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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김시습

그린페 2009. 7. 26. 00:21

이항복글씨

 

 김문기@_ 김시습_종로에서노량진까지.hwp (160.0K), Down : 0, 2009-03-02 02:35:27

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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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핸드폰 010-2703-7816
  • 1962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했으며 1992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과 1993년도 중앙일보 연말 시조백일장 장원과 1994년도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현재는 전업으로 시와 동화 창작 및 교육 교재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웹디자인 홈페이지 제작과 출판 편집 일도 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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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종로에서 노량진까지

  김문기 수필


 

서울시 종로는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잇는 큰 길이다. 예로부터 종로에는 육의전 등 많은 장사패가 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종루(鐘樓)에서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종을 치면서 그 시간에 맞춰 한양성의 여덟 대문을 여닫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종로’라는 현재의 길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종로 2가에는 1929년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 ‘화신상회’가 있었다. 지금의 삼성프라자 자리다. 그 옆으로는 제일은행 본점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에는 ‘의금부(義禁府) 터’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조선조 관리 양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하던 관아 자리’라고 쓰여 있다.
그곳에 홀연히 매월당 김시습이 찾아왔다. 물론 김시습은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부근인 명륜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한양에서 보낸 사람이다. 한양 토박이로서 한창 학문을 갈고닦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전권을 거머쥐자 갑작스레 미친 중이 되었다. 미친 중인 그는 산이며 강이며 어느 한적한 움막에 앉아 술이나 마시고 시나 짓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한양을 한참 등진 지방의 어느 곳에 있어야 했다. 그런 김시습이 세조 집권 2년째 되던 해 ‘병자사화’가 일어나자 홀연히 한양의 중심지 종로로 찾아온 것이다.
김시습은 종로로 찾아오기에 앞서 지금의 서울시 노원구 끝자락에 있는 불암산으로 찾아들었다. 그곳 절에서 이틀간을 보낸 그는 이윽고 삿갓을 눌러쓰고 바랑을 둘러메고 한양으로 향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건장한 체격의 몸종 하나가 옆에 붙어 있었다. 몸종과 함께 동대문 쪽으로 가 옷감 장사패에게서 무명과 삼베 등을 샀다. 그런 다음 발걸음을 곧장 종로로 향했다. 아마도 지금의 삼성프라자 앞길이며 동아일보사 주변 청계천 일대를 많이 배외했으리라.
매월당 김시습! 그는 누구인가.
훗날 이율곡이 선조 임금의 명을 받아 <김시습 전기>라는 위인전을 썼다. 그 전기문에 의하면, 김시습은 세살 때 어머니가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無雨雷聲何處動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이계전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우면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오세신동’이라 불렸다. 더불어 집현전 학사인 최치운이 어린 그를 보고 ‘천하의 기재’라 칭찬하면서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종 임금은 김시습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어린 그를 승정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왕명을 출납하던 정삼품 벼슬의 박이창은 우선 김시습의 재주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박이창은 유난히 키가 작은 김시습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가 시습이라는 아이냐? 너는 오늘 황공하옵게도 상감마마께옵서 직접 네 재주를 시험하려 하시었으나 사정상 내가 대신 시험하니까 그리 알고 잘 듣고 화답하여라. 알았느냐?”
“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시습이 어른스럽고도 공손하게 대답하자 박이창은 잠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그를 향해 시를 한 수 읊었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동자지학 백학무 청공지말)
어린 아이의 배움은 흰 학이 푸른 하늘가를 날아서 춤추는 듯하다.

박이창에게서 시를 전해들은 김시습은 눈을 반짝이더니 시로써 화답했다.

聖主之德 黃龍翻碧海之中 (성주지덕 황룡번 벽공지중)
어진 임금의 은총은 누른 용이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번득임과 같도다.

