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장시복기자][[그린강국 코리아, 건설이 이끈다 - 세계속의 한국건설<8>]삼성물산]

#. 지난해 7월 어는 무더운 여름날 밤 10시. 당시
삼성물산 건설부문장과 해외영업본부장 등 임원들이 긴급 호출을 받고 서울 신라호텔로 달려갔다. 호텔 접견실에는 당시 방한 중이던
쿠웨이트 정부 최고위급 인사인 나세르 총리가 맞이하고 있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삼성물산이 시공을 마무리 하고 있는
버즈두바이에 감탄한 나세르 총리가 갑자기 일정에 없던 브리핑을 요청한 것이다. 삼성물산의 우수한 초고층 시공 경험과 노하우를 전해들은 쿠웨이트 정부는 현재 삼성물산과 시공 방안을 협의 중이다.
이 뿐 만 아니다. 중동의 수장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세계 최고층인 버즈두바이(818m)보다 더 높은 1000m 이상의 '킹덤 타워'(Kingdom Tower)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삼성물산 측에 기술적 조언을 얻으며 시공 제의를 해오고 있다. 내년 상반기 공식 발주 예정으로 삼성물산의 수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초고층 하면 삼성물산" 이라는 공식이 중동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버즈두바이 현장소장인
김경준 상무는 "1993년 이후 16년 동안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와 대만
타이페이101빌딩, 버즈두바이 등 세계 3대 마천루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과 초일류 기술력을 높게 평가한 중동 및 아시아·유럽·북미 등 세계 각국에서 시공 제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즈두바이의 시행사인 두바이국영개발업체 이마르(Emaar)의 메트루시 이마르 사장도 세계 30여개의 경쟁업체를 제치고 수주한 삼성물산에 대해 "삼성 없이는 버즈두바이가 있을 수 없다"고 신뢰감을 보이기도 했다.
◇초고층 NO1으로 우뚝 선 삼성물산= 삼성물산은 이미 초고층 시공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NO.1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현존 세계 최고 건축물인 두바이의 버즈두바이가 삼성건설의 기술로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버즈두바이는 향후 10년간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삼성물산은 내다보고 있다.
고속 엘리베이터 운행과 커튼월 설치 등과 관련해 한 치의 오차 없는 수직도 관리를 위해 GPS 측량 시스템을 비롯해 3일에 1개층 씩 골조공사를 진행하는 층당 3일 공정을 해왔다.
두바이가 금융 위기 이후 맥을 못 추고 일부 개발 사업들이 중단되고 있지만 내년 1월 오픈을 앞두고 외부 공사를 대부분 마친 버즈두바이는 우뚝 솟아 두바이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두바이 어디에서든 '사막의 꽃'을 형상화한 거대한 나선형 모양의 반짝이는 버즈두바이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600m가 넘는 콘크리트 압송기술, 막대한 자재와 인원을 적재적소에 신속히 배분하는 초고층 양중관리, 80MPa 고강도 콘크리트 기술 등은 모두 현재의 버즈두바이를 가능케한 삼성물산의 '명품 기술'이다.
김경준 상무는 "초고층 건축물의 시장규모는
2010년까지 약 600억 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앞으로 수년 동안은 국내외에서 초고층 건축물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예상되지만 이후에는 초고층 건축물 자체보다는 이를 기반으로 한 주변 상업시설과 업무·주거시설 개발이 더욱 본격화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발전플랜트 강자‥UAE원전 수주 유력= 삼성물산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건설사로 거듭나기 위해 초고층 뿐 만 아니라 도로와 항만 교량 등 고급토목, 발전플랜트, 하이테크 분야에서 기술경쟁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특히 삼성물산은 발전플랜트 분야에서도 세계적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우선 지난해 8억1000만 달러(한화 1조원)의 대규모 아부다비 알수웨이핫 S2 민자담수발전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발전 플랜트는 정밀 기술의 집약체이자 '플랜트의 꽃'이라 불린다. 설계 및 엔지니어링·시공·유지보수의 프로젝트 라이프 사이클을 EPC(설계·구매·시공) 턴키방식으로 수주하면서 세계적 지명도를 확보하게 됐다.
