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자는 정말 무서워』
96년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학교. 「모전여전의 닮은 꼴 한국인 모녀」 서진규씨(50)와 딸 자스민 조(22)를 보며 교수들과 학생들은 혀를 내둘렀다. 서씨는 「국제외교사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 딸은 정치외교학과 3학년. 더욱이 딸은 예비역 미군 소령인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 홍일점 ROTC. 소문이 퍼지면서 어머니와 딸은 순식간에 「하버드의 명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하버드는 집념과 투지의 상징. 모국의 가난, 가부장제, 여성차별,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생활 등 캠퍼스로 가는 길은 험로와 역경 투성이였다.
세월을 잊은채 지금도 캠퍼스 한편 아파트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는 서진규씨. 신문을 배달하는 등 어렵게 학비를 조달, 여고를 졸업한 후 가발공장에 들어갔다. 대학에 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 여자가 배우면 뭘해』하는 사회인식 때문에 행로를 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해 박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그녀는 71년 어느날 무작정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태인식당, 한인식당 등을 전전하며 온갖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국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러나 각오했던 어려움, 고생이 심할수록 도전하고픈 의욕이 샘솟았다. 우선 말을 배우기 위해 일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제 학생으로 대학에 등록했다. 그즈음 합기도 관장이던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해 딸 자스민을 낳았다. 하지만 여자의 사회활동을 바라지 않는 「한국인 남편」 때문에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꿈을 결코 버릴 순 없는 스물여섯살의 「애 엄마」는 생각 끝에 여덟달배기 딸을 친척에게 맡기고 미군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조금만 힘들게 살면 여러가지 길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얼굴색이 다른 18∼20세의 남자들 무리에 끼여 뒤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맹훈의 결과는 200여명 중 최우수 훈련병. 이후 병참학교에서도 최우수 졸업생이 됐다. 첫 근무지는 6년만에 돌아온 서울의 용산부대. 하지만 육군병장으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장교가 되기로 했다. 낙하산 강하, 유격, 행군, 도하…. 81년 겨울 간부후보생 양성소가 있는 조지아주 베닝부대의 훈련은 매일 이탈자가 속출할 만큼 혹독했다. 그러나 서씨는 「최우수 지도자상」과 「1등상」을 거머쥐며 끝내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공수훈련까지 통과했다.
험하디 험한 여자의 길.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10살 아래의 미군 장교와 결혼했지만 1년만에 또 결별했다. 아픔을 달래며 딸과 함께 독일의 유류중대로 떠난 뒤 85년에 경기 남양주군 퇴계원 유류부대에서 155명을 지휘하는 최초의 여성 중대장이 됐다. 그뒤 영관이 되려고 동북아전문가 과정에 지원했으나 미국 육군성의 대답은 「No」. 상대국의 문화 때문에 여성은 곤란하다는 것. 즉시 워싱턴으로 달려가 담당자를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고난의 긴 여정. 하지만 그녀는 어느 한때라도 공부를 뒤로 미루어놓지 않았다. 짜투리 시간도 철저히 이용, 학업을 이어나갔다.『 용산 메릴랜드대학 야간학부에서 시작해 이곳 저곳에서 티끌처럼 학점을 모아 14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뒤 캘리포니아 국방언어대학을 나와 이듬해 하버드대학원의 동북아전문가 석사과정에 합격했습니다』
근무지를 수시로 떠돌아다닌 군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던 딸 자스민은 어린 시절 내내 꼴찌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근성을 닮아서인지 중2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강한 지적 호기심을 보이며 역사. 만화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일에 바빴던 서씨도 딸의 교육 만큼은 꼬박꼬박 챙겼다. 결국 중3때 역사상을 받고 중,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전국 우수졸업생 141명에 뽑혀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표창을 받으며 조지타운대에 입학했다.
서씨는 2년만에 석사를 따고 박사과정에 합격한 뒤 군에 복귀했다. 일본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소령으로 진급한 뒤 동양계 여성 최초로 주일미군사령부 정치, 군사고문 겸 자위대 담당 연락장교가 됐다. 병참대대 부대대장과 군사령부 운영과장을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령 진급 기회를 잡았다. 96년 12월. 며칠밤을 고민한 서씨는 결국 필생의 꿈을 위해 군복을 벗고 하버드로 돌아왔다. 자스민도 엄마 곁에서 함께 공부하려고 2학년때 하버드로 전학했다.
『 엄마가 몸으로 가르쳐준 교훈은 황무지에서 일군 성공의 열매가 달콤하고 그 또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죠. 지난 9월 이화여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후 서울에서 헤어진 아버지도 우연히 만났어요. 이젠 나이가 들어 집중이 잘 안된다고 하소연하는 엄마에게 제가 힘과 용기를 줘야 할 것 같아요』
학위를 딴 후 자서전을 쓰고 고국에 돌아올 생각이라는 어머니. 의무복무를 마친 뒤 외교분야에서 일해볼 계획이라는 딸. 어머니와 딸이 엮어나가는 「2대의 인생드라마」가 언 가슴을 녹인다. "스스로 열심히 사는게 가장 훌륭한 딸 교육" 서진규씨의 가장 큰 고민은 딸의 교육.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군생활.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딸에겐 형편없는 교육환경. 그 때문인지 딸은 초등학생 시절 내내 반에서 꼴찌를 맴돌았다.
