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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mbc미술대전-2011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그린페 2009. 12. 26. 03:53
  • 제 34회 대한민국 전승 공예 대전 수상작 전시  2009-08-21

    제 34회 대한민국 전승 공예 대전 " 특선 " 수상 8분과 민화부문 십장생도 100 x 210cm 장지, 수간분채 ○ 개 막 식 : 2009. 9. 29(화) ○ ▶ 장소 /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 전 시 : 2009. 9. 29(화) ~ 10. 11(일) / 13...

    blog.naver.com/heejj0228/30067639502 블로그명: 靑裕 정희정 작업공간랭킹5,2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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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4회 금강미술대전 개최요강


    1. 주최 : 대전문화방송(주)

    2. 작품 종목 : 회화(한국화, 양화 표현기법은 제한 없음)

    3. 작품 내용

      가 .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

      나 . 국내외에서 공개 전시되지 않은 작품

      다 .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 순수창작품

    4. 작품 규격

      1차 : 사진 5X7 (12.7cm X 17.8cm)

      2차 : 작품 100호 이내 (표구에 유리, 아크릴, 비닐 사용금지)

    5. 작품 접수

      1차 사진 접수 : 2008년 9월  8일(월) ~ 12일 (금)까지, 5일간

      2차 작품 접수 : 2008년 9월 26일(금) ~ 30일 (화)까지, 5일간

                      (출품사진과 동일한 1차 입상작품)

    6. 접수 장소 : 대전문화방송 1층 (로비)

    7. 출품수(사진) : 1인당 5점 이내

    8. 출품료 : 5만원(1인당)



    * 기타 자세한 내용은 대전문화방송 홈페이지(www.tjmbc.co.kr) 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리비아의 40주년 혁명기념일 축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2009.9.1.)|작성자 침묵의향기

     

    선진국 지형도ㆍ스카이라인 바꾸다
    [머니투데이] 2009년 12월 03일(목) 오전 11:06   가| 이메일| 프린트
    [머니투데이 김정태기자][[그린강국 코리아, 건설이 이끈다 - 세계속의 한국건설<1>]롯데건설]
    12월 초 호주 퀴즐랜드 골드코스트의 리틀비치 주택개발 사업현장. 섭씨 40도에 달하는 한여름 더위 속에서도 10만여㎡ 부지에 대형 크레인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사방에선 포크레인의 우렁찬 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제법 올라선 건물 골조들이 470가구가 들어설 주택단지임을 알려준다. 6층 높이의 건물 골조에는 롯데건설이 짓고 있음을 알려주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있다.
    5년차에 접어드는 안태진 대리는 이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공사 진척률을 파악해 본사에 보고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가 7개월 전 처음 이곳 현장을 찾았을 때는 현장 관리자나 인부들은 롯데 직원이라고 말해줘도 'What is Lotte?'라고 되물으며 현장에 들여보내 주지 않아 황당했다. 그러나 이젠 이들에게 농담을 걸 정도로 친숙해졌고 업무협조도 비교적 잘되고 있다.
    안 대리는 "국내 다른 대형건설사에 비해 해외경험이 많지 않아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있어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롯데가 호주 건설시장에 선도적으로 진출해 뿌리를 내리는데 대한 자부심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 건설시장 진출로 '차별화'=롯데건설은 중동과 동남아 등을 중심으로 실적을 올리고 있는 국내 다른 건설사들과는 달리 호주와 일본 등 선진국 건설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선진국 시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해 해외건설사업에 대한 위험요소가 적다. 하지만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적은데다, 진입장벽이 높아 진출도 쉽지는 않다.
    롯데건설은 해외건설 후발주자로서 이같은 차별화 전략을 짰다. 호주에서는 2600억원 규모의 리틀비치주택 개발 사업을 수주한 것 외에도 지난해 같은 지역의 중심부인 사우스포트에서 1억4000만 달러 규모의 아파트 개발사업권을 확보, 현재 터파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일본시장에선 국내 건설사 가운데 롯데건설이 독보적이다. 일본은 공공발주 물량이 꾸준하지만 국내건설사들이 진출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롯데건설은 매년 꾸준한 수주실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6년 일본 건설시장에서 380억원 실적을 기록했던 롯데건설은 올해 1300억원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정권교체로 새로 들어선 하토야마 내각이 공공발주물량을 줄이고 있어 일본 건설업계가 전반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긴장하는 분위기다. 양성석 해외영업본부장(이사)은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일본 롯데와 공동으로 민간 부동산개발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롯본기힐스와 같은 도심재생사업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룹의 글로벌 진출 전략에 맞춰 '안정성' 높여=롯데건설은 초기 해외 시장 진출의 위험요소를 줄이기 위해 투자형 개발사업보다는 단순 도급형 사업을 추진해 왔다.
    롯데백화점, 호텔, 제과, 마트, 호남석유 등 그룹사와 동반 진출해 안정적인 공사를 수주해 왔다. 그룹 사업은 베트남,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소위 '브릭스'(VRICS) 국가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인구가 많고 성장잠재력이 높은 국가에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소비재 중심의 투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롯데건설로선 안정된 공사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
    롯데건설은 이같은 해외건설 진출 노하우를 토대로 네트워크를 축적, 대형 인프라 공사와 투자형 개발사업에 적극 진출한다는 전략이다. 지난 10월 착공한 65층 규모의 베트남 하노이시티 콤플렉스는 여러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롯데건설의 해외 첫 진출한 초고층빌딩이란 점이다. 비록 그룹의 지원아래 수주된 공사지만, 동남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게 큰 수확이다.
    실제 최근들어 롯데건설은 동남아와 중동 국가들로부터 초고층빌딩 건설 제안을 받고 있다. 롯데건설은 초고층빌딩 분야에선 분명 후발주자이지만 국내에서 123층짜리 제2 롯데월드와 107층 부산 롯데월드 등 초고층빌딩 건설이 진행 중이라는 점만으로도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롯데건설은 또 중국 요녕성 심양시에서도 15억 달러 규모의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오피스 및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는 복합단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부문 다각화 등 자체 해외사업 강화=롯데건설은 안정적인 그룹 공사의 성공을 발판으로 자체 해외사업 강화에 나서고 있다. 특히 올 3월 처음으로 리비아 주택기반 시설청이 발주한 1120억원 규모의 알아잘랏 지역의 인프라 턴키 공사를 수주했다. 해외에서 첫 인프라 공사를 수주하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롯데건설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서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총 415헥타르(ha) 규모의 부지에 도로, 상하수도, 전기, 통신 시설 등을 건설하게 된다. 롯데건설은 지난 2007년 리비아에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예술학교 공사를 수준한데 이어 이번에 인프라 공사까지 수주함으로써 리비아 건설 시장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사례가 됐다.
    롯데건설은 중국, 우즈베키스탄, 알제리, 카타르 및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대규모 복합 부동산 개발사업과 도급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예정이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 요르단, 카타르, 사우디 등 전통적인 석유, 가스 보유 자원국인 중동의 신규시장 진출을 적극 모색하면서 롯데건설만의 특화된 사업부문에 역량을 집중해 나갈 계획이다.


