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단군신화

그린페 2009. 12. 6. 01:27

위서 (출전 : 삼국유사 기이편 상 고조선)
위서(魏書)에 전한다. 이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경에서 말하기를 무엽산이라 한다. 또 전하기를 백주 땅에 있는 백악이라고도 한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라 한다.] 요임금과 같은 때에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이름했다.

2. 고기古記 (출전 : 삼국유사 기이편 상 고조선)
옛날에 환인[제석이라 일컫는다.]이 있었다. 아들 중에 환웅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는 뜻이 있었다. 환인은 환웅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해서 이에 천부인 3개를 주어 인간을 다스리도록 보냈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여기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을 신시라 일컫는다. 이것이 환웅천왕을 일컬음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다. 이때에 곰 하나와 호랑이 하나가 같은 굴에서 살고 있으며 항상 환웅 신께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러운 쑥 심지 하나와 마늘 이십 개를 보내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햇빛을 백일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될 것이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고 21일간을 금기를 지켰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을 할 사람이 없어 신단수 아래서 매번 아이를 잉태하게 해달라고 축원을 올렸다. 이에 환웅이 잠시 몸을 변하여 그녀와 혼인을 하여 아들을 갖게 해 주었다. 그를 가리켜 단군왕검이라 한다. 당요가 즉위한지 50년 경인[당요의 원년은 무진년이니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또는 궁홀산[방홀산]이나 금미달이라 이름한다. 나라를 다스린지 1,500년이었다. 주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갔다.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 그 수명이 1908세 였다.

3. 단군기 (출전 : 삼국유사 기이편 상 고구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 하였다.

4. 제왕운기 (출전 : 제왕운기 권하 전조선기)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는고.
석제의 손자, 이름은 단군일세.
요제와 같은 해 무진년에 나라 세워
순 임금을 지나 하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지금의 구월산. 다른 이름은 궁홀, 또는 삼위. 사당이 지금도 있음]
나라를 누리기를 1028년
그 조화 석제이신 환인의 유전한 일.
그 뒤의 164년 만에
어진 사람 나타나서 임금과 신하를 마련하다.[일설에는 이후 164년 동안 비록 부자(父子)는 있었으나 군신(君臣)은 없었다고 함] 


5. 단군본기 (출전 : 제왕운기 권하 전조선기 / 한사군 및 열국기)
본기(本紀)에서는 상제 환인(桓因)에게는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웅(雄)이라 했다고 하였다. 환인은 웅에게 삼위태백에 이르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웅은 천부인 3개를 받아서 귀신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고 한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고 조선 땅에서 왕이 되었다. 따라서 (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고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니 죽지 아니 하였다.

단군본기에서는 "비서갑하백(非西岬河伯)의 딸과 결혼해서 남자를 낳았다. 이름은 부루(夫婁)라고 한다."

6. 단군고기 (출전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평양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부루가 아들이 없어서 금색 와형아(金色蛙形兒)를 얻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세워서 태자(太子)를 삼았다. 그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다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東海) 가에 땅이 있는데, 이름은 가섭원(迦葉原)이며, 토질이 오곡(五穀)에 적당하여 도읍할 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에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였다.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扶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海慕漱)이다. (이후는 주몽 이야기라 생략)

7. 단군기 / 삼한고기 (출전 : 연려실기술별집 역대전고 단군조선)
단군의 휘는 왕검이니. 구사(舊史) 단군기(檀君記)에 "신인이 태백산[지금의 영변 묘향산] 단목 아래에 내려오시니, 나라사람들이 받을어 임금으로 삼았다. 때는 당요(唐堯) 무진년이었다.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지금의 문화 구월산. 본 이름은 궐산(闕山)이니,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발음이 늦춰져, 구월산으로 그릇 발음되었다. 일설에는 '아사(阿斯)'란, 방언으로 구(九)이고, 달(達)은 방언으로 월(月)이니 '아사달'이란 '구월'의 방언이라고도 한다.]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삼한고기]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는데,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으며, 우(禹)임금이 제후를 도산(塗山)에 모을 때,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삼한고기 하나라 우임금 18년 갑술]

8.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출전 : 조선왕조실록) - 권근이 지은 시
듣자하니 황막한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가 제요(帝堯)의 시절.
대를 전해온 것 몇인지,
햇수는 천년을 지났다 하오.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代)에도,
한가지로 조선(朝鮮)이라 이름하였소.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9. 응제시주(應制詩註)
옛날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 내려와 국인(國人)이 군주으로 삼아 세우니 부르기를 단군이라 하였는데, 당요(唐堯) 원년 무진의 일이다.