김시습의 화답이 너무 기특한 터라 박이창은 물론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고 말았다. 과연 소문 그대로 김시습은 오세신동이었다.
박이창은 눈을 반짝이며 앉아있는 김시습이 귀여워 얼른 안아 올렸다. 그를 무릎에 앉히고는 몇 번이나 시로서 시험을 했다. 그럴수록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재주에 더 한층 놀라워했다.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
“來時襁湺金時習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벽에 걸린 저 산수화를 보아라.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
“小亨舟宅何人在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박이창은 오세신동에 대해 세종에게 보고를 했고 세종은 곧 김시습이라는 아이를 내전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김시습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앞에 모았다. 조용히 세종 앞으로 다가갔다.
세종 역시 어머니 품에서 젖이나 빨게 생긴 어린아이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 많은 글을 배워 성취하면 과인이 장래에 너를 좋은 인재로 쓰리라. 알았느냐, 시습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의 얼굴이 밝게 빛나며 미소가 번졌다. 김시습에게 감탄한 세종은 그에게 비단 오십 필을 선물로 주면서 직접 가져가라고 했다.
김시습은 머리를 조아린 채 곰곰 생각하더니 비단을 모두 풀어 끝과 끝을 서로 이었다. 오십 필을 곧장 잇고는 세종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비단 한 끝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때 아니게 비단이 길게 이어져 대궐 문 밖까지 펼쳐지는 터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다.
세월은 흘러 김시습은 열세 살 나이가 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당시의 대석학인 김반과 윤상에게서 학문을 익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세월이 더 흘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김시습에게 가슴 아픈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주던 세종 임금이 죽었다. 뒤를 이은 문종 임금마저 병고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이윽고 나이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단종 임금이다.
단종 임금이 즉위할 무렵 열여덟 살의 청년으로 성장한 김시습은 그저 삼각산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문밖출입도 없이 은인자중으로 일관하던 청년 학자였다.
그런데 다음 해인 1453년, 김시습은 한양을 다녀온 친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했을 뿐더러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리고는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전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계유정란이었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재주로 세종 임금을 감탄케 하고 왕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학문만 하던 김시습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흘러 1455년이 되었다. <매월당집> ‘유적수보’편에 보면, 그 때의 일을 김시습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이 스물한 살 때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단종 임금이 왕위를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문을 닫고 삼 일간 문밖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방을 뛰쳐나와서는 크게 통곡했다. 모든 책을 불태워버렸다. 미친 듯이 더러운 똥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즉시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하고는 여러 번 호를 바꾸었다.’
이율곡은 김시습을 평가하면서 ‘그는 일종의 이인(異人)이며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하여 남의 시선을 모으고자 하는 사람에 가깝다.’라고 썼다. 다른 기록에서는 ‘김시습은 미쳐서 읊조리고 다니며 세상을 구경거리로 희롱하더니 세상을 피해 선승이 되었으나 불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그를 미친 중으로 취급했다.’라고 썼다. 그리고 또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흉보았고 서로 앞서거니 기와조각과 돌을 던져 그 미친 중을 몰아냈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가 찾아왔다. 천하의 미친 중이라 매도당하던 김시습이 홀연히 한양 종로로 찾아온 건 서기 1456년 6월 11일 아침이었다. 그는 평소 한양을 가리켜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했었다. 사람 잡는 관리가 있고, 사람 잡는 법률이 있고, 사람 잡는 인심이 있는 한양은 악귀들의 세상이라 했었다.
“더럽고 추잡한 악귀 놈들!”
그의 입에서 쌍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종로를 미친 듯이 걸으며 한없이 욕설을 뇌까렸다.
역시나 흉측스러운 소문이 종로의 골목골목을 쏘다니고 있었다. 소문을 따라 김시습의 발걸음도 쏘다녔다. 계유정란은 이미 3년 전의 일, 그는 종로를 쏘다니며 얼마 전에 벌어졌다는 병자사화 이야기를 들었다. 한창 힘을 쓸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지만 한없이 쏘다니다 한없이 넘어지고 무너지고 깨졌다. 길바닥에 누워버리면 울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모두 들으시오! 그 선생들은 세종 임금께 총애를 받던 집현전의 충신들이라오.”
