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한 해 동안 통감부는 137회에 걸쳐 국내와 해외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 2만947부를 압수했다.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포함하여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이 주 압수대상이었다('조선총독부 施政年表' 1909년). 이 표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잡지 서적 연설문은 물론이고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맡았던 일본인 발행 신문까지 압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의 필봉은 꺾이지 않았다.
"국민의 행동을 구속하야 손 한번 들기와 발 한번 디디기도 자유로이 하지 못하게 하면 가히 그 나라를 멸망케 할까, 교육권을 차지하여 정신을 혼미케 하는 술법으로 청년의 뇌수를 변역(變易·고치어 바뀜)하면 가히 그 나라를 멸망케 할까, 언론을 속박하야 신문잡지의 출판함을 검열하며 혹 타국에서 자유로 발간하는 신문도 보지 못하게 하며 전하지 못하게 하면 그 나라를 가히 멸망케 할까."
'신보'는 이등박문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1773~1859·빈 회의를 주도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던 정치가)에 비유하여 '일백 명의 메테르니히가 능히 이태리를 압제하지 못한다'(신보, 국한문 1908.4.29., 한글판, 5.2.)는 논설로 침략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인민들이 천만길 지옥을 뛰어나와 청천백일을 좀 보고자할 사상이 있을까 염려하야 신문기자가 조금 분격한 언론을 게재하면 순검의 포승과 옥중에 형벌로 그 몸을 썩이며, 캄캄한 그믐밤 같은 토굴 속에서 허다히 무고한 백성을 몰아넣고 천만가지 기기괴괴한 수단으로 아무쪼록 그 눈을 멀게 하고 그 귀를 막게 하며 그 수족을 불인(不仁·몸의 어느 부분이 마비되어 움직이기가 거북한 증세)하게 하며 그 호흡을 통치 못하게 하여 일호반점이라도 생맥이 있는 듯하면 바삐바삐 틀어막으려고 했다."
오스트리아 의 압제하에 있던 이태리를 한국의 현실로 묘사한 이 글은 통감부가 신보사 사장 영국인 배설(裵說)을 기소할 때 '치안방해'의 증거물로 제시했던 대표적인 항일논설이다. "오호라, 그 나라의 혼(國魂)만 잃지 않으면 비록 천변만화의 괴기 수단으로 압제를 행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니…." 논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한국이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예고했다.
일본 은 한국의 신문 잡지 단행본 등 출판물에 사전검열을 강행하여 기사의 삭제를 명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를 통해 국내 신문의 항일 기사는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지만, 공립신보(1908년 3월 25일자.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사진과 기사가 실려있다), 대동공보 등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교포 신문은 원천봉쇄가 불가능했다. 일제의 침략을 강경한 어조로 거침없이 규탄하는 국외 교포신문의 국내 유입에 대해 일본은 압수로 대응했다.
1908년 4월 29일 일본이 '광무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총칼을 든 일본도 신문의 힘이 두려웠던 것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친일파 연구의 초석을 세운 임종국
책을 보다 2009/12/17 18:45 해를그리며
오늘날 우리 사회의 뒤틀어진 모습을 들여 보다 보면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여기 저기 문제가 없는 곳이 없을까 라는 생각에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 옳은 일을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고 정도를 걷기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러하기에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수준의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또 인간은 그렇게 지고지순한 존재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러한 삶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인 처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의 곳곳을 들여다보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해도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최소한의 것을 사회정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민족정기라고 내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막가는 놈들도 그 선이라는 것은 웬만 해서는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회는 최소한의 선도 없고 최소한의 정의도 살아있지 못하다. 강한 놈이 장땡이고 능력껏 해쳐 먹는 놈이 장땡이다.