    ◇중동·아프리카 진출이 '해외 승부처'=롯데건설은 자원개발 및 인프라 개발이 활발한 중동·아프리카 국가를 중장기적인 해외건설의 성장동력으로 삼는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UAE 아부다비 현지에 해외 지사를, 리비아 트리폴리에 현지 합작법인을 각각 설립했다. 롯데건설은 아부다비를 중동 진출의 전략거점으로 삼아 카타르, 두바이, 요르단 등에서 적극적인 수주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 플랜트 부문에서도 그룹사인 KP케미칼, 호남석유, 롯데대산유화 등과 동반 진출을 추진해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의 발전, 환경 및 화공 플랜트 수주에 핵심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중동에서의 수주 실적 성장세도 가파르다. 2007년까지 별다른 실적을 보이지 못했지만 지난해 4419억원의 수주실적을 올린데 이어 올해 5120억원의 수주가 예상된다. 이같은 호조에 힘입어 롯데건설은 플랜트를 포함한 올해 전체 해외수주 목표를 지난해(1조1335억원)보다 25.4% 늘어난 1조4220억원으로 책정했다.
    양 본부장은 "중동·아프리카 진출이 앞으로 롯데건설의 해외 승부처가 될 것"이라며 국내 공기업과 연계한 패키지 사업 발굴 및 공동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리비아 대수로 공사 조감도.

    ◇ 대수로 공사 1,2단계가 완공된 이후 하루 400만 톤의 물이 각 도시로 공급되고 있다. 도시 곳곳에는 비상사태를 대비해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대규모 저수지도 만들어졌다.

    ◇ 대형 트럭이 대수로 관을 싣고 사하라 사막을 질주하고 있다.

    ◇ 1984년에 착공된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지금도 사하라 사막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서트(리비아)=김선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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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리비아 근대화와 함께 한 한국기업 30년

     

    기획 시리즈/ 리비아를 가다<4-1>

     

     ◇ 1,2단계 대수로 공사가 완공되면서 불모지였던 리비아 사막이 점차 옥토로 바뀌고 있다.

    월드윙즈 에이앤티, 리비아 아프리키야 항공 및 지중해 사이...  2008-09-11

    ...이다. 인천 출발 유럽 및 중동의 주요 도시를 경유, 수도인 트리폴리, 벵가지 등 리비아의 주요 도시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로 연결이 가능하다...성도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사이프러스 항공 (Cyprus Airways)은 지중해 동부 에게해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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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부활' 김해 가야역사테마파크 상량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목) 오후 05:37   가| 이메일| 프린트
    내년말 완공..가야의 생활상.풍속 체험 시설물 조성(김해=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경남 김해시가 `제4의 제국' 가야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재조명하기 위해 짓고 있는 가야역사테파크의 상량식이 26일 오후 김해시 어방동 카야테마파크 부지 내의 태극전 앞 마당에서 열렸다.
    상량식은 건물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이다.
    상량식이 열린 태극전은 왕의 집무실로 가야테마파크에 들어서는 9개 왕궁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이날 행사에는 김종간 김해시장을 비롯한 시청직원, 100여명의 목수와 시공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상량문에는 `11월26일 입주상량(立柱上樑)'을 비롯해 가야테마파크 조성사업의 성공과 김해시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의 글귀가 담겼다.
    공사에 참여한 목수들을 비롯한 행사 관계자들은 광목 끈으로 마룻대를 묶어 50만 김해시민의 정성이 담긴 마룻대를 태극전에 얹었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건국해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500여년간 번성했던 제4의 제국 가야를 재현하고 가야인의 생활상과 풍속 등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시설물을 조성해 놀이와 휴양을 즐기며 가야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조성된다.
    김해시 어방동 분성산 일대 17만9천여㎡에 총사업비 532억원을 투입해 내년말 완공을 목표로 건립되는 가야역사테마파크는 가야 교역촌과 가야 생활촌, 철광산, 가야놀이마당, 철의 정원 등의 테마로 조성된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현재 가야시대 귀족과 전사,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기 위한 구간마을, 전사마을, 가야마을은 목조 건축물 기둥과 지붕 설치공사가 한창이며 수로왕의 처소인 가락정전과 허왕후전은 기와잇기 등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pitbull@yna.co.kr
     
