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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빠이롯드

그린페 2009. 7. 28. 02:19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유용선

내 나이 여섯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

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

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

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

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은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라고 해야 맞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에 대해 알아보자.


어릴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정일권의 이름 석자가 뱅뱅 돌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 "多景峰"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놀던 산이 있었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에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갑자기 전망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묘가 하나 나오는데 내가 세상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만큼 삐까뻔쩍한 묘였다. 바로 그게 나의 어린시절 놀이터, 정일권가의 묘소였다. 넓직한 잔디밭이 있어서 참 좋았다.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당시 대다수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내가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 산을 다경봉이라고 불렀겠나?  그 아름다운 산에 봉분을 만들어서 호석을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둘러 감아놓고 표석도 참 아름답게 해 놓았다.


그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지만 호석은 태어나서 처음봤고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석재로 된 상석이며, 표석 또한 그 처음 봤다. 해가 넘어갈 즈음 빽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정일권 집안 무덤만 환하게 빛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리석에 햇살이 반사되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 광채가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일권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집 무덤을 보고 느꼈다.


정일권은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태어난 정일권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정일권은 이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상으로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를 선물로 받았다. 정일권 집에 놀러온 일본군 장교들조차 이 군도에 거수경례를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입고 자신의 모교 광명중학교로 가서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선동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입교를 위한 진학지도를 했다.     


정일권은 그야말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 육사 수석졸업에,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속부관으로서 화려한 견장을 하고, 허리에는 일본도를 찬 채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왜 부럽지 않았겠나? 오로지 조선인 가운데 정일권만이 누리는 영광이었다.


이런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정일권의 언변에 혹하여 줄줄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그 해(1938년)에 입학한 조선 젊은이들이 13명인데 그 가운데 11명이 정일권의 광명중학교 후배들이다.


이 자들이 해방 이후 정일권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군을 지배했는데 소위 말하는 관북파, 또는 "알래스카 부대"라는 군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모조리 대한민국 군내에서 장성급의 요직을 담당했다.


정일권은 어쨌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족의 비참한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의 주구로서 활동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누렸다.


그러다가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일권은 바빠졌다. 소련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곧 일본군이 미군에게 항복하자 정일권은 재빨리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의 한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간부들을 모아 "만주교민보안대"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사령관에 올랐다.


소련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일권은 즉시 "만주교민보안대"를 잽싸게 독립군의 모습으로 변

정일권
▲ 정일권 전총리
ⓒ엠파스 검색
신시키고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지어 독립군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후에도 계속 애창되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어쨌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느닷없이 광복군 독립투사로 극적으로 둔갑하였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곧 정일권의 사기행각은 소련군 보안부대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는 곧 무장해제되고 강제해산 명령을 받았다. 또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일권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소련군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아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군 보안부대에서 정일권을 떠보기 위해서 친구 최 모를 시켜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게 했는데 정일권이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즉 소련군 보안부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동분자로 몰린 정일권은 시베리아행 숙청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시베리아행 포로열차에서 탈출, 죽기살기로 월남하였다.


월남에 성공한 정일권은 즉시 미군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수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소련 유학을 결심하고, 극적으로 월남을 하여 영어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을 한번 보라!!!!!  변신의 대가 살아있는 꺼삐딴 리를 보는 듯하다.


정일권은 충실하게 미군정의 일제 잔재 부활 정책에 편승하여 미군의 신임을 얻고, 지리산에 은거하는 좌파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서서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일 뒤, 1950년 6월 30일 불과 32살의 나이에 정일권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느닷없이 육군참모총장이 된 거다.


전쟁 중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군 윗대가리 새끼들이 전쟁 중에 군인을 양성하라고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과 물자, 보급을 빼돌리고 죽자살자 달리기만 시켜 부지기수로 굶어죽이고 병들어죽이게 한 사건이다. 무려 젊은이들 천 수백명이 죽었다.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훗날 정일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명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그 후 주불대사로 근무할 때 드골에게도 핵전쟁을 대찬성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일권의 몰상식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족의 고통, 국토의 황폐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승리만을 꿈꾸는 승리지상주의의 전형이다.


어쨌든 정일권은 1957년 합참의장, 육군대장으로서 2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한다. 그 이후 이승만의 궁정외교의 앞잡이가 되어 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를 맡게된다.


1965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 한일협정 서명장면. 왼쪽 끝이 정일권. 
ⓒ엠파스 검색
주미대사직에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나흘 뒤 정일권은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동분서주하며 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국의 각계인사를 접촉한다. 물론 본국에서 김활란, 한경직 따위의 기독교인사들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또 박정희를 선전하기 위해 날아와서 정일권을 도왔다.


