최초의 채굴권이 양도된 1955년 [석유법]이 적용된다. 총체적인 관리는 과거 석유성이었던 '석유국'(secretariat of petroleum)에 의해 이루어진다. Esso 리비아는 훼잔 남서부에서 1957년 최초로 계약을 체결하였지만, 현재의 주된 생산 지역은 내륙의 Sirte이다. 원유의 수출은 1961년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OPEC에 가입하였다. 리비아 역시 '아랍석유수출국기구'(The 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APEC)와 '아프리카석유생산국협회'(African Petroleum Producers Association; APPA) 회원국이다.
리비아에 석유 매장 가능성이 확인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석유 탐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전후 산업의 급속한 성장과 이에 따른 석유수요의 급증으로 국제석유회사들의 관심이 중동을 비롯한 광대한 아프리카 지역으로 돌려졌을 때, 리비아 석유도 탐사가 시작되었다. 리비아 원유는 오래 전부터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에 매장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리비아의 석유 탐사는 지질조사를 행한 대석유회사 '인디펜던트'(Independent)가 맡게 되었다. 1955년 협정기간이후, 각각의 채굴권 지역이 정부로 귀속되는 50: 50 이윤분할방식으로 채굴권을 양도할 수 있는 석유위원회를 설립하면서 [석유법]이 발효되었다. 1958년 Esso社 시추 지역의 유정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는 수출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리비아에서는 동법에 따라 25개의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했는데, 이중 15개사는 미국계이고, 나머지는 영국, 프랑스, 서독 및 화란계였다.
1957년 중요한 석유협정이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0년후 리비아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원유 수출국이 되었다. 리비아의 석유산업은 정치적 안정, 서유럽 시장에의 인접성 및 특히 정제에 적합한 저유황 원유라는 이점으로 초창기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1967년 수에즈 운하의 봉쇄는 리비아 석유산업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원유 생산이 1962년 일량 2만 바렐에서 1970년 일량 330만 바렐로 증가하였다.
원유 수출은 5개 그룹에 의해 건설된 파이프라인으로 다양한 유전으로 연결되는 5개의 각각 다른 해양 터미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파이프라인 시스템과 터미널은 다른 그룹들도 이용할 수 있다. 개방된 5개 터미널중 하나는 1961년 시르테만(灣)의 Mersa Brega의 터미널이다. 이 파이프라인은 1959년 리비아의 Esso Standard가 원유를 발견한 벵가지 남쪽 약 300km에 위치한 키레나이카의 Bir Zelten에 건설되었다. 이 그룹은 또 메르사 부레가에서 정유를 하였고, 이태리와 스페인으로 선적을 준비하기 위해 개스 액화 단지를 건설하였다. Oasis 그룹의 Hofra 유전을 위한 터미널이 메르사 부레가 서쪽 Ras as-Sidr에 건설되었다. Mobil/Gelsenberg 그룹도 호프라 부근에서 원유를 발견하였지만, 라스 앗 시드르 동쪽 Ras Lanouf에 또다른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였다. Tobruk 부근 Mersa al-Hariga의 네 번째 터미널로부터 그 당시 BP/Bunker Hunt 이권 지역이었던 Sarir까지 약 500km에 달하는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었다. Zuetina 터미널은 Augila와 Idris로 원유를 수송하기 위하여 1968년 개통되었다. 이곳에서 1966년초까지 채굴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미국계 석유회사 Occidental사는 대규모의 원유를 발견하였다. 우길라로부터 멀지 않은 Nafoora 유전으로부터 원유를 생산하는 Amoseas 그룹은 라스 라누흐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을 가지고 있다. 현재 리비아는 서부에 6번째 터미널을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리비아는 석유사업 참여를 원하는 산유국중 주도국이 되었다. 1970년대초 리비아 정부와 산유국들간에 다양한 협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로 1973년 리비아 정부는 Agip, Conoco/Marathon/Amerada Hess, Exxon, Mobil Occidental 및 Amoseas의 리비아 조업 지분을 51% 획득하는 한편, BP/Bunker Hunt, Shell, Texaco, California Asiatic Atlantic Richfield 주식을 완전히 국유화하였다. 이들 회사의 항의는 조정을 통하여 1977년 해결되었다.
