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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자전에세이

그린페 2010. 2. 9. 09:50

[ 2004-02-19 ]
조회수 :1517


 제 목 : 작은거인 김 현철 자전 에세이

 작 성 자 : 운영자


차 례

1. 어둠 속에서
2. 다시 세상 밖으로
3. 정치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4. 정치와 현실 사이에서
5. 아버님으로부터 정치를 배우다
6. 결혼, 유학, 취직, 그러나......
7.맨몸으로 부닥친 정치 : 1987년 대통령 선거
8. 정치 실험을 시작하다
9. 정치의 현장에 서서
10. 선거전의 한복판에서 : 1992년 대통령 선거
11.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12. 개혁과 변화 속에서
13. 역사의 뒤안길에서
14. 죄인의 몸이 되어
15.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1.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은 당신을 잘 안다고 하는데, 왜 시치미떼는 거요?”
“아니,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한 통화 한 일도 없는데 시치미라니요? 왜 다른 사람들 예기는 무조건 믿으면서, 내가 하는 얘기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겁니까?”
“왜 그런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당신이 김현철이니까 그런 것 아니오!”
그랬다. 나한테는 아무런 유보가 없었다. 누군가가 지나치듯이, “이건 김현철이가 아니면 안 될 일 같은데.....” 라고 한마디만 던지만 다음날 신문에는 어김없이 「김현철 관련설」이 나오곤 했다. 항의도 소용없었고, 부인도 소용없었다. 심지어는 침묵조차도.
나의 침묵은 대부분 「사실 인정」으로 처리되었다. 「침묵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세월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분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이야기들에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꼭 해야 할 이야기도 참았고, 표정도 감추었다. 나는 없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소나기도 지나가고, 사람들도 나를 잊어주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청문회에 불려나가 「바보」가 되고, 법정에 서서 「파렴치범」이 되었다.
차라리 구치소가 편했다. 나는 거기서 몸의 자유를 반납하는 대신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동료 재소자들도 나를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라 「1318번 김현철」로 대해주었다. 작은 소리로 전해주는 동료 재소자들의 「힘내라」는 격려도 그냥 들리지 않았다. 나는 버텼다. 갈 데까지 간 나로서는 더 이상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우선은 허물어지지 않고 버텨야 했다.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내야 했다.
서울구치소 13상(上)동 12호. 2편 남짓한, 나만의 작은 그 공간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 절대 고독 속에서 「참된 나」를 찾아 헤맸다.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셨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버리신 적이 없는 분이셨다.
처음 얼마간은 습관처럼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다 감정이 격해지면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찬송가도 부르고 울부짖으며 기도도 했다.
이때 시작한 성경 공부는 그 후로 나의 가장 소중한 일과가 되었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간절한 간구로 다시 얻은 신앙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다시 보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상처받았지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할수록 내 작은 사랑은 그만큼 커갔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비밀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비로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사람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감사와 환희, 이제 2평의 작은 공간은 더 이상 나를 가두어 놓는 두텁고 높은 벽이 아니었다. 그곳은 용서와 반성으로 거듭나는 작은 산실이었으며, 사랑으로 충만한 감사와 환희의 공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1997년 봄,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2. 다시 세상 밖으로

“그때는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아. 원래 희생양이란 비극적 요소를 가져야 되는 것 아니겠어? 그점에서 자넨 가장 완벽한 희생양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요즘 와서 부쩍 선배 어르신들로부터 듣는 소리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라가 잘되었다면 전 그걸로 만족입니다.”
“자네 말대로 나라 꼴이라도 잘되었으면 내 이런 말도 안하지.....”
끌끌 혀를 차시는 모습들을 보면 나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
문민정부에 몸담았단 인사들 중에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아무래도 김 소장 문제를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정치공학적으로만 접근했던 것 같아. 김 소장 문제는 사실 문민정부가 개혁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중도에 주저앉고 마느냐 하는 정치 역학의 문제였는데, 우린 이 본질적인 문제에 눈을 감고 말았어. 귀찮아서 피했던 거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 소장을 희생시켰지. 그것도 김 소장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한보 문제로 말이야.....”
이 역시 나로서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다. 다만 못난 나를 아직도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어디 이분들 뿐이랴. 세상이 온통 나를 손가락직하고 비웃을 때도 나는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다. 2000년 10월 6일 이른바 「안기부 자금 사건」으로 김기섭 씨와 내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내와 있다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람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던 것이다. 억센 사투리를 쓴 그들은 집에 들이닥치자마자 미리 예행 연습을 해둔 듯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나에게 무조건 자료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때 아내가 이들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면서 저항했고 이들이 멈칫하는 순간 나는 뒷문을 통해 옆집으로 가 경찰에 신고했다. 내가 탈출하자 그들은 황급히 집 밖으로 나와 밴 두 대에 나눠 타고 도주했는데, 결국 범인들을 잡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내가 살던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행동이 조직적이었던 점, 금품이 아니라 자료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점,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구의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던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나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 물증이 없어 여기서 더 이상의 얘기를 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심증만은 분명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의 테러 사건은 나로서는 두 번째 겪는 테러 사건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국내에서, 그러니까 1998년 6월 15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도 평소대로 등산을 하러 집에서 나와 등산로 초입에 있는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일단의 사람들한테 납치를 당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도 차 안에서 그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차가 속도를 늦춘 틈을 타 뒷문을 박차고 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었다. 그 사건은 그 후 범인들이 잡혔으나 납치와 테러의 배후나 동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게 정리되고 넘어 갔었다.
2002년, 나는 올해로 마흔 네 살이다. 한 아내와 세 아이의 가장인 나는 그러나 지금 맨몸뚱이 하나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김영삼 총재의 둘째 아들」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영식」으로서가 아니라 김현철이라는 한 인간, 한 자연인으로서 내 인생을 일궈나가고자 한다.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바라면서.


