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암기 폭파 알-메그리히 석방…백악관 유감 성명·유족 강력 반발
케니 맥아스킬 법무장관은 "알-메그라히의 건강이 매우 악화된 뚜렷한 정황이 있는데다 그의 수감생활에 대한 동정 여론 등을 감안했다"고 석방 결정 배경을 밝혔다.
맥아스킬 장관은 이어 "알-메그라히는 유죄이며 그에 대한 선고는 영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잔인무도한 테러분자에 대한 선고"라면서도 "의료진은 그에게 3개월이 채 안 되는 시한부 삶이 남아있다고 하기에 전능한 (신의)힘에 의한 선고를 앞둔 그를 인도주의 차원에서 석방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죽을 때까지 수감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많고 많은 이들이 정부 결정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스코틀랜드의 가치를 고려할 때 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영국 BBC 방송과 스카이 뉴스는 알-메그리히가 고향인 리비아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취재원을 밝히지는 않았다.
전직 리비아 정보기관원인 메그리히는 1988년 12월18일 런던을 출발해 뉴욕으로 가던 팬암 여객기 103편을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시킨 혐의로 구속기소돼 2001년 최소 징역 27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미국인 189명을 포함한 탑승객 259명과 폭발 당시 지상에 있었던 11명 등 총 270명이 사망했다.
한편 알-메그리히가 리비아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폭발 희생자 유족들을 비롯한 미국 정부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당시 20살이었던 동생을 잃은 카라 웹즈(미국·뉴저지)는 "스코틀랜드 정부가 동정표를 던진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알-메그라히)을 동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분노를 표출했다.
백악관도 즉시 성명을 통해 스코틀랜드 정부 결정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백악관은 이날 "미국 정부는 누차 영국과 스코틀랜드 쪽에 알-메그라히가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면서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슬픔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맥아스킬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알-메그라히를 풀어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고 역시 7명의 미 상원의원들도 유사한 내용을 담은 서신을 발송한 바 있다.
khur@newsis.com

리비아의 압델 바셋 알-메그라히(좌 2번째)가 2009년 8월 20일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해 리비아 지도자 모아마르 가다피의 아들 세이프 알-이슬람 엘-가다피의 포옹을 받고 있다. 팬암 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유일한 사람인 알-메그라히는 이날 스코틀랜드의 한 감방에서 석방된뒤 고국에서 생을 마감하기위해 귀국했다. 알-메그라히에 대한 석방 결정은 팬암 여객기가 20여년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승객-승무원 270명의 유가족들의 분노를 자아냈다(AP=연합뉴스)
-
나세(羅世)
나세는 외침이 잦았던 고려말에 무장으로서 맹활약을 하였으며, 특히 왜구격퇴에 공이 많았으며 연안군에 봉해졌다. 특히 우왕(禑王) 6년에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는 상원수(上元帥) 심덕부(沈德符)는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부원수(副元帥) 초무선(崔茂宣)은 화통도감 제조(火筒都監 提調) 등과 함께 고려연합함대인 전함 100척으로 왜선 500척을 완파하여 왜구의 기세를 크게 꺾은 진포대첩(鎭浦大捷)을 총지휘(總指揮)하였고, 그 뒤 문화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가 왜구가 다시 득세하여 수도 개성을 위협하자 수도방위의 좌일선인 東江(임진강) 都元帥를 지냈으며, 다시 해도원수를 맡았을시에는 동해에 있는 축산도(丑山島) 출동명령에 불복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함대가 축산도로 출동하려면 왜구가 장악하고 있는 남해안을 통과하여야 하였다. 이 사건은 훗날 한산도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출동명령을 거부하다가 투옥되는 상황의 선례가 되었다. 나세는 조선조에서는 문하부참찬을 지내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왜구가 다시 서해안까지 침범하매 태조2년에 왕명을 받고 74세의 고령으로 출전하였다가 태조 6년에 78세로 군영에서 순직하였다. -
나중우(羅仲佑)
호는 낙천와(樂天窩), 공민왕때 급제, 전교시령, 예문관 지제고, 춘추관 편수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고 조선조가 개국하매 공은 절의를 지켜 김제로 낙향하였다. 이에 태조 이성계가 우의정으로 세차례나 불렀으나 “忠臣은 不事二君”이라 하면서 조정에 나가지 안았다. - 나 부(羅富) : 始祖 羅州羅氏淵源에서 說明
- 나득규(羅得규) : 後1世 高麗 令同正
- 나중윤(羅仲允) : 2世 高麗 令同正
- 나송기(羅松奇) : 3世 高麗 令同正
- 나수영(羅守永) : 4世 高麗 진사(進士)
- 나 위(羅位) : 호조전서(戶曹典書)
- 나 계(羅桂) : 중서시랑(中書侍郞)
- 나 석(羅碩) : 금양군(錦陽君)봉작(封爵)
- 나 세(羅世) : 연안군(延安君) 앞에서 별도 설명
- 나 원(羅源) : 사온서직장(司온署直長)
- 나동길(羅東吉) : 증주목사(甑州牧師)
- 나경세(羅經世) : 감역(監役)
- 나중우(羅仲佑) : 樂天窩公 神道碑에서 별도 說明
- 나 진(羅璡) : 공조전서(工曹典書)
- 나공언(羅公彦) : 羅城君 不조廟에서 별도 說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