한편 1982년 미국은 리비아산 원유의 금수조치를 단행하였고 1985년 11월 석유제품 수입금지로 이를 보완하였다. 1986년 1월 리비아의 국제 테러리즘 개입 확신에 따라 레이건 미대통령은 미국내 리비아 자산을 동결하였고, 미국 회사와 리비아간의 모든 상업거래를 2월초까지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미국은 동년 2월 리비아에서 지분을 소유한 5개 석유회사를 포함하여 약 12개의 리비아내 미국계 회사들에게 과도기동안 조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훈령을 수정하였다. Occidental, Conoco, Marathon, Amerada Hess 및 W. R. Grace 등 석유회사는 레이건 대통령이 동년 5월 설정한 새로운 최후 조업 기간인 6월 30일 리비아에서 조업을 중단하였다. 3년에 걸치는 휴업기간은 1989년 6월말 만기가 되었다. 비록 협상이 진행중에 있기는 하지만, 석유회사들이 조업을 재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협정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리비아 원유의 확인매장량은 oil and Gas Journal에 따르면 1994년 현재 228억 바렐이지만, 리비아 정부는 450억-500억 바렐로 추계하고 있다. 튜니시아와의 해양 경계선 분쟁에 대한 1982년 헤이그 국제 사법재판소의 해결에 따라, 리비아는 70억 바렐 정도의 매장량을 갖는 연근해 매장지역에 접근이 확대되었다. 1983년 6월 이와 유사한 리비아-말타(Malta)간 분쟁도 추가적인 매장가능 잠재지역을 리비아에게 제공하는 조건으로 해결되었다. 1988년 5월 리비아는 튜니시아와 대륙붕에 대한 공동 탐사에 관한 협정에 조인하였다. 따라서 리비아의 원유생산은 20억 바렐로 추정되는 확인가능 매장량과 일량 15만 바렐의 생산능력 투자가 계획되어 있는 Bouri offshore 유전에 의해 대폭 증대될 전망이다.
1960년대 급속한 원유 생산의 증대는 1973년까지 리비아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생산국가운데 4번째 생산국으로 끌어 올렸다. 원유생산은 1970년 일량 332만 바렐로 최고에 달했고, 정부의 원유 절약정책 선언과 함께 1975년 원유생산은 일량 148만 바렐로 감소하였다. 1979년까지 리비아 원유생산은 일량 209만 바렐로 증가하였다. 1983년 3월 리비아는 일량 110만 바렐의 OPEC 생산 상한선을 받아들였지만, 1984년 11월 가격유지를 위한 OPEC 노력의 일환으로 일량 99만 바렐로 원유생산을 감축하였다. OPEC이 1985년 12월 쿼타제도를 포기하였지만, 리비아가 쿼터를 일량 94만8천 바렐로 책정함으로써 동제도는 재 도입되었다. 쿼타제도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또 다시 포기되었지만, 1993년 재 도입되었고, 1994년말 다시 유지되었다. 하지만 생산 능력의 제약 때문에 리비아는 일량 139만 바렐 할당량을 생산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리비아는 석유산업에 정밀 검사가 필요하지만 제재조치로 인해 정유 시설의 향상, 부품의 확보 및 해외 직접 투자의 유치가 어려운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2) 석유산업
리비아 석유산업은 모든 산업 가운데 80%를 점하고 있다. 1989년 기준 리비아의 원유생산은 일량 114만 5천 바렐이며, 석유수입은 75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생산능력은 1990년대말에 가면 일량 250만 바렐에 달할 전망이다. 이러한 리비아의 원유 생산, 소비 및 수출 추이는 <표 4>와 같다.