3. 정치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나는 1959년 3월 8일 서울 약수동에서 아버지 김영삼과 어머니 손명순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의 고향은 잘 알려진 대로 거제도다. 그래서 나 역시 본적을 거제에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거제는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관향은 김녕(金寧), 시조 김시흥의 후예로서 충정공파 29세손이다. 김녕 김씨가 언제 어떤 경로로 거제도에 입도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김녕 김씨 형제가 경주에서 거제도로 옮겨와 형은 큰달섬(大鷄島), 아우는 작은달섬(小鷄島)에 살았다고 하며 그 이후 지금껏 거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갯마을 외포리에서 기독교 신앙과 교육에 선각자적인 역할을 하신 증조부님의 영향으로 우리 집안은 지금도 기독교를 독실히 믿고 있으며 아버님은 일찍이 신교육을 통해 이른 성공을 이루실 수 있으셨다. 또한 증조부님 당시부터 어장이 번창하여 소위 「민주 멸치」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아버님의 정치 역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지금도 명절 때면 「고마운 분들」에게 돌리곤 한다.
구순이 훌쩍 넘으신 할아버님께서는 이제는 연로하셔서 어장 경영을 못하시지만 집안의 어른으로서 대소사를 지금도 관장하신다. 그리고 내가 두 살 때 고정 간첩의 흉탄에 돌아가신 할머님을 지금은 영정으로만 기억하지만 구정이나 추석 혹은 아버님이 정치적으로 무슨 결단이 필요할 때는 예나 지금이나 나는 가족들과 더불어 할머님 성묘를 하고 생가를 방문하곤 한다. 생가복원 후에는 현재 내방객이 끊이지 않을 정도의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나 역시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할 때는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머님의 고향은 마산이다. 어머니는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다니시다가 중학교 때 마산으로 옮겨 마산여고를 나오시고 결혼하실 때까지 내내 마산에서 사셨다. 그러니까 해방과 전쟁을 모두 마산에서 겪으셨던 것이다. 외가는 20년간 마산 오동동에서 사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는 경양고무공업사라는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마산 일원에서는 외할아버지가 만든 고무신을 안 신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하시곤 한다.
외할아버님의 사위 사랑은 대단하셔서 아버님이 처음 출마한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경양고무에서 만든 고무신 1만 2천여 켤레를 선거에 쓰라고 보내기시까지 하셨다 한다. 물론 선거법에 위반되는 일이라 이 고무신들은 배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다시 마산으로 돌아갔지만 이 사실로 인해 외할아버님의 사위 사랑은 그 후로도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다.
두 분이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연유도 이렇듯 외가가 마산에 뿌리박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버님이 어머니와 데이트를 하던 중 마산항에서 시비를 걸어온 건달들과 맞붙어 혼찌검을 내고 그 일로 어머니의 사랑과 신뢰를 확고히 했던 에피소드도 외가가 마산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자랐기에 나는 언제부턴가 마산을 거제와 함께 「제2의 고향」으로 느끼게 되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삭막한 도시 환경에서 성장한 나에게 마음의 고향이 생겼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겠는가.