    가야 , 유홍종 소설 ‘아사의 나라’ 로 되살아나
    [경향신문] 2009년 12월 10일(목) 오후 05:26   가| 이메일| 프린트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사료 부족으로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제4의 제국’ 가야가 유홍종(66)의 소설 <아사의 나라>(문예출판사)로 되살아났다.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강대국의 틈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꿈꾸고 투쟁하다가 마침내 좌절하는 과정을 재조명한 역사소설이다. 가야의 왕녀로 백제에 볼모로 끌려가 의자왕의 마지막 후궁이 된 아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비궁의 안방 권력투쟁, 삼국통일의 주역 신라의 설오유 장군과 아사의 사랑, 비운의 의자왕이 지키던 사비성의 마지막이 주요 배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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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층 만든 기술 또한 세계 최고"
    [머니투데이] 2009년 12월 24일(목) 오후 02:36   가| 이메일| 프린트
    [머니투데이 장시복기자][[그린강국 코리아, 건설이 이끈다 - 세계속의 한국건설<8>]]삼성물산 버즈두바이 현장소장 김경준 상무
    창간 100년이 넘는 세계적 권위의 건설전문지 ENR(Engineering News Record)은 '2008 뉴스메이커에 25인'에 삼성물산 버즈두바이 현장소장인 김경준 상무(사진)를 선정했다. 한 해 동안 세계 건설 현장 및 인물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성과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받은 것이다.
    김 상무는 지난 1993년부터 해외 초고층 건축 현장을 누빈 '글로벌 전문가'다. 현재 세계 최고층인 말레이시아 KLCC타워(88층·452m) 현장 소장을 지냈으며, 지난 2005년 2월부터 버즈두바이 현장소장으로 부임해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ENR은 "버즈두바이가 세계 최고 인공구조물 등 각종 기록을 경신하면서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는 데는 김 상무의 역할이 크다"며 "그는 국적과 언어가 다른 30여 개 하도급 업체와의 직접 대화를 하고 수천 명의 현장 근로자를 진두지휘하며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버즈두바이 현장의 진행 상황은.
    ▶두바이 정부와 시행사인 이마르(Emmar) 측에 따르면 셰이크 모하메드 즉위 4주년을 맞아 내년 1월 4일 호텔 오픈을 예정하고 있다.
    -'두바이 쇼크' 영향으로 국내에선 버즈두바이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두바이 정부가 사태 해결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실제 아부다비 역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상황이 점차 안정화 되고 있다. 버즈두바이 현장은 큰 문제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내년 1월 4일 호텔 오픈 이후 마무리 공사와 함께 성공적으로 완공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해외에서 삼성물산의 초고층 기술력을 높게 평가하고 시공을 제의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양한 초고층 관련 기술들을 효과적으로 적용해 성공적으로 공사 수행을 한 경험이 많다는 게 삼성물산의 가장 큰 자산이다. 초고층 빌딩의 경우 내년 이후 경쟁적으로 신규 발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삼성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킹덤홀딩사와 1600m이상 높이의 '킹덤타워' 프로젝트를 협상 중이다. 중동 뿐 아니라 아시아·유럽·북미 등 다양한 곳에서 초고층 시공계획이 계획되고 있어 초고층 시공의 글로벌 1등 경쟁력을 갖춘 삼성물산의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초고층이 과연 수익성이 많이 남는지에 대한 우려도 일각에서 제기한다.
    ▶앞으로 수년 간 국내·외에서 초고층 빌딩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예상된다. 초고층빌딩 자체와 함께 이를 기반으로 한 주변 상업시설·업무시설·주거시설의 개발이 동시에 이뤄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버즈두바이를 시공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2007년 7월 21일, 착공한 지 2년 반 만에 골조 공사가 현존 세계 최고 높이인 타이베이 금융센터(TFC)의 높이 508m(101층)를 훌쩍 넘어섰다. 세계 최고층 기록을 갈아치운 것으로, 내년 1월 17일에는 최종 높이(818m)에 도달하게 된다. 누구도 올리지 못한 높이의 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데서 오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인한 피로감 속에서 대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어 어느 때보다 가슴이 뿌듯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킹덤 시티 타워(킹덤홀딩스 발주) 사업성 ...  2009-11-19

    사우디아라비아 제다-킹덤 시티 타워(킹덤홀딩스 발주) 사업성 분석 당선작-SOM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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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를 빛낸 기업] 삼성물산 건설부문, 글로벌 톱10 건설사 초석 다져
    [중앙일보] 2009년 12월 23일(수) 오후 10:21   가| 이메일| 프린트

    [중앙일보 강병철] 삼성물산 건설부문(삼성건설)에 2009년은 위기를 발판 삼아 글로벌 톱10 건설사 진입을 위해 초석을 다진 해로 기억된다.
    두바이의 위기 속에서도 지난 5년 동안 최고의 기술과 인력을 투입한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두바이(154층·818m)’ 완공이 눈앞에 다가왔다. 삼성건설이 초고층 빌딩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과 공사 수행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보여줬다. 버즈두바이 덕분에 세계 초고층 빌딩 시장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계획하고 있는 1200m 높이의 킹덤타워 시공도 협의가 들어오고 있다.
    올 10월 개통한 인천대교도 교량 분야의 기술력을 여실히 증명했다. 국내 최장, 세계 5위의 사장교인 인천대교를 건설하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52개월. 인천대교 길이의 3분의 1수준인 서해대교 건설에 72개월이 걸린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중동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앞다퉈 교량 건설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삼성건설은 발전 플랜트와 고급 토목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발전 플랜트 분야에서는 8억 달러 규모의 아부다비 알슈웨이핫 S2 발전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최근에는 카자흐스탄 발하슈 발전 플랜트 시공도 맡았다. 부가가치가 높지만 그만큼 난공사로 인식되던 아부다비 살람스트리트 지하차도와 싱가포르 마리나 해안고속도로 건설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주택 브랜드인 ‘래미안(來美安)’ 역시 국내 주택 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아파트의 명성을 이어갔다. 7월 입주한 서울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는 국내 최고의 명품 주거단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1월 분양한 경기도 수원 ‘래미안 광교’는 평균 55대 1, 최고 775대 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했다. 삼성건설은 올해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총 1만여 가구를 공급, 분양단지마다 높은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 침체로 만만치 않은 경영 상황에서도 기술력과 영업 능력을 향상하고, 경영 효율성을 강화한 해”라고 평가했다.
    강병철 기자
     
    "초고층=삼성물산" 중동서 무한신뢰
    [머니투데이] 2009년 12월 24일(목) 오후 02:33   가| 이메일| 프린트
    [머니투데이 장시복기자][[그린강국 코리아, 건설이 이끈다 - 세계속의 한국건설<8>]삼성물산]
    #. 지난해 7월 어는 무더운 여름날 밤 10시. 당시 삼성물산 건설부문장과 해외영업본부장 등 임원들이 긴급 호출을 받고 서울 신라호텔로 달려갔다. 호텔 접견실에는 당시 방한 중이던 쿠웨이트 정부 최고위급 인사인 나세르 총리가 맞이하고 있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삼성물산이 시공을 마무리 하고 있는 버즈두바이에 감탄한 나세르 총리가 갑자기 일정에 없던 브리핑을 요청한 것이다. 삼성물산의 우수한 초고층 시공 경험과 노하우를 전해들은 쿠웨이트 정부는 현재 삼성물산과 시공 방안을 협의 중이다.
    이 뿐 만 아니다. 중동의 수장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세계 최고층인 버즈두바이(818m)보다 더 높은 1000m 이상의 '킹덤 타워'(Kingdom Tower)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삼성물산 측에 기술적 조언을 얻으며 시공 제의를 해오고 있다. 내년 상반기 공식 발주 예정으로 삼성물산의 수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초고층 하면 삼성물산" 이라는 공식이 중동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버즈두바이 현장소장인 김경준 상무는 "1993년 이후 16년 동안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와 대만 타이페이101빌딩, 버즈두바이 등 세계 3대 마천루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과 초일류 기술력을 높게 평가한 중동 및 아시아·유럽·북미 등 세계 각국에서 시공 제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즈두바이의 시행사인 두바이국영개발업체 이마르(Emaar)의 메트루시 이마르 사장도 세계 30여개의 경쟁업체를 제치고 수주한 삼성물산에 대해 "삼성 없이는 버즈두바이가 있을 수 없다"고 신뢰감을 보이기도 했다.