이 때 정일권은 박정희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제 3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했으나 모두 군출신인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집회가 거세지자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올랐다. 이로부터 무려 6년 7개월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정일권은 운 좋게 영국 처칠장례식장에서 기시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한일 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과 만주국 실력자 기시는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게다가 정일권은 만주 관동군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난성회 회원이었으므로 더욱 문제될게 없었다. 이로써 순탄하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일권의 내각을 소위 불도저내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일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는 실상 박정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일권은 무색무취한 스타일로서 철저한 YES맨이었다. 청와대에서 국정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만년마담"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처세술로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들며 무려 6년 7개월간 최장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6년 7개월간 수행한 후 물러나며 천하의 아부쟁이 정일권은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력과 애국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애로운 인간성은 번번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 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총리직을 마친 아부쟁이 정일권은 박정희에게는 유신헌법을 옹호할 국회의장으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법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국회가 "어린 아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것이 바로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9대 국회부터였다.


정일권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기관을 비방, 모독하는 것을 처벌토록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통과시켰다. 질의도 없고, 찬반토론도 없고, 심지어 의원 수 조차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통과시켰다. 김옥선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낼름 처리했다.


그래서 국회의장 정일권의 일처리를 사람들은 "동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찍듯"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사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심심하면 속기록을 삭제하는 일이 정일권 국회의장의 취미였다.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에 최장수 국무총리 기록과 더불어 최장수 국회의장의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은 엄청나게 손상시키면서도 외유나 세미나만은 매우 풍성하게 했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최장수 국회의장이면서도 가장 적은 회의일수를 기록한 국회의장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정일권은 이외에도 숱한 의혹을 지닌 인물이다. 사생활도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정인숙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파헤치고 싶지 않다. 또 정일권 스스로 딱 한번 밖에 안 잤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이 위대한 과업은 여성지들에게 부여한다.


박동선사건과도 연관이 있고, 통일교 문제도 정일권과 연관이 있으나 다 뻔한 얘기다.


자유총연맹 초대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고문을 역임하다가 임파선암에 걸려 지난 1994년 죽었다. 정일권이 죽을 때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어쨌든지간에 이 정일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정일권가의 후손들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일단 정일권의 후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명자씨가 쓴 글을 보면 정일권은 70년대 중반에 현숙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장가를 들어 3남매를 또 두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이면 예순의 나이인데... 헐.


어쨌든 내가 거금을 투자하여 각 신문 인물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도대체 정일권의 자식들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순전히 정일권 책임이다. 정일권의 부인도, 며느리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아나?


파악되는 것은 정일권의 딸 정희경이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의 동생인 이원천의 아들과 결혼하

이동찬명예회장
▲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엠파스 검색
였다는 사실이다. 이원천의 조카가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다.


이원천의 형, 이원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동찬, 이동보가 그 들이다. 물론 이동구라는 아들을 나이 일흔 세살 때 낳았다고 한다. 참 그 기구한 얘기를 들어보면 아기가 불쌍하다. 그러나 사생활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옮기지 않겠다.


이원만의 아들 이동보는 김종필의 딸 김예리와 결혼했다. 곧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쨌든 이원만은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원만의 둘째 딸 이미자는 포항의 대지주 박문학의 큰 아들 박성기와 결혼했다. 박성기는 한국 바이린 사장이다. 한국 바이린은 부직포산업의 선두주자인 다국적 기업이다.


막내딸인 이미향은 삼립식품 창업자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태인샤니그룹 회장 허영인이 이미향의 남편이다. 베스킨라빈스니 던킨도너츠니 하는 것들이 다 이 집 거다.


코오롱 설립자 이원만의 큰 아들 코오롱 명예회장 이동찬의 장녀 이경숙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와 결혼하였다.


이동찬의 사돈 이효상, 대구출신으로 동경대를 졸업한 이 자는 정말 악명높은 반민주 인사다. 신라왕조 부흥 운운하며 영남공화국을 부르짖던 자다. 선거 때 지역주의를 최초로 부추긴 자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을 앞장서서 제명하라고 요구했던 인물이 바로 이효상이다.


이효상은 선거 유세 때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이효상은 1963년부터 이런 말도 떠들고 다녔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


정말 이 나라를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이효상은 이 따위 국민분열 획책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코오롱 재벌과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는 현재 영남대 교수다. 이문조의 처가 코오롱그룹 현 회장 이웅렬의 큰 누나다.


나는 이효상의 또 다른 아들인 이문희를 눈여겨 보고 있다. 그는 신부로서 천주교 대구교구 대주교다. 현재 김수환의 바통을 이을 천주교 차기 추기경 물망에 올라있다. 말이 되냐??


코오롱 이동찬의 차녀인 이상희는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고홍명의 장남 고석진과 결혼한 것이다. 고석진은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동선 전문업체인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코오롱 이동찬의 세째 딸 이혜숙은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자의 장남인 이동혁과 결혼했다.