<표 4> 리비아의 원유 생산, 소비 및 수출 추이
연도 |
생산 |
원유 수출 |
석유제품 수출 |
석유제품 소비 |
1985 |
1,032.2 |
894.6 |
90.9 |
103.0 |
1986 |
1,308.0 |
1,067.0 |
101.9 |
94.0 |
1987 |
972.5 |
810.0 |
110.5 |
99.5 |
1988 |
1,029.8 |
890.0 |
90.0 |
104.3 |
1989 |
1,129.2 |
872.0 |
127.5 |
107.7 |
1990 |
1,397.0 |
1,090.0 |
150.0 |
100.5 |
1991 |
1,500.3 |
1,220.0 |
140.0 |
105.9 |
1992 |
1,432.7 |
1,180.0 |
170.0 |
107.5 |
1993 |
1,361.0 |
1,110.0 |
142.0 |
125.5 |
1994 |
1,380.0a |
1,125.0 |
130.0 |
153.5 |
1995 |
1,410.0a |
n/a |
n/a |
n/a |
a IEA 추계
자료: EIU, 1996, Country Profile 1996-97.
1987년 7월 두 번째 플랫홈이 Bouri offshore 유전에 설치되었다. 이는 총연장 33km에 10km의 넓이를 갖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offshore 유전인 보우리 유전을 개발하기 위한 첫단계 계획의 일환이다. 이 유전은 1976년 발견되었고, 1986년 9월 개발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플랫홈과 64개의 유정(油井)으로부터 실제 생산능력은 API 27-280(中질유/重질유)인 일량 약 15만 바렐 정도이다. 확인된 가채매장량은 20억배럴로 추정되며, 1994년말 생산량은 일량 약 15만 바렐 정도이다. 선박을 끌어들인 다음, 일량 25만 바렐을 생산할 수 있는 10억 달러의 투자가 요구되는 Murzuk 유전개발은 최우선적인 프로젝트가 되었고 NOC는 충분한 지원을 확보하였다. 첫 번째 계약 판정은 이미 이루어졌고, 1996년말 하류부문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유전은 스페인의 Repsol, Total 및 오스트리아의 ɮMV사로 구성되는 콘소시움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석유산업의 관리가 국영회사의 수중으로 들어온지 3년후인 1989년 3월 리비아 '석유국'(Petroleum Secretariat)이 부활되었다. 부활된 석유국은 리비아 석유산업을 재조직하고 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정부 참여의 폭이 확대된 새로운 탐사계획이 리비아 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정부는 현재 상업적 채산성이 있는 유전이 운집해 있는 리비아 중북부 Sirtica 외곽 지역의 원유 매장 잠재력을 평가하기 위한 활동적인 탐사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곳에는 과거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인 서부 리비아와 이 지역의 연근해 지역에 두 개의 중요한 이권 지역이 있다. 또한 다른 지역, 즉 대규모 미탐사 지역인 남부지역에서도 탐사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튜니시아와의 분쟁이 해결된 이후 1989년 4월 '리비아 튜니시아탐사회사'(Libyan-Tinisian Exploration Co.)가 설립되었다. 1991년 1월 리비아는 동년 수준에서 55년 동안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228억 바렐의 원유매장량을 발표하였다. 1988연초 천연개스 매장량도 90년의 생산량/매장량 비(比)를 갖는 7,277억 cu m으로 추계 되었다. 개스는 이태리와의 장기 계약에 따라 파이프라인으로 이태리로 수송되며, 터어키도 1988년 8월 발효된 경제조약에 따라 25년동안 리비아로부터 매년 15억 cu m의 LNG를 구입할 것이다. 리비아는 현재 알제리의 지중해 파이프라인을 통하여 보다 값싸게 이태리로 개스를 수출할 수 있는 송유관에 리비아의 송유관을 연결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시장측면에서 리비아는 지금까지 원유를 특수한 재화나 서비스재로 교환하는 협정을 맺어 왔다. 최근 프랑스, 이태리, 폴란드, 러시아, 유고슬라비아 및 다수의 기타 국가들과 원유 구매와 관련한 바터거래(barter deals) 협정을 맺었다. 리비아는 또한 브라질, 그리스와 특별한 석유 협정을 체결하였고, 알제리, 나이제리아 및 가봉과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인도를 목적으로 생산량의 4% 적립에 합의하였다.
