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은, 영화감독 김동원과 열애 풀스토리 고백
[뉴스엔] 2009년 07월 21일(화) 오후 12:25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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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이미혜 기자]
배우
한고은이 13살 연상 연인 김동원과 열애 풀스토리를 고백했다.
한고은은 7월 22일 방송되는 SBS ‘
한밤의 TV연예’에서 배우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우여곡절과 데뷔 후 13년 동안, 한결같은 몸매와 외모를 유지하는 비결을 털어놨다.
한고은은 얼마 전 무려 13살 차
영화감독 김동원씨와 열애사실을 당당하게 고백했다. 사랑을 해서 한층 더 예뻐지고 밝아진 한고은은 스타&감독 커플 탄생 풀 스토리와 함께 열애 사실을 공개한 이유까지 솔직하게 밝혔다.
환상적인 몸매와 서구적인 외모로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른 한고은.
SBS 주말드라마 ‘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서 딸아이를 둔 엄마로 편안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한고은은 CF로 연예계에 데뷔, 13년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한고은은 한국에서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한고은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어눌한 발음과 연기력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작품마다 변신을 거듭했고, 드라마 ‘
사랑과 야망’ ‘
천하일색 박정금’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방송은 22일 오후 8시 50분.
한고은탤런트
출생1977년 03월 10일
신체신장-172cm
학력FIDM대학 의상디자인
데뷔영화 '태양은 없다'(1998)
수상KBS 연기대상 조연상(2007) KBS 연기대상 인기상(2004) KBS 연기대상 인기상(2003)
커뮤니티공식사이트
김동원 감독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전공하고 여러 CF들과 영화 예고편 및 타이틀을 제작하며 실력을 쌓아왔다. 장편 데뷔작은 <투사부일체>. |
이미혜
macondo@newsen.com
배우 한고은은 영화 '유감스러운 도시'의 감독 김동원과 열애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두 사람은 12년 전 CF 촬영을 통해 처음 만났으며, 지난해 11월 영화 '유감스러운 도시' 촬영과정에서 자연스레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최근 한고은은 MBC '놀러와'에 출연,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또한 한고은은 17일 방송된 KBS '연예가 중계'-'게릴라 데이트'에 출연해서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밝히니, 오히려 남자 친구가 편안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우 한고은의 연인 김동원 감독은, CF 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2006년 영화 데뷔작인 '투사부일체'로 관객 62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팬들은 ‘예쁜 사랑하세요’, ‘와! 정말 축하해요’, ‘행복한 모습, 보기 좋네요’, ‘너무 부러워요. 오래도록 좋은 모습 보여주세요’ 등 축하의 글들을 전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www.reviewstar.net
김동원(金東元.1884.2.1∼?)
정치인. 평안남도 대동 출생. 평양의 대부호(大富豪) 김대윤(金大潤)의 맏아들이며,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형. 1903년 평양일어학교 졸업, 1906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법과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 신병으로 중퇴, 귀국하였다.
1910년부터 6년 동안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ㆍ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때 안창호(安昌浩)와 교유하며 민족문제를 협의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출옥 후 실업계에 투신하여 목재상ㆍ평양고무공장 등을 경영하는 한편, 숭인(崇仁)ㆍ숭의(崇義)ㆍ숭실(崇實)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사 또는 이사장으로 민족교육발전에 진력하였다. 또,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도 가입, 활동하다가 1922년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25년 동우구락부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다시 1930년에는 [동우회]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며, 1934년 조선소년척후대 평남연맹의 간부로 보이스카우트운동에 종사하다가 1939년 [동우회] 조직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잡혀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으로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으나, 1950년 제2대 총선거에서는 낙선하였다. 1950년 6ㆍ25남침 때 납북되었다.