도둑질을 하더라도 부끄러워 하며 사람들 안 보이는 곳에서 하고 사람에게 걸리면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거는 사람이 눈 벌겋게 뜨고 있는데 해쳐먹을 것 다 해쳐먹고 그러다가 문제가 되면 ‘나만 해 먹었냐? 너도 해쳐 먹고 싶었는데 능력이 없어서 못 해먹는 것 아니냐? 다른 놈들도 다 해쳐먹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 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나름의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또 사회에도 보편적인 통념이 되는 가치들이 있다. 물론 그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자들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인간은 예외적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 자체가 통념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는 사태다.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지켜져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참히 무너질 때 그 사회의 정의는 땅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정의가 시궁창으로 곤두박질 친 근본적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친일민족반역자(소위 친일파)에 대한 적절한 정리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후환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팔아 일제치하에 부귀공명을 누렸던 자들은 해방이 되면서 일벌백계 됐어야 했다. 하지만 일제 때 권세를 누리던 자들은 이승만을 등에 업고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그들에게 쫓기던 독립군과 그 후손들은 그 친일파들에게 여전히 쫓기면서 살았다. 이렇게 최소한 바로 세워져야 했을 역사적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자자손손 부귀공명을 누리기 때문에 민족의 최소한의 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거센 비바람 속에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이 땅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횡횡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필귀정은 없었다.
나라의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친일행위자에 대한 적절한 심판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이 오래 흘러 실질적인 처벌은 어렵게 되었더라도 역사적 심판은 내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은 자자손손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후손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임종국선생을 만나다
우리의 근현대사 중에서 일제시대와 관련된 내용은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읽어 대강의 윤곽만 잡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생에 따라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는 교양도서였다. 해전사는 여러 저자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정리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당시 책을 읽으면서 몇몇 유명 저자를 제외하고 생소한 저자들이 많았고 그 많은 저자들의 이름을 모두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이 아주 많고 그들 중 일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그 중 1권에는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가 있고 2권에는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임종국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저술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최근까지 임종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인지하는 바가 없었다.
임종국이라는 사람을 특별히 인지하게 된 것은 오로지 오블의 이웃블로거인 정운현님의 보림재를 통해서다. 보림재는 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라 한다. 도대체 임종국이 누군데 보배로 받든다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최근에 들어 찾아보니 정운현님이 저술한 임종국평전이 있었다.
임종국평전은 편안한 문체로 임종국의 주변 사람들의 말과 그의 책들 그리고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 임종국은 어릴 적 부터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소학교를 마치고 농업학교로 진학하지만 가축에 예방주사도 놓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만 두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고려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판검사를 꿈꾼다. 그것은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목격한 처참한 장면을 보고 자기가 위정자가 되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야심에서였다. 종국은 『민법총칙』 500쪽을 한 달 이내에 외울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여섯달 비지땀을 흘리며 공부를 하니 『민법』『형법』등 법전 일곱 권을 달달 외우기도 했단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면서 판검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방황의 시기를 거치다 이상에 깊이 매료되어 빠지게 된다. 그는 이상의 작품들을 찾아서 『이상전집』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해방 후 많은 자료가 유실되고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종국의 작업은 대단한 작업이었다. 많은 자료를 발로 찾아다니며 無에서 有를 엮은 것이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상의 연구에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전집』으로 유명해진 종국은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상과 같은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종국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을 지켜보고, 박노준이 빌려다 준 『친일파군상』이란 책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빠진다. 그 책에는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이에 종국은 친일파들의 자료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일문학론』을 저술하게 된다. 종국은 『친일문학론』이 대단한 반응을 얻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언론을 비롯하여 어느 곳도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친일파들이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임종국은 열정적인 저술활동으로 『한국사회풍속야사』『일제침략과 친일파』『밤의 일제침략사』『일제하의 사상탄압』『한국문학의 민중사』『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2』『정신대 실록』『친일논설선집』를 펴냈다. 이 책들 또한 문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임종국은 소외받는 삶을 살게 된다. 문단 또한 친일행위자들과 그의 제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소외받는 삶을 살면서 종국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파에 대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뛰어난 두뇌와 열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십년에 걸쳐서 나라 곳곳에서 이루어진 친일행위의 정리를 혼자 감당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년에 『친일파총사』(10권)을 계획하고 진행하다 노환으로 그것이 혼자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두분의 도움을 받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종국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1989년 60이라는 이른 나이에 영원히 눈을 감게 된다.