리비아 역시 다른 대규모 원유생산국과 마찬가지로 원유의 수출보다는 원유의 정제 및 가공을 선호하고 있으며, 저유황의 장점 때문에 리비아 원유는 특히 정제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85년 6월 '경제 및 계획 일반인민위원회'(General People's Committee for Economies and Planning)의 한 보고서는 1970년이후 56개 석유화학 프로젝트와 연간 570만톤의 석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21개 정유공장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하였다. 1987년말 기준으로 리비아는 총 일량 32만 9천 바렐 능력의 정유시설을 확충하였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NOC는 Mersa Brega에 각각 일량 1000톤의 생산능력을 갖는 암모니아 공장과 에탄올 공장을 건설하였다. 1980년 9월 Abu Kammash 화학 단지가 문을 열었다. 1981년 '라스 라노프 공업단지'에서 32억 3,700만 달러의 투자 계획으로 조업이 시작되었지만, 1984년 완공 예정이었던 계획이 연기된바 있다. 가공공장에 부가하여 1984년 10월 10개의 석유화학공장으로 구성되는 '라스 라노프'의 제2단계 계획에 착수했지만, 아직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주로 메탄올, 암모니아 및 요소로 구성되는 석유화학제품의 수출은 1987년 기준으로 1,386,972톤에 달한다.
리비아는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Koper 정유공장과 리비아로부터 동유럽에 이르는 Adriatic 파이프라인과 같은 석유의 하류부문에도 진출하고 있다. 1988년 해외 '하류부문' 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석유투자회사'(The International Oil Investments Company)가 설립되었다. 리비아産 원유의 대부분은 외국의 탱커로 운송되며, 유휴 선박이 약간 있다. 1988년 1월 리비아 상선은 10개의 탱커, 1개의 화학수송선 및 13개 화물선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리비아 원유 구매에 대한 국제적인 수입금지조치를 성공시킬 목적으로 유럽국가들에 대하여 주기적으로 리비아산 원유 수입을 강요하고 있다. 1993년 서유럽 국가들은, 이태리가 총수출의 44% 그리고 독일이 21%를 차지하는 등, 여전히 리비아 원유 수출의 총 94%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유능력은 UN 제재조치에 따라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석유제품의 생산은 전년도 및 그 전해 년도의 일량 28만 2천 바렐에서 1993년에는 일량 26만 8,300바렐로 감소하였다. 더욱이 최근 석유회사들이 12개월 기간동안 리비아의 석유부문에 4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하지 못하게 금하는 법령을 미 상원이 통과시킴으로써 그 타격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3) 석유회사
리비아 석유산업의 관리, 감독 및 참여 기관은 생산, 정제 및 분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1968년 설립된 '국영석유회사'(National Oil Company; NOC)이다. 1986년 보복조치로 확대된 미-리비아간 분쟁이 있기 이전에는 Occidental, Conoco, Marathon, Amerada Hess 및 W. R. Grace 등 5개의 미국계 석유회사가 리비아에서 조업하였다. 리비아 당국에 의한 이들 석유회사에 대한 자산 동결과 함께 1986년 이들은 리비아에서 철수하였다. 1989년 미국의 무역제재조치 일부 완화에 따라 이들 석유회사의 귀환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초 리비아에 대한 무역제재조치를 지속하기로 한 부시 행정부의 결정은 1992년 4월에 부과된 UN의 보복조치로 협상은 동결되었다.