얼마 전에 의인 선생들이 무참하게 처형당했다니 김시습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길 가던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그를 향해 ‘미친 중이 다시 나타났다!’며 손가락질을 했지만 그의 옆에 붙어있는 건장한 몸종 때문인지 돌팔매질은 하지 못했다.
몸종이 김시습을 일으켰다. 그는 몸종에게 의지하며 종로의 골목을 한없이 쏘다녔지만 온갖 감투를 뒤집어쓰고 여봐란 듯이 거드름 떠는 무리들이 싫어 광화문 한길로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 대신 피마길로 걸었다. 피마길은 쏟아진 비로 진흙창이 되어 있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걷기는 광화문 한길보다 훨씬 편했다.
종루가 넘겨다보이는 곳에 다다른 김시습은 더 이상 알아보는 이가 없도록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삿갓 속에서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좌측에 있는 의금부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나랏일에 얽힌 사람들만 골라 잡아들이되 한번 끌려들어갔다 하면 제 발로 걸어 나온 자가 하나도 없다는 곳, 죽이고 살리기를 심판하기에 앞서 우선 초다듬질부터가 사람을 잡는다는 참으로 고약한 흉가가 바로 그곳, 의금부였다.
김시습은 몸종에게 광목과 삼베를 더 사도록 심부름을 시키고는 한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혜정교 건너편을 보니 서린방 초입 전옥서(典獄薯)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서린동 지역에 포도청이 있었고 그에 딸린 감옥이 서슬 퍼렇게 서있었다.
김시습의 발걸음은 뜬구름처럼 허허로웠고 먹구름처럼 어지러웠다. 그렇게 태평로를 향해 걸었다. 지금의 소공동, 정동, 태평로동, 북창동, 무교동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태평로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때까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지금의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어 자연스럽게 ‘태평로’라는 길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서울신문사 빌딩 좌측 화단에 ‘군기시(軍器寺)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 시대에 갖가지 무기를 제조하던 관아가 바로 군기시다. 조선 초엽 본래 이름은 ‘군기감’이었지만 서기 1466년 세조 12년에 군기시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그 앞길이 참 넓었다. 나라에서 큰일을 치루는 장소로 활용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곳이었다.
김시습은 그쪽을 향해 걸었다. 전옥서를 끼고 과일상이 늘어서 있는 곳을 걷자니 청계천 모전교가 발에 밟혔다. 모전교를 건너니 드넓은 무교동 주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소문에 의하면, 궁궐 사정전 안뜰에서 그리고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세종의 신하들이 수레에 실려 군기감 앞으로 왔다고 했다. 자그마치 40여명이나 끌려왔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의금부의 수레가 다다르기 전 군기감 앞에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정인지, 신숙주, 권남, 한명회, 강맹경, 정창손, 윤사로, 이사철, 황수신 등 수많은 고관 대신들이라 했다. 세종의 신하들이 참형당하는 걸 관람하기는 길거리의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군기감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군기감 앞에서 벌어진 세종의 신하들에 대한 거열형은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 및 머리를 각각 묶은 수레를 사방으로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어 죽였다고 했다. 그 중 유성원은 집에서 일찌감치 자살했는데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와 거열형을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길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시로 보고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에서 머리통들을 높은 장대에 매달았다고 했다.
첩첩산중 움막에서 술이나 마시고 시나 짓고 있어야 할 김시습이 굳이 한양으로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뒤늦게 김시습이 직접 바라본 군기감 앞은 정말 흉측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피범벅이 된 머리통들이 장대 끝에 매달려 썩어가고 있었다.
효수는 사흘 째 진행 중이라 했다. 머리를 제외한 각각의 시체들은 군기감 앞에서 여덟 개로 찢어졌고 관리들에 의해 팔도 지방 사람들에게 골고루 전해졌다고 했다.
그 머리통들은 사실 세종 임금이 총애하던 집현전 학자들이고 문종 임금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받은 충신들이었다. 그들이 세조 즉위 1년, 난신역적 세조를 처단하고 다시금 단종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다는데……. 그러다 발각되어 하나같이 참형을 당했다는데…….
김시습은 흐느적거리는 몸을 겨우 감당하며 걷고 또 걸었다. 구역질이 차올라 걷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억지로 걸었다.
그런데 주변 장사패들이 쉬쉬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의금부에서 오늘 유시(오후 5시부터 7시까지)에 군기감 앞에 달아맨 대역 죄인들의 머리통을 거두어 청파역을 지나 새남터 근처에 내버린다네.”
“거기가 어디요?”