친일파 연구의 어려움
친일파에 대한 연구를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안 된다. 임종국이 친일파 자료를 모을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었다.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를 찾아 구석 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어려움은 그것 만이 아니다. 당시에는 친일을 했던 당사자들이 모두 건재한 상태로 사회 각 분야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각 분야에서 요직을 모두 꾀 차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에 대한 언급은 금단의 성역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실명으로 거론한다는 것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그 분야에서 배척받게 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역사의 주된 연구 분야는 친일행위는 덮어두고 독립운동에 관한 부분이 주를 이루었다. 사회 각 분야로부터 내부고발자가 되어 왕따 당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맹세를 하지 않는 한 금단의 성역은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얼마전 서울대 김민수교수가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위를 비판했다가 교사재임용에서 탈락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이 그 금단의 성역에는 자신의 스승이 있고 자신의 부모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종국 자신도 모교인 고려대 은사 유인오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평생을 고대 동문들 사이에서 배척 받으며 살았다. 반면 그의 부친의 친일문제는 쉽게 정리가 되었다. 그의 부친 임문호가 선교행위를 하며 친일행위를 한 것에 알게 되어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부친을 찾아가 묻는다.
‘아버지! 친일 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임문호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고 말했단다.
『친일문학론』을 출간한 이후 문단에서는 임종국의 책들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임종국은 문단에서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외되고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가 그 누구도 친일의 흔적을 들쳐내기를 원하지 않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광화문광장에서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는 것과 당시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그의 업적은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 임종국평전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평전에는 그의 편치 않았던 개인사와 가정사들도 담고 있다. 임종국이라는 한 인간의 다양한 조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절름발이 같은 그의 역사의식의 부재에 대한 질타도 가하고 있다. 가령 그는 친일파에 대해서는 천착을 하였지만 당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 친일파들이 복귀하는데 미국이 막강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의 쿠테타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부분등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친미적 사고를 유지했고, 북한의 친일파 척결은 공산당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반북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책의 흠이라고 한다면 서술자가 지나치게 두드러져 보인다는 정도일 것이다.
뒤늦은 결실 '친일인명사전'
임종국은 그가 모아 놓은 친일파 관련 자료를 지키기 위해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라고 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뜻과 소중한 자료들을 이어 받아 후학들이 민족문제연구소를 세우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얼마 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 위한 과정도 쉽지 않았고 마지막 발간 행사도 우익단체들의 방해로 인하여 행사개최장소를 백범김구선생의 묘로 옮겨서 치러야만 했다. 이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한질을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에게 증정했다. 모진 고난 속에서 임종국 선생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친일인명사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을 연구하는 작업이 탄압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시시 때때로 친일파의 족속들이 유령처럼 살아나 민족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을 보게된다. MB정권은 광복절은 묻어두고 건국절을 성대한 행사로 치르려 하고 있다. 더 이상 일제치하와 그 당시 있었던 친일의 흔적을 되새기게 하는 광복절은 저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모두 친일파를 적절히 심판하지 못하고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반민특위의 와해는 두고 두고 가슴 아픈 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정리에 목을 메는 이유는 아픈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러하기에 친일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게 초석을 놓은 임종국의 작업은 외로웠겠지만 우리 민족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작업이었다.
오늘도 친일파의 영광을 입은 자들은 온갖 괘변을 늘어 놓아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들이 늘어 놓는 괘변들의 형태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늘어 놓는 괘변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하지만 사회의 곳곳을 들여다보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해도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최소한의 것을 사회정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민족정기라고 내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막가는 놈들도 그 선이라는 것은 웬만 해서는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회는 최소한의 선도 없고 최소한의 정의도 살아있지 못하다. 강한 놈이 장땡이고 능력껏 해쳐 먹는 놈이 장땡이다.
도둑질을 하더라도 부끄러워 하며 사람들 안 보이는 곳에서 하고 사람에게 걸리면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거는 사람이 눈 벌겋게 뜨고 있는데 해쳐먹을 것 다 해쳐먹고 그러다가 문제가 되면 ‘나만 해 먹었냐? 너도 해쳐 먹고 싶었는데 능력이 없어서 못 해먹는 것 아니냐? 다른 놈들도 다 해쳐먹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 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나름의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또 사회에도 보편적인 통념이 되는 가치들이 있다. 물론 그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자들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인간은 예외적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 자체가 통념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는 사태다.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지켜져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참히 무너질 때 그 사회의 정의는 땅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정의가 시궁창으로 곤두박질 친 근본적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친일민족반역자(소위 친일파)에 대한 적절한 정리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후환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팔아 일제치하에 부귀공명을 누렸던 자들은 해방이 되면서 일벌백계 됐어야 했다. 하지만 일제 때 권세를 누리던 자들은 이승만을 등에 업고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그들에게 쫓기던 독립군과 그 후손들은 그 친일파들에게 여전히 쫓기면서 살았다. 이렇게 최소한 바로 세워져야 했을 역사적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자자손손 부귀공명을 누리기 때문에 민족의 최소한의 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거센 비바람 속에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군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이 땅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횡횡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필귀정은 없었다.