서씨는 그런 딸을 위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 많은 대화를 했다. 이야기를 먼저 하기보다는 듣는 쪽이 되어 딸의 관심과 개성을 살폈다. 때론 흥미를 돋워주고 때론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줬다. 만화광인 딸에게 만화로 된 교재를 사줘 일본어를 숙달할 수 있도록 표시나지 않게 돕기도 했다.
『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개성과 심리를 잘 파악해 길을 제시해 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 1등은 언제나 외로운 존재』라며 공부보단 인성바른 아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열심히 사는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잘못해도 남 앞에선 절대 야단치지 않고 아버지의 빈 자리가 마음에 걸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잦은 왕래를 부탁했다. 그러자 수줍은 성격이 사라지고 딸이 강한 성취동기를 나타내며 학습과 생활면에서 급우들을 앞질러 나갔다. 고교때 주니어 ROTC를 자원해 군사훈련을 즐기던 딸은 결국 하버드에서도 「활기찬 ROTC생도」를 선택, 「개성있는 삶」을 연출하고 있다.
송도 '미디어밸리' 기획 30대 여성 핵물리학자 최규현
컴퓨터그래픽 강동영 기자 해저터널을 오가는 자동차. 사이버스쿨과 원격진료 병원. 위성을 통한 첨단 교통제어망, 누구나 떠나는 우주여행…. 여성 핵물리학자 최규현박사(38)가 꿈꾸는 첨단 미래형 도시의 모습이다.
2005년 인천 송도에 들어서게 될 「미디어 밸리」는 이런 과학기술 도시의 「인큐베이터」. 인공지능 로봇, 첨단 애니메이션, 초고속 통신망 등 모든 첨단분야의 신기술 개발이 이루어지는 「벤처의 요람」이다. 산업체와 연구기관이 연구결과를 내놓으면 바로 벤처창업으로 이어져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실용화하게 된다.
『 성공의 관건은 첨단 기술산업을 주도할 전문인력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정보통신망이 잘 갖춰진 연구시설을 제공하고 산업현장과 빠르게 연결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거죠. 낮은 토지비용, 광범위한교통망, 자연친화적인 환경 등 송도의 미디어 밸리는 사이언스 파크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천대 핵물리학 교수인 최박사는 인천시 과학정책 전문직 공무원과 재단법인 송도 테크노파크 운영위원을 겸하고 있다. 지난 95년 인천시가 국제협력실 과학정책 전문위원을 공채할 때 핵이론가에서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과학이론을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지원했다.
96년 전경련산하 「미디어 밸리 추진위원회」가 전국 1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입지 공모가 미디어 밸리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세계 각국 테크노파크의 정보와 자료를 분석해 유치계획서를 완성했다. 인천국제공항(Air port)과 동북아 최대의 첨단 항구로 변신할 인천항(Sea port), 정보화 신도시 송도(Tele port)가 연결되는 야심찬 트라이 포트(Tri port) 프로젝트. 미국의 실리콘 밸리, 인도의 방가로르 소프트웨어단지,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 폴리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과학단지 등 세계 유명 사이언스 파크의 장점을 모델로 삼아 완벽한 자료를 만들었다.
인천시는 그녀가 만든 계획서대로 송도에 미디어 밸리 유치를 결정했다. 때마침 산업자원부에서도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테크노 파크」 부지를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 우리나라는 벤처기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기업체는 기술진이 없다고 한탄하고 대학 등 연구기관은 실험실에 갇혀 있습니다. 창업자금 지원 기준도 불분명합니다.
미디어 밸리는 바로 이런 기업과 연구소와 자본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구체적인 마스터 플랜을 짰다. 중소기업이 8,600여개나 있지만 전문 연구진은 턱없이 부족한 인천. 기존의 생산기반을 활용해 신기술을 개발한다면 예산을 줄이면서 기업간 경쟁력을 키워 세계 굴지의 자본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해 12월 인천시는 포항, 대구 등지와 함께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한국경제가 어려움에 처하고 세계경제의 흐름 역시 불확실해지면서 진통이 따랐다. 공무원들은 실패할 경우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결정을 미루기만 했다. 신뢰감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담당 실무자들을 불러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연구계획서를 수정해가며 밤샘작업을 했다.산자부의 계획대로 매년 50억원씩 5년간 투자하면 총 2백50억원. 그러나 건설비와 연구비를 낭비하지 않으려면 자립기반을 다져야 한다. 「미디어 밸리」가 건설될 1백6만평 송도 부지 중 10만평을 제공해달라고 인천시를 설득했다. 10만평중 8만평을 기업과 연구소에 분양해 수익금으로 시험생산 공장을 가동시켜 벤처기업을 키우자는 것. 결국 인천시는 매년 20억원씩 5년간 1백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시의회에서도 뒤늦게 사업설명을 듣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인천대 박인호교수, 인하대 손충열교수, 생산기술연구원의 홍영명, 권혁철, 문병문박사 등 6명으로 송도 테크노파크 기획팀을 구성하고 지난 6월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지난달 전국 테크노파크 추진 중간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더이상 미디어 밸리가 「뜬구름 잡는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 반도체 산업의 진원지였던 실리콘 밸리가 최근 들어 바이오산업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동식물을 응용한 첨단산업을 키우고 있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더욱 유리합니다. 예를 들어 지렁이, 마늘 등에서 항암성분을 추출해 의약품으로 개발한다면 부가가치가 크게 높아질 것입니다』
최박사는 풍부한 자연자원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동원한다면 「IMF 극복」은 시간문제라고 확신한다. 국경 없는 정보화 사회. 초고속 통신망과 네트워크 분야. 영상, 게임 등 멀티미디어 컨텐츠 산업도 마찬가지. 흩어져 있는 한국의 과학기술과 뛰어난 예술 재능 등을 한곳에 모으면 세계시장에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 여성과학자의 꿈이 담긴 「첨단기술과 마케팅이 어우러진 21세기 테크노파크 시대」. 멀지 않은 곳에서 손짓하고 있다.