9. 정치의 현장에 서서

1990년에 나는 사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고 간판도 「민주사회연구소」로 바꾸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나름대로 민주화의 길에 대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으로 정국은 일단 안정되었다. 제1야당이었던 평민당의 비난이 거셌지만, 변화된 정국 구도에서 그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못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3당 합당 후 우리가 겪은 최대 고비는 앞서 얘기한 「내각제 각서 파동」이었다. 「내각제 각서 파동」은 내각제 각서의 존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누출됨으로써 생긴 것이었다. 그 문건이 언론에 누출, 폭로되자마자 각 언론이 일제히 「YS 낙마 가능성」 「YS 용도 폐기 선언」 식의 해설 기사를 쓰기 시작했던 데서도 「파동」의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들은 이 문건 누출을 통해 아버님을 압박함으로써 아버님을 내각제로 끌어들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약속 위반자」로 만들어 매장시키려 하였다.
사태는 너무나 분명했고 또 너무나 심각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버님은 당 대표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당무 거부를 통해 저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일단 당무 거부라는 최강의 수단을 동원한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거기서 더 밀린다면 탈당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상도동 칩거가 시작 되었다.
점진적 민주화밖에는 길이 없다고 결행하신 3당 합당이었고 합당을 위해서는 사소한 문제에 구애될 수 없다고 서명해주신 각서였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것 때문에 합당 자체를 파기해야 될지도 모르는 사태까지 오게 되었으니 아버님이 3당 합당 당시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큰 고뇌 속에서 상도동 칩거를 하셨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민자당 내에서 아버님은 상대적인 소수였고 민정계와 공화계로부터 협공을 받는 형국이었으니 아버님은 물론 민주계 전체가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합당 후 그때까지 채 1년도 안 된 기간 동안 저들이 보여온 태도와 자세를 보아도 더 이상의 후퇴는 곧 싸움도 하지 않고 백기를 드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각제 논의는 연말까지 당분간 하지 않으며, 당무는 대표에게 일임한다”는, 다시 말해, 두어 달 후인 1991년에 내각제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그때까지는 아버님이 대표를 맡는다는 타협안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님의 측근 인사들이 가지고 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님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아버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는,
“이번에야말로 방향을 분명히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속셈은 모두 드러났으니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길을 가야 합이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로서는 최대한 강력하게 내 주장을 말씀드린 것이다. 마음을 정하신 아버님은 측근들을 모아놓고, “이번에야말로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고 넘어가겠다. 다들 동요하지 말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라”고 말씀하셨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아버님은 그날로 마산으로 떠나셨다. 비서 몇 사람과 내가 수행한 단촐한 일정이었다.
“거봐라, 저 사람들이 이제 본심을 드러낸 거다. 잘 처신하고 무엇보다 건강에 조심해라.”
마산에서 뵌 할아버님이 아버님께 첫마디로 하신 말씀이다.
아버님의 마산행은 결국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측근 인사가 내려와 아버님을 뵙는 것을 계기로 알단락되었고, 서울로 돌아오신 아버님은 곧바로 김종필, 박태준 씨를 배석시킨 채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격한 말씀까지 하신 끝에 더 이상 내각제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걸로 매듭을 지음으로써 완전히 끝났다.
참으로 험난한 이 2년 3개월 여의 세월 동안 나에게도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도 내가 곧 유학을 갈 거라는 소문이 돌았던 일은 나에게 다시 한번 내 인생 항로를 생각해보게 하였다.
합당 후 연구소 일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아버님을 개인적으로 보좌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다. 그러나 보좌라고 해봤자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워낙 가까이서 모시다 보니, 그리고 아들이라는 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었고, 되는 얘기건 안 되는 얘기건 말씀을 드려볼 수는 있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경계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그에 따라 이런저런 소문들도 돌기 시작했다.
“현철이가 너무 설친다” “현철이가 너무 강성이라 얘기가 잘 안 통한다.” 등등. 그러던 끝에 나온 것이 바로 “현철이가 유학간다더라”였다. 사실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철이가 문제를 자꾸 일으켜서 YS가 현철이를 외국으로 내보낸다더라”가 소문의 실체였다.
일이 이쯤 되자 나로서도 언제까지나 「그러다 말겠지」 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야 말로 다할 수 없었지만, 대통령 후보를 향해 어려운 걸음을 하고 계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아무리 내 문제라 해도 내 감정대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1991년 5, 6월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 미국으로 갔다. 하버드 대학, 조지 워싱턴 대학, 조지타운 대학, 미국 국제전략연구소 등을 두루 알아보았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는 당장 여름 학기부터 와도 좋다고 했다. 아쉽게 중단했던 공부였다. 몇 년의 공백은 있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정 그렇다면 내가 유학 가주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도 발동했다. 귀국 즉시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버님을 성심껏 도와드렸으나 결과적으로 누를 끼친 것 같습니다. 나가서 공부나 마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버님은 말씀에 앞서 눈가부터 축축해지셨던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돕겠다는데 그게 무슨 죄냐, 네가 원해서 간다면 할 수 없지만 떼밀려서 가는 거라면 허락할 수 없다.”
목이 메어 더 이상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절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밖으로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스쳐갔다. 아버님의 신뢰와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동안 혼자서만 고민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얼마나 속좁은 생각이었던가. 얼마나 경솔한 행동이었던가.
다음날부터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아버님을 모셨다.
「그래 누가 뭐라 해도 아버님이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됐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얘기에 일희일비하지 말자.」
그 후로 나는 유학이라는 단어를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10. 선거전의 한복판에서
- 1992년 대통령 선거