코오롱 이동찬의 넷째 딸 이은주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박정희 경제특보를 지내고, 한국은행장을 거쳐 전두환 신군부하에서 상공부 장관,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 신영철의 의사다.


그런데 이 신병현이 봉명그룹 회장이자 문경학원 이사장인 이동녕과 사돈이다. 이동녕은 영남학원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신병현의 딸 신수연이 이동녕의 아들 이승무와 결혼을 하였다. 이승무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하였다.


이동녕의 아들인 아세아시멘트 회장 이병무의 둘째 아들 이인범이 얼마전 삼양통상 허정구의 아들 그러니까 GS 칼텍스의 회장 허동수의 막내 딸 허지영과 결혼하였다. 허씨집안하고 맺어졌으면 만사 끝난 것이다. 


이동녕은 동양화학그룹 회장 이회림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fn 포커스] 이웅렬 코오롱 회장
▲ 이웅렬 코오롱 회장 
ⓒ엠파스 검색
현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렬은 그의 동선이나 그의 배경을 볼 때 민주개혁세력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 왔다. 결혼은 비교적 평범하게 하였다. 한 때 대한민국 고급벽지시장을 좌지우지 하던 동남갈포공업의 서병식의 딸 서창희와 결혼하였다.


다시 원위치하여 정일권 쪽으로 되돌아가자. 정일권의 아들 정세훈은 영풍그룹 창업자 장병희의 딸 장현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남 장철진, 장형진 등이 요즘 영풍을 주무르고 있다. 요즘은 31살짜리 정형진의 아들 장세욱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린데 재산이 몇 백억원이다.


영풍 장병희는 박정희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세련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침략기에 화려한 견장을 하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채 백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던 정일권,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못지 않은 금력과 권력을 자랑하며 얽키고 설켜서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이 행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리 커 보이던 남대문이 이리 작을 줄이야”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만년필 회장이 70년 만에 가 본 내 고향 개성
국내 대표적인 개성상인 중 한 명인 고홍명(80) 한국빠이롯드만년필 회장이 개성을 다녀왔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고 온 덕분인지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쳐났다. “내가 개성 갔다 와서 몇 자 적어봤어. 한번 봐 봐” 그가 A4용지 6장에 적은 기행문을 읽다 보니 그의 출발 전부터 도착 후까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다. ‘긴장→흥분→감회→아쉬움’ 그 자체였다. <편집자 주>
 2005년 8월26일. 나는 현대아산에서 마련한 15대 버스 중에 7호차에 몸을 실었다. 꼭두새벽인데 부속실 직원 두 사람이 긴장된 표정으로(마치 수만 리 길을 떠나는 사람 보내듯이)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수행사원 없으니 조심하시고…” 한다.
 나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웬만하면 이른 새벽에 배웅해주니 ‘고맙소’ 한마디 해야 할 것인데… 엄숙한 기분으로 그저 무언무답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나나 그들은 서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당일로 갖다오는 북측이기에 여러 걱정이 서로 교차됐던 것이다. 그들이 버스에서 내린 후 한참 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5시15분이다.

 버스 속 잡담하는 사람 없어
 목에 개성시범관광증을 걸고, 버스 안을 휭 하고 돌아보니 약 40명 대부분이 70대, 80대, 90대 분들이다.
 버스안은 아주 긴장된 분위기로, 잡담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현대아산에서 7호차 책임 관리자가 차안 마이크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말하자 버스가 출발했다. 오전 6시 버스가 1호차, 2호차 순으로 조용히 엑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옆에 앉은 분이 “저 사람 인사 받으시죠” 해줘 창밖을 내다보니 내내 엄숙했던 직원들은 얼굴에 곱게 웃음을 띄우며 두 손 들어 환송해 준다.
 서울 경복궁 주차장을 떠난 버스는 자유로를 달려 경기도 파주시 장단골 마을을 지나 군내 삼거리에 도착했다. 바로 가면 판문점이고 좌회전하면 개성이다. ‘개성 18km’라는 표지판을 지나 2km쯤 가서 버스가 멈춘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밟아야 하는 출입사무소(도라산)이다.
 이곳에서 현대아산 이름이 인쇄된 봉투에 휴대전화를 넣어서 현대아산직원에게 건네니 그가 다시 자루에 집어넣는다(휴대폰은 못 가지고 간다 한다).
 오전 8시 드디어 버스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한다. 얼마 있다가 중앙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섰다.
 북한군 초소를 지나 ‘통일다리’(임진강을 건너는 새 다리인 듯)를 지나자 북한 기전동 마을이 저 멀리 보인다. 남측과 높이 경쟁을 벌였다는 160m 깃대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라며 “게양 시는 군인 40명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말해줬다. 날이 흐리고 나는 시력이 나빠 보지 못했으나 일행 중 한 분이 여전히 인공기가 걸려 있다고 한다.
 북방한계선에 도착한 뒤 버스에서 내렸다. 북측 출입사무소에서 금속탐지기로 몸 전체를 검색하고 소지품(크고 작고 가릴 것 없이) 검사를 받았다. ‘역시 내 나라가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검사대를 통과했다.
 오전 8시 55분 버스는 북한 사복 차림에 ‘인상 좋은 분’ 두 명이 올라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 바깥을 촬영하지 않게끔 단속 감시하는 사람인 듯싶었다.