나라의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친일행위자에 대한 적절한 심판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이 오래 흘러 실질적인 처벌은 어렵게 되었더라도 역사적 심판은 내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은 자자손손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후손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임종국선생을 만나다
우리의 근현대사 중에서 일제시대와 관련된 내용은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읽어 대강의 윤곽만 잡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생에 따라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는 교양도서였다. 해전사는 여러 저자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정리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당시 책을 읽으면서 몇몇 유명 저자를 제외하고 생소한 저자들이 많았고 그 많은 저자들의 이름을 모두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이 아주 많고 그들 중 일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그 중 1권에는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가 있고 2권에는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임종국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저술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최근까지 임종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인지하는 바가 없었다.
임종국이라는 사람을 특별히 인지하게 된 것은 오로지 오블의 이웃블로거인 정운현님의 보림재를 통해서다. 보림재는 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라 한다. 도대체 임종국이 누군데 보배로 받든다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최근에 들어 찾아보니 정운현님이 저술한 임종국평전이 있었다.
임종국평전은 편안한 문체로 임종국의 주변 사람들의 말과 그의 책들 그리고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면서 판검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방황의 시기를 거치다 이상에 깊이 매료되어 빠지게 된다. 그는 이상의 작품들을 찾아서 『이상전집』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해방 후 많은 자료가 유실되고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종국의 작업은 대단한 작업이었다. 많은 자료를 발로 찾아다니며 無에서 有를 엮은 것이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상의 연구에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전집』으로 유명해진 종국은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상과 같은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종국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을 지켜보고, 박노준이 빌려다 준 『친일파군상』이란 책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빠진다. 그 책에는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이에 종국은 친일파들의 자료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일문학론』을 저술하게 된다. 종국은 『친일문학론』이 대단한 반응을 얻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언론을 비롯하여 어느 곳도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친일파들이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임종국은 열정적인 저술활동으로 『한국사회풍속야사』『일제침략과 친일파』『밤의 일제침략사』『일제하의 사상탄압』『한국문학의 민중사』『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2』『정신대 실록』『친일논설선집』를 펴냈다. 이 책들 또한 문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임종국은 소외받는 삶을 살게 된다. 문단 또한 친일행위자들과 그의 제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소외받는 삶을 살면서 종국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파에 대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뛰어난 두뇌와 열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십년에 걸쳐서 나라 곳곳에서 이루어진 친일행위의 정리를 혼자 감당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년에 『친일파총사』(10권)을 계획하고 진행하다 노환으로 그것이 혼자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두분의 도움을 받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종국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1989년 60이라는 이른 나이에 영원히 눈을 감게 된다.
친일파 연구의 어려움
친일파에 대한 연구를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안 된다. 임종국이 친일파 자료를 모을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었다.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를 찾아 구석 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어려움은 그것 만이 아니다. 당시에는 친일을 했던 당사자들이 모두 건재한 상태로 사회 각 분야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각 분야에서 요직을 모두 꾀 차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에 대한 언급은 금단의 성역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실명으로 거론한다는 것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그 분야에서 배척받게 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역사의 주된 연구 분야는 친일행위는 덮어두고 독립운동에 관한 부분이 주를 이루었다. 사회 각 분야로부터 내부고발자가 되어 왕따 당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맹세를 하지 않는 한 금단의 성역은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얼마전 서울대 김민수교수가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위를 비판했다가 교사재임용에서 탈락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이 그 금단의 성역에는 자신의 스승이 있고 자신의 부모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종국 자신도 모교인 고려대 은사 유인오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평생을 고대 동문들 사이에서 배척 받으며 살았다. 반면 그의 부친의 친일문제는 쉽게 정리가 되었다. 그의 부친 임문호가 선교행위를 하며 친일행위를 한 것에 알게 되어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부친을 찾아가 묻는다.