1992년 대통령 선거는 1987년의 선거와는 또 달랐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달랐다. 평생 야당만 해오신 아버님에게 여당의 대통령 선거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여당으로서도 사상 처음으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확정한 것이고, 아무런 프리미엄 없이 선거를 치르기도 처음이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크게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는 선거에서 후보의 지위와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 선거판을 운영, 관리함에 있어 그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는 일종의 오케스트라와 같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악기로 화음을 이뤄가는 연주와 같다. 한두 사람이 내는 불협화음도 금방 전체 오케스트라에 영향을 주게 되는 매우 예민한 연주와 같은 것이다. 후보는 말하자면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지휘자와 같다. 지휘자의 미묘한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화음과 음질이 결정되듯이 후보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그 거대한 선거 운동 진영 전체가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만큼 후보의 지위는 절대적이고 후보의 역할은 막중하였다. 선거에서는 적어도 51퍼센트 이상이 후보의 몫이라는 것이 내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배운 첫번째 교훈이었다.
나는 이점과 관련하여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님과 주변 인사들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 그리고 탁월한 상황 장악력에 대해 깊은 감명과 큰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마침내 투표일이 다가왔고 나는 후회 없는 심정으로 아내와 함께 한 표를 행사했다. 사실 선거 결과는 거의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선거전 막판으로 가면서 아버님의 우세가 이미 여러가지 형태로 감지되고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기간 내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각종 조사결과를 취합해온 나에게 그것은 과연 얼마나 큰 차이로 승리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승리, 최소한 40퍼센트 이상의 득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지나면서 아버님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아버님은 당사로 떠나셨다. 나도 아버님을 모시고 있던 시내 호텔을 나와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를 찾았다. 나는 나사본의 여성 조직 사무실부터 시작하여 방마다 돌면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들른 민주산악회 사무실에서 나는 비로서 우리가 해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열광적이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까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끌어안았다.
이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상도동으로 가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다.
“축하드립니다. 수십 년간 기다려오셨는데 축하드린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번에 자네 수고가 많았다. 참 고생했다.”
물러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뿌듯한 마음이 되었다. 아버님으로부터 실로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으로 한 사람 몫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제부터 뭘 하지? 며칠을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어수선하게 보낸 뒤 나는 먼지 앉은 책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11.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김 소장이 다시 나서줘야 되겠어요. 이러다가 수십 년 만에 잡은 정권을 저 사람들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뭣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 버텨왔는데, 눈 뻔히 뜨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김 소장밖에 없으니 김 소장이 나서주시오.”
오랜만에 예전 여론조사연구소를 할 때 불렸던 김 소장이란 호칭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지만, 그보다도 그분들의 격양된 표정과 말소리, 특히 그분들의 주장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집권 초기니만큼 약간 문제는 있으리라 하면서도 그러나 큰 문제야 있겠는가 하고 별 생각 없이 책만 파고 있던 나로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들이었다.
“사태가 그렇게 심각합니까? 전 전혀 몰랐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날 밤 그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던 공부는 계속한다. 그러나 남의 일처럼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말 어떻게 해서 이룬 권력 교체인데 이렇게 흐지부지 끌려가야 된단 말인가.」
우선은 격양된 분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니 저라도 아버님께 여러분들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실 터이니 그렇게 흥분들 하시지 말고 차분하게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 나가십시다. 앞으로는 저라도 여러분들을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건 여러분들이 아니면 문민정부를 누가 버텨주겠습니까?” 뭐, 대충 이런 취지로 그분들을 안도시켜드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분들께 약속한 대로 나는 그 다음날 아버님을 찾아 뵙고 그분들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렸다. 실로 오랜만에 아버님께 다시 정치 이야기를 전해 올린 것이었다.
사실 좀 주저하지 않은 것은 아이었다. 아버님은 이제 이 나라의 대통령이셨다. 아무리 그동안 가까이서 모신 처지라고는 하나 자칫하면 주제넘는 짓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아니라 민산과 민주계의 문제였다.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버님께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의 얘기였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아버님께서 믿고 의지하시던 분들의 얘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께 간곡히 그분들의 심정을 전해드렸다.
“비록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분들께 자리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버님을 따르는 분들이니, 아버님께서도 그분들을 잊지 말고 기회 닿는 대로 손이라도 한번 따뜻하게 붙잡아주셨으면 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만 계시던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음, 그래......., 그 사람들이야말로 내 평생 동지들이야. 자네 말이 맞네!”
“.....”.
아버님은 현장의 목소리에 목말라하고 계셨다. 항상 사람들과 함께 하시던 당신이셨는데 청와대 생활을 시작하시면서는 그런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는 가급적 나의 청와대 출입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는 것인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버님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셨고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주목을 받고 있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까지 아버님을 만나뵙고 싶지는 않았다. 또 청와대란 곳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곳도 아니었다.
나는 경호실이나 부속실 사람들에게 가급적 드러나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주의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들도 이 문제만큼은 속수무책이었으리라.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나와 청와대 출입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끔씩 아버님을 찾아뵙는다는 얘기는 이내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를 만나자는 사람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갖는 마력은 그만큼 엄청났다. 누가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뉴스가 되고, 그 사람은 곧 주목의 대상이 되곤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아무 때나」 대통령을 만난다는 「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걸 예상 못한 내가 오히려 너무 순진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를 원했고,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원했다. 편지도 많이 받았다. 대부분은 격려와 조언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민원도 있었고 청탁도 있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사실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단체들이었다.
처음에는 난감했고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화도 났다. 도대체 청와대 사람들이 뭘 어떡하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연락을 해오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경호실에다가 싫은 소리도 몇 번 했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권의주의 독재 시대도 아니고 청와대 출입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다. 그분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싫은 소리를 했으니 내 짧은 소견에 스스로 화가 났다.
말이 쉬워 여론 조사지 여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필요 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다시 연구소를 차리고 나앉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 아들이 여론조사소를 차렸다고 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곡해하지 않고 바라봐주길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결국 편법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아버님을 도와온 김원용 성균관대 교수에게 여론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조사의 주제와 질문항은 그때그때 김 교수와 내가 상의해서 결정하기로 했고 거기에 필요한 실무는 김 교수가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물론 필요한 자금은 내가 조달하기로 했다.
궁리 끝에 나라사랑실천본부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쓰다 남은 돈에 생각이 미쳤다. 각종 사무실 보증금 그리고 각종 기자재 처분 금액 등 상당액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아버님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인데, 선거 때 못 썼으니 지금이라도 쓰자. 그게 그 돈을 후원하신 분들의 뜻에도 맞는 일 아니냐......!
나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그 돈을 이용해 여론 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물론 나만 여론 조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여론에 민감하신 아버님이시라 청와대 비서실에서도 정기적으로 여론 조사를 했고 당이나 또는 각 기관에서도 여론 동향과 관련된 각종 조사와 자료를 아버님께 보고드렸다. 그것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나 해왔던 일이고 앞으로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여론 조사는 청와대나 다른 기관들의 여론 조사와는 좀 달랐다.
대개의 여론 조사는 특정 문제에 대한 여론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나는 특정 사안이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파악하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파악된 여론 중 튿이한 것이나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내 나름대로 정리해두었다가 내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화제로 올려 사람들을 통해 크로스 체킹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옥석」이 가려진 것들만 아버님께 보고드렸고 필요할 경우 그 주제만을 가지고 심층 조사를 추가로 실시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여론과 동떨어진 보고를 드리거나 주관적으로 해석한 조사 내용을 턱없이 주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대체로 구체적인 사례나 실증적 근거들을 같이 보고드릴 수 있었다.
동문 선배들로부터 활동비를 보조받게 되면서 나는 좀더 효과적으로 내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일단 자금 조달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여론 조사와 민심 파악이라는 활동과 내 학위 논문의 작성이라는 두 가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문민정부 전반기 3년간 나는 이렇게 연구와 활동을 두 축으로 하여 비교적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12. 개혁과 변화 속에서