 개성공업지구 오니 고(故) 정주영 현대명예 회장 떠올라
 출발 2분 뒤 개성공업지구로 들어갔다. 남한과 똑같이 4차선 길도, 전선도, 건물도 공장답게 설계되어 있고, 정리정돈 안전제일이라 씌어진 헬멧, 작업복, 굴착기, 공단 안을 왔다 갔다 하는 트럭 등 전부가 ‘현대건설’ 표시여서 마치 2000만 평이 현대건설 작업장 같았다.
 나중에 이 글 말미에 기록하겠지만, 고 정 회장이 사석에서 “고 박사(나의 애칭인지 고 정 회장은 꼭 고 박사라 했다. 사실 나는 경제학 박사 학위가 있다) 두고 보시오. 개성사람 다 잘살게 하겠으니까” 한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놀랍도다. 20년 이상 앞날을 내다보신 고 정 회장. 예언대로 연기 뿜는 굴착기, 포클레인 자동차 전부 현대건설 마크다. 지금 개성사람 3500명이 공단에서 일하고 있단다.
 그립고 꿈에 항상 그려온 개성 시내로 버스는 조용히 들어섰다. 구체적으로 쓰기 힘들지만(몇 시간 방문으로 어떻게 직감적인 글을 쓰겠나) 여하간 일반인은 볼 수가 없다. 골목마다 정장한 군인이 한손에 빨간 기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고, 집집마다 창밖에 화분을 내놓았는데 창마다 ‘커튼’이 쳐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갔을까. 내가 2003년 평양 방문(4박5일)시에는 일반인과 많이 마주쳤고, 웃으면서 “반갑습네다” 하고 말을 건네주던 모습과는 차이가 너무 크구나 하고 비교도 해보았다.
 남대문이 보였다. 안내하는 사람이 알리지 않아 각자가 눈이 빠져라 하고 주위를 살피다가 앗! 저기 남대문이… 그러나 내가 어려서 보았던 남대문이 지금은 작게 보이고 관리, 보수가 안 된 듯해 안타까웠다.

 영통식당 11첩 반상기 약식 맛 으뜸
 남대문에서 선죽교, 성균관(고려박물관), 숭양서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 같았다. 옛날엔 참 멀기만 했는데 버스를 타서였을까? 2분, 3분 거리에 불과했다(우리 버스 이외의 다니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시내는 생각했던 것보다 옛날보다 엄청나게 작아진 듯이 느꼈다.
 가장 먼저 고려박물관(고려 성균관 유적을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을 돌아보면서 우리 개성송상 선배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의 송암박물관, 윤장섭 성보실업 회장이 세우고 전시 중인 호림박물관을 연상해 보았다.
 옛날 여러 번 가 본 선죽교에선 한석봉(국보 명필)의 선죽교라고 새겨진 비석이 새로웠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어 오전 11시45분 영통식당에 들어서니 11첩 반상기로 차려진 둥근 탁자의 4인분 식탁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제사 때 쓰는 유기그릇에 여러 가지 개성 전통음식(우리는 서울에서도 똑같이 차려 먹는다)을 먹었다. 그 중에 약식은 달지 않고 아주 진미가 있었다.