“새남터는 저 아래 강가요. 억새와 갈대밖에 없는 노들나루 근방 모래 습지인데, 밤낮으로 까마귀가 유령처럼 들끓는 곳이라오.”
김시습으로서는 낭패다 싶었다. 작전을 바꾸어야 했다. 그는 사실 늦은 밤에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을 훔쳐가려고 종로를 걸어 태평로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몸종을 시켜 미리 무명과 삼베 등을 사둔 것인데, 아무래도 일이 더 어렵게 된 셈이었다.
김시습은 발길을 돌려 피마길을 향해 되걸었다. 철물다리 쪽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이 쉬쉬하며 나누는 이야기들을 더 주워들었다.
정말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을 새남터로 가져가 내버린다면 어떻게 할까. 그곳엔 한양을 수호하는 군부대가 있어 배가 여러 척이며 수십 명의 경계병이 있으리라.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관아가 또 거기에 있어 뜬눈으로 짐승들을 감시하는 관리도 여럿 있으리라. 기와공장을 관장하는 관아가 또 거기에 있어 일꾼들이 기와의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밤을 지켜보리라.
김시습은 몸종을 데리고 아랫녘 청파역을 향해 걸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그 아래 쪽 지리를 미리 살펴두어야 했다. 특히 의금부 포졸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성안보다는 청파역 쪽이 수월하리라.
김시습은 만초천을 건넜다. 서대문 무악재에서 시작하여 청파동과 원효로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들던 시냇물이 만초천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청파로가 되었는데, 당시는 도성의 하수로 역할을 수행했다.
김시습이 청파역 인근에 다다른 시간은 밤 8시쯤으로 이슬비가 자욱이 내리고 있었다. 이슬비만 내리고 바람만 안 불면 다행이리라. 작은 배를 띄워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으리라. 그런데 밤 10시쯤이 되자 마파람이 불더니 삿갓을 벗기는 말바람으로 바뀌었다.
어둠 속에서 새남터 주변 지리를 살펴보니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을 훔쳐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살펴보니 한 가닥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칠흑 같은 밤에 새남터로 가 머리통을 거두어 곧장 한강을 건너면 어떨까. 성공과 실패는 반반이지만 김시습은 이미 자신의 몸을 버린 사람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기개로 가득 차 있었다.
한강을 건너면 그 언덕이 바로 장지가 되리라. 하지만 한강 건너 흑석진에는 노량원이 있고 갖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민가집도 많았다. 아무리 오밤중이라 해도 누구 눈에라도 발각되면 큰일이었다. 김시습 역시 의인 선생들과 매한가지로 삼족이 능지처참 당할 일이었다.
김시습은 몸종과 함께 만초천 배다리 옆에 있는 집에서 밥을 사먹고는 그대로 누워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밖을 내다보니 바람이 더 거세지는 게 아마도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한 발짝 앞조차 보이지 않는 오밤중에 김시습은 몸종을 데리고 새남터로 향했다. 지금의 신용산 철교와 인도교 사이 서부이촌동 부근이다. 새남터는 둔지산 기슭에 기대어 마냥 물살에 깎이고 있는 곳으로 말바람에 비비적대는 억새와 갈대 소리만이 쉼 없이 들려왔다.
새남터로 가까이 다가간 김시습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억지로 버티려 했지만 후들후들 떨리던 몸이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럴 만도 했다.
대역 죄인의 집안 남자는 늙은이 젖먹이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고, 박팽년의 처는 정인지에게 주고, 박팽년의 며느리는 구치관에게 주고, 성삼문의 처와 딸은 박종우에게 주고, 성승의 처는 이흥상에게 주고, 유성원의 처와 딸은 한명회에게 주고, 유응부의 처는 권반에게 주고, 하위지의 처와 딸은 권언에게 주고, 이개의 여동생은 이계전에게 주고, 김문기의 며느리는 권남에게 주고…….
김시습은 어둠 속 땅바닥에 쓰러져 소리 없이 몸부림쳤다. 겨우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긴 했지만 한참만의 일이었다.
김시습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어둠 속을 헤쳐 갔다. 감시가 없는 틈을 타 새남터로 들어갔다. 강변 말뚝에 매인 조각배들이 어슴푸레 보였다. 상여뚜껑만한 조각배들이 마구 덤비는 물살에 시달리며 마냥 삐거덕거렸다.
세상 사람들의 비탄과 울분을 자아내며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을 까마귀밥이 되라고 내던져진 새남터에는 인기척이 있을 리 없었다. 인기척은커녕 누가 그 흉한 곳으로 접근하랴. 개 짖는 소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김시습은 사방을 살피며 나아갔다. 깜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바람결에 맡아지는 시체 냄새를 따라 조심스레 걸어갔다. 이윽고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들이 보였다. 가마니에 담아서 아무렇게나 쏟아버리고 간 그대로 한 군데에 쌓여 있었다.
“선생들, 여기 계셨구만요. 으…….”
김시습은 가슴이 미어져 말문을 닫아야 했다. 머리통들을 와락 껴안고는 그대로 엎드렸다.
대역 죄인들의 목을 베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 뭇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 했는가. 의인 선생들의 머리끄덩이마다 이름표를 적어 맨 종이쪼가리가 마른 풀잎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저만치 떨어진 채 귀신 옷자락처럼 보이는 것은, 속을 비우고 내버린 가마니였다. 가마니가 바람에 뒹굴다가 움버들나무 밑동에 걸려있었다.
김시습은 일어서서 의인 선생들에게 절을 두 번 하고는 꿇어앉아 흐느꼈다.
