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막의 영웅 카다피!!(LIBYA LEADER) |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Qaddafi, Muammar al- )는 1969년 9월 1일 세계는 북아프리카 연안국가인 리비아에서 카다피에 의해 주도된 알파타 대중혁명으로 인해 당시 서방의 이익을 대변했던 이드리스 왕정체계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악스럽게 지켜보았다. 카다피는 1942년 생으로 리비아의 해안도시인 시르테출신 베두인 유목민의 후예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정치에 능동적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랍세계가 직면했던 정치적 격변과 대중에게 가해진 압제적인 폭정과 식민열강의 아랍복장과 전통에 대한 억압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혁명가로서의 정치적 각성과 의식을 일찍 눈뜨게 했다. 특히 굴욕에 찬 과거로부터 고무적 미래를 창출하고자 했던 이집트의 낫세르가 보인 노력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강렬한 투쟁은 카다피에게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켜, 후에 혁명지도자로서 아랍의 통일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압제 아래 고통받고 있는 제 3세계의 대중들에게 국제적 전선을 연대하는 민족해방운동의 기수가 된다. 또한 그는 청년시절부터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필연적으로 다수대중에 대한 착취로 귀결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제반피해가 여기에서 연원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대중주의의 열렬한 추종은 이미 1950년 후반에 학생지도자로서 주도한 성공적인 대중데모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는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1958년에 이미 비밀혁명 세포조직을 구성했으? ?이것은 숭고한 이상과 인류를 위한 헌신과 신사회주의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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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중주의적 정치 철학은 70년대 중반에 저술된 "그린북"에 잘 집약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적 통치기구를 거부하고 대중권력의 개념을 도입, 인간의 가치와 전통, 원칙등에 기초한 신사회 창조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는 혁명후 즉각 노동법등을 제정해서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대중들로 하여금 부의 평등한 분배와 균등한 교육,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카다피는 정의와 평등, 상호 존중에 입각한 세계인들간의 협력과 인본주의에 입각한 자유와 민주주의, 민족해방을 주창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하게 된다. 초기단계로서 혁명후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당시 리비아에 주둔했던 미국 및 영국군 기지와 오랫동안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던 이태리 잔류민들을 철수시켰는데, 이는 카다피가 취한 최초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노선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의 자유와 해방운동에 대한 범세계적 지원은 필연적으로 열강의 이해와 상충하게 되었으며, 제국주의의 위기의식의 발로로 인해 마침내 1986년 4월 15일에 미국과 일부 나토국가의 공동작전에 의한 침공으로 카다피 자신의 양녀와 수 많은 리비아 대중의 인명을 빼앗기게 되는 비싼 대가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대중해방이라는 대의에 찬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오랜 인종차별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공로로 89년에 제 1회 카다피 인권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넬슨.만델라는 카다피 지도자를 "최초의 자유의 투사"로 명명했다. 오늘날 동구의 격변은 자유와 민주주의. 행복이 인류의 지상과제이며 자마히리야(대중주의) 사상이 진정한 대안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자국의 자유와 자주적 노선을 견지하고자 하는 카다피의 투쟁은 제반분야에서의 부정과 압제,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숭고한 가치를 수용하고 있으나 악의에 찬 서방언론은 자유의 투사로서의 그의 이미지를 테러주의자로 호도시키고 있다. 이것은 카다피야 말로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구상 어느 곳이든지 자유의 문제에 관한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지원과 지지를 통해 범세계적인 신질서를 쟁취하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대해 페르난도.라토즈.빌즈는 그의 저서 (불가사리의 독수리)에서 카다피의 존재를 간파하고 있다. <그는 독수리다. 긍지를 지닌채 여유있게 날으면서 정확하게 포착한다. 진실로 무암마르 카다피야 말로 불가사의한 독수리이다. |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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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지중해계 인종 리비아인과 아프리카계 인종 에티오 피아인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후 BC 10세기에 이르러 트리리폴리타니아로 그리 스인이 와서 지중해 무역의 기지로 정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트리폴리타니아는 카르타고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번창했다. BC 2세기에 카르타고가 몰락한 후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의 리비아는 무역활동의 기지로서 올리브, 포도, 보리, 밀 따위를 로 마에 공급하여, '로마 제국의 곡창'으로 불 리는 등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쇠퇴와 함께 반달족의 침공을 받아, 5세기에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회복돠 함께 일시적으로 번영을 되찾았으나,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아라비아인이 침입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인데, 670년 우마이야 왕조가 튀니지의 카이루안에 마그레브 지방을 통치할 총독을 배치한 뒤로 이슬람화되기 시작하였고, 아라비아어가 보급되었다. 11세기 중엽 아라비아인들이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에게 추방당하여 리비아에 이주했다. 그 결과로 부족 간의 항쟁이 벌어져 국토가 황폐해지고 동시에 아라비아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에 한때 스페인과 몰타의 기사단의 지배아래 놓이기도 했으나 1561년 오스 만투르크 제국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그후 1911년 이탈리아에 지배당하기까지 오스만투르크 제 국이 세운 괴뢰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다. 1911년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에 침공하고, 그 이듬해에는 발칸전쟁에서 패한 오스만투르크와 조 약을 맺어 리비아를 식만지로 삼았다. 