 노인들 폭포 앞 경사로 말없이 올라
 박연폭포에 도착하니 주차장 이정표에는 ‘박연폭포 560m’라고 표시돼 있고, 경사가 30~60도까지 급경사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어 미끄럽진 않았지만 560m 언덕 같은 고개를 내 나이에 오르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일행을 보니 지팡이를 짚은 분, 옷을 벗은 분 모두에게 험난한 길이었는데, 한 사람도 말없이 꾸벅꾸벅 걸어 올라가 나도 용기를 내어 폭포에 도달했다.
 70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박연폭포였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송악산을 도보로 넘어와서 본 자리. 폭포 위쪽에 고사찰이 있었고, 거기서 하룻밤 묵었는데…, 이번에는 폭포 위로 올라갈 용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가. 일행을 잠시 떠나 안소통(소악산 뒷산)에 우리 제주 고씨 선조의 산소가 대대로 모셔졌고 추석에 자손들이 모여 차례 지내던 생각에 잠겨 눈 감고 잠시나마 조상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박연폭포를 끝으로 개성관광 버스가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 도라산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버스가 통일대교를 지나 자유로로 들어서자니 도로 오른쪽 임진강은 말없이 남북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마치 한반도는 임진강이 누구누구 가리지 않는 한 핏줄이라고 조용히 말하는 듯.
 마지막으로 개성 만월동(가마골)에서 같이 자란 친구(서철식-작고했음)가 “여보게, 같이 개성 가서 옛날처럼 만월대 잔디에서 형설시대(螢雪時代) 가지고 언쟁하세” 하며 그렇게 가보고싶어 했는데 나만 다녀와 아쉬웠다. 같이 자란 한해석군은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 산다며 서울 오면 찾아와 “여보게 개성 갈 땐 같이 가자” 했는데…
 내 고향 개성에 밝은 태양 빛이 구석구석 밝힐 날을 기원하면서 필을 놓는다.                                  松江 高洪明
 추기  일행 중 여러분이 반갑게 인사 주셨는데 아려 뵙지 못한 것 송구스러웠습니다. 나이 탓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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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강연수원 유성시대‘활짝’

2008/10/16 09:22

복사 http://blog.naver.com/cnews9/10036047934

동국제강연수원 유성시대‘활짝’

‘봉명동’ 최종 확정… 경기 활성화 기여 17일 임직원 교육 시작해 본격 업무 돌입

권기택기자 cnews9@naver.com

 

등록일: 2008-10-15 오후 6:17:39

한국철강산업의 축을 이루는 동국제강그룹 연수원이 대전 유성구 봉명동에 둥지를 틀게 돼 침체된 유성지역의 경기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15일 (주)동국제강과 유성구에 따르면 그동안 충북 옥천의 (주)국제종합기계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던 연수원 시대를 마감하고 오는 17일 그룹계열사 임직원 교육을 시작으로 연수업무에 본격 돌입함으로써동국제강연수원 유성시대를 활짝 열게 됐다고 밝혔다.

당초 동국제강은 50여만㎡ 규모의 연수원 건립을 위해 옥천군과 대구 등지에 부지를 물색했으나, 땅값 문제 등으로 토지주와 갈등을 빚어 오다가 진동규 구청장의 적극적인 기업유치 활동에 힘입어 유성 봉명동을 최종 이전지로 확정했다.

동국제강은 그룹연수원 유성이전을 위해 지난해 하반기 유성구 봉명동 445-2번지에 5500㎡의 건축연면적에 8층 규모의 유성타워 건물을 매입, 2~4층은 강의실, 5~7층은 숙박시설을 배치하기 위한 리모델링을 끝내고 이달 17일 계열사 임직원에 대한 첫 연수를 시작으로 개원에 이르게 됐다.

이경수 연수원장은 “유성구의 적극적인 행정적인 지원을 통해 대전의 중심, 청정유성으로 연수원을 이전하게 돼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며 “1층과 지하1층까지 완전히 리모델링을 마친 후 동국제강그룹 총수를 모시고 정식으로 개원식을 갖을 계획”이라며 “앞으로 연수원 개원과 운영과정에 많은 지원을 바란다”고 덧붙였다.

동국제강그룹 유성연수원은 앞으로 그룹차원의 각종 행사는 물론 서울, 파주, 인천, 당진, 포항, 부산, 화성 등 그룹 내 사업장에서 연간 5만 8500여 명에 달하는 임직원에 대한 교육을 책임질 예정으로 유성 지역경제에 적잖은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진동규 유성구청장은 “최고의 인적·물적 인프라가 갖춰진 사업하기 좋은 최적의 도시이자 비수도권 순 인구유입률 전국 1위를 자랑하는 유성으로의 이전을 26만 구민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성장잠재력이 무한한 축복받은 도시 유성시대를 맞아 세계속으로 뻗어나가는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설수 있도록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편, 동국제강그룹은 미국, 일본, 중국, 브라질에 해외지사를 두고 있으며, 7조원대의 매출을 위해 충남 당진과 브라질 쎄아라에서 후판 분야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 동국제강을 필두로, 표면처리강판 전문기업인 유니온스틸, 국제종합기계, 종합 물류기업인 국제통운과 동국통운, DK에스앤드, 휴대폰 부품업체인 DK유아이엘과 IT전문 서비스 업체인 DK유엔씨 등 모두 9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권기택기자

 