그러나 문민정부의 정치 상황은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았다. 아버님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속도의 결단력을 갖고 취임 직후부터 엄청난 힘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거셨다.
공직자 재산 공개와 정치 자금 수수 근절, 안기부의 기구 축소및 정치 개입 배제, 정치 군부의 퇴진과 군개혁, 대북 관계의 개선과 통일 정책의 전면적 재검토 등 지난 30여 년간 누적되어온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개선하기 위한 각종 조치들이 이렇게 취임 직후 3월 한 달 사이에 숨쉴 틈 없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사안마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것들이었고 또 그래서 개중에는 나중에 수정 보완된 것들도 있지만 실로 이 한달은 「아, 이런 게 개혁이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 시기였다.
정국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고 사라들은 일종의 흥분과 약간의 두려움 섞인 기대감으로 과연은 내일은 또 뭐가 터질까 하는 기다림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요즘 세상에서는 문민정부의 개혁을 두고 프로그램이 없는 즉흥적 개혁 이었다고 폄하하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 할 수 없다. 또 4년 전 국민의 정부 출범을 전후해 준비된 대통령론이 한창 유행한 적도 있지만 이 역시 나로서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국정이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처럼 각종 프로그램, 이 많은 나라에서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 준비된 대통령이니 준비 안 된 대통령이니 말들을 하지만, 세상에 어떤 대통령 후보가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무슨 준비를 했는가, 어떻게 준비를 했는가가 아닐까?
아버님과 문민정부의 주체 세력은 최소한 2년여에 걸쳐 집권준비를 했고 집권 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프로그램대로 국정이 이루어졌는지는 별도의 평가를 요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도 문민정부의 국정은 애초에 준비되었던 프로그램을 상당 정도 실행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혁 프로그램이 있었다 해서 그것이 원안대로 그대로 시행됐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개혁 프로그램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현실에서 실현되었는가? 더 나아가 그 개혁 실천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민정부의 개혁에 대해 나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몇몇 부분에서는 아쉬운 느낌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고, 또 어떤 것은 그 중요성에 걸맞는 실행력을 갖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들도 있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문민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아버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국 정 과제는 군정을 종식시켜 명실상부한 문민정부의 기반을 확립한는 것이었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수많은 개혁 아젠다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개혁들에 앞서 우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군정의 잔재를 일소하고 문민정부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오랜 야당 경험과 2년 여의 여당 경험 속에서 아버님은 군정의 잔재를 일소하는 일은 최소한 두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첫째는 여전히 힘을 쓰고 있는 정치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군을 이들 정치 군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문민적 강국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정기 군 인사도 무시한 채 마치 전격 작전처럼 3월 8일 육군 수뇌부를 경질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이제는 다 옛날 얘기처럼 되었지만 1987년 대통령 선거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1992년 대통령 선거때도 정치 군부가 주도하는 군의 동향은 정치권이 항상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라.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 군부의 동향이 한번이라도 세인의 관심이 된 적이 있었던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토 세력이 있다는 식의 애기가 나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1992년과 1997년 선거 사이의 이 5년 동안 문민정부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 군부를 정치에서 완전히 축축하고 문민적 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는 정치사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군정의 잔재를 일소하는 두 번째 과제로 아버님이 생각하신 것은 정보 기관을 개혁함으로써 공작 정치를 일소하고 정보기관에 의한 인권 유린 사태를 근절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아버님은 취임 직후부터 안가 폐쇄를 시작으로 안기부를 비롯한 전 정보 기관의 개혁을 단행하셨다.
김덕 교수를 안기부장으로 발탁하는 「파격적 인사」는 이 문제에 대한 아버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는데 이렇게 아버님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김덕 부장이 시작한 정보 기관 개혁은 군 개혁을 주도했던 후임 권영해 부장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13. 역사의 뒤안길에서

초기와는 달리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문민정부는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초기와 같은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개혁을 포기하고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잘 수도 없었다. 교육개혁이건 노가 관계 개혁이건 법조 개혁이건 문민정부가 공을 들인 개혁 조치들은 각종 이익 집단들에 의해 비토당하고 있었으며,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무기력한 국회에거 계류되기 일쑤였다.
나는 이 무렵부터 아버님께 가급적 휴식을 가지시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드렸다.
“당장 눈앞의 일에 신경 쓰시지 않을 수 없으시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멀리 보시고 중,장기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러시려면 우선 아버님부터 좀 여유를 가지셔야 합니다. 제발 좀 얼마간이라도 일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럴 때면 아버님도 내 말에 수긍하시면서도 또 어쩔 수 없는 일상으로 빠져들곤 하셨다. 미뤄두어도 좋은 사안이란 단 하나도 없는 생활이었으므로.....
1994년 11월 발표된 세계화 선언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요즘이야 상식적인 얘기가 됐지만 세계화의 핵심은 우리의 사회 구조와 관행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로 우리의 내부를 개혁하고 체질을 개선, 강화하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문민정부의 역사적 과제를 이 세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문민정부의 마지막 과제로 공정한 선거 관리를 내거신 아버님이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심판자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고 올바른 정치 발전의 초석을 다진다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과열 경쟁으로 인한 고소 고발 사태를 사법의 척도로만 처리할 수 없는 이른바 「통치권 차원」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신 적이 있다. 퇴임 1주년을 즈음한 자리에서였다.
“여러 고비가 있었지. 심지어는 헌정 중단 사태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 후보가 사법 처리될 경우 그 사태를 누가 책임질 수 있었겠나.”
“고민이 많으셨겠습니다.”
“참 고민이 많았지. 며칠 잠을 통 못 잤어. 그리고 결심했지. 어떤 일이 있어도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야 되겠다. 그래 총장한테 바로 지시했지.”
나는 지금도 그때의 결정이 나라를 위해 참으로 잘하신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같은 상황이 닥쳐도 아버님은 꼭 같은 결정을 내리실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이런 고뇌와 결단을 이해하려 하기는커녕 그것조차도 자신들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투과시켜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나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 물론 그들도 국가를 책임져야 할 자리에 앉게 되면 이것저것 두루 살피면서 국정을 경영해 나가겠지만, 그걸 꼭 겪어보고 당해봐야만 아는 것인가 하는 답답함과 안쓰러움이 있는 것이다.