이런 결과는 삼성이 꾸준히 세계적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시장을 두드린 결과로 평가된다. 2000년 싱가포르 세라야 복합 화력발전소, 2003년 인도네시아 무아라따와르 가스터빈발전소 EPC공사, 2007년 싱가포르 아일랜드파워 복합화력 건설공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주처로부터 기술력과 공사수행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
앞으로 발전플랜트와 관련 중동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남미 등 해외시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해외 원자력발전소 건설시장 진출에도 적극 나설 방침이다.

대표적으로 세계 원전 업계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첫 원자력 사업자 수주전에서 한국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으며 수주가 유력시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석탄화력발전 사업에도 참여할 예정으로 대규모의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명실상부한 발전 EPC 분야의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해가고 있다.
◇日업체도 실패한 '지하 토목공사' 성공='해외 토목 부문에서도 '지하 난공사'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전하고 있다. 지난 7일 싱가포르 현지 업체를 비롯해, 일본·홍콩 등 세계 6개 건설사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지하철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특히 이번 공사는 발주처의 원안대신 오히려 현장상황에 맞춰 가설벽체의 높이를 다양화한 대안 설계를 통해 발주처로부터 기술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대부분 연약지반으로 이뤄진 싱가포르에서 삼성물산이 지난 3년 사이에 수주한 지하 토목공사는 △지하철 DTL908 △마리나 해안고속도로 MCE483·486 등 총 4건 13억 달러를 넘어섰다.

삼성물산이 싱가포르 시장에서 유독 선호되고 있는 것은 최고의 난공사로 꼽히던 칼랑파야르바 지하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성공시킨 덕이 크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인근 일본 건설업체가 맡은 공구에서 지반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의 난공사였지만, 오히려 삼성물산의 기술력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 지하 난공사의 기술력은 UAE 아부다비에서도 지하고속도로를 수주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이와 함께 인천대교를 건설한 교량기술 역시 삼성물산 해외 건설의 한 축이 되고 있다. 국내 최장 사장교이자 세계 5위인 인천대교를 건설하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 교량 시장에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최근 인도 등에서 잇따라 교량공사 입찰에 참여하는 등 시장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구주백제 왜왕과 일본천황시대
서기 600년 법대왕이 역시 1년만에 서거하고,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옮겨가면서,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 8살의 아배阿輩 왕자가 새로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배왕자가 뒷날 서명천황이 되고 또 의자대왕이 되었다.
백제 무대왕은 아배阿輩 왕자에게 후비로서 딸을 주었는데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 무대왕을 제명천황과 효덕천황의 부왕으로서 모정왕茅渟王으로 기록했다.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 백제 무대왕인데 서동을 마동이라고 하며, 이 마동과 모정왕의 발음이 관련된다.
8살의 아배阿輩 구주백제왕이 수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수서隋書]에서 서기 600년의 왜왕에 대하여 성은 천天(=阿每)이고, 이름 (字)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라고 했는데, 이 왜왕은 바로 서명천황舒明天皇(구주백제왕 재위600~629, 일본천황 재위629~641, 백제대왕 재위641~660) 이름이다. 서명천황의 능비는 오기나가타라시히로누카명息長帶廣額命이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오기나가息長는 시가현滋賀縣의 지명이고, 어머니 다가라왕寶王(~618)이 태어난 고향일 것이다.
[수서]의 다리시多利思는 대帶의 일본 발음이다. [고사기]에 대帶를 다라시로 읽으라고 했다. 이를 [일본서기]에 옮길 때는 족足으로 바꾸어왔다.
북고北孤는 비고比古, 즉 일자日子다. 따라서 다리시북고는 대일帶日, 또는 족일足日이다. 광액廣額의 광廣은 당시 구주백제 광국廣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액額은 우리말 발음 “아이”가 의자대왕의 호인 아히阿輩에 해당한다.
또 그의 호는 아히-계미阿輩鷄彌라고 했는데, 계미鷄彌는 우리말로 “닭미”로서 서명대왕의 호칭이었던 다무라황자田村皇子와 같은 말이다.
아히阿輩은 액額인 것이다. 액전촌額田寸은 누카다무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의 왕비도 계미鷄彌라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닭미로 읽으면 추고천황의 딸로 기록된 다미왕多米王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다메田眼로 기록했는데 똑같은 말이고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기록이 있다.