몸종이 허리에 맨 보퉁이를 끌렀다. 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황랍(벌꿀 말린 것) 한 토막과 부싯돌을 꺼냈다.
인기척이 없는 지 다시 살펴보고는 부싯돌을 두드렸다. 바람이 거센데도 불이 생겨났다. 황랍 토막에 불을 붙이고는 의인 선생들의 머리끄덩이를 살펴보았다. 누런 종이쪼가리에 붉은 글씨로 謀叛大逆 三問 陵遲處斬 (모반대역 삼문 능지처참)이니 謀叛大逆 彭年 陵遲處斬 (모반대역 팽년 능지처참)이니 하고 적혀 있었다.
김시습은 성삼문,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이개, 박팽년, 유응부의 머리통을 차례로 받쳐 들면서 흐느껴 울었다. 특히 유응부의 머리통을 껴안을 때의 흐느낌은 한층 심했다.
소문에 의하면, 나이 예순을 넘긴 터라 채 잡아들이지 않은 유응부의 부인이 수레에 실려 가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향해 ‘영감은 살아서는 한 끼 먹고 두 끼 굶는 가난으로 저를 고생시키더니 이제는 막가면서까지 이런 재앙을 남기는구려!’ 했단다. 땅바닥을 구르고 통곡했단다. 그러자 수레를 호송하던 관리들이 부인의 앞으로 몰려들며 말했단다. ‘이삼 일간 계속 불인두로 지지고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어찌 눈뜨고 보겠느냐. 가급적 빨리 숨을 끊어 고통이 덜하도록 죽여주겠다. 그러려면 맨입으로 되겠느냐. 그 입은 옷이라도 벗어서 우리에게 인정(뇌물)을 쓰라.’고 했단다.
세상인심은 그런 식이었고 또다시 김시습으로 하여금 진저리를 치게 했다.
몸종이 움버들나무 있는 곳으로 가 걸쳐있던 가마니를 주워왔다. 김시습은 의인 선생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가마니에 담았다. 가슴 속 흐느낌으로 인해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눈물만 쏟아졌다.
“걱정 마십쇼. 대역 죄인은 저쪽이라오. 선생들, 이제 불초소생과 더불어 강을 건넙시다.”
김시습은 가마니를 끌어안고 몸종이 가리키는 조각배를 탔다. 몸종이 묶인 밧줄을 풀자 조각배가 바람에 밀리며 출렁였다.
가마니가 비바람에 젖는 걸 본 김시습은 삿갓을 벗어 가마니에 씌워주고는 몸종이 하는 일을 도왔다. 강 건너를 향해 나아갔다. 회오리 물을 만나 조각배가 양천 지역으로 흘러간다면 낭패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김시습과 몸종은 억센 힘으로 조각배를 강 건너로 몰았다. 조각배가 지금의 한강대교 남단인 흑석진에 닿아야 제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강물에 밀리고 또 밀렸다.
이윽고 조각배가 반쯤 물에 잠긴 강둑 바위를 들이받으면서 삐거덕거렸다. 조각배가 부서지면 큰일이라, 김시습은 얼른 가마니를 부여안았다.
김시습과 몸종이 겨우 내린 강가는 지금의 한강철교 남단 노량진 방면 오른쪽이다. 언덕이 가파른 곳이지만 어렵지 않게 그 마루까지 기어오를 수 있었다.
김시습과 몸종은 나란히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살폈다. 아래쪽이 노량원이 있는 동네니 그런대로 적절히 건너온 듯싶었다.
낮이면 오고가는 사람들이며 뱃사람들 눈에 훤히 띄는 곳이다. 무덤이 너무 외져 있으면 알아차리기보다 잃어버리기 쉬운 법, 사람들 눈에 훤히 띄어야 외롭지 않으리라. 또 그래야만 먼 훗날 언젠가 의인 선생들의 기개와 충절이 뭇 사람들에게 전해지리라.
김시습은 먼저 연장자인 성승이 묻힐 자리를 몸종에게 짚어주었다. 몸종은 보퉁이에서 자루 없는 괭이를 꺼내 구덩이를 팠다.
김시습은 염습을 했다. 바랑에서 먼저 삼베를 꺼내 송곳니로 물고는 다섯 폭으로 쨌다. 의인 선생들의 머리끄덩이에 달아맨 황지단필의 종이쪼가리마다 모두 떼어버렸다. 손가락으로 머리끄덩이를 빗질해 주고는 상투를 짰다. 기름종이에 싸온 종이로 머리통을 싸맸다. 그리고 째놓았던 삼베로 하나씩 감싸 매었다.
김시습은 머리통 다섯 개를 몸종이 파놓은 구덩이에 하나씩 묻고는 흙으로 덮었다. 작고 볼품없는 무덤이지만 차례로 옮겨 다니며 다독였다.
“황량하고 괴로운 심정 그지없고 선생들께 그저 미안 천만이로소이다. 다만 바람이며 추위며 더위며 습기는 다소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입죠. 봉분을 하고 떼를 입혀 다듬는 일은 먼 훗날의 일이올시다.”
김시습은 몸종에게 반듯하고 깨끗한 돌을 주워오라고 시켰다. 그 돌에 글씨를 썼다. 成氏之墓, 成氏父之墓, 朴氏之墓, 兪氏之墓, 李氏之墓. 뭇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 선생들의 본 이름을 알아볼 수 없게끔 쓰고는 그 돌들을 무덤 임자를 찾아 하나씩 박아놓았다.
빗발이 좀 그치면서 새벽하늘이 강물에 얼비쳐 오는 시간, 김시습은 다섯 무덤에 차례로 제사를 지냈다. 술잔 하나 없고 제물 하나 없는 제사였다.
지금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 묘역’은 처음 그렇게 조성되었다. 처음엔 다섯 분이었지만 차후 성승의 묘가 강물에 유실되었고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묘가 추가 되었다.
사육신에 대한 제사 의식을 마친 김시습은 몸종을 불러 세웠다. 일찌감치 준비해 둔 말이 있었다.
“이렇게 큰일을 마쳤구나. 너는 이제 네 몸으로 살려무나. 내가 너를 자유롭게 놓아줄 테니 너는 스스로 논밭을 일구고 처자를 양육하며 살아야 한다.”
“오, 나으리!”
몸종은 더없이 감격스러워 했다. 몸을 단정히 하더니 김시습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서 가거라. 흑석진을 지나 광나루까지 거슬렀다가 경상도 땅을 향해 가거라. 사람들에게 묻고 묻다보면 네 고향으로 찾아갈 수 있으니 혹시나 먼 훗날 나를 만나더라도 ‘나으리’라 부르지 마라. 나는 뜬구름이요 바람이니……. 어쩌다 보이는 보름달이니…….”
김시습은 흑석진 쪽으로 몸종을 보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는 자신은 계룡산을 향해 걸어갔다. 걷는 데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그로부터 세상일에 뜻을 잃고 각지를 방황하며 살았다. 그러면서 <관서를 유람한 기록> <관동을 유람한 기록> <호남을 유람한 기록> 등의 시문집을 썼고 경주 금오산에 침거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기도 했다.
훗날 이율곡은 <김시습 전기>를 통해 ‘그는 절의를 표방하고 윤리와 기개를 잃지 않았으니 그 뜻을 살펴보면 가히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투는 수준이며……. 백대(百代)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이다.’라고 칭송했다.