15.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마흔텟이 된 지금까지 내 뜻대로 내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주위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뜻에 맞춰가면서 살아온 40여년의 삶이었다.
때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고, 질 줄 뻔히 알면서도 싸움을 했다. 내 의지만으로 살고 싶어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기도 했고, 눈과 귀를 틀어막아보기도 했다.
가끔 거울을 통해 지난 몇 년간 부쩍 는 흰머리를 보면서 「김현철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처연한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큰놈을 보면서 마흔이 넘어버린 내 나이를 다시 생각하기도 한다.
꿈과 열정으로 뭉쳤던 20대가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리고 나는 만신창이가 된 40대 중반이 되어버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 의지에 따라 살 수 있을까?」
나는 내내 이 물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속의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시 시작할 것인가.
냉정해야 했다. 또 다시 기분으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키지도 않는 길을 갈 수는 없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역시 나에게는 정치밖에 없는 것 같아. 다른 것보다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정치라는 걸 요즘에 와서야 새삼 깨닫게 됐어.”
“글쎄, 과연 잘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여론의 지탄을 받는 건 아닐까?”
“언제 시작하든 어려움은 있을 거야. 특히 나에게는.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거야. 내 의지로 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이미 결심이 섰다면 한번 해보세,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하세.”
다 맞는 말이었다. 하기 어려운 얘기들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요란스럽게 시작한 21세기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오랜 방황에서 돌아온 것처럼 푸근하고 넉넉하다. 그 넉넉함으로 나는 정치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누구나 정치를 시작하면서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출사표를 던진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보고 배운 것, 느낀 것에 충실하려고 한다. 정치인 한 사람의 각오와 열정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으면 세상의 한 자락도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내가 정치를 시작하는 것은 정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와 외형적 성과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20여 년의 젊은 시절 동안 어깨너머 배운 정치, 마치 물과 공기와 같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정치, 그러나 나에게는 처음으로 다가오는 나의 정치를 시작하면서 나는 세가지 목표를 새롭게 세우고 있다.
첫째는 가능한 많은 좋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다. 정치를 뭐라고 정의하든 결국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정당이라는 강성 조직이건 사이버상의 네트워크 같은 연성조직이건 정치는 사람들이 더불어 하는 거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 역량있는 사람들,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은 곧 좋은 정치, 내용 있는 정치, 미래 지향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쌓는 일이다.
나는 현 정치 구도상의 여야나 보수/진보 등의 구별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간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주어진 것인 만큼 나름의 존재 이유는 있을 것이지만 이미 그 대부분의 구획은 의미를 잃었고, 설사 그렇지는 않더라도 얼마 안 있어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20세기적 정치 구도의 발전적 해체와 21세기의 새로운 정치 구도의 건설이라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으로 이른바 「3김 시대」는 역사 속으로 묻혀갈 것이다. 아버님이나 다른 두 분의 역할을 그것대로 있겠지만, 정치의 주역은 물론 새로운 정치 주체들의 행동과 사고 방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정치 빅뱅」은 필연적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됐든, 다음 여당을 어느 정치 세력이 담당하게 되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존의 정치 구도와 정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새로운 정치 구도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
개별화된 한 사람의 구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흐름과 같이하는 좋은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라는 강력하고도 새로운 힘을 통해서.
이 네트워크에서는 정치와 비정치의 벽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벽도 물론 없을 것이다. 밑바닥의 정서와 목소리가 여과없이 모일 것이며,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소리, 하나의 행동이 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란 곧 이 소리들을 모아내고 조직하는 것이며, 그 소리들을 정제하고 강하게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토론의 과정일 것이다. 나는 이 토론의 장에 열심히 참여할 것이다. 내 목소리와 내 감정을 이 소리들 속에 섞어놓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나의 소리와 나의 정서를 단련시켜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렇게 모아지고 새롭게 만들어진 소리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을 것이다. 「정치」라는 이름의 타협과 변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소수파의 길이라 할지라도.
두 번째 목표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한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정치는 과정의 예술이다. 결과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정치인은 표의 노예가 되고 돈의 노예가 되며 권력의 노예가 된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지역 감정에도 몸을 맡기고 보스의 발 밑에 몸도 던진다. 이러게 해서 형성된 파벌 붕당 정치, 지역주의 정치, 공천권과 돈으로 이루어지는 1인 지배 정치의 틀이 우리가 그 동안 보아왔고 겪어 왔던 우리의 정치였다.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를 새로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법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들이 정치권에 수혈된다 하더라도 우리 정치는 새로워질 수 없다. 정치 신인들이 정치에 입문한지 1,2년이 지나지 않아 구태를 배우게 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할 때 이 모든 구태는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어렵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중히 할 때 우리는 지역주의와 금권/관권의 유혹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물론 실패의 위험도 크다. 아니 십중팔구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없는 일이라면 애초에 도전할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마도 명예로운 고립을 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역감정과 공천권과 금권/관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소속이라는 고립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뜻을 같이하는 명예로운 무소속들과 더불어 새로운 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길만이 타성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세 번째 목표는 크고 넓고 길게 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정략이 아니라 국정에 충실한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정략과 국정은 구별이 쉽지 않다. 특히 현실 정치 속에서 국정은 항상 정략속에 묻쳐 있게 마련이고 정략을 국정의 외피를 뒤집어쓴채 교활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국정과 정략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략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국정과 정략은 그 순간 뚜렷하게 구별된다. 예산 심의와 법안 심사 그리고 국정 감사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이 하는 모든 일은 곧바로 국정에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언제나 해답이 있게 마련이다. 최선책이 없을 때는 차선책이라도 있는 것이 국정이다.
물론 이 해답 자체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거나 이런저런 공직에 앉아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검증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이해 관계나 자신이 속한 정당 또는 자신이 모시는 보스의 이해관계에 맞춰 변형시키는 정략정치이다. 나는 이러한 정략 정치야말로 우리 정치권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우리 정치를 3류, 4류로 전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정치 불신은 정치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인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정략 정치의 틀을 하루 빨리 벗어던져야 한다. 나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게 되건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미국에서 쓰기 시작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응어리를 토해내듯 그렇게 썼다. 전후좌우를 생각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썼다.
그리고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감정을 그냥 쏟아놓은 데가 많았다. 아직은 해서는 안 될 이야기도 더러 눈에 띄었다. 망설이다 결국 몇 군데는 손을 봤다. 몇 사람의 이름을 지웠고 지나치게 적나라하다 싶은 대목은 손을 보았다. 이러다 보니 초고를 가지고도 또 몇 달간을 씨름했다. 그 와중에 마산 재선거 출마문제가 돌출되었다. 아쉽게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나로서는 또 한번의 벽을 넘은 느낌이다. 정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나는 이 자선 에세이의 출간을 결심하였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흠이 있으면 흠이 있는 대로 나 자신을 있는 그래도 노출시키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모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씩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첨삭 없이 휘몰아친 거친 글에 중간 마침표를 찍었다. 출간을 결행하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287~299