국내 첫 청각장애 보험설계사 홍의직씨
-“우리 아빠도 넥타이 매고 회사 간다”-
홍의직씨(30)는 요즘 아침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넥타이 차림에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길이 마치 꿈길 같다. 한사람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한다.
쌍용화재 울산지점 제일영업소 보험설계사. 그에게 「보통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 소리를 단 한줄도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 사람들을 만나 보험내용을 설명하고 계약한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두번 실패하면서도 계속 도전했고 끝내 「특별한 사원」이 되었다.
부산농아학교를 마치고 뛰어든 사회는 가시밭길이었다. 어렵게 페인트통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으나 2개월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사람 소리는 물론이고 기계작동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위험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눈치 때문에 계속 다닐 수 없었다. 그후 옮겨다닌 직장이 6~7곳. 어딜가든 장애인에 대한 경계와 편견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다행히 92년 중공업회사에서 컴퓨터도면 그리는 일을 하게 됐다. 처음으로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해 가족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그러나 3년을 넘기지 못했다. 때때로 받는 상처도 가슴 속에서 커져갔지만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 때문에 버티기 힘들었다.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외로움. 귀찮아하며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점심시간, 쉬는 시간 언제나 혼자였다.
직장을 그만둔 후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 상대는 더 힘들었다.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 사람, 다짜고짜 밀쳐내는 사람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울산항에 정박한 외국 선박에 올라가 장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안통하니까 속은 편했습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찮은데다가 불안정한 생활이었어요. 하나도 못파는 날도 있었죠』
칠순 노모와 아내, 어린 두 아들을 둔 가장. 의욕을 상실한 그는 점점 나약해져만 갔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제일영업소 권용완소장(46)을 만났다. 그는 보험설계사 일을 권유했다. 처음엔 누구 놀리냐며 화를 냈다. 어머니와 아내도 반대했다. 더이상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홍씨는 며칠이 지나자 처음 생각과는 달리 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권소장의 도움을 받으며 보험상식을 공부했다. 전문용어도 많고 내용이 어려웠지만 열심히했다. 그러나 첫 시험을 보기도 전 시험장에서 쫓겨날 뻔 했다.
청각장애인이란 사실을 안 시험감독관이 『농아가 어떻게 보험설계사를 할 수 있느냐』며 나가라고 다그쳤다. 가슴에서 울컥 분노가 치밀었지만 시험만 보게 해달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험을 치렀지만 낙방. 감독관과 주위에선 「그것 보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덤벼들었다.
『정상인도 어려운데 어떻게 보험판매를 하느냐며 모두들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저도 약해졌죠. 하지만 아내와 아들들의 소망마저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청각장애인 아내는 함께 새벽잠을 설치며 말없이 격려했다. 지난 8월 세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10일간의 애타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합격통지서. 홍씨는 물론이고 온가족이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국내 첫 청각장애인 보험설계사. 홍씨는 제일 먼저 청각장애인들을 찾아나섰다. 동정심을 바란 것은 아니다. 이제껏 보험에 들고 싶어도 장애인이란 이유로 보험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고 자세히 필담으로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 불편했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9월에 비장애인인 이상원씨와 87만원짜리 자동차보험 계약을 성사시켰다. 손짓 발짓과 필담을 나누느라 시간이 2~3배 더 들었다. 정상인을 설득하는 일이 보통 힘들지 않지만 계약때의 보람도 그만큼 크다.
직장 동료들도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권소장을 비롯, 12명의 동료들이 매일 아침 10분씩 그에게 수화를 배운다. 그로 인해 함께 사는 세상을 배우고 있다며 오히려 고마워들 한다. 지난 추석때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양말 2켤레가 든 5,000원짜리 선물세트. 사회에 발을 디딘 후 자신을 처음으로 진정한 동료로 인정해준 직원들에게 작지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살맛나는 세상. 그가 더욱 흐뭇한 것은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큰 아들 석형(5)이의 유치원 입학식날 혼자했던 약속. 아이는 말못하는 아버지가 창피했는지 살며시 바지 끝을 잡아당겨 그를 맨 뒤쪽에 서있게 했다. 아는체 하지 않는 아들이 밉기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저려왔다.
『아이가 떳떳하게 우리 아버지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매일 아침 집 나서는 그를 보며 석형이는 『우리 아빠도 넥타이 매고 회사 간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지난달 월급은 50만원. 큰 돈은 아니지만 홍씨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가족을 포근히 감싸안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인도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판토마임 유머’사무실에서 인기 ‘캡’-
홍의직씨는 사무실에서 인기가 좋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유머감각이 뛰어나기 때문. 몸짓으로 건네는 농담으로 동료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10월, 11월 연속 우수실적상을 받은 그는 상금으로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된장찌개 저녁이었지만 모두들 흡족해했다. 그와 함께 요즘 신바람난 사람은 제일영업소 권완용소장. 틈만나면 홍씨 자랑에 바쁘다.
