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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이청운)

그린페 2009. 8. 5. 01:07

강청 (江靑)-이청운

 
중국 정치가. 산둥성[山東省(산동성)] 주청현[諸城縣(제성현)] 출신.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아내이다. 어려서,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떠나 1923년 톈진[天津(천진)]의 담배공장에서 일했다. 1929년 지난[濟南(제남)]의 실험극장에 들어가 1930년 베이징[北京(북경)], 1931년에는 칭다오[靑島(청도)]와 농촌에서 신극을 순회공연했다. 1933년 칭다오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1934년 한때 체포당했지만 란핑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일본군 점령하의 상하이[上海(상해)]를 탈출, 옌안[延安(연안)]으로 갔다. 마르크스레닌학원에서 마오쩌둥의 가르침을 받았고 1939년 마오쩌둥과 결혼했으며 루쉰[魯迅(노신)]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50년 베이징신정부의 문화부 영화지도원, 1963년 경극(京劇)의 현대화·혁명화를 주도하였고, 1964년 발레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등의 개작지도(改作指導)를 맡았는데, 이 연극개혁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6년 린뱌오[林彪(임표)]와 문예공작용 <기요(紀要)>를 만들어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다. 중앙문혁소조(中央文革小組) 제1부조장, 1967년 군문혁소조(軍文革小組)의 고문이 되었으며 홍위병(紅衛兵)을 직접 지휘했다. 1969년과 1973년 당정치국원이 되었다. 1974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문화계에 압력을 가하는 등 크게 권세를 휘둘러 여제(女帝)설까지 나왔다. 마오쩌둥이 죽은 직후인 1976년 10월에 4인방(四人幇)으로 체포되어 1981년의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재판에서 죄상을 부인하였으나 사형,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다가 그 후 무기로 감형되었다. 1991년 자살하였다.
 모택동의 아들이던 모안영의 출신 성분이 어케 되는지요?
| 08.10.22 13:08
 

베를린까지 진격한 소련군 전차 소대장 출신입니다.

 

모택동은 이씨부인, 양개혜, 하자진, 이청운(강청) 등과 모두 네번을 결혼하여 여덟 아이를 두었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아들 모안영과 딸 이민, 이눌 뿐입니다.

모안영은 양개혜와의 사이에 낳은 맏아들입니다. 모택동은 양개혜와의 사이에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등 3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이들 중 모안룡은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떨어져 지내는 과정에서 네살 때 병에 걸려 죽고 둘째 모안청은 거리에서 구타당하여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모안영와 모안청은 거리의 아이들이 되어 상해를 유랑하다가 유연히 발견되어 1937년에 마오의 영향력으로 소련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큰아들 모안영은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련군에 입대하여 전차 소대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하였으며 1949년에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동생 모안청과 귀국해 아버지와 무려 20여년만에 해후합니다. 이 후 모안영은 베이징의 한 기계 공장에서 당 부서기로 일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지만 신혼 일년만에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입대하였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들 중 모안룡은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떨어져 지내는 과정에서 네살 때 병에 걸려 죽고 둘째 모안청은 거리에서 구타당하여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모안영와 모안청은 거리의 아이들이 되어 상해를 유랑하다가 유연히 발견되어 1937년에 마오의 영향력으로 소련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큰아들 모안영은 소련의 프룬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련군에 입대하여 전차 소대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하였으며 1949년에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동생 모안청과 귀국해 아버지와 무려 20여년만에 해후합니다. 이 후 모안영은 베이징의 한 기계 공장에서 당 부서기로 일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지만 신혼 일년만에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입대하였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당시 모안영은 한국전쟁에 지원해서는 팽덕회의 총사령부에서 러시아어 번역등의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중공군 총사령부는 평안북도 대유동에 있는 금광으로 두개의 큰 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안영이 북에 들어온 지 2-3주 가량된 1950년 11월 24일 밤 몇대의 무스탕이 주둔지 상공에 날아와 낮게 비행하며 정찰을 하였고 대체로 이런 일이 있으면 다음날 반드시 폭격을 하곤 했습니다. 팽덕회는 시간이 날때마다 집무실로 쓰는 목조가옥에서 50000분의 1 작전지도를 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를 불안히 여긴 부사령관 홍학지(洪學智)는 팽 몰래 지도들을 동굴 방공호로 옮기고 그곳에서의 작전회의를 요청했습니다. 목조 가옥에는 당직을 서는 고서흔(高瑞欣)과 성보(成普) 그리고 모안영이 남게 되었습니다. 팽덕회가 방공호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않아 몇대의 미군기가 총사령부 상공을 스쳐 지나갔는데 많은 은백색의 번쩍이는 물건들이 떨어지고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오르더니 팽의 집무실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군이 네이팜탄으로 폭격을 실시한 것입니다. 성보는 얼굴 반쪽에 화상을 입고 폭발기류에 의해 튕겨져 목숨을 구했으나 모안영과 고서흔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후 팽덕회가 귀국하여 직접 상황을 설명하자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안영은 이제 만 28세로 자기의 책임을 다했다. 혁명전쟁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주의를 위하고 침략자들을 반격하기 위해 중국인민들은 가장 우수한 자녀로 지원군을 편성하여 북한에 출동시켜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고 국가를 보위하다가 많은 우수한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안영의 유해는 북조선에 묻어 우리와 북조선 군민들이 고락을 함께하는 혁명정신을 구현하고 우리 중국과 북조선 양국 국민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조한 모택동은 모택동은 며느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안영의 시신을 중국으로 송환해 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36만에 달하는 중공군 전사자들의 유해송환문제도 일거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평북 회창에 있는 모안영의 무덤에는 북조선 인민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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