의원들의 당적 이동이 계속되었고, 「국민의정부」가 휘두르는 사정의 갈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번뜩였다. 나는 집 전화는 물론 핸드폰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전화기를 바꾸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바꾼 전화기도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신경을 꺼버렸다. 으레 누군가 듣겠지 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더 이상 숨기고 감추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1998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2심 재판도 끝났다. 역시 3년의 실형, 그러나 재판부는 보석을 철회하지 않았다. 대법원까지 가서 법리적 다툼을 할 경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준비하도록 배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고마웠다. 재판부도 법리상 다툼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 변호사는 기세가 꺽이지 않았다. 비록 2심에서도 지기는 했으나 오히려 법리 논쟁에서 자신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마땅히 대법원 상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시들했다. 내 한 몸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 같아 구차스러웠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이꼴 저꼴 보지 말고 차라리 감옥에 가자.”
심정이 그랬다. 나 때문에 구속된 많은 사람들은 놔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이기 싫었다. 일주일안에 어떻든 결정을 해야 했다. 상고를 포기하고 감옥에 갈 것인지, 아니면 대법원 상고까지 올라가 끝까지 다툴 것인지.
나는 아내와 마주 앉았다. 2심 재판이 끝난 지 한 3일 후쯤 되는 밤이었다.
“나 더 이상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
“…….”
“힘들겠지만 잘 견뎌내야 해.”
“…….”
“…….”
“그런데 애들한테는 뭐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무 잘못 없이 희생당했다고 믿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나를 욕하는 자기 또래 아이들과 맞붙어 싸우다 얼굴을 붉히고 돌아오는 일이 가끔씩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쳤다는 말은 더더구나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음날 여 변호사를 만났다.
“끝까지 가봅시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정국은 계속 혼미를 거듭했다. 내가 보기에 국민의 정부는 국정의 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듯 했다. IMF 위기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국정의 핵심고리를 잡아내지 못했고, 국정의 핵심 과제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주체 세력의 결집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소수파 정권의 한계가 곳곳에 드러났다.
문민정부라는 속죄양이 있었으므로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면 문민정부 탓으로 돌려버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의 정부는 자꾸 「쉽고 편한 길」을 가려고 했다. 국민의 정부가 잘돼야 문민정부의 위상과 성과가 지켜질 것이라는 처음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거듭되자 차츰 무관심으로 변해갔다. 어떻게 되겠지. 그런 심정이었다.
한나라당도 야당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나라를 망친 당이 무슨 할말이 있느냐”는 정부 여당의 공세가 먹혀들었고 조금 지나서는 사정 드라이브가 위력을 발휘했다. 소속 의원들의 동요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이회창 씨는 연속되는 정부 여당의 공세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국민의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도움으로 IMF위기 국면을 헤쳐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IMF와 미국 거대 자본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국민의정부가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IMF사태가 국제 경제 역학에 의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국제 경제 역학에 의해 수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 수습은 또 다른 위기를 배태하는 것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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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는다. 당시 내 주위를 옥죄고 있던 유형/무형의 압박들과 무관치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정부 여당의 태도는 또 그렇다 치도라도 당시 야당의 태도에 대해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회창 씨는 아버님의 안위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사원장으로, 국무총리로 그리고 당 대표로 만들어 주셨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이 만드셨던 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까지 나섰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회창 씨가 아버님의 테러 사건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적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야당으로서는 마땅히 정치 쟁점화했어야 될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직 대통령에 대해 행해진 테러였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소리높이 외치는 「국민의 정부」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야당은 침묵했다. 독재 정권하의 야당도 그보다는 나았다. 하나 있는 야당이 그런 상태였으니 국정에 대한 용기 있는 비판과 견제 속의 균형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것이 아버님이 민주산악회 재건을 생각하시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다.
1999년 봄 대법원은 나의 상고심 판결에서 알선 수재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부분 무죄를 선고하고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의 부분 무죄 판결은 사실상 나의 무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오랜 법정 투쟁 끝에 나는 마침내 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단초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으로부터 사건을 다시 돌려받은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이번에도 2년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전례로 보아 최소한 집행 유예는 확실하다던 예상을 또다시 뒤엎는 결과로 되었던 것이다. 1999년 7월의 일이었다.