    ◇초고층 NO1으로 우뚝 선 삼성물산= 삼성물산은 이미 초고층 시공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NO.1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현존 세계 최고 건축물인 두바이의 버즈두바이가 삼성건설의 기술로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버즈두바이는 향후 10년간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삼성물산은 내다보고 있다.
    고속 엘리베이터 운행과 커튼월 설치 등과 관련해 한 치의 오차 없는 수직도 관리를 위해 GPS 측량 시스템을 비롯해 3일에 1개층 씩 골조공사를 진행하는 층당 3일 공정을 해왔다.
    두바이가 금융 위기 이후 맥을 못 추고 일부 개발 사업들이 중단되고 있지만 내년 1월 오픈을 앞두고 외부 공사를 대부분 마친 버즈두바이는 우뚝 솟아 두바이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두바이 어디에서든 '사막의 꽃'을 형상화한 거대한 나선형 모양의 반짝이는 버즈두바이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600m가 넘는 콘크리트 압송기술, 막대한 자재와 인원을 적재적소에 신속히 배분하는 초고층 양중관리, 80MPa 고강도 콘크리트 기술 등은 모두 현재의 버즈두바이를 가능케한 삼성물산의 '명품 기술'이다.
    김경준 상무는 "초고층 건축물의 시장규모는 2010년까지 약 600억 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앞으로 수년 동안은 국내외에서 초고층 건축물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예상되지만 이후에는 초고층 건축물 자체보다는 이를 기반으로 한 주변 상업시설과 업무·주거시설 개발이 더욱 본격화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발전플랜트 강자‥UAE원전 수주 유력= 삼성물산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건설사로 거듭나기 위해 초고층 뿐 만 아니라 도로와 항만 교량 등 고급토목, 발전플랜트, 하이테크 분야에서 기술경쟁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특히 삼성물산은 발전플랜트 분야에서도 세계적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우선 지난해 8억1000만 달러(한화 1조원)의 대규모 아부다비 알수웨이핫 S2 민자담수발전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발전 플랜트는 정밀 기술의 집약체이자 '플랜트의 꽃'이라 불린다. 설계 및 엔지니어링·시공·유지보수의 프로젝트 라이프 사이클을 EPC(설계·구매·시공) 턴키방식으로 수주하면서 세계적 지명도를 확보하게 됐다.
    이런 결과는 삼성이 꾸준히 세계적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시장을 두드린 결과로 평가된다. 2000년 싱가포르 세라야 복합 화력발전소, 2003년 인도네시아 무아라따와르 가스터빈발전소 EPC공사, 2007년 싱가포르 아일랜드파워 복합화력 건설공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주처로부터 기술력과 공사수행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
    앞으로 발전플랜트와 관련 중동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남미 등 해외시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해외 원자력발전소 건설시장 진출에도 적극 나설 방침이다.


    대표적으로 세계 원전 업계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첫 원자력 사업자 수주전에서 한국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으며 수주가 유력시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석탄화력발전 사업에도 참여할 예정으로 대규모의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명실상부한 발전 EPC 분야의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해가고 있다.
    ◇日업체도 실패한 '지하 토목공사' 성공='해외 토목 부문에서도 '지하 난공사'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전하고 있다. 지난 7일 싱가포르 현지 업체를 비롯해, 일본·홍콩 등 세계 6개 건설사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지하철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특히 이번 공사는 발주처의 원안대신 오히려 현장상황에 맞춰 가설벽체의 높이를 다양화한 대안 설계를 통해 발주처로부터 기술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대부분 연약지반으로 이뤄진 싱가포르에서 삼성물산이 지난 3년 사이에 수주한 지하 토목공사는 △지하철 DTL908 △마리나 해안고속도로 MCE483·486 등 총 4건 13억 달러를 넘어섰다.


    삼성물산이 싱가포르 시장에서 유독 선호되고 있는 것은 최고의 난공사로 꼽히던 칼랑파야르바 지하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성공시킨 덕이 크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인근 일본 건설업체가 맡은 공구에서 지반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의 난공사였지만, 오히려 삼성물산의 기술력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 지하 난공사의 기술력은 UAE 아부다비에서도 지하고속도로를 수주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이와 함께 인천대교를 건설한 교량기술 역시 삼성물산 해외 건설의 한 축이 되고 있다. 국내 최장 사장교이자 세계 5위인 인천대교를 건설하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 교량 시장에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최근 인도 등에서 잇따라 교량공사 입찰에 참여하는 등 시장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성유리, SBS `천년지애`서 의자왕 딸 부여공주역
    핑클의 '요정' 성유리가 개구리를 쓱싹(?)한다.

    22일 첫 방송(오후 9시45분)될 SBS TV 특별기획 '천년지애'(극본 이선미 김기호, 연출 이관희) 1회분의 한 장면.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자로서 본격적인 멜로물에 도전하고 있는 성유리는 최근 촬영분에서 혐오스런 동물을 직접 먹는 장면을 연출해내는 '몬도가네'식 투혼을 보였다.

    의자왕의 딸 부여공주로 백제 부흥운동 도중 신라의 스파이(김남진)의 계략에 빠져 아리장군(소지섭)과 함께 정신 없이 도망치는 장면. 문제의 신은 피난 도중 굶주림에 지친 아리장군이 개구리와 뱀을 잡아 모닥불에 구워 부여공주와 나눠먹는 커트였다.

    제천에서 열린 이번 촬영에서 촬영 스태프는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주변에서 개구리 서너마리를 잡아왔다.

    즉석에서 꼬챙이에 꽂힌채 모닥불에 그스른 개구리는 시커먼 색깔에 네 다리 형체가 고스란히 보전돼 있는 상태. '맛있게 먹는다'는 대본에 충실하기 위해 먼저 소지섭이 개구리 뒷다리를 한 입에 쓱 베어물었다.

    이번엔 소지섭이 건넨 개구리를 집어든 성유리 차례. 평소 비위가 약한 성유리는 보신식인 영양탕과 추어탕조차 입에 못 대는 편.