【학력】
1903 평양일어학교 졸업
1906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과 1년 수료
【경력】
1924 평양고무공업사 사장
1941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숭덕ㆍ숭의ㆍ숭실ㆍ대성학교 일본어 교사
1911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평야지회 주요인물로 지목되어 체포(징역6년 선고)
1913 7월 무죄 선고로 풀려남
1913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
1919 동익사(東益社) 설립, 전무
1921 평양 YMCA 창립, 부회장
1924 평양고무공업사 사장. 숭인상업학교, 숭의여학교, 숭실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장
1930 평양고무공업조합 이사장. 평양상공회의소 부회두(副會頭)
1922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 결성,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통합, 동우회(同友會)로 명칭 개정
1924 평안고문공업사 사장
1930 평양고무공업조합 이사장
1930 평양고무공업조합 이사장
1935 평안농사주식회사 설립
1936 평양고무공업 주식회사로 개편
1940 황도학회(皇道學會) 발기 참여
1930 평양고무공업조합 이사장
1941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평양 대성학원 설립
1945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
1945 미군정관 행정고문, 한국민주당 총무
1947 10월 한국민주당 기획부 부장
1948 5월 제헌국회의원(서울 용산을, 한국민주당)
1948 5월 31일 제헌국회 초대 부의장(∼1950.5.30)
1950 6월 6ㆍ25전쟁 당시 납북
1956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
1956 7월 요양원에 수용
[출처] 정치인 김동원(金東元)|작성자 재봉틀
햄릿 김동원 어떤 분이셨는지?? |
답변자 : 비공개 l 2006-05-16 13:45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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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국내 초연을 맡아 ‘영원한 햄릿’으로 불렸던 원로 연극배우 김동원씨가 13일 오후 6시25분 이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0세. 고인은 뇌질환으로 쓰러진 2004년 6월부터 투병 생활을 해 왔다는데요.
1932년 연극 ‘고래’로 무대에 선 뒤 1933년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성자의 샘’에 출연해 배우로 살 것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 고인은 1994년 국립극단의 ‘이성계의 부동산’을 끝으로 3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1951년 국립극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 신협 시절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햄릿을 맡아 열연했으며 이로 인해 ‘영원한 햄릿’, ‘한국의 햄릿’이란 별명을 얻기도 한 국내 연극계 1세대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1937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뒤 1947년 극단 극예술협회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극단 신협 운영위원을 지냈습니다.
2003년에는 미수를 맞아 ‘영원한 햄릿 김동원의 예술과 삶’을 제목으로 연극인생 62년을 돌아보는 전시회가 열렸으며 회고록 ‘미수의 커텐콜’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장례는 고인이 연극, 영화, TV 등 여러 분야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예술인장’으로 치러진다는데요. 장례위원장은 차범석 광화문포럼 회장, 부위원장은 장민호 원로단원, 집행위원장은 임영웅 대표가 각각 맡을 예정이다. 유족으로 부인 홍순지 여사와 아들 덕환(전 ㈜쌍용 사장)·진환(우리자산관리㈜전무이사)·세환(가수)씨가 있습니다. 영결식은 17일 오전 9시 삼성서울병원에서 열리며 장지는 경기도 용인공원.
김동원 감독 “재개발은 없는 사람 우려먹는 시스템”
[경향신문] 2009년 03월 10일(화) 오후 05:53 가 가 | 이메일| 프린트 ㆍ다큐 ‘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김동원 감독(54)이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만든 것은 21년 전인 1988년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제 철거당한 상계동 주민들과 3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일상을 찍은 기록이다. 용산 참사 발생 50일째인 10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다큐 공동체 ‘푸른 영상’ 사무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재개발의 원리는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상계동 때는 합동 재개발, 목동 때는 공영 재개발, 지금은 뉴타운 재개발인데 하나같이 건설 자본을 위한 이익 재창출이 본질”이라며 “재개발은 거주민의 주거환경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들을 우려먹는 시스템”이라고 밝혔다. 김 감독은 요즘 상계동에서 찍은 영상을 다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살벌했던 것 같다”며 “집이 헐린 철거민들이 텐트에서 숙식을 하는데 용역들이 식칼로 텐트를 긋고 가는 모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경찰이 사후에 개입했는데 용산에서는 용역과 합동작전을 펼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12일에는 용산 희생자 추모집회가 열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상계동 올림픽이 재상영됐다. 유가족들은 영화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감독은 “정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계속 시간을 끌면서 여론을 잠재우려는 것 같다”며 정부의 무관심을 비판했다. <김지환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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