 

사찰명 : 무량사 전화번호 : 041-836-5066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성보문화재 : 51 개
무량사 극락전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장소가 바로 만수산 무량사입니다. 당시 김시습이 생을 마감하기 위한 장소로 무량사를 선택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험하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백 년이 지나도 나를 귀찮게 할 관리 하나 없을 것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스님이 되어 유랑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무량사에 들어와 59세 때 입적하였습니다.

 

무량사 어떤 산사이었기에 김시습이 이곳을 선택하였을까요. 무량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극락세계입니다. 무량사는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하는 중생세계가 아닙니다. 권력과 재물에 탐을 내어 질서와 윤리를 파괴하는 사회가 아니며, 번뇌와 갈등으로 고민하는 세계도 아니며, 어리석은 판단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세계도 아닙니다. 밝은 지혜로서 인간들에게 광명과 아름다움을 주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김시습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무량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찾은 것입니다. 세속의 모든 것을 정리하여 마지막 남은 육신의 찌꺼기를 버리고, 아름다운 세상 지혜로운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 무량사에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무량사는 김시습의 흔적이 살아있는 도량입니다. 김시습이 무량사에 남긴 흔적이 과연 무엇일까요. 경내에는 김시습의 영정과 부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김시습이 남긴 것은 영겁을 삶을 살기 위해 무량사를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들로 하여금 김시습을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무량사에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김시습의 흔적만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진리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만수리(萬壽里)
 

1. 위치

면적 11.3㎢, 인구 28가구 92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2㎞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과 북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 화북면(化北面), 서는 대목리(大木里), 남은 삼가리(三街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묘막이 있다하여 묘막(墓幕)이라 하였는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군조례에 의해 만수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자연마을

・냉-골[마을] 만수동 남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전정리때 모두 철거 되었다.