사법부가 정치적 논리에 의해 휘둘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법원이 환송한 사건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대법원에 재 상고할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되었다. 얼마가 걸리든 그렇게 해서 대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내 사건과 관련된 갖가지 법리적 문제까지 어떻게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나는 일체의 사면 복권 가능성을 포기해야 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8.15사면 복권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시 법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 것인가.
청와대와 동교동 측의 생각 같다면서 8.15사면 복권으로 내 문제를 마무리 짓는게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전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그들로부터 들은것도 아니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대법원 재상고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그러다 안 되면 감옥살이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오기도 여전히 있았다. 여변호사는 이미 재상고장을 작성해놓고 있었다.
나는 재상고장을 놓고 며칠째 고민했다. 그러나 재상고 기한을 하루 남겨두고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나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미진한 대로나마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대범원의 부분 무죄와 환송 결정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다. 어차피 정치적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느의 뜻에 맡기자. 내 사건은 어차피 정치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나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재상고를 포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부터 세상의 풍랑은 온통 나를 뒤흔들어댔다. 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저 나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은 주로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 그리고 검찰을 향했다. 김현철을 사면복권 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사면권을 남용하지 말라.”
“김현철 사면을 고리로 정치적 담합을 꾀하지 말라.”
“ 검찰은 김현철을 즉각 구속 집행하라.” 등등.
나에 대한 공격은 이른바 공동 여당의 한 축인 자민련내에서도 가해졌다.
시민단체들은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나는 다시 국민의 공적이 되었고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일신의 안녕이나 꾀하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나의 사면에 대한 여론 조사를 벌였다. 당연히 절대다수의 국민이 사면 불가의 입장을 밝혔고 그 조사 결과는 김대중 정부가 나를 사면할 경우 지지도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일종의 정치적 위협 무기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나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고 견디는 수밖에. 그간 단련해 놓은 「맷집」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때 쓰러져버렸을 것이다.
한달 가까이를 그러더니 김대중 대통령은 나에게 잔형 집행 정지라는 부분 사면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복권은 되지 않았다. 벌금과 추징금도 그대로였다. 결국 감옥에는 다시 집어넣지 않을테니 딴생각 말고 가만있으라는 얘기였다.
잔형 집행 정지라는 「은사」를 받았는데도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해주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매듭을 풀었다는 느낌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아지 작은 매듭 하나를.......
나는 사면 직후 그간 보관되어 있던 활동 잔여금 70억 원을 찾아 벌금과 세금을 내고 나머지는 몇 군데 사회 단체에 모두 기부 하였다.
그 얼마 후 나는 내 기부금을 받아준 단체들 중 한곳인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 돈으로 신장 투석기를 들여와 많은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고 있으니 꼭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장 투석이라는 말에 나는 염치 불구하고 그들의 초대에 응했다.
나의 어린 시절 애기 중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급성 신장염에 걸려 꼬박 1년을 병원에 누워 지낸적이 있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기였다.
아파본 사람만 안다지 않는가. 나는 그 돈이 신장병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단체 관계자를 꼭 직접 만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인사를 받으련게 아니었다.
“정말로 고마운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투석 중인 환자들과 만나 다정하게 애기도 나누었다.
“꼭 나으십시오. 힘내십시오.”
이것만으로도 나의 1999년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사는거야 」
나는 2000년 4월의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4월 7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복권이 안 되어 출마는 불가능했지만 구경꾼의 입장에서 먼발치에서 선거를 보는 것도 그것대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바둑 수가 더 잘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의 변화도 확연하게 느껴졌고 기존 정치의 한계와 문제점도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보고 있노라니 어욱 의지도 새로워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 복권은 절차에 불과하다. 비록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나의 정치를 시작하겠다. 안목도 넓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야 겠다.
“정말 제대로 준비 해야겠다.”
미국행 비행기에서 나는 이 말을 되씹고 되씹었다.
나는 미국에서 복권 조치를 통보 받았고, 1년이 조금 지난 2001년 6월 돌아왔다. 그사이 이 책과 국가 경영학에 대한 몇가지 글도 손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 정치, 그것도 제대로 된 내 식대로의 정치를 해보겠다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아직은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상황에서만 하는 정치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의 도전과 실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나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내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이 김현철이 살아가는 방식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