    구운 개구리를 들고 한참을 난감해 하던 성유리는 결심한 듯 이를 악문채 개구리를 입에 무는 강단을 발휘해 OK 사인을 받아냈다. 곧바로 구강청정제로 입안을 헹궈낸 성유리는 "구운 개구리에서 풍기는 노린내가 역겨웠다"고 소감을 표현.

    주윗사람들은 "그나마 극중 설정인 뱀이 장어로 대체돼 진짜 뱀을 입에 대지 않은 것만도 어디냐"며 위로했다는 후문.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2003/03/18

    의자왕 증손녀 부여태비 묘지명 중국서 발견 古書와 書畵

    2009/04/0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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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왕 증손녀, 당 황족과 혼인했다
    직계 부여태비 묘지명 중국서 발견…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웠다" 칭송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660)의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의 묘지명이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 의자왕 후손들의 가계도가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이 묘지명은 그간 존재만 알려져 있던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직계라는 사실과 함께 그 생애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15일 충북대에서 열리는 제1회 백제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중국 산시(陝西)고고연구소가 2004년 당 고조의 무덤인 헌릉 주변 조사과정에서 찾아낸 부여태비와 그의 남편인 당 황족 이옹(李邕) 부부의 묘지명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다.
    묘지명은 전문 30행에 1행 각 31자 총 831자의 글자를 해서로 음각해 새겼는데,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증손녀이자 부여융(隆)의 손녀이며 부여덕장(德璋)의 딸이라고 기록해 의자왕의 직계임을 밝히고 있다.
    그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과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敬)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었으나 그 사이의 가계상 공백을 메워주는 부여덕장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드러났다.
    묘지에 따르면 부여태비는 690년 부여덕장의 차녀로 태어나 711년 이옹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혼인, 718년 괵왕비에 책봉됐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李淵)의 증손자로, 장안 외곽의 영토를 다스리는 괵왕(王)으로 봉해진 제후왕이었다.
    727년 이옹이 죽고 장자 이거(李巨)가 왕위를 이어받은 4년 후인 731년 태비로 책봉됐으며, 738년 49세로 세상을 떠나 이옹과 합장됐다.
    묘지는 특히 "부여태비가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웠으며, 이옹과 혼인한 후 집안을 일으켰다"는 등 용모와 성품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침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아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다"고도 했다.
    김 관장은 "부여태비의 생애를 알려줄 뿐 아니라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왕족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며 "앞으로 의자왕이 묻힌 뤄양(洛陽)의 망산에 대한 중국측 조사결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첫부인 효용상실하자 '헌신짝' 처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에서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남편 이옹(李邕)의 묘지명과 함께 같은 무덤에서 발굴되고 공개됨으로써 이 남편 또한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증손자로서 당 황실 일원이며, 제후왕에까지 책봉된 적이 있는 까닭에 이번 묘지명 외에도 그의 족적은 다행하게도 문헌에서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이옹은 "나쁜 남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출세와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먼저 출세를 위해서는 권력은 있으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을 첫부인으로 맞아들이더니, 정국의 변화에 따라 이 여인이 효용 가치를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가차없이 자기 손으로 부인의 목을 벤 인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중 고조 이연의 아들 22명과 그 후손의 행적을 정리한 항목에 의하면 이옹의 할아버지는 이연의 15번째 아들이자 '괵왕'에 책봉된 이봉(李鳳)이며, 아버지는 측천무후 집권 초반기에 조주자사(曺州刺史)를 역임한 이굉(李宏)이다.
    당시 당나라는 황제의 아들을 비롯한 황족들을 각 지역 제후왕(諸侯王)으로 책봉하는 소위 분봉제(分封制)를 가미해 지방을 다스렸으므로, 이렇게 분봉된 제후왕은 맏아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이옹의 직계 조상은 이미 셋째 아들인 아버지 때부터 '괵왕'이 될 수는 없었다.
    나아가 정국에서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측천무후가 당 왕조를 단절시키고 주(周)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측천무후는 중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당 황실 친족들에게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 바람이 몰아쳤다. 이 와중에 이옹의 사촌형으로서 괵왕이라는 제후왕으로 있던 이우(李寓)라는 사람 또한 688년에는 제후왕의 지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기간에 이옹이 어떤 처지에 내몰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 다시 서광이 찾아온다.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中宗)이 황제에 복위하면서 당 황실이 부활한 것이다.
    이에 편승해 이옹 또한 큰집으로 넘어갔던 '괵왕'이란 제후왕 타이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구당서에 수록된 그의 짧은 열전에서는 "이옹이 위서인(韋庶人)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이때부터 중종 시대에 남다른 총애를 입어 비서감(秘書監)이 되더니 갑자기 또 '괵광'으로 고쳐 책봉되어서는 (중앙정부와는 다른 별도의) 지방정부를 열고 관리까지 두었다"고 했다.
    위서인이라는 여자의 배경을 이용해 벼락출세했다는 뜻이다. 위서인은 글자 그대로는 위씨(韋氏) 성을 지닌 서인(평민여자)라는 의미지만 중종의 정비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위황후(韋皇后)를 말한다.
    이옹이 어떤 방식으로 위황후에게 접근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용케도 황후의 여동생과 인연이 닿아 그를 아내로까지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벼락출세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백제 의자왕 증손녀 묘지명 발굴 (서울=연합뉴스)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의 묘지명이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과 함께 발견됐다.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부여태비의 가계와 생애, 인품 등을 기록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이런 행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이 위황후의 여동생이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구당서 중 외척(外戚) 일원인 위온(韋溫)이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에 의하면 위황후의 여동생은 남편이 태상소경(太常少卿)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풍태화(馮太和)라는 사람이지만 남편이 죽자 이내 이옹에게 개가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이옹은 출세를 위해 최고 권력자의 여동생으로서 과부가 된 위씨를 아내로 삼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위씨부인은 남편 풍태화의 생전에는 숭국부인(崇國夫人)이라고 불리면서 언니를 등에 업고 역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옹에게 다시금 시련이 닥친다. 위황후가 얼마 뒤 실각하고 평민으로 쫓겨나 '위서인'(韋庶人)이 된 것이다. 이옹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위황후 주변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마당에 그 일원인 그 자신은 자칫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이옹은 이 위기를 실로 드라마틱한 기법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괵왕에 책봉된 지) 한달 남짓만에 위씨(韋氏.위황후)가 실각하자 이옹은 칼을 빼어들고는 그 처(위씨부인)의 목을 베어서는 조종에다 바쳤다"고 했다.
    자신의 출세 도구였던 부인을 그냥 내친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가 직접 죽이고, 그 목을 베어 조정에 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당시 세상인심이 비루한 행동이라고 여긴 까닭에 (그는) 심주자사(沁州刺史)로 강등됐고 그 주(州)의 사무를 몰라 봉읍(封邑. 분봉받은 땅) 또한 삭감당했다"(구당서 이옹 열전)고 한다.
    그렇지만 이옹은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경운(景雲) 2년(711)에 다시 괵왕에 책봉되어 200호(戶)를 봉읍으로 하사받았으며 누차 승진하여 위위경(衛尉卿)이 되고 개원(開元) 15년(727)에 죽었다"고 했다.
    이로써 보면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이옹이 첫 부인인 위씨를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뒤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옹의 행각이 부여태비 묘지명에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김영관 관장은 "뜻밖에도 묘지명에는 그런 내용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부여태비가 두번째 부인이라는 사실도 빠져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된 이옹 자신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발견된다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출처] [펌] 의자왕 증손녀 부여태비 묘지명 중국서 발견|작성자 아따