・만수-동(萬樹洞)[마을] 만수동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임자가 있었는데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뜬물이 10리나 뻗쳐 흘렀다고 함.

・만수-동(萬壽洞)[마을] 만수리의 으뜸되는 마을. 옛날에는 만세암(萬世庵)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 현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풍천인(豊川人) 임의백(任義伯)의 묘가 뒷산에 생기고 일대의 토지가 모두문중의 소유가 되었으며 묘막(墓幕)을 짓고 사람을 구하여 관리하게 하므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묘막(墓幕)이라 부르던 것을 1987년 만수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음.

・묵밭-추리[마을] 만수동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정 정리 때 모두 철거되었다.

・산-막(山幕)[마을] 만수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피앗-재[마을] 만수동 동북쪽에 있었던 마을. 1976년 화전 정리 때 모두 철거되었다.


4. 기타지역

・감투-봉[산]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산. 감투처럼 생겼음.

・거북-바우[바위] 냉골 안쪽에 있는 바위. 둥근 바위 위에 작은 것이 삐죽 내민 것이 멀리서 보면 거북이처럼 보인다고 함.

・깊은-웅댕이골[골]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곰바우-골[골] 냉골 입구왼쪽으로 첫머리에 있는 골짜기. 곰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함.

・나무박-골[골] 만수동 서북쪽 천황봉골에 속한 골짜기.

・남산-골[골] 만수동 동북쪽 약산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독-바우[바위] 묵밭추리 남쪽에 있는 바위. 오뚝하게 서 있는 모양이 밑에서 올려다 보면 곧 넘어갈 것 같으나 올라가서 밀어보면 끄덕도 않는다 함.

・독산제당-골[골] 만수리 입구 삼가3교다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매-바우[바위] 만수동 남쪽 산에 있는 바위. 매처럼 보인다 함.

・매바우-골[골] 만수동 남쪽 매바위가 있는 골짜기.

・먹굴-골[골] 묵밭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로 가는 길목이 됨.

・묵밭-추리골[골] 만수 서남쪽 묘막1교와 묘막2교 사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바깥-나무박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 바른쪽 두 번째 골짜기.

・바른-골[골] 천황봉골에 딸린 왼쪽 마지막 골짜기.

・밤나무골-골[골] 만수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천황봉골의 왼쪽 첫 번째 골짜기임.

・산재당-골[골] 산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새먹-골[골] 묵밭추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주차장 동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임.

・성문-바우[바위] 산막 북쪽 산에 있는 바위. 마치 성문처럼 보임.

・송이밭-골[골] 큰묵밭추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송이버섯이 많이 나온다함.

・안-나무박골[골] 바깥나무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애마무-골[골] 만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약시-골[골] 만수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용수시미-골[골] 만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벽 중간에 굴이 있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갈때이리저리 부딪힌 자국이 있다고 함.

・작은-고사리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작은-냉골[골] 묘막2교 건너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묵밭추리들[들] 묘막1교 남쪽에 있는 들.

・작은-산지텃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장구목-골[골] 만수리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장구목처럼 잘록하게 생겼다함.

・절-골[골] 냉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절이 있었다 함.

・주산-날등[등] 만수동 북쪽 천황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충청감사 임의백의 묘가 있음.

・진등뱅이-골[골] 만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6.25후 피난민들이 들어와 화전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으나 화전정리때 모두 이전하였음. 골이 길으며 둥벙처럼 깊고 넓다함.

・진-밭[밭] 만수리 입구  독바위골에서 다리 건너에 있는 밭. 고랑이 길어서 밭머리가 안보인다고 함. 전에 부부가 밭고랑 양쪽에서 스슥(조) 밭을 매들어오고 있었는데 하도 멀리 떨어져있어 아내가 도망가는 줄도 몰랐다고 함.

・집텃-골[골] 만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짚은-둠벙[둠벙] 냉골 입구 독바위 앞에 있는 둠벙.

・천황봉-골[골] 만수동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큰-고사리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작은 고사리골 위에 있음.

・큰-냉골[골] 묘막3교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묵밭추리들[들] 묘막1교 옆에 있는 들.

・큰-산지텃골[골] 만수동 북쪽 천황봉골의 딸린 골짜기. 작은 산지텃골 아래에 있음.

・피앗-재[고개] 만수리에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로 넘어가는 고개.

・피앗재-골[골] 만수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피앗재로 가는 길목임.