‘아버지! 친일 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임문호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고 말했단다.
『친일문학론』을 출간한 이후 문단에서는 임종국의 책들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임종국은 문단에서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외되고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가 그 누구도 친일의 흔적을 들쳐내기를 원하지 않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광화문광장에서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는 것과 당시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그의 업적은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 임종국평전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평전에는 그의 편치 않았던 개인사와 가정사들도 담고 있다. 임종국이라는 한 인간의 다양한 조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절름발이 같은 그의 역사의식의 부재에 대한 질타도 가하고 있다. 가령 그는 친일파에 대해서는 천착을 하였지만 당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 친일파들이 복귀하는데 미국이 막강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의 쿠테타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부분등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친미적 사고를 유지했고, 북한의 친일파 척결은 공산당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반북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책의 흠이라고 한다면 서술자가 지나치게 두드러져 보인다는 정도일 것이다.
뒤늦은 결실 '친일인명사전'
임종국은 그가 모아 놓은 친일파 관련 자료를 지키기 위해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라고 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뜻과 소중한 자료들을 이어 받아 후학들이 민족문제연구소를 세우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얼마 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 위한 과정도 쉽지 않았고 마지막 발간 행사도 우익단체들의 방해로 인하여 행사개최장소를 백범김구선생의 묘로 옮겨서 치러야만 했다. 이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한질을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에게 증정했다. 모진 고난 속에서 임종국 선생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친일인명사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11월8일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왼쪽부터)이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헌정하고 있다.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에게 친일인명사전 한질을 증정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을 연구하는 작업이 탄압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시시 때때로 친일파의 족속들이 유령처럼 살아나 민족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을 보게된다. MB정권은 광복절은 묻어두고 건국절을 성대한 행사로 치르려 하고 있다. 더 이상 일제치하와 그 당시 있었던 친일의 흔적을 되새기게 하는 광복절은 저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모두 친일파를 적절히 심판하지 못하고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반민특위의 와해는 두고 두고 가슴 아픈 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정리에 목을 메는 이유는 아픈 역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러하기에 친일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게 초석을 놓은 임종국의 작업은 외로웠겠지만 우리 민족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작업이었다.
오늘도 친일파의 영광을 입은 자들은 온갖 괘변을 늘어 놓아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들이 늘어 놓는 괘변들의 형태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늘어 놓는 괘변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민족반역자(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10가지 '궤변'
1. 색깔론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집단은 빨갱이라는 주장. "해방 직후에도 친일파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산당 사람들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다. 친일파 비난하는 것은 북한의 단골 주장이다. 지금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X들은 죄다 빨갱이다"는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www.minjok.or.kr)나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www.historyfund.com) 홈페이지에 가장 자주 올라오는 친일 청산 반론 중의 하나이다.
(반론) 대체로 이들의 조상에는 전직 친일 경찰 군인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은 6 25 때 자신들의 부친이 "북괴의 남침"을 막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애국자(founder)인데, 빨갱이들이 이를 미워해 친일청산 명분을 들고 나온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이 결코 아니다. 독립국가 건설을 막기 위해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이들의 반공은 생존 본능이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 주장은 가장 충실하게 과거 친일파의 논리를 순혈주의로 이어받고 있다 하겠다.
2. 공과론(功過論)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게 끼친 공로가 많으니, 한 때의 친일로 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식민지 시기 교육, 언론, 학술, 문화 다방면에서 선각자로서의 활동이나, 한때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반공활동이나 기득권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공으로 든다.
(반론) 친일파들이 부분적으로 공이 있더라도 민족 전체에 대한 범죄행위가 심각할진대 정상참작이 아닌 면죄부로서 공을 격상시키는 것은 주와 종이 바뀐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공과론에는 "공"은 내세울지언정 "과"는 결코 스스로 언급한 적이 없다.