     

    김춘추 왕위 등극 걸림돌은 비담 아니라 '여자'
    [오마이뉴스] 2009년 12월 17일(목) 오전 11:29   가| 이메일| 프린트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드라마 <선덕여왕>.
    MBC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는 춘추 대 비담의 대결이다. 김춘추의 부모를 죽인 미실의 '패거리'들 즉 비담 캠프의 구성원들이 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하여 비담 주변으로 모여듦에 따라 이러한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드라마 속의 선덕여왕은 한편으로는 조카인 춘추에게 대권을 넘겨주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연인' 비담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조카와 연인의 투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여왕의 고뇌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드라마 속의 후계구도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면 좀 심할 테고, '새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면 듣기도 좋고 그럭저럭 괜찮은 표현이 아닐까 한다.

    대한민국에서 '선덕여왕 다음은 진덕여왕이고 진덕여왕 다음이 김춘추'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시청자들이건 드라마 작가들이건 다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따금씩 '김춘추가 선덕여왕 다음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혹시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후계자로 부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김춘추의 부모가 미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처음 듣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미실의 패거리들이 김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또 김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하는 부류들이 있어서 그들이 비담을 중심으로 결집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는 어떠했고, 김춘추가 왕재(王才)로 부각된 시점은 언제였을까? 과연 김춘추는 이모인 선덕여왕 밑에서 후계자의 물망에 올랐을까?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두 아들인 동륜태자(장남)와 제25대 진지왕(차남)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제26대 국왕이 진지왕의 자손들 사이에서 나왔다면, 신라에서 성골남진(聖骨男盡)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진지왕-김용수·김용춘-김춘추 혈통에서는 남자들이 계속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동륜태자(편의상 '제1세대') 쪽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성골남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륜태자의 아들들인 진평왕·진정갈문왕·진안갈문왕(제2세대)에게서 아들이 전혀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갈문왕이란 국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작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제2세대에 뒤이어, 제3세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동륜태자 라인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김용춘 혹은 김용수와 결혼함으로써 진지왕 라인으로 넘어가 김춘추를 낳은 천명공주, 무왕과 결혼함으로써 백제 쪽으로 넘어가 의자왕을 낳은 선화공주(이설 있음)를 제외하고, 정작 진평왕을 계승한 선덕여왕에게서는 아예 자식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 MBC


    선덕여왕이 자식을 낳지 못한 의학적 원인은 아무래도 여왕 본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작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 따르면, 진평왕이 외손을 보기 위해 용수·용춘을 덕만공주의 침소에 번갈아 '투입'해 보았지만 매번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등극한 후에 용춘·을제·흠반이 여왕의 남편이 되었지만 이때도 자식이 전혀 생기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왕에게 불임의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여왕의 후계자로 떠오른 인물은 누구였을까? '진지왕이 폐위된 뒤로 그 자손들의 지위가 격하되기는 했지만, 선덕여왕의 근친 중에서 유일한 남자는 김춘추였으므로 김춘추가 후계자로 부각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표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에서 '원칙상 남자가 왕이 되어야 하지만, 급할 때에는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한 점을 볼 때에, 동륜태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남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성별보다는 신분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간에 혈통적으로 동륜태자와 가까운 사람이 후계자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에,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부각된 사람은 동륜태자의 손녀이자 여왕의 사촌인 동시에 진안갈문왕의 딸인 승만공주(훗날의 진덕여왕)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선덕여왕의 몸에서 다음 국왕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졌겠지만, 여왕이 심각한 건강문제를 겪은 여왕 5년(636) 이후로는 승만공주가 조심스럽게 차기의 대안으로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선덕여왕 말년에 승만공주를 중심으로 후계구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여왕 사후에 승만공주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른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덕만공주는 진평왕 사후에 국회의 의결(귀족들의 옹립)이라는 절차를 밟아 왕위에 오른 데에 비해 승만공주는 그런 절차 없이 곧바로 왕위에 오른 점을 볼 때에, 진평왕 말년의 덕만공주보다는 선덕여왕 말년의 승만공주가 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담의 난 같은 메가톤급 정변을 겪고도 또 정변 진압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는데도 승만공주가 자연스레 왕위를 계승한 사실은,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이미 그를 중심으로 후계구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김춘추가 후계자의 물망에 오를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진덕여왕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진덕여왕의 자리를 계승했을까? 선덕여왕 말년에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떠오른 것처럼 김춘추도 진덕여왕 말년에 후계자로 부각되었을까? 이어지는 항목에서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왕릉의 모습.
    ⓒ 김종성



    김춘추가 후계자로 떠오른 시점

    진덕여왕 치하에서 김춘추의 지위가 어땠을 것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가 이미 정통성에서 이탈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강제로 폐위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왕-김용수·김용춘-김춘추 라인에서는 원칙상 왕이 나올 수 없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평왕이 한때 김용수를 천명공주와 결혼시킨 다음에 그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가 아니라 '진평왕의 사위 김용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훗날 김춘추의 혈통에서 신라 왕위가 계승된 사실 때문에 '김춘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왕재로 거론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순전히 결과론적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을 최상위에 두는 신분제 사회에서 성골 신분을 상실한 진지왕의 후손들은 일찌감치 왕위계승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선덕여왕 사후에 김용춘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덕여왕이 죽은 시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 16년(647) 음력 1월이고, 김용춘이 죽은 시점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동년 음력 8월이다. 김용춘이 선덕여왕보다 늦게 죽었는데도 그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것은, 진지왕 폐위와 동시에 그 후손들이 왕위계승권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춘추가 외교 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또 김유신과 더불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제 사회에서는 능력보다 신분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그런 후천적 능력만으로는 왕재로 거론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결국에는 재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가 아닌가.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으로서 왕의 밑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은 왕에게 버림을 받든가 아니면 왕을 내쫓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것이 바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의 한계였다.