『처음 보험설계사를 권유했을 땐 화를 내며 귀담아 듣지도 않았어요. 며칠 후 찾아와 정말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던지 꼭 해내리라 믿었습니다』
지금껏 울어본 적이 없다는 홍씨. 하지만 지난 추석 성묘길에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산 범서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보험설계사가 된 모습을 보여드렸다. 2남2녀 중 막내인 홍씨를 늘 가슴 아파하며 눈감는 순간까지 걱정했던 아버지. 언젠가 사회인으로 당당히 활동하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우리사회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죠.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어 다행이에요.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내 이귀자씨(28)도 지난 8월부터 화장품 외판원을 시작했다. 가정을 방문해 마사지해주고 제품을 설명한다. 아직 다섯식구 살림이 빠듯하긴 하지만 저축통장을 갖게 됐다.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 홍씨는 지금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호주 국제그룹 37세 회장 김용삼
-단 한번의 성공에 힘싣고 ‘앞으로’-
호주 국제그룹 회장 김용삼씨(37). 87년 무역회사 「위컴」을 설립한 이후 「킬리」로 회사명을 바꾸고 오세아니아여행사, 영투어항공, 로고 환태평양통신사, 해외여행자 정보센터, 워킹홀리데이협회, 키부츠협회, AES교육센터, JW컨설턴트, 마스타투어, INFO-IP 컴퓨터컨설팅, 인터넷피플 등 무역·여행, 컴퓨터·인터넷IP, 통신·잡지사, 해외이주컨설팅 등 여러 분야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토박이인 김씨는 81년 한국외국어대 무역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티를 벗기도 전인 그해 3월 영어 자동번역기를 생산하는 국내 재벌기업 전자업체를 찾아가 일본을 포함, 동남아 15개국에 홍보하겠다고 설득해 첫 해외여행의 기회를 얻었다. 기본여행경비를 받고 60여일에 걸친 해외여행을 무사히 마치며 「무슨 일이든 뜻만 있다면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스포츠신문에 해외여행 체험기를 연재하면서 여행관련 잡지사와 여행사 등에서 스폰서 제의가 이어졌다. 82년 호주를 거쳐 뉴질랜드·사모아·피지·세븐데이아일랜드 등의 섬나라를 답사했고 유럽에도 다녀왔다. 군 제대 후 서울대 심리학과 3학년에 편입했지만 호주의 해변마을을 잊지 못해 87년 호주 시드니대 경영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월 70만~80만원의 학비와 생활비는 부모가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해 배편으로 보내준 가방·신발·의류 등을 팔아서 해결했다. 이렇게 시작한 「작은 무역」의 경험을 살려 무역회사 「위컴」을 차렸다. 첫 사업은 호주와 뉴질랜드 바닷가에 널려있는 모래 수출. 가공 생선·육류·야채 수출에도 손을 뻗었다.
92년에는 인도네시아로 옮겨 목재 수출입과 함께 가구공장을 경영했다. 상사주재원과 교민들을 대상으로 경제정보와 국내기업 동향을 소개하는 「코리아타운」이라는 주간지 형태의 신문도 발행했다. 호주에서는 교민들을 위한 「시드니위크엔드」와 일본어판 「재피니스위크엔드」를 만들었다.
일본어판 신문을 만들기 위해 채용한 일본인들의 여권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워킹홀리데이 비자」. 95년 김영삼대통령의 호주 방문때 교민들과의 대화에 참석, 호주와의 워킹홀리데이비자 협정 체결을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그해 7월 호주와 국내에 워킹홀리데이협회를 세우고 국내 직장인·대학생들에게 취업여행의 기회를 제공했다.
남대문시장 잡화로 사업을 시작해 12년만에 12개 회사를 세운 김씨는 지난 11월 직원들에게 E메일로 보냈던 편지들을 모아 「인생은 딱 한번만 성공하면 된다」는 책을 펴냈다.
『우리나라 젊은 사업가들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따려고 너무 성급하게 덤비는 것 같아요.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운이 나빠 실패하는 경우도 많은데. 인생은 여러번의 성공보다 단 한번의 성공이 중요하죠. 그러나 그 작은 성공을 지키려고만 하면 반드시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되지요. 조직의 시스템을 갖추고 꿈과 희망을 갖고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
김형진사장, 중졸 사환에서 증권사 사장까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이후 숱한 기업들이 쓰러졌다. ‘맨손으로 시작해 그룹총수가 됐다’ 는 ‘근대화형 신화’ 들도 함께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IMF시대에도 우리 주위엔 어김없이 새로운 ‘입지전’ 이 쓰여지고 있다. 동아증권(현 세종증권)을 인수한 김형진(40) 세종기술투자사장은 IMF체제가 모든 사람에게 ‘독약’ 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올 7월 세종기술투자라는 조그만 창업투자회사가 동아증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했을 당시 증권가의 관심은 김형진이라는 인물에 모아졌다. ‘사채업자가 증권사를 거져 집어삼킨뒤 몇 푼 남기고 팔아치우려 한다’ ‘권력과 가까운 인물의 비자금이 인수자금이다’ 하는 루머들이 돌아다녔다. 동아증권 직원들조차 “어쩌다 우리가 이런 꼴이 됐나”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이 동아증권을 인수한 지 얼마 안돼 일일이 보낸 편지를 받아본 직원들은 김 사장의 ‘경영마인드’ 가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됐다. “회사의 재산을 축내는 직원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회사가 번 돈은 직원과 주주와 고객들에게 고루 돌아갈 것입니다.” 세종이라는 이름도 세종대왕이 새겨진 만원짜리 지폐처럼 고객들이 항상 옆에 두고 싶어하는 금융기관이 되자는 뜻이라는 설명도 예사롭지 않았다.