10. 동국통감(東國通鑑)》외기(外紀)
단군조선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 임금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11. 기수사문록 (출전 : 청학집)
금선자(金蟬子)는 이렇게 말했다. "변지(卞沚) <기수사문록(記壽四文錄)>은 우리나라 도류(道流)의 무리를 기록했는데, 거기에서 언급하기를 '환인진인(桓因眞人)은 명유(明由)에게서 업을 받았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에게서 업을 받았는데, 광성자는 옛날의 성인이다. 환인진인은 동방 선파(仙派)의 조종이고, 환웅천왕은 환인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사실을 기술하고, 바람, 비, 오곡 등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재하시어, 우리나라 백성을 교화시켰다. 단군이 대업을 계승해 10년간 교화하니, 구이가 모두 그를 존경하여 천왕으로 추대하였다. 쑥으로 만든 정자와 버드나무로 만든 대궐에서 머리를 땋고서 소 위에 걸터 앉아 세상을 주관해 다스린 지 1418년만에 아사산(阿斯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그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그 당시 큰 나라 9개국과 작은 나라 12개국이 모두 단씨(檀氏)였다.'라고 하였다.

12. 청학집
위한조(魏漢祚)에게 취굴자(翠窟子)가 물었다. "단군은 어찌하여 당장리(唐莊里)로 옮겼습니까?" 이에 선생님이 답하였다. "단군에게는 재주가 있는 아들 네 명이 있었으니, 곧 부루(夫婁),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하후(夏后)가 도산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을 때에 부루는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입조했다. 구이 중의 '알유'가 난을 일으키자, 부여는 중외 각국의 군사를 모아 토벌하여 평정했다. 나라에 질병이 돌 때에는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백성을 살리었다. 산에 사나운 짐승이 많으니, 부소가 불을 지르고 사냥하여 짐승들을 몰아냈다. 이 네 왕자의 공로는 당세의 으뜸이 되는 것으로, 후세까지 그 업적이 드리워졌다. 요 임금 때 9년 동안 홍수가 나고, 우 임금은 8년 동안 치수 사업을 했는데, 홍수로 등주, 내주 바다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범람했고, 패수도 불어 넘쳐 평양이 물에 잠겼었다. 이에 네 왕자가 이 산에 올라 토지의 마땅함을 살펴, 당장리에 도읍했다. 이제 물의 형세를 살펴본 즉, 동쪽으로 흐르고 원 땅이 건조하다. 이후에 만양 용진(茸津)에 조수가 생기고 마령(馬嶺)에 돌이 일어나면, 이곳은 다시 왕자의 터전이 될 것이다.

단군왕검 때 남이(南夷)의 침입이 있었다.

13. 단군세가 (출전 : 미수기언)
상고(上古) 구이(九夷) 시대 초기에 환인씨(桓因氏)가 있었는데, 환인이 신시(神市 환웅을 가리킴)를 낳고 비로소 생민(生民)의 정치를 가르치니,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환웅(桓雄)이 단군(檀君)을 낳으니,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살면서 호(號)를 단군(檀君)이라 하고, 처음으로 나라의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는데, 조선이란 동녘 가에 해가 뜬다는 명칭이다. 어떤 사람은,
“선(鮮)이란 산(汕)을 말한 것으로, 그 나라에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 것이다.”
라고 한다. 조선이 평양(平壤)에 도읍한 것은 도당씨(陶唐氏 요(堯)를 말함)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던 해였다. 단군이 부루(夫婁)를 낳았는데, 어떤 사람은,
“해부루(解夫婁)의 어머니는 비서갑(非西岬)의 여자이다.”
라고 한다. 우(禹) 임금이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서 회합할 때에, 부루도 도산에 가서 우 임금에게 조회하였다. 그 뒤에 단군은 당장(唐藏) 땅에 옮겨 살다가 중국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러 죽었다. 송양(松壤) 송양은 지금의 강동현(江東縣) 서쪽에 단군총(檀君塚)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로 들어갔다.”
하고, 그의 죽음은 말하지 않았다. 태백산과 아사달에 모두 단군 사당이 있다.
부루(夫婁)가 즉위하여 북부여(北扶餘)를 세웠다. 부루는 곤연(鯤淵)에 기도하여 ‘금와(金蛙)’를 얻었는데, 그의 생김새가 금개구리와 같아서 이름을 금와라고 하였다. 부루 시대에 상(商) 나라가 망하여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왔다. 그 뒤에 주(周) 나라의 치덕(治德)이 쇠퇴해지자,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였다.
부루가 졸(卒)하고 금와가 뒤를 이어 수도를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웠다. 금와 말년에 진(秦)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동쪽 경계에 들어와 진한(秦韓 진한(辰韓)을 말함)을 세웠다.
한 고후(漢高后) 때에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을 점령하자,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은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金馬)에 이르러 마한(馬韓)을 세웠다.
한 효무제(漢孝武帝) 때에는 한 나라가 예맥(穢貊)을 공략(攻略)하여, 예맥 임금 남여(南閭)가 항복하니, 처음에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의 청을 받아들여 혁파(革罷)하였다.
금와(金蛙)가 대소(帶素)에게 전하니, 대소가 강대함을 믿고 고구려와 전쟁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자, 아우 갈사(曷思)가 즉위하였으며, 손자 도두(都頭)에 이르러서 고구려에 항복하여 동부여가 망하였으니, 갈사(曷思)는 왕의 이름이 아니다. 갈사에 도읍을 했기 때문에 호(號)를 갈사라 한 것이다. 그 연대를 상고하여 보면 중국의 왕망(王莽) 때이다. 환인(桓因)ㆍ신시(神市)에 대하여서는 그 시대를 상고할 바가 없고 단군의 정치는 요 임금 25년부터 순 임금, 우 임금의 3대를 거쳐 상의 무정(武丁) 8년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解夫婁)의 뒤로 갈사가 망하던 왕망(王莽) 시대까지 또한 1천 년이다. 그 뒤에도 남은 종족이 있어서 진(晉)과 통교하였다.