    그래서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후계자로 거론될 수 없었다. 진덕여왕 사후에 성골남자는 물론이고 성골여자도 모두 사라진 상황 하에서 귀족들이 알천을 섭정으로 옹립한 사실은, 김춘추의 공식적 지위가 알천보다도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알천의 추천을 받은 김춘추가 귀족들의 추대를 세 차례나 사양한 것은, 세 번 정도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할 만큼 김춘추에게는 왕위가 과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김춘추는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국왕 후보로 부각되었을까? <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본기'에 따르면, 김춘추가 차기 국왕으로 부각된 시점은 알천이 섭정을 거부하고 김춘추를 추천한 때였다. 그러니까 진덕여왕이 사망한 진덕여왕 8년(654) 음력 3월로부터 음력 4월 사이의 어느 시점부터 김춘추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이는 김춘추가 후계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간이 길어야 1개월밖에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위계승권이 없는 그가 그렇게 급부상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성골이 완전히 끊어져서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다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알천마저 섭정 자리를 사양했다는 점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가 18세 풍월주 재임 경력을 통해 이미 리더십을 인정받았다는 점 ▲칠숙의 난 이후 김유신 집안과 함께 김춘추 집안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

    ▲의자왕·연개소문 정권의 등장 이후 선덕여왕의 권위가 급속히 약화되면서 김춘추-김유신 콤비가 외교·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점 ▲신라가 국운을 개척하기 위해 외교 방면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때에 마침 김춘추가 외교의 귀재로 인정받았다는 점 ▲김춘추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들까지도 당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함으로써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점 등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춘추가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진덕여왕 사후에 알천이 섭정을 포기하면서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왕위계승권자로 부각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왕권을 꿈꾸고 있었을지 몰라도, 폐주 진지왕의 손자라는 낙인이 찍힌 김춘추는 함부로 왕의 꿈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교방면에서 실력을 쌓는 동시에 김유신 가문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르며 훗날에 대비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김춘추는 결코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광(韜光)이란 표현이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양회(養晦)는 했다. 어둠 속(불리한 신분)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면서 성골여자들이 모두 사라질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이다.

     

    선덕 천명 선화…세 여자 이야기
    [뉴시스] 2009년 09월 16일(수) 오후 06:18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뉴시스】유상우 기자 = KBS 1TV역사 스페셜’이 19일 밤 10시 ‘세 여자 이야기-선덕, 천명, 선화’를 방송한다. 왕권은 불안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끊이지 않던 1300여년 전 신라가 배경이다.서라벌에는 그 누구보다 아들을 기다렸던 왕이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이다. 재위기간 끝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세 딸이 있었다. 영리한 덕만, 온순한 천명, 그리고 아름다운 선화다.

    632년 1월 신라 화백회의에서는 역사적인 결정이 이뤄진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의 즉위를 결정했다. 27대 선덕여왕이다. 하지만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 공주시절, 여왕의 즉위를 탐탁지 않게 여긴 귀족의 반란이 있었다. 칠숙·석품의 난이다. 그럼에도 덕만공주는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 해 왕위를 이을 성골 귀족 중 남자가 없으니 성골 혈통을 지닌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한다. 성골은 사실 진골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대를 거치며 왕실의 혈통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다거나 왕위를 계승할 성골의 남자가 없어서 여자인 덕만공주가 왕이 됐다는 것은 당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사위가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한 명분이었던 것이다.

    선덕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으로 신라 서쪽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 성을 잃는 국난을 겪는다. 특히, 백제와 접한 군사상 요충지 대야성의 함락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로 목숨을 건 외교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야성 함락으로 여왕의 버팀목들이 떠나자 정치적으로 점점 고립돼 갔다. 이 때 왕권 다음의 위치인 상대등 비담이 여성군주는 선한 정치를 펼칠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선덕여왕이 정치적으로 크게 의지한 것은 불교였다.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없었던 여왕은 불교를 국가 통치의 구심점으로 적극 활용했다. 선덕여왕 대 창건됐다고 알려진 사찰은 영묘사, 분황사를 비롯해 25개다. 다른 왕대에 창건한 사찰보다 2~3배 많다. 또 황룡사 9층 석탑, 첨성대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긴다. 선덕여왕은 대규모의 사찰과 탑, 첨성대 등의 건립을 통해 내부 결속력을 다졌다.

    천명공주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로 등장하며 그녀의 성격이나 일생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진위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천명공주는 진평왕과 정치적 대립관계인 용춘과 결혼했다. 진평왕이 천명에게 왕의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자 천명이 효심으로 순종했다고 돼있다. 왕권에서 멀어진 천명공주는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이 훗날 3국의 기틀을 다지고 진골 신분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김춘추다. 김춘추는 즉위 후 어머니 천명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결혼한 천명공주가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선화공주는 서동(훗날 백제의 무왕)과의 사랑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선화공주를 진평왕의 셋째 딸로 기록한다. 가장 아름다웠다는 진평왕의 셋째 선화공주는 백제의 왕비가 된다. 선화공주의 결혼은 국경을 넘는 사랑이었나. 그들의 사랑이야기와 달리 역사적 사실은 냉혹하다. 남편 서동은 백제 무왕으로 즉위 후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다. 장인인 진평왕과 한 치 양보 없는 전쟁을 치른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은 사위로서 신라의 왕권을 계승하려는 정략이었다.

    swryu@newsis.com

    백제 의자왕 증손... [현재창]
    백제 패망(660년) 뒤 중국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의 후예로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웠다. ... 비문에는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隆)의 손녀이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德璋)의 이라고 기록돼 있다. ...
    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newssetid=82 (206k) 이 사이트에서 더보기 | 저장된 페이지

     

    비운의 천재왕... 의자왕 위대한 역사영웅

    2009/12/08 08:59

    복사 http://blog.naver.com/csmhong/120096553682

    구주백제 왜왕과 일본천황시대

       

    서기 600년 법대왕이 역시 1년만에 서거하고,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옮겨가면서,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 8살의 아배阿輩 왕자가 새로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배왕자가 뒷날 서명천황이 되고 또 의자대왕이 되었다.