 
패리스 힐튼 母 “딸 정사신 보기 민망해” 울상
[뉴스엔] 2009년 07월 27일(월) 오전 06:41   가| 이메일| 프린트
[뉴스엔 박선지 기자]
할리우드 악동 패리스 힐튼의 어머니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딸을 둔 어려움을 호소했다.
외신은 패리스 힐튼의 어머니 캐시 힐튼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TV에 방영될 딸의 정사장면을 도저히 볼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어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힐튼은 3년 전, 자신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었고 지난 5월 열린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패리스, 낫 프랑스(Paris, Not France)’란 제목으로 이 영상물을 최초 공개했었다. 그리고 오는 28일(현지시간) 미국 MTV를 통해 이 다큐멘터리가 대중들에게 공개될 예정.
하지만 이 안에는 지난 2003년 ‘원 나잇 인 패리스(One Night In Paris)’란 제목으로 출시됐던 패리스와 과거 남자친구 릭 살로몬과의 섹스 동영상 컷이 포함돼있어 힐튼의 가족들을 당황케 하고 있는 상황이다.
패리스의 어머니 캐시는 지난 22일 미리 공개된 다큐멘터리 예고편 영상을 본 후 딸의 정사장면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캐시는 미국 연예정보프로그램 E!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섹스 동영상이 포함돼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큐멘터리 안에 꼭 저런 장면을 넣었어야했는지 모르겠다”며 “가족들이 보기엔 정말 민망한 장면이다”고 속상함을 드러냈다.
한편 패리스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평소 대중들에게 비춰진 자신의 이미지가 잘못된 것임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패리스는 “대중들이 카메라 앞에서 보는 나는 만들어진 캐릭터지 실제 내 모습이 아니다”며 “사람들은 나를 ‘금발머리의 백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일종의 내 브랜드다. 나는 멍청한 이미지로 돈을 번다”고 항변했다.
 
막걸리도 '한류 주역'… 해외서 인기
상반기 수출 213만弗… 작년보다 13% 늘어
  • 최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막걸리가 한류 붐을 타고 해외에서도 수출량이 증가하는 등 인기를 누리고 있다.
    27일 관세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막걸리 수출량(수리신고일 기준)은 2635t으로 금액은 213만4000달러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중량은 16%, 금액은 13% 늘어난 것이다.
    우리나라 막걸리를 가장 많이 찾은 나라는 일본으로 올 상반기 전체 수출량의 89%(2336t)를 가져갔다. 그다음으로 미국(159t), 중국(57t), 호주(20t), 베트남(18T), 홍콩(15t), 태국(11T), 싱가포르(9t) 등의 순이었다.
    막걸리 수출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8년 631t(61만4000달러 상당)에서 10년 만인 2008년 5457t(442만2000달러 상당)으로 8배 넘게 증가했다.
    반면 막걸리와 함께 국내 주류를 대표하는 소주의 수출은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올 상반기 소주 수출량은 3만6694t(5069만달러)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물량과 금액 모두 7%가량 줄었다.

    임정빈 기자 jblim@segye.com

제주 쌀 막걸리, 일본수출 성공   2009.07.20 제주 쌀 막걸리, 일본수출 성공 2009년7월13일자 (제2160호) 제주합동양조㈜, 2400병 제주 전통 쌀 막걸리가...별도의 살균 처리 없이 생막걸리 상태로 수출해 신선도로 승부하게 되는데 주로 일본 도쿄의 주요 음식점과 도·소매점에서... http://blog.daum.net/jejunong   제주김현철-김현철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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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혜림 묘, 모스크바 외곽에 있다
[동아일보] 2009년 07월 28일(화) 오전 02:50   가| 이메일| 프린트

[동아일보]
본보 첫 확인… 공동묘지 관리인 “2005년경 매장”관리사무소 사망자 명부엔 가명 ‘오순희’로 등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국모(國母)가 될 수도 있었던 여자의 묘 치고는 너무 관리가 되지 않았네요.”

20일 오후 모스크바 서쪽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번째 동거녀인 성혜림(1937년 1월∼2002년 5월)의 묘를 둘러보던 러시아인들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봉분 위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묘비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 묘소 주변에 수북이 쌓인 낙엽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 묘는 성혜림이 묻힌 곳이 틀림없었다. 묘 앞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었고, 묘비 뒷면엔 ‘묘주 김정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정남은 김 위원장과 성혜림의 장남이다. 묘지 관리인들에 따르면 그는 2005년경 북한인들을 모스크바에 데려와 묘비를 세웠다.

이에 앞서 기자는 묘지 관리사무소에 들러 사망자 명부를 확인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성혜림의 묘비가 세워진 구역에 묻힌 사망자는 ‘오순희’라는 가명으로 등재된 사실이다. 오순희 명의의 묘를 확인해 보니 바로 그의 묘소였다. 성혜림의 시신은 모스크바에서 가명으로 위장 안치됐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묘지를 확인했다.