미국계 5개 석유회사들은 리비아의 주요 5개 생산회사중 하나인 '오아시스석유회사'(Oasis Oil Company) 이권중 40.8%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59.2%는 NOC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계 주식의 지분은 Conoco 16.3%, Marathon 16.3% 및 Amerada Hess 8.2%로 구성되어 있다. 51%의 지분을 소유한 NOC와의 또다른 합작회사로는 36.75%의 지분을 소유한 Occidental과 12.25%를 소유한 오스트리아의 ɮMV(ɮsterreichisch Mineralɯlverwaltung)가 있다. ɮMV는 NOC와 탐사 및 생산 joint-venture를 형성하고 있다. W. R. Grace는 라규바(Raguba) 유전의 주식 12%를 가지고 있다. 1986년 1월 리비아에 대해 제재조치가 부과되었을 때, 미국계 5개 석유회사들의 공동 생산 권한은 리비아 일일 생산량의 약 1/4를 구성하는 일량 26만 3천 바렐 정도였다. 일량 16만 8천 바렐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는 Oasis 석유회사의 경우, 약 24억 바렐로 추정되는 채굴 가능한 매장량의 지분을 갖고 있다. 1986년 이후 리비아는 원유의 탐사 및 생산에 있어서 유럽계 석유회사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이태리의 ENI/Agip은 7,7000km2에 달하는 12개 지역에서 이권을 가지고 리비아 총생산의 18%에 근접하는 생산을 해냄으로써 현재 리비아에서 조업중인 외국 회사로는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6. 맺음말
리비아 경제에서 석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리비아는 가격인상을 통한 석유수입의 증대를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리비아의 원유 매장량 비율이 다른 OPEC 회원국의 그것보다 낮기 때문이다. 1994년말 기준으로 볼 때, OPEC의 원유 가채매장량은 7,703억 바럴로 평균가채년수가 79.5년임에 비해, 리비아의 원유가채매장량은 228억 바렐로 가채년수가 약 44.6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리비아는 가능한 원유생산의 증대보다는 가격정책을 통한 석유수입의 확보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더욱이 그들 경제에서 차지하는 석유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산업구조의 왜곡은 가속화되고 있다.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리비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의존하였으나, 석유 수출이 본격화되자 이농현상이 급증하여 현재는 총인구의 약4%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 GDP와 수출의 각각 60%를 차지하던 농업이 현재는 GDP의 3% 미만에 불과하여 농업 수요의 80%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리비아는 1994년 기준으로 외화수입의 95%를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부족한 식량수입과 대수로사업 및 공업화 등 주요 기간산업의 소요재원도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리비아의 석유산업은 1968년 석유부 산하기관으로 설립된 국영 NOC가 원유의 탐사, 시추, 생산, 정제, 수출 및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독점권을 갖고 있다.
현재 리비아 석유산업의 최대 현안과제는 신규매장량 확보를 위한 유전개발의 활성화이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리비아는 신규 해양유전과 개스전을 개방하여, 유고, 오스트리아, 브라질, 캐나다 및 벨기에 등의 기업들이 해양 탐사를 벌이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지중해상의 최대 유전인 '보우리'(Bouri) 유전이다. 현재 이태리의 Agip이 이 유전을 개발하고 있으며, 약 50억 바렐의 매장량과, 약 6억5천만 바렐의 가채매장량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스페인의 Repsol, 프랑스의 Total, 오스트리아의 ɮMV 등이 트리폴리 남부 사하라 사막의 Murzuk 분지의 유전개발을 위해 유럽콘소시움을 구성하였다. NOC와 유럽콘소시움간에 체결된 생산분배계약에 의하면, NOC가 생산량의 75%, 콘소시움이 25%를 분배받게 되며 운영권자는 Repsol이다. 하지만 리비아의 유전개발사업은 미국과 UN의 제재조치로 외자의 조달이 여의치않아 커다란 애로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리비아가 미국으로의 수출물량을 유럽으로 수출함으로써 제재조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볼 수 는 없지만, 위와 같은 유전개발의 자금조달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리비아 제재의 주목적은 유전 및 개스전 개발에 대한 외국회사의 참여를 방해함으로써 리비아로의 자금 흐름을 막아 석유수입을 압박하자는 데 있다.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멕시코 등 NAFTA 회원국들은 WTO 및 NAFTA의 기본 정신인 '자유무역주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따라서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제재조치는 유럽 국가들, 특히 EU와 NAFTA 회원국들간에 무역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마찬가지로 리비아의 국내외적인 경제환경은 아직 한국이 이곳의 유전개발에 참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저유황 원유로 품질이 우수한 리비아 원유에 대한 유전개발은 물론 원유 수입(輸入)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