    백제 무대왕은 아배阿輩 왕자에게 후비로서 딸을 주었는데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 무대왕을 제명천황과 효덕천황의 부왕으로서 모정왕茅渟王으로 기록했다.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 백제 무대왕인데 서동을 마동이라고 하며, 이 마동과 모정왕의 발음이 관련된다.

     

    8살의 아배阿輩 구주백제왕이 수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수서隋書]에서 서기 600년의 왜왕에 대하여 성은 천天(=阿每)이고, 이름 (字)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라고 했는데, 이 왜왕은 바로 서명천황舒明天皇(구주백제왕 재위600~629, 일본천황 재위629~641, 백제대왕 재위641~660) 이름이다. 서명천황의 능비는 오기나가타라시히로누카명息長帶廣額命이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오기나가息長는 시가현滋賀縣의 지명이고, 어머니 다가라왕寶王(~618)이 태어난 고향일 것이다.

    [수서]의 다리시多利思는 대의 일본 발음이다. [고사기]에 대帶를 다라시로 읽으라고 했다. 이를 [일본서기]에 옮길 때는 족足으로 바꾸어왔다.

    북고北孤는 비고比古, 즉 일자日子다. 따라서 다리시북고는 대일帶日, 또는 족일足日이다. 광액廣額의 광은 당시 구주백제 광국廣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은 우리말 발음 “아이”가 의자대왕의 호인 아히阿輩에 해당한다.

    또 그의 호는 아히-계미阿輩鷄彌라고 했는데, 계미鷄는 우리말로 “닭미”로서 서명대왕의 호칭이었던 다무라황자田村皇子와 같은 말이다.

    아히阿輩은 액인 것이다. 액전촌額田寸은 누카다무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의 왕비도 계미鷄라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닭미로 읽으면 추고천황의 딸로 기록된 다미왕多米王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다메田眼로 기록했는데 똑같은 말이고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기록이 있다.

     

    단, 추고천황이 536년생이고 다미왕이었던 다카라황녀寶皇女 즉, 황극천황皇極天皇은 594년생이므로 추고천황이 58세에 낳은 것이 되고, 추고천황의 남편인 민달천황은 585년에 죽었기 때문에 의자대왕비인 다미왕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서명천황은 이미 600년에 수나라와 교섭하여 스스로 왜왕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당시 왜왕의 후궁이 6~700명이라고 하였다. 의자대왕이 종국에 백제 사비성에서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전조가 보였다.

    즉, 수나라와 교류한 600년의 왜왕은 겨우 여덟살의 구주백제 의자대왕이었다.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600년의 국서에서 하늘을 형이라 하고 태양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해뜨기 전에 정사를 보고 해가 뜨면 일을 마치고 동생(즉 태양)에게 맡긴다. ”고 하여 수나라 문제를 왜왕의 동생격인 태양에 비유하였다.

    倭王以天爲兄,以日僞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

    [수서]의 기록에 이때 600년에 이미 의자대왕은 구주백제에 12관제를 시행하였다. 덕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용하여 대덕大德,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예大禮, 소예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 등으로 12관제를 만들었다.


    구주백제가 백제의 관위를 버리고, 스스로 관제를 만든 것은 본토백제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그를 섬긴다고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기록했는데, 스스로 위덕대왕 이후의 적손으로서 본토백제 무대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는 그가 무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607년의 국서에서는 더욱 광오한 표현으로, 수양제를 화나게 하였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하였다.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국서에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뜨는 태양이, 지는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게다가 수나라 양제를  지는 태양으로 놀렸으니 수양제가 화를 낸 것이다.

    608년 수양제는 배청裴?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수나라 사자 배청은 백제를 거쳐서 죽도竹島(=진도珍島),남망라국南望羅國(=남해도南海島), 쓰시마都斯麻國(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支國)를 지나 큐슈 북부의 축자竹斯國에 상륙하였다. 그 동쪽에 중국인들이 사는 진왕국(秦王國)이 있었으니, 침류대왕 때부터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
    (큐슈 동해안)에 달하니, 왜왕倭王이 소덕(小德)이라는 벼슬을 가진 아배이(阿輩台)를 마중시켰다. 이는 의자대왕과 같은 아배(阿輩)를 사용하니 왕자였을 것이다.

    이 큐슈 동해안에서 수나라 사자 배청은 왜왕을 만나고 돌아갔다.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에는 수나라 사자가 가지 않은 것이다.


    600년 기록의 왜국 수도는 야먀퇴(邪靡堆), 야마대(耶馬臺)였다. 지금의 오오이타현(大分縣) 나가쯔(中津市) 야마쿠니가와(山國川)로 보아서 나가쯔시(中津市)가 당시 의자대왕의 구주백제 수도 위치이다.

     

    한편 600년에 의자대왕의 태자로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가 기록되었다. 리利가 이름이고, 가미다(=神田)-불리(佛)는 다리시-북고와 같은 경칭일 것이다. 가미다神田는 큐슈九州 교토군京都郡 가미다정神田町의 지명이다.

    이곳 주변에 전방후원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서 의자대왕의 동생으로 중진왕(中津王)과 다량왕(多良王)이 있다. 중진왕中津王은 구주백제의 중진시中津市를 다스리고, 다량왕多良王은 큐슈 다라국多羅國, 구마모토熊本城를 통치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쿄토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 축자(筑紫)=(후쿠오카福岡市)와 지마군島郡(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來目皇子)는 이듬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옛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또다시 승리하여 당마황자의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603년 초에 헌법 17조가 일본에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으로서, 일본 천황의 보좌역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나이어린 조카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마굿간(廐戶)을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국서를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국서를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는 큐슈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일본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준동할 것을 염려했는지,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조정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위덕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
    (~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서명천황 의자왕은 구주백제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을 통하여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天智天皇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天武天皇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
    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서명천황이 죽을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큐슈의 구주백제에서 대화조정으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이후 구주백제왕은 의자왕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제명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제명천황의 아들인 부여풍장은 대화조정으로 들어가고 중대형황자가 남아서 동궁이라고 하였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
    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
    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조정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
    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큐슈(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큐슈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였을 것이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오사카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의자대왕은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본토백제로 향했다.
    이때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세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구주백제, 일본을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이다.
    삼단의 방형제단은 백제와 구주백제, 그리고 대화조정을 상징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