모 신문사 사주처럼 친일 행적은 감춘 채 민족운동가로 묘사하는 것은 공과론을 넘어서는 기만행위다. 김동길이 말하는 16인의 각 분야의 업적이란 것도 일제시기 그들이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 온, 그리고 해방 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고스란히 유지된 그들의 사회적 기득권을 말한다. 제대로 친일세력을 청산했으면 이런 기득권이 그들에게 남았겠는가? 지금의 조선일보, 동아일보처럼 언론의 위세를 빌어 이렇게 설칠 수 있었겠는가?
3. 공범론(共犯論)
그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 공범론자들이 곧잘 드는 예가 창씨개명. 대부분의 사람이 창씨개명을 했으니 이들도 일제에 "협력"했다, 다 친일했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냐는 주장이다. 당신도 그 때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협박도 여기에 포함된다.
(반론) 친일파 청산 세력들은 창씨개명이나 말단 생계유지형의 소극적 친일을 한 사람을 친일파라 한 적이 없다. 친일파는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민중에 대해 해악을 끼친 적극적인 인자들을 뜻한다.
우리 또한 일제시기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100% 보장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누구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살인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기막힌 논법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4. 망각론
과거는 흘러갔다는 논리. 50년이 지난 이 시점 당사자들도 다 죽었는데 친일파 청산은 궤변이라는 주장이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의 해체로 친일파 청산 재론은 일사부재리에 해당한다는 "법리적 주장"도 포함된다.
(반론) 친일파들에 대한 법적 제재는 불가능해도 이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속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구나 해방 후 이들이 기득권을 포기, 자숙하지 않고 온갖 기념사업까지 전개하면서 또 한번 역사 왜곡을 저지르는 한 친일문제는 잊혀진 과거사가 될 수 없다.
5. 범부피해론(또는 호구책론)
권력의 강제에 의해 친일을 했기 때문에 연약한 개인(범부)이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는 주장. 서정주는 해를 따라 살아가는 무지랭이인 "종천순일파"라고 자처하기도 했다.
(반론) 당시 친일은 강요도 있었지만 본인의 의지도 매우 중요했다. 또 백번을 양보해 범부로서 불가항력이었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타인(민중)의 피해에 대한 속죄는 상식이다. 가난하다고 도둑질하면 용서를 빌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서 공인적 성격이 강했다. 그들이 해방 후 반성하고 범부로서의 삶으로 자숙했으면 이 주장은 성립된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은 범부의 삶보다 "민족지도자"의 화려한 영광을 그대로 누리고자 했다. 다른 모든 행위는 민족지도자로서의 비범함에서 나오고 친일행위만은 범부의 것으로 자신을 분해시키는 몰염치성이 더 큰 문제라 하겠다.
6. 직분충실론(또는 희생론)
"박정희는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다녔다. (어느 시민)", "민족언론(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다. (김활란, 모 언론사주)"는 주장.
(반론) 이 같은 직업의 탈윤리화 속에는 기득권의 영속화와 역사의 면책 욕구가 숨어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친일의 핵심이다. 일제가 추구한 친일세력의 구조화는 바로 문필보국, 언론보국, 황도예술 등 "직업봉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 언론을 살리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논리 아닌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7. 순교자론
당시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민족의 선각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의 희생자(순교자)"라는 주장. 대표적인 논자가 3 1절 명단 발표 후 이른바 문제의 16인을 월간조선을 통해 적극 옹호한 김동길 교수.
(반론) 김 교수는 16인의 친일을 일종의 순교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멸시와 국내 친일파에 대한 순교자적 숭배라는 뒤바뀐 역사관을 확인한다. 따라서 친일파에 대한 비판은 민족반역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나온다.
8. 연좌제의 부활
이제 와서 친일파 명단을 거론하는 것은, 죄 없는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반론) 연좌제를 잘못 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친일파 청산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의 의도는 친일파의 후손을 벌주고 보복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행여 조상의 친일 문제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9. 국론분열론
친일청산은 양육강식의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담론이라는 주장.
(반론)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친일만이 아니라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논쟁은 민족 통합의 적이 되는 셈.
10. 정치적 음해론
정치권에서 종종 나오는 야당 정치인을 음해하기 위한 정치적 모략과 결합된 음해라는 주장.