단, 추고천황이 536년생이고 다미왕이었던 다카라황녀寶皇女 즉, 황극천황皇極天皇은 594년생이므로 추고천황이 58세에 낳은 것이 되고, 추고천황의 남편인 민달천황은 585년에 죽었기 때문에 의자대왕비인 다미왕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서명천황은 이미 600년에 수나라와 교섭하여 스스로 왜왕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당시 왜왕의 후궁이 6~700명이라고 하였다. 의자대왕이 종국에 백제 사비성에서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전조가 보였다.
즉, 수나라와 교류한 600년의 왜왕은 겨우 여덟살의 구주백제 의자대왕이었다.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600년의 국서에서 하늘을 형이라 하고 태양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해뜨기 전에 정사를 보고 해가 뜨면 일을 마치고 동생(즉 태양)에게 맡긴다. ”고 하여 수나라 문제를 왜왕의 동생격인 태양에 비유하였다.
倭王以天爲兄,以日僞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
[수서]의 기록에 이때 600년에 이미 의자대왕은 구주백제에 12관제를 시행하였다. 덕德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용하여 대덕大德,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예大禮, 소예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 등으로 12관제를 만들었다.
구주백제가 백제의 관위를 버리고, 스스로 관제를 만든 것은 본토백제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그를 섬긴다고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기록했는데, 스스로 위덕대왕 이후의 적손으로서 본토백제 무대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는 그가 무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607년의 국서에서는 더욱 광오한 표현으로, 수양제를 화나게 하였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하였다.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국서에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뜨는 태양이, 지는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게다가 수나라 양제를 지는 태양으로 놀렸으니 수양제가 화를 낸 것이다.
608년 수양제는 배청裴?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수나라 사자 배청은 백제를 거쳐서 죽도竹島(=진도珍島),남망라국南望羅國(=남해도南海島), 쓰시마都斯麻國(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支國)를 지나 큐슈 북부의 축자竹斯國에 상륙하였다. 그 동쪽에 중국인들이 사는 진왕국(秦王國)이 있었으니, 침류대왕 때부터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큐슈 동해안)에 달하니, 왜왕倭王이 소덕(小德)이라는 벼슬을 가진 아배이(阿輩台)를 마중시켰다. 이는 의자대왕과 같은 아배(阿輩)를 사용하니 왕자였을 것이다.
이 큐슈 동해안에서 수나라 사자 배청은 왜왕을 만나고 돌아갔다.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에는 수나라 사자가 가지 않은 것이다.
600년 기록의 왜국 수도는 야먀퇴(邪靡堆), 야마대(耶馬臺)였다. 지금의 오오이타현(大分縣) 나가쯔(中津市) 야마쿠니가와(山國川)로 보아서 나가쯔시(中津市)가 당시 의자대왕의 구주백제 수도 위치이다.
한편 600년에 의자대왕의 태자로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가 기록되었다. 리利가 이름이고, 가미다(=神田)-불리(佛)는 다리시-북고와 같은 경칭일 것이다. 가미다神田는 큐슈九州 교토군京都郡 가미다정神田町의 지명이다.
이곳 주변에 전방후원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서 의자대왕의 동생으로 중진왕(中津王)과 다량왕(多良王)이 있다. 중진왕中津王은 구주백제의 중진시中津市를 다스리고, 다량왕多良王은 큐슈 다라국多羅國, 구마모토熊本城를 통치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쿄토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 축자(筑紫)=(후쿠오카福岡市)와 지마군島郡(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來目皇子)는 이듬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옛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또다시 승리하여 당마황자의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603년 초에 헌법 17조가 일본에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으로서, 일본 천황의 보좌역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나이어린 조카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마굿간(廐戶)을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국서를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국서를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는 큐슈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일본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준동할 것을 염려했는지,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조정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위덕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서명천황 의자왕은 구주백제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을 통하여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天智天皇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天武天皇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서명천황이 죽을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큐슈의 구주백제에서 대화조정으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이후 구주백제왕은 의자왕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제명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제명천황의 아들인 부여풍장은 대화조정으로 들어가고 중대형황자가 남아서 동궁이라고 하였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隆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조정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큐슈(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큐슈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였을 것이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오사카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의자대왕은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본토백제로 향했다.
이때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세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구주백제, 일본을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이다.
삼단의 방형제단은 백제와 구주백제, 그리고 대화조정을 상징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