・할인-굴[굴] 산막북쪽 산중간에 있는 굴.

・형제-봉(兄弟峰:803m)[산] 만수동 동쪽에 있는 산. 봉우리 2개가 마주 서 있다.


5. 문화유적

○ 만세암지(萬世庵址)

만수리 만수동(萬樹洞)마을 25-2번지에 있는 절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1860년대에 폐찰되었는데 사찰의 규모가 대단하여 쌀 씻는 물이 10리나 내려 갔다고 하며 승려가 수천명이 있었다 한다. 풍천임씨(豊川任氏)선대의 묘를 이 사찰 뒤에 모신 후 폐찰하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발간 조선고적보물조사자료에 의하면 ‘만수암지(萬壽庵址)’라 칭하고 마을 전체가 사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 임의백묘(任義伯墓)

주산날등에 있는 충청도관찰사 풍천인(豊川人) 임의백(任義伯)의 묘소로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 임좌묘(任座墓)

조선현종때 상의원정(尙依院正) 풍천인 임좌의 묘소로 군자감정 임성주(任聖周)의 묘가 있다.

○ 민속

- 산 제 : 매년 정월과 동지달에 마을 앞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거행하고 있다.


6. 산업

・옥수수, 고추, 약초, 꿀


7. 기타

・천황봉 3파수(三派水)의 하나인 금강지류인 삼가천의 발원지로서 마을 중심부를 이리 저리 곡류하면서 관통하고 있으며 3㎞에 달하는 맑은 물은 ‘만수계곡’이라 불리우며 여름철 많은 탐승객이 왕래하고 있다. 1993년 마을 회관 앞에 마을 자랑비를 세움.

 

관람포인트

 

1) 만수산 무량사는 극락세계를 의미하는 곳입니다. 극락세계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2) 김시습의 영정과 부도 있는 도량인 만큼 꼭 확인하시고 김시습이 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3) 2층의 극락적은 매우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앞의 5층 석탑과 석등도 전형의 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극락전 앞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허리 굽은 반송, 꼿꼿한 편백나무도 있습니다. 사진하나 찍어두면 좋은 풍경사진이 될 것입니다.   

5) 만수산 숲길은 참배길입니다. 이 길에는 야생 조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수산 자연휴양림도 함께 둘러보십시오.

 



샴푸, 화장품, 노트북, 음료, 의류 등 주요 분야의 CF 스타로서도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배우 신민아윤은혜에 이어 비비안의 새로운 얼굴이 됐다.

양승남 비비안 상품기획팀 부장은 “신민아의 외적 조건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비비안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 이미지와 잘 맞았다”며 모델 기용 배경을 설명했다.

21일 비비안 측이 공개한 비비안 화보는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신민아의 성숙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신민아의 매력이 발산될 새 비비안 광고는 오는 9월에 전파를 탄다.

한편 신민아가 현재 전속모델로 활동 중인 진로소주 화보에서도 순수함과 귀여움이 넘치는 매력을 발산하며 눈길을 끌고 있다.

  • 현존하는 일본 '게이샤'들
  • 김만수-영아 '83 

       제목 :영아 '83
    가수 :김만수
    앨범 :(1983) 김만수 - 뚜바뚜바 / 영아 '83

    1.낙엽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 날
      영아와 나누던 사랑의 얘기는
      지난 여름 파도에 부서져 가버렸나
      내 사랑 영아는 내 사랑 영아는
      잊어려고 눈을 감아도 저 멀리 떠오네
      영아 영아는 내 사랑 그림자

    *내 사랑 영아는 내 사랑 영아는
      잊어려고 눈을 감아도 저 멀리 떠오네
      영아 영아는 내 사랑 그림자




     

     

    
    김만수 - 영아
    바람에 날리어 지는 낙엽은 
    새봄에 꽃피는 꿈을 꾸겠지
    간밤에 보았던 영아의 꿈은 
    새봄에 온다는 기별이겠지
    영아 나는 왜 어느새 나는 왜 어느새 
    기다려 진다고 꿈에 젖나
    영아 샘처럼 솟아나는 정 접어두고
    영아 꿈속에 다시 꽃피는날 기다려
    긴머리 날리며 떠난 저 길에 
    진달래 한아름 피어나겠지
    창가에 어리는 기나긴 꿈은 
    한아름 피어난 사랑이겠지
    영아 나는 왜 어느새 나는 왜 어느새 
    기다려 진다고 꿈에 젖나
    영아 샘처럼 솟아나는 정 접어두고 
    영아 꿈속에 다시 꽃피는 날 기다려 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