(반론) 물론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의해 친일문제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음해론을 빌미로 친일청산 그 자체의 필요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롭고 검증된 민간단체에 친일문제를 위임함으로써 민족 성원 모두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적극적 대안일 것이다.
이밖에 "친일파 청산은 퇴행적 민족주의 담론이며, 국제화시대, 탈민족국가 시대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 논리"라는 주장, 여성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여성운동에 대한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탄압"이라고 논박하는 견해들도 친일파 옹호의 궤변들로 거론됐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집단은 빨갱이라는 주장. "해방 직후에도 친일파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산당 사람들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다. 친일파 비난하는 것은 북한의 단골 주장이다. 지금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X들은 죄다 빨갱이다"는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www.minjok.or.kr)나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www.historyfund.com) 홈페이지에 가장 자주 올라오는 친일 청산 반론 중의 하나이다.
(반론) 대체로 이들의 조상에는 전직 친일 경찰 군인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은 6 25 때 자신들의 부친이 "북괴의 남침"을 막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애국자(founder)인데, 빨갱이들이 이를 미워해 친일청산 명분을 들고 나온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이 결코 아니다. 독립국가 건설을 막기 위해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이들의 반공은 생존 본능이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 주장은 가장 충실하게 과거 친일파의 논리를 순혈주의로 이어받고 있다 하겠다.
2. 공과론(功過論)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게 끼친 공로가 많으니, 한 때의 친일로 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식민지 시기 교육, 언론, 학술, 문화 다방면에서 선각자로서의 활동이나, 한때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반공활동이나 기득권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공으로 든다.
(반론) 친일파들이 부분적으로 공이 있더라도 민족 전체에 대한 범죄행위가 심각할진대 정상참작이 아닌 면죄부로서 공을 격상시키는 것은 주와 종이 바뀐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공과론에는 "공"은 내세울지언정 "과"는 결코 스스로 언급한 적이 없다.
모 신문사 사주처럼 친일 행적은 감춘 채 민족운동가로 묘사하는 것은 공과론을 넘어서는 기만행위다. 김동길이 말하는 16인의 각 분야의 업적이란 것도 일제시기 그들이 친일의 대가로 보존해 온, 그리고 해방 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고스란히 유지된 그들의 사회적 기득권을 말한다. 제대로 친일세력을 청산했으면 이런 기득권이 그들에게 남았겠는가? 지금의 조선일보, 동아일보처럼 언론의 위세를 빌어 이렇게 설칠 수 있었겠는가?
3. 공범론(共犯論)
그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 공범론자들이 곧잘 드는 예가 창씨개명. 대부분의 사람이 창씨개명을 했으니 이들도 일제에 "협력"했다, 다 친일했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냐는 주장이다. 당신도 그 때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협박도 여기에 포함된다.
(반론) 친일파 청산 세력들은 창씨개명이나 말단 생계유지형의 소극적 친일을 한 사람을 친일파라 한 적이 없다. 친일파는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민중에 대해 해악을 끼친 적극적인 인자들을 뜻한다.
우리 또한 일제시기 태어났으면 친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100% 보장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은 누구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살인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기막힌 논법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4. 망각론
과거는 흘러갔다는 논리. 50년이 지난 이 시점 당사자들도 다 죽었는데 친일파 청산은 궤변이라는 주장이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의 해체로 친일파 청산 재론은 일사부재리에 해당한다는 "법리적 주장"도 포함된다.
(반론) 친일파들에 대한 법적 제재는 불가능해도 이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속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구나 해방 후 이들이 기득권을 포기, 자숙하지 않고 온갖 기념사업까지 전개하면서 또 한번 역사 왜곡을 저지르는 한 친일문제는 잊혀진 과거사가 될 수 없다.
5. 범부피해론(또는 호구책론)
권력의 강제에 의해 친일을 했기 때문에 연약한 개인(범부)이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는 주장. 서정주는 해를 따라 살아가는 무지랭이인 "종천순일파"라고 자처하기도 했다.