투명한 경영약속, 99년 순이익 200억원 목표
실제로 김 사장은 인수직후 12개 지점 가운데 영업실적이 가장 나쁜 2개 지점을 폐쇄해버렸다. 반면 영업직원들에게는 수익의 15%를 실적급으로 지급하는 등 침체돼 있던 회사분위기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김 사장이 회사를 인수한뒤 세종은 기업어음(CP)과 채권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달만인 8월에 일찌감치 흑자로 전환했다. 이어 9월과 10월에도 각각 39억원, 5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내년에는 순이익 2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호조를 보이고 자금시장이 안정되는 등 여건이 좋아진 탓도 있지만 김 사장은 “회사의 체질이 바뀌고 있기 때문” 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일례로 그는 경영의 투명성을 들면서 그 자리에서 전날까지의 세종증권 재무제표를 컴퓨터로 뽑아서 손님에게 보여주곤 한다.
김 사장은 “세종증권을 인수한 것은 정말로 모범이 될만한 금융기관을 만들어 경영해 보겠다는 뜻” 이라고 말한다. IMF가 없었더라면 이같은 꿈을 현실화하는게 상당히 늦춰졌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IMF는 김 사장이 증권사를 인수할 능력과 자신을 갖게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 사장은 IMF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 회사채금리가 30%를 훨씬 웃돌고 기업들의 부도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5대그룹이 아닌 중견·중소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에 투자했다. 고금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80년의 격변기를 돌이켜 보세요. 당시에도 금리가 30%위로 치솟고 부도가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가 정권유지와 정당성확보를 위해 강력한 사회안정책을 실시하면서 금리가 1년6개월만에 13%대로 떨어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회사채 선물거래, ‘흐름 읽는 투자’ 로 자금 확보
이같은 판단아래 그는 기업들의 회사채를 ‘입도선매’ 했다. 증권업 허가가 없었기 때문에 증권사를 통해 기업들과 접촉, 회사채 인수계약을 미리 맺은 것이다. 계약내용은 ‘3개월뒤 연 25%의 수익률로 회사채 200억원어치를 인수하기로 한다’ 는 식. 이른바 회사채 선물거래인 셈이다. 계약을 맺는 기업의 자금담당자들조차 김 사장을 이상한 시선으로 봤다. ‘금리가 얼만큼, 언제까지 뛸지 모르는데 이런 낮은 금리로 미리 인수계약을 맺어놓다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불과 몇달뒤 금리는 10%대로 급락했다. 해당기업들 가운데는 ‘김 사장에게 속았다’ 며 분해하는 곳도 있었지만 금리예측에서 승패가 갈린 이상 할말이 없었다.
벤처기업 주식투자에서도 돈을 벌었다. 지난해 8월 자금난에 허덕이던 유일반도체 주식 25만주를 사들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유일반도체는 영업이 정상화해 코스닥시장에 등록됐고 올들어 32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주가가 크게 뛰어 시세차익을 남긴 것은 물론이다.
김 사장 표현대로라면 ‘흐름을 읽는’ 이같은 투자 덕에 그는 증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과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세인의 관심을 더 끄는 부분은 김 사장의 개인사이다. 중졸에서 증권사 경영주에 오르게 된 그의 이야기는 암울한 IMF시대에 또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무사 사환으로 사회에 첫발, 채권도매업으로 성공
그는 전남 장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경, 법무사 사무소 사환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사환생활을 하면서도 방송통신고를 졸업하고 임시서기보 시험에 합격했다. 등기소 공무원이라는 조그만 출세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이곳에서 채권을 파고들었다. 전화채권이나 주택채권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에 유통되는지를 유심히 관찰한 것이다. 방위근무를 마치자마자 24살의 나이인 81년, 자신을 포함해 직원 3명으로 명동바닥에 사무실을 차렸다.
지금의 부인도 그때부터 고락을 같이한 부하직원이자 동업자이다. 김 사장은 국공채도매에서 출발, 양도성예금증서(CD) 특수채 회사채 전환사채(CB) 등으로 투자 영역을 넓히며 증권가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교분을 넓힌 끝에 90년 홍승캐피털이라는 법인을 차렸다. 김 사장은 자신이 일종의 ‘비제도권 채권딜러’ 였던 셈이라고 표현한다. 채권도매업무만을 하고 대금업은 손에 대지도 않았기 때문에 흔히 부르는 사채업자라는 표현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증권실무는 증권사 직원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때론 얻어먹으며 익혔다. 독학이라면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김 사장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해본 사람은 그가 정규교육을 중학교까지밖에 받지 않았다는데 놀란다. 그만큼 그는 주식 채권은 물론 선물 스와프 등 파생상품거래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IMF시대를 지렛대 삼아 ‘증권가 신화’ 이뤄
지난해 세종기술투자를 만든데 이어 세종증권까지 인수, 제도권 금융인으로서 자리를 잡았지만 김 사장은 ‘어려웠던 시절’ 을 잊지 않고 있다. 김 사장은 아직 전세집에서 산다. 영풍문고빌딩 한켠의 세종기술투자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말이 사장실이지 두평 남짓한 공간에 응접세트도 없다. “80년대 중반 친척과 함께 강남에 70여평 땅을 샀습니다. 한때 그 땅값 뛰는 맛에 사업을 소홀히 하다가 다 들어먹을 뻔 했지요. 개인재산이야 많지만 모두 회사에 투자돼 있습니다”
IMF시대를 도약의 지렛대로 삼아온 김 사장. 그가 끝까지 ‘증권가의 신화’ 로 남을지, 아니면 앞서간 수많은 기업인들처럼 ‘또 하나의 거품’ 으로 스러질지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학벌 파괴, 적성에 맞는 일 찾아 인생개척 사광주
여기 당당한 세 젊음이 있다. 치열한 대학문 앞에 절대 주눅들지 않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윤기있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서 학벌이란 단지 스쳐지 나가는 바람과 같이 꿈을 향해 펼치는 자신들의 날개를 꺽지 못하는 미약한 단어일 뿐이다.