 

단국대학교의 검은 동상

단군 신화는 간단히 말해 인간 세계로 내려온 천신의 자손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오랜 동안 계속되어 한국의 역사에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며, 천신의 자손인 현왕(現王)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영계(靈界)와 인간계(人間界)를 매개할 수 있는 샤먼(shaman)과 같은 특이한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단군'의 '檀'이 원래는 '壇'이었고 고조선의 왕은 제사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 제사 의식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측면은 이어지는 시기인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신의 자손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는 동북아시아 지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 흔히 보인다. 또한 자신의 조상이 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전승과 숭배 신앙은 시베리아 퉁구스(Tungus)족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문화의 기저에는 시베리아 지역 주민들의 문화와 연결되는 면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마다 신화가 있듯이 전설처럼 내려오던 한민족의 단군신화(檀君神話)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인 환웅, 즉 웅녀의 혼인으로 단군 왕검이 탄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호랑이가 약속한 기일을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가 인간이 되지 못하였다고 설명되는데, 이를 신화의 상징으로 보아 실제 과 호랑이라기보다는 천신족이었던 환웅 부족과 토착세력인 을 섬기는 부족이 연합해 단군조선을 건국했고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은 대립하다가 밀려나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족은 점차 그 이름이 변하면서 ‘족-고족’으로 바뀌었고, 이후 부여에서 주몽이 오게 되면서 고족의 족장 딸인 소서노와 혼인하면서 ‘고구려’라는 국가 체계를 이루었다고 보고 있다.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은 예족으로서 우리 민족의 근간인 예맥족 가운데 예족이라는 학설이 있다. 또 예족은 동예여진족의 선조쯤으로 여기고 있는데 실제 여진족의 고대 유물을 보면 호랑이를 섬겼다는 증거가 많이 보인다. 여진족이 바로 중국청나라를 세운 부족이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서, '단군이란 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있다. 《규원사화》에서는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백달이나 배달로도 불렀고, 나라의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다. 이를 한자로 쓰다 보니 박달임검을 박달나무 단(檀)자에 임금 군(君)자를 적게 되었다는 것이다.

《규원사화》의 기록으로는 단군 임금 때 8대 대신(八加)이 있었는데, 이 중 농사를 관장한 사람이 고시 씨이며, 이 고시 씨에 예를 올리기 위해서 밥을 먹기 전에 '고수례' 혹은 '고시례'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단군에게는 네 명의 아들 부루, 부우, 부소, 부여가 있었는데, 맞아들인 부루는 2세 임금이 되었고, 막내아들인 부여는 나중에 부여의 시조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규원사화》에서는 '부시(부소가 부시로 와전되었음)가 마른 쑥을 재료로 하여 쇠와 돌을 서로 맞부딪쳐서 불을 만들고, 그 불로 산과 늪을 태우니, 이에 짐승과 벌레가 멀리 도망하여 그 폐해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부싯돌, 부시철, 부싯깃 하는 것은 모두 단군의 3째 왕자인 부시의 공을 기리고자 하는 데 그 연원이 있다는 것이다.

단군 신화는 기록과 구전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선사시대 고조선인의 풍습과 의식세계를 추측하기도 하고, 그것이 고려 이후 각 시기마다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2세기 후반 장기간에 걸친 몽골와의 전쟁 이후, 단군한국사의 독자성과 유구성 및 한국인의 동질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단군》은 SBS에서 제작을 계획하였던 단군신화를 소재로 한 100부작 사극 드라마이다. 2007년 가을에 방영할 예정이었으나, 제작이 보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