(반론) 당시 친일은 강요도 있었지만 본인의 의지도 매우 중요했다. 또 백번을 양보해 범부로서 불가항력이었다 할지라도 그에 따른 타인(민중)의 피해에 대한 속죄는 상식이다. 가난하다고 도둑질하면 용서를 빌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서 공인적 성격이 강했다. 그들이 해방 후 반성하고 범부로서의 삶으로 자숙했으면 이 주장은 성립된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은 범부의 삶보다 "민족지도자"의 화려한 영광을 그대로 누리고자 했다. 다른 모든 행위는 민족지도자로서의 비범함에서 나오고 친일행위만은 범부의 것으로 자신을 분해시키는 몰염치성이 더 큰 문제라 하겠다.
6. 직분충실론(또는 희생론)
"박정희는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다녔다. (어느 시민)", "민족언론(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다. (김활란, 모 언론사주)"는 주장.
(반론) 이 같은 직업의 탈윤리화 속에는 기득권의 영속화와 역사의 면책 욕구가 숨어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친일의 핵심이다. 일제가 추구한 친일세력의 구조화는 바로 문필보국, 언론보국, 황도예술 등 "직업봉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 언론을 살리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논리 아닌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7. 순교자론
당시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민족의 선각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의 희생자(순교자)"라는 주장. 대표적인 논자가 3 1절 명단 발표 후 이른바 문제의 16인을 월간조선을 통해 적극 옹호한 김동길 교수.
(반론) 김 교수는 16인의 친일을 일종의 순교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멸시와 국내 친일파에 대한 순교자적 숭배라는 뒤바뀐 역사관을 확인한다. 따라서 친일파에 대한 비판은 민족반역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나온다.
8. 연좌제의 부활
이제 와서 친일파 명단을 거론하는 것은, 죄 없는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반론) 연좌제를 잘못 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친일파 청산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의 의도는 친일파의 후손을 벌주고 보복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행여 조상의 친일 문제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9. 국론분열론
친일청산은 양육강식의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담론이라는 주장.
(반론)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친일만이 아니라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논쟁은 민족 통합의 적이 되는 셈.
10. 정치적 음해론
정치권에서 종종 나오는 야당 정치인을 음해하기 위한 정치적 모략과 결합된 음해라는 주장.
(반론) 물론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의해 친일문제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음해론을 빌미로 친일청산 그 자체의 필요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롭고 검증된 민간단체에 친일문제를 위임함으로써 민족 성원 모두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적극적 대안일 것이다.
이밖에 "친일파 청산은 퇴행적 민족주의 담론이며, 국제화시대, 탈민족국가 시대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 논리"라는 주장, 여성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여성운동에 대한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탄압"이라고 논박하는 견해들도 친일파 옹호의 궤변들로 거론됐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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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열거되는 99인 친일 매국노들의 후손으로 이나라에 기득권 층으로 살고 있는 자들은 누가 있나요?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노덕술 친일 고문경찰의 대명사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방응모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김성수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부일협력의 길로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유진오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 별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박순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송금선 반도 지식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 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최 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정치 이갑성 독립유공자로 훈장받은 친일 밀정 장 면 가진 자의 편에 선 구도자 역사 이병도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사관 신석호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이선근 역대 부도덕한 정권의 밑받침이 되어 준 이론가 신친일파 박정희 시류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 기회주의자 정일권 탁사(濁史)로 얼룩진 '한국의 부도옹' 방응모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박마리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친일과 권력욕의 화신 박순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백두진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된 현실순응주의자 백선엽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신현확 사계절을 행정관료로 꽃피운 끝없는 생명력의 화신 김동원 독립 운동과는 무관했던 국회부의장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노덕술 친일 고문경찰의 대명사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방응모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김성수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부일협력의 길로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유진오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 별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박순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송금선 반도 지식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 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최 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정치 이갑성 독립유공자로 훈장받은 친일 밀정 장 면 가진 자의 편에 선 구도자 역사 이병도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사관 신석호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이선근 역대 부도덕한 정권의 밑받침이 되어 준 이론가 신친일파 박정희 시류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 기회주의자 정일권 탁사(濁史)로 얼룩진 '한국의 부도옹' 방응모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박마리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친일과 권력욕의 화신 박순천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청기사 백두진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된 현실순응주의자 백선엽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신현확 사계절을 행정관료로 꽃피운 끝없는 생명력의 화신 김동원 독립 운동과는 무관했던 국회부의장" name=hidden_content> |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7] 통감부가 두려워한 한국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