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금융위기로 투자를 중단했던 세계 각국 국부펀드가 최근 투자를 재개하고 있다.
중국투자공사(CIC)가 올해 말까지 헤지펀드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히는가 하면, 중동을 대표하는 국부펀드인 아부다비투자청(ADIA)은 뉴욕 맨해튼의 상징인 크라이슬러 빌딩을 사들였다. 쿠웨이트와 카타르 국부펀드는 제너럴모터스(GM) 빌딩을 매입했다.
국부펀드 원천이 되는 국부는 개별 국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면 '오일 머니'와 외환보유액으로 나눌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 리비아, 카타르 등 중동과 노르웨이 러시아 등 산유국은 유전 개발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국부펀드를 설립ㆍ운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 국부펀드는 주로 수출로 벌어들인 외환보유액을 기반으로 한다. 이런 이유로 전자를 '상품에 기초한 국부펀드', 후자를 '비상품에 기초한 국부펀드'로 구분하기도 한다.
국부펀드의 일차적인 목적은 장기ㆍ분산투자를 통한 안정적인 수익성 추구다. 당대에 축적한 부를 미래 세대, 즉 후손에게 효율적으로 이전하기 위한 국가적 전략인 것이다.
물론 국부를 당대에 나누는 선택도 가능하다.
캐나다 앨버타주는 2006년 초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오일샌드 개발을 통해 막대한 부가 축적되자 세금 감면은 물론 주민들에게 1인당 340달러씩 나눠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8년 6월 노르웨이 국부펀드 성공 사례를 언급하면서 캐나다 연방정부와 앨버타 주정부에 대해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한 국부펀드 활성화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국부펀드 투자 대상은 주식과 채권 등 전통적인 투자자산은 물론이고 부동산, 원자재, 사모주식(Private Equity), 파생상품 등 대체투자(AI, Alternative Investmen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GIC는 주식과 채권 비중이 높지만,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서울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자 광화문과 강남 테헤란로의 초대형 상업용 빌딩을 싼값에 사들이는 등 타 분야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민간 펀드들이 단기 성과에 민감한 반면 국부펀드는 상대적으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장기투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국가 자산을 운용하다 보니 무기, 마약, 카지노 등 평판 리스크(Reputation Risk)가 높은 산업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기업 경영권 분쟁에 개입하거나 구조조정을 통한 단기 자본이득을 꾀하는 투자도 선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부펀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양질의 장기자본으로 꼽힌다.
그러나 국부펀드 투자 패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수익성 못지않게 전략적 목적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싱가포르는 국부펀드를 통해 자국 내에서는 금융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한편 외국에서는 전략적 경제영역 확보에 적극적이다.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이 최근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측에서 중국 건설은행(CCB) 지분을 대량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007년 출범한 신생 국부펀드지만 크기(운용자산 2000억달러)로는 초대형에 속하는 중국 CIC 역시 원자재 분야와 대체 에너지 기업에 집중 투자한다는 방침이어서 국가 장기 어젠더를 겨냥한 포석이 돋보인다.
국부펀드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자금 공급처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M&A 시장에서 국부펀드 위상이 돋보인다. 135억달러 규모 초대형 딜이었던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바클레이스 글로벌 인베스터스(BGI) 인수 등 초대형 M&A 딜에는 예외 없이 중동ㆍ아시아 국부펀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국가들은 외국 국부펀드에 대해 자국 투자를 규제하기도 한다.
지난해 독일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이외 국가가 독일 기업 지분을 25% 이상 인수할 때 심사를 강화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누가 봐도 중동ㆍ아시아 국부펀드에 대해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같은 염려는 독일뿐만이 아니어서 국제통화기금(IMF)이 주도하고 미국 등 선진국 지원사격으로 지난해 9월 각국 국부펀드에 대한 규제 강화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IMF와 24개 국부펀드가 모여 합의한 일명 '산티아고 프린서플(Santiago Principal)' 골자는 향후 국부펀드 투자를 규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부펀드에 대한 규제 논의는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지금 오히려 '흑묘백묘론'이 주요 정서로 통한다.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치적 성격이 강한 돈도 대환영이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글로벌 금융시장에는 국부펀드가 보유한 막대한 달러를 매개로 한 대규모 M&A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형국이다.
■ 국부펀드SWF(Sovereign Wealth Fund)
국부펀드(SWFㆍSovereign Wealth Fund)는 말 그대로 '국부(國富)'로 조성한 펀드를 말하며 전 세계적으로 40여 개에 달한다. 우리나라에는 2005년에 설립한 한국투자공사(KICㆍKorea Investment Corporation)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전 세계 국부펀드 규모는 2007년 2조달러 수준에서 현재 4조5000억달러로 늘었다. 2012년에는 12조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5년 사이에 6배 성장하는 셈인데,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국제 자본시장에서 인수ㆍ합병(M&A) 붐을 일으켰던 사모펀드와 헤지펀드 자산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국부펀드 파워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종인 KIC 경영기획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