성혜림의 시신 행방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었다. 북한 당국이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가지고 갔다는 설이 많았다. 화장(火葬)한 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얘기도 돌았다. 시신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묘가 등재 단계부터 위장됐기 때문이다.

성혜림 묘비 뒷면엔 ‘묘주 김정남’ 글자 선명아들 권력다툼서 밀린 올초부터 당 간부들 발길 끊어“외국인이 왜 러 공동묘지에…”안장때부터 논란 끊이지않아北요청으로 명부 위장한듯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관리인은 성혜림이 러시아 땅에 묻힌 배경을 묻자 “정치적인 문제라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모스크바 매장에 러시아와 북한 당국의 정치적 거래가 얽혀 있음을 시사하는 얘기였다. 한 관리인은 “북한 국적인 그의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유명 러시아인들이 안장된 묘역으로 밀고 들어온 바람에 묘소 조성 당시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외국 국적의 사망자는 이 묘지에 묻힐 수 없었는데 북한 당국이 러시아에 “성혜림 시신의 본국 송환 계획을 취소하니 북한의 국모 수준으로 안치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성혜림을 가명으로 위장 매장한 기관으로도 북한 대사관이 지목됐다. 한 러시아 공무원도 “사망자 명단은 평양의 지시에 따라 북한 대사관이 조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묘지 관리인에 따르면 사망자 명부를 가명으로 바꾸면 일반 방문객은 가명을 모르면 묘지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이 같은 공동묘지가 20곳이 넘는 데다 이 묘역에 묻힌 사망자도 2만 명을 웃돈다.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 관리인들은 “매장된 성혜림의 신원 감추기는 처음부터 외부 방문객의 묘지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그의 묘비엔 사망 날짜가 ‘2002년 5월 18일’로 새겨져 있었다. 당초 알려진 사망 날짜인 5월 17일보다 하루가 늦다. 묘소를 함께 둘러본 러시아인은 “외부인의 접근을 이중으로 막기 위해 사망일자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성혜림의 묘소가 조성된 현장에서도 위장의 흔적을 추가로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묘소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묘소 주변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묘비는 모두 서쪽을 향해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인 사망자의 묘는 정면에서 차례로 확인하면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는데 그의 묘비는 반대 방향으로 세워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구의 묘인지 쉽게 확인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 말부터 30여 년간 모스크바에 장기 체류했던 성혜림은 모스크바에선 유명인사였다.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은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묘소에서 20m 떨어진 도로 근처에서 꽃밭을 가꾸던 한 여성 근로자도 “그가 김정일의 첫 번째 동거녀였고 이들의 아들은 김정남”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러시아인들에 따르면 성혜림이 모스크바에 처음 온 해는 1974년. 김 위원장이 두 번째 여자인 김영숙과 결혼한 뒤였다고 한다. 이에 앞서 성혜림이 김 위원장과의 동거로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쓴 자서전 ‘등나무 집’에는 그의 모스크바 이주 경위가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김 위원장의 동생 김경희는 그에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소련으로) 나가라. 노후는 내가 보장하겠다”며 그의 모스크바 이주를 종용했다.

성혜림은 소련으로 건너온 뒤 소련 외교부가 제공한 외교관 전용 건물에서 생활했다. 그가 2002년 5월 17일 사망할 당시 거주했던 곳은 모스크바 남서쪽 바빌로바 거리 85. 이 건물에서 32년 동안 일했던 니나 니콜라예브나 씨는 “성혜림이 낮에는 북한 경호원 2, 3명에게 번갈아 감시당하고 밤에는 신경쇠약 정신병에 따른 불면증으로 수시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말했다. 이 건물에서 20년 동안 살았다는 한 러시아 남자는 “그가 북한 왕조의 대를 이을지도 모르는 왕자를 낳아서인지 몰라도 그의 모스크바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다”고 전했다.

성혜림의 묘소가 있는 공동묘지 관리인들은 “2008년까지 북한 관리들이 그의 묘소를 주기적으로 관리했지만 김 위원장의 권력이양설이 떠돌았던 올해 초부터는 이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성혜림의 묘소 오른쪽에는 언제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빨간색 조화 한 송이만 남아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의 묘소를 방문하는 북한 고위관리들이 줄을 이었으나 최근에는 발길이 거의 끊겼다는 것. 북한 사정을 잘 안다는 한 러시아 여성은 “그의 묘소가 최근 왕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여인의 무덤’으로 추락한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10년전 " 곰탕" 이라는 드라마에서

부부를 한 사이라 그런지..

뭔가 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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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새영화에서 트렌스젠더 역 '파격변신'

[마이데일리 = 강지훈 기자] 영화배우 이나영이 1년여만에 스크린 복귀작에서 트렌스젠더 역할을 맡아 파격적인 변신을 예고했다.