적성을 찾아 능력을 키워가는 사람들. 최근 교육부에서 모집한 ‘능력 중심 사회 구현을 위한 실천 수기에 글을 공모, 입상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여상졸 학력으로 방송리포터로 활약 중인 사광주 “저보고 모두들 ‘몰래카메라의 귀재’래요” 사광주씨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써 교육부에 제출했다. 주제는 ‘학벌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살다보니 글을 낸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육부에서 입상자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그제야 다시한번 생각을 해봤다. ‘내가 과연 성공한 사람이 맞을까?’
올해 36세의 사광주씨는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정주부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녀를 결코 평범하다고 생 각하지 않는다. 살고있는 동네에서 통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동사무소 행정 모니터 요원, 파출소 청소년 선도요원, 소비자 상담실 모니터 요원등 지역기관의 봉사활동은 물론 방송국 주부리포트로도 활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보내는가 하면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퀴즈 프로그램에도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한마디로 ‘오지 랍이 넓은’ 사람이다.
“전 원래 성격이 좀 활발하거든요. 집에 있을 때도 단 1초도 가만히 있지 못해요. 뭐든지 하고 움직여야만 이 직성이 풀리거든요. 글을 쓰고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 것도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시작했죠.”
사광주씨는 상고를 졸업한 뒤 사회 생활을 했지만 일찍 결혼해 두 아이를 갖게 되면서 일을 접고 전업주부 생활을 했다. 집에 있으면서 할 일을 찾았던 그녀는 초등학생인 아이의 숙제를 봐주기위해 직접 글짓기 공 부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글쓰는데 취미를 붙였다. 그러던 중 모 기업 화보에 응모한 글이 뽑혀 상금 7만 원을 받게되면서 각종 신문, 잡지, 화보에 닥치는대로 기고를 했다. 그 때는 오로지 글쓰는 것이 생활의 낙이었고 그래서 하루에도 4~5편의 글을 써 여러 매체에 보내기도 했다.
신문 독자투고란에 거의 매일 자신의 글이 실렸으며 라디오에서 전화 연결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꽤 많았다. 한번은 방송국에서 만나 알게 된 사람과 주부퀴즈 대회에 나가게 됐다. 사실 남편이 싫어해서 안나가려고 했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 몰래 나갔는데 그날 1등을 해 엄청나게 많은 상품을 받았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서 걱정을 하며 집에 들어가 화난 남편에게 그날 받은 상품목 록을 들이밀었더니 놀란 남편이 앞으로는 열심히 나가보라는 격려(?)를 받기도 했다.
평소 집에서 글을 쓰면서 신문과 잡지를 많이 읽은 탓에 일반 상식이 풍부했던 사광주씨는 대학졸업해 좋은 직장생활까지 했다는 다른 주부 들을 모두 제치고 나가는 프로마다 상을 휩쓸었으며 그 덕에 본인의 집 뿐만 아니라 친정과 시댁의 모든 살림살이를 상품으로 가득 채웠다.
여행권도 여러번 받아 가족들 뿐만 아니라 어렵게 사는 동네 할머니께 인정을 베풀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 ‘푼수를 잘 떤다’고 말할 정도로 성격이 활발한 사광주씨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단순히 답만 맞 추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압도했으며 그 덕에 케이블 TV에서 방송 리포터 제의를 받기도 했다.
“MBC-TV의 ‘10시 임성훈입니다’라는 프로에서 주부특공대를 공채로 모집한다기에 이력서를 냈어요. 6백명 가까이 몰렸는데 대부분이 좋은 대학을 나왔을 뿐만 아니라 케이블 TV에서 아나운서등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솔직히 자신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은근히 걱정되더군요. 괜히 내 학력으로 이런데 왔다가 공개망신을 당하는게 아닌가 해서요.”
하지만 그런 우려와는 달리 그녀의 이름은 5명의 최종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었고 그중 고졸학력의 소지자는 그녀뿐이었다. 주부특공대가 된 그녀는 얼마동안 교육을 받은 뒤 바로 현장취재에 들어갔다.
주부특공대의 역할은 매주 마다 그 주에 이슈가된 사건을 주부 시각으로 생생히 취재해 방송하는 일이었다. 특공대 일을 하면서 재미도 있었지만 위험했던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탑골공원 노인들의 매춘 실태 보고, 앵벌이 소년의 24시, 청계천등지에 떠도는 포르노 비디오의 실태등을 취재 했을때의 위험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커피파는 아줌마로 분장해 접근하는 할아버지와 여관까지 들어가는가 하면 청계천에서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속였다가 방송에 나온 얼굴을 알아보는 통에 들키기 직전에서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보람도 있었다.