이나영은 올 하반기 촬영에 돌입하는 영화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감독 이광재 제작 하리마오픽쳐스) 출연을 최근 확정했다. 지난해 가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비몽' 이후 약 1년여만에 스크린 복귀다.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는 이혼한 가정의 아이가 아빠가 성을 전환해 여자로 변한 것을 모르고 아빠를 찾으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로 이나영이 성을 전환해 아빠에서 여자로 변한 주인공을 맡아 파격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트렌스젠더에 심각하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고 코미디로 부드럽게 풀어낼 전망이다.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는 '7급 공무원'으로 400만 관객을 모은 제작사 하리마오픽쳐스의 천성일 대표가 제작과 각본을 맡았다.
 
 

http://netv.sbs.co.kr/sbox/sbox_index.jsp?uccid=10000451952박해미  쵸컬릿

 

 

2년만에 물거품된 '태왕사신기의 꿈'

김종학 감독, 김종학프로덕션 경영후퇴·지분매각

김동하 기자 | 2009/07/27 16:18 | 조회 9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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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코스닥 꿈이 모래로?
김종학 감독의 이름을 내걸고 야심차게 출발한 김종학프로덕션이 2년만에 투자회사의 손으로 넘어갔다. 김종학 감독이 지분을 팔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주가는 오히려 연일 급등세를 이어가며 환호하는 모습이다.

김종학프로덕션(1,215 상승세130 +12.0%)은 지난 주말 김종학 감독과 특수관계인 장현선씨가 보유하고 있던 26만3229주를 전량 매도했다고 밝혔고, 이후 첫 거래일인 27일 전일대비 12%급등한 1215원에 거래를 마쳤다.

연 이은 자금조달 실패에 이어 최대주주가 수차례 변경되는 혼란 속에 있지만 주가는 지난 15일부터 23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연일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수소에너지 사업진출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과는 무관한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밝히자 주가는 크게 요동쳤다.

김종학 감독은 지난 21일 대표이사에서도 물러났고 부사장인 박창식씨가 신임대표로 선임됐다.

김종학프로덕션은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으로 유명한 김종학 감독이 광개토대왕의 대륙정복을 판타지 서사 드라마로 다룬 '태왕사신기'로 또 한번 찬사를 받으면서 코스닥 시장에 당당히 입성했다. 지난 2007년 6월 전기장비업체 퓨어나노텍을 136억 원에 인수하며 우회상장했고, 당시 1800원대에 머물던 주가는 단기간에 1만2000원대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현 주가는 1215원이다.

김종학프로덕션은 올들어 자금조달에 실패하면서 최대주주가 최근 두 차례 변경됐다. 김종학프로덕션은 지난 5월 5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상증자에 나섰지만, 단 한주의 청약도 받지 못했다.

김종학프로덕션은 지난 16일 최대주주가 5.68%를 장내매수한 박석전 예스큐홀딩스 대표이사 외 1인으로 변경된 데 이어, 투자회사인 유티씨앤컴퍼니가 제3자배정유상증자로 지분 26.41%를 확보하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유티씨앤컴퍼니는 김종학프로덕션의 최대 채권자인 유티씨인베스트먼트의 관계사다.

김종학프로덕션은 다음달 21일 주주총회를 열어 이사를 신규로 선임하고 수소에너지 등 신규사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할 예정이다.

김종학프로덕션 관계자는 "김종학 감독은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나지만 새 드라마 '신의'를 제작하는 등 프로덕션 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영참여 목적으로 5.68%를 장내매수하며 뛰어든 박석전 씨 측은 법원에 최대주주가 유티씨앤컴퍼니로 변경되는 이번 유상증자의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지난 20일 이사회에서 결정된 보통주 338만9830주의 신주 발행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이다.

회사 측은 이로써 신주의 상장에는 제동이 걸렸지만, 신주가 이미 발행돼 최대주주변경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종학PD, 한의학드라마 '신의' 제작..올 하반기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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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혜성 기자 | 2009/04/29 18:22 | 조회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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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PD



'스타 연출가' 김종학 PD가 이번에는 정통 한의학 드라마를 제작한다.

김종학 프로덕션은 29일 오후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제작할 한방 한의학 드라마 '신의'(神醫, 가제)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오늘 대한한의사협회와 업무 협조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에 제작되는 한방 한의학 드라마 '신의'는 지난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 제작 이후 공백기를 가진 김종학 감독이 직접 연출하는 작품으로 올 하반기에 방영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종학 프로덕션에 따르면 이번에 체결된 양해각서에서 김종학 프로덕션은 드라마의 제작과 관리업무를 총괄하기로 했다. 또한 대한한의사협회는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한의학 지식과 자료가 본건 드라마의 대본과 연동 되도록 최대한의 자문 역할과 제반 업무에 협조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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