가출청소년의 24시를 취재하면서 만난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충고를 듣고서는 바로 집으로 귀가했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겨 더 열심히 취재를 다녀 주변으로부터 ‘몰카(물래카메라)의 귀재’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얼마전 프로그램 개편으로 주부특공대 코너가 없어져 고정적으로 일을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PD수첩등 다른 프로그램에서 도움을 청하면 그 일을 해주고 있다.
“전 단 한번도 제 학력에 대해 속상하거나 고민한 적이 없어요. 지금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이고 초등학교 1학년인데 항상 엄마가 존경스럽다면서 엄마처럼 살거라고 말하 거든요. 대학 문턱에도 못가봤지만 이정도면 괜찮은 인생 아닌가요?”
비록 남들보다 못한 여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늘 최선을 다해왔다는 사광주씨는 앞으로도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거라면서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을 보였다.
학벌 파괴, 적성에 맞는 일 찾아 인생개척 김보흠
숭의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김보흠 “백일장에서 상금으로 받은 50만원으로 몽땅 책 샀어요” 이번 교육부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 수상 입상자는 현재 숭의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 재학중인 김보흠씨다.
김보흠씨의 작품 ‘내안의 나’는 초지일관 글쓰는 일에 자신을 개발, 고교 재학중 다양한 문예작품전 활동을 했고 이를 계기로 대학에 진학, 특기장학생으로 보람찬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내용을 치밀한 구성과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올해 19세의 김보흠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오고 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전 부모의 이혼으로 동생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성장한 그녀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책으로 달랬다. 설상가상으로 넉넉한 살림이 할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갑자기 기울어졌고 그때부터 늘 부족한 생활을 이어왔다. 친구들이 모두 유치원에 다닐때도 그녀는 혼자 집이나 동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때 그녀의 유일한 벗이 책이었다. 다행히도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할아버지 덕에 좋아하는 책을 늘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 쓰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틈만나면 책을 사다주 었고 또 신문에 나온 기사에 대해서도 늘 이야기를 해주었다.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소질은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다. 교내 백일장은 물론 외부단체에서 주체하는 대회에서도 항상 상을 받았다. 학교 선생님들도 그녀의 글쓰기 실력에 대해서는 늘 인정을 해주었다.
틈만나면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살림 때문에 원하는대로 책을 사서 보지 못하는게 늘 안타까웠지만 적은 용돈 쪼개가면서 책사는데 보탰다. 한번은 학생백일장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는데 그 때 받은 상금 50만원을 몽땅 책 사는데 투자할 만큼 책에대한 욕심은 대단했다.
대학을 결정할 무렵 가정형편상 진 학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을 때 그녀는 문창과쪽을 생각했고 그녀의 글솜씨를 알고있는 학교측에서 그녀의 실력이라면 능히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녀는 장학생으로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위한 수업을 받고 있다. 최근 그녀가 공들이며 쓰고 있는 소설은 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 자신의 어릴적 경험은 물론 주변으로부터 소재를 모아 진솔한 문체로 만들고 있다.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글 잘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화려한 문장이나 통속적인 이야기가 아닌 독자가 마음으로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을 쓰는게 제 꿈이죠. 아직은 여러 면으로 부족하지만 그런 때를 위해 더 열심히 해야죠.”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로 자신의 꿈을 밝히는 김보흠 씨의 다부진 표정에서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졸 출신으로 국내 애니메이션 계 일인자가 된 박경숙
박경숙 라프 드래프트 코리아 사장(38)은 집이 너무 가난해 진학을 포기하고, 20여 년 동안 애니메이션의 외길로 달려와 마침내 매년 1천만 달러가 넘는 수출고를 자랑하는 중견 기업인이 되었다. 고졸 학력이 전부인 박사장이 역경을 듣고 애니메이션 업계의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된 성공비결과 미국인 만화 영화 감독과의 결혼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난 11월 30일 제 35회 무역의 날, 수출에 공이 많은 기업인들에게 수여하는 산업훈장 시상식장에 남자 기업인들 사이에 유일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가 바로 국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정상에 서 있다는 라프 드래프트 코리아 박경숙 사장이다. 그녀는 의외로 젊고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생머리에 수더분한 복장을 하고 스탭들과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박경숙 사장이 운영하는 라프 드래 프트 코리아는 만화영화 제작업체이다. 주로 외국의 대형 만화영화 제작사와 거래하는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가장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회사다.
라프 드래프트가 상대하는 외국회사는 우리에게도 만화영화 ‘라이온 킹’으로 잘 알려진 브에나 비스타 (월트 디즈니 계열사), 만화영화 전문채널인 미국의 M-TV, CBS, ABC, FOX등이다. 국내 TV용 만화 CF도 상당수 제작하기도 했다.
미국 NBA스타인 마이클 조던과 찰스 버클리의 나이키 신발, 캘러그 콘 프레스트의 유머러스한 CF도 바로 라프 드래프트의 작품이다. 최근에는 라프 드래프트의 자회사로 미국에 있는 라프 드래프트 스튜디오(남편이 경영)에서 ‘맥스’라는 작품을 제작해 프랑스 애니메이터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감독상(남편 그렉 벤조씨가 감독했다.)을 차지하기도 했다.
박 사장이 이처럼 애니메이션 분야에 독보적인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특유의 자신감과 영어 솜씨, 품질위주의 경영 덕분이었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잘라 말했다.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섬세하고, 센스가 있기 때문에 유망한 분야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일찌감치 발전해 있는 미국에서도 애니메이션의 상당수의 인력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만화영화를 수입하거나 제작하는 회사의 사장 모임을 가면 남자 사장들은 대개 권위적이고 자기 표현을 못해요. 오히려 여자들이 협상을 이끌어 나가는 데 유리 하더라고요. 앞으로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여성의 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친의 재산을 물려받아 사업을 일구는 대다수의 기업인과 달리 박경숙씨는 철저하게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군인인 아버지의 3녀1남 중 차녀로 출생한 그녀가 사업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부친의 사업실패 때문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싶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허락하지 않자 박경숙 사장은 영어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남들이 진학공부를 할 때 영어공부에만 전념했다. 어찌보면 학력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지만 박사장은 영어만 제대로 할 줄 알면 무슨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한다.
박사장의 영어공부 비결은 ‘통채 로 외우기’. 단어는 기본이고 문장까지 모조리 외워버리는 것이다. 그 러다 보면 어느새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린다는 것이다.
“영어공부를 위해서 부끄러움도 체면도 잊어버렸어요. 외국인만 보이면 달리던 버스를 세우고 외국인을 쫓아가 외워두었던 회화 한 마디라도 건네야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한 영어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열린 세계사격선수권 대회에 통역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고교졸업후 청운의 꿈을 품고 외국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바이어들과 상대하며 무역일선에서 뛰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차나 나르는 잔심부름에 불과했다. 6개월간을 일하고 난 뒤 그녀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져버렸다.
새롭게 시작한 일은 만화영화 수입 회사에서 번역을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번역작업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번역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자 박사장은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어려서부터 순정만화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박사장은 만화영화를 만드는 시스템 자체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만화영화의 밑그림에 채색을 하기전 검사하는 ‘애니 메이션 체킹'은 국내에 전문가가 없어 외국인 기술자를 데려다 써야 했던 분야였다.
당시로서는 고급기술이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체킹기술은 외국인들만 공유할 뿐 국내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다. 박사장은 번역을 하는 틈틈이 외국인과 대화를 하면서 혹은 곁눈질로 하나씩 기술을 습득해 갔다.
어느 정도 기술이 연마되자 박 사장은 대만 만화영화제작사의 일을 처리해주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박 사장의 나이는 24 살이었다.
“독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더군요.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 아파트를 월 세로 빌렸죠. 아예 아파트에다 작업 실을 꾸며 숙식과 일을 한꺼번에 해결한 셈이죠. 처음에는 애니메이션 체킹이라는 분야가 워낙 생소해서 수입이 금세 늘어나더군요. 그러다 타 업체와 동업을 잘 못해 손해를 보게 되었죠.”
첫번째 사업이 실패했을 때 박사장은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 그렉 밴조씨를 만나게 된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남편은 미국만화영화 제작사의 슈퍼바이저(감독관)로 하청업체의 일을 감독하러 왔다 통역을 맡게 된 박경숙씨와 만나게 된것이다.
밴조씨는 미국에서 만화영화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플래티늄상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박 사장에게 ‘첫눈에 반해서’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박 사장은 ‘동양사람이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그러나 보다’ 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달은 것은 밴조씨. 일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보내고 전화 를 했다. 박경숙씨에게 편지가 안오면 전화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한국에 특별한 일이 없는 데도 오로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12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방문하기도 했다. 1년이 넘는 열렬한 구애에 감동한 박경숙씨는 그렉 밴조씨와 결혼을 했고 니키 밴조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생활은 편해졌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만화영화에 대한 꿈이었다.
“주급 2백 달러 정도 받는 체커로 다시 일을 시작해서 국내 만화영화 수출업체의 지사장을 맡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만화영화 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남편은 반대하더군요. 한국에는 아무런 기반도 없는데 무슨 일을 시작하냐는 거였죠. 하지만 그동안 익혀온 노하우와 자신감만 있다면 정상에 설 자신이 있었어요.”
마침내 92년 귀국해서 세운 것이 ‘라프 드래프트 코리아’ 였다. 처음에 불과 10여 명의 직원으로 시작 한 라프 드래프트는 이제 직원만도 4백여 명에 이르고 지난해 매출만 1 천3백만 불에 이를 정도의 중견 기업이 되었다. 구조조정의 한파속에도 오히려 직원들의 보너스를 인상해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회사가 되었다. 라프 드래프트가 성공하게 된 것은 박경숙 사장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저희는 처음부터 질 위주의 경영을 했습니다.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품질이 완벽하지 않으면 출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실정에 벅차면 수주를 받지도 않았죠. 처음에는 한국의 작은 회사가 외국 대회사에서 물량을 주는데도 일이 벅차다고 주문을 거절하자 바이어들이 어이없어 했지만 나중에는 완벽한 물품을 보내자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박경숙 사장은 지금까지 라프 드래 프트 코리아가 외국회사가 제작한 물품을 하청받아서 제작해주었다면 앞으로는 자체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아직까지 스토리를 구성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이미 제작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 마치 뮬란처럼 동서양인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 시장의 우수성을 과시 하겠다는 박경숙 사장. 그의 성공 시대는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