그러나 세누시 파 교단을 중심으로 한 리비아인의 저항 때문에, 해안지대 이외의 식민지화는 좀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대두와 함께 1940년에는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식민지 처리를 유엔 총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1951년 리비아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3개 주의 연방제에 의한 독립국으로 인정, 세누시 파 교단의 수장 모하메드 이드리사가 국왕이 되었 다. 1963년에는 헌법 개정에 의해 연방제가 폐지되고, 단일국가로서의 리비아 왕국이 탄 생했으나, 1969년 카다피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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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의 지중해안에 위치하고, 국경은 이집트, 수단, 차드, 니제르, 알제니, 튀니지와 닿아 있다. 지중해의 해안선은 2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리비아'란 말은 일찍이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막을 가리키던 그리스어인데, 그 이름대로 해안지대를 제외한 국토의 약 90%가 사막지대이다. 국토 면적은 약 177만㎢로 동부의 키레나이카 지방, 서부 해안지대의 트리폴리타니아 지방, 그리고 서남부의 사막지대 페잔 지방 등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을 향해서 돌출한 표고 약 700미터의 자발 알 아흐다르 고원을 포함한 키레나이카 지방의 중심지는 벵가지이다.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은 해안선에서부터 차츰 높아지는 단구가 알주프라 오아시스에 이르기 까지의 지역으로서 트리폴리가 그 중심이다. 이상의 북부 해안지방에 전인구의 90%가 집중되어 있다. 국토의 0.5%밖에 안되는 농업지대도 이곳에 있고, 주로 곡물이 재배되고 있다. 페잔지방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인데, 세부하 등이 오아시스들이 군데군데 있다. |
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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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는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서머타임 실시 시기에는 7시간이 늦다. |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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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단위는 리비아 디나르 LD 이고, 1LD는 1000디르함 Dirham 이다. 미화 1$는 약 0.30 LD이다. 환전은 은행 및 호텔에서 할 수 있다. |
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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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볼트. |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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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보내는 우편물은 1 ~ 2 주일 걸릴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국으로 국제 자동 전화 ISD가 가능하다. 큰 호텔의 전화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현재 자동전화 가능 지역은 트리폴리(시내 및 국제공항), 벵가지, 데르나, 미수라타 등 5개 지역이다. 그곳에서의 한국 식별 번호는 00 + 82 이다. |
현지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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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리비아 한국 대사관]: A435 Trovato Partition, 6km Gargaresh, Tripoli, Libya ☎ (021)833503,833484
[대한무역진흥공사 리비아 지사]: 9-4 Jamal Abdul Elnasser St. Aburuquiba Bl dg. 4th Fl. Tripoli, Libya ☎ (021)34183
[주한 리비아 대사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4-5 ☎ 797-6001~7 |
알아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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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이슬람 국가이므로 노출이 심한 옷이나 화려한 옷은 되도록 삼가야 한다. |
현지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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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 LYD 0. 250/PER PC USD 0. 90, 미네랄워터 LYD 0. 700/PER BOTL USD |
러시아 대통령, 카스트로 전 쿠바 대통령과 회담 (E)
[VOA 미국의소리] 2008년 11월 29일(토) 오후 02:45 가 가 | 이메일| 프린트
중남미 4개국을 순방 중인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28일 올해 82살인 카스트로 전의장을 약 1시간 가량 면담했습니다. 러시아 정부 관계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카스트로 전대통령이 양국 관계와 국제현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면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피델 카스트로 전대통령과 만나기 전, 카스트로 전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라울 카스트로 현 쿠바 대통령과 함께 구소련병사 기념탑에 헌화했습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은 27일 단독 그리고 확대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또 양국 정상은 쿠바의 독립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기념탑과 최근 만들어진 러시아 정교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현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냉전 시절 구소련이 쿠바와 맺었던 유대관계를 되살리기 위해서 쿠바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관계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중남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보다는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서 베네주엘라와 페루, 쿠바 그리고 브라질을 방문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Russian President Dmitri Medvedev has met in Cuba with the island's former president, Fidel Castro, capping a four-nation tour of Latin America in a bid to bolster ties in the region. Mr. Medvedev met privately with the 82-year-old Castro for more than an hour Friday. Russian officials say Mr. Medvedev and the former Cuban president discussed relations between their countries and international policy. No further details of the meeting were released. Earlier, the Russian leader laid a wreath at a monument to Soviet soldiers with Mr. Castro's brother, current President Raul Castro. on Thursday, Mr. Medvedev and Raul Castro met privately and also with delegations from each country. They visited a monument to Cuba's independence hero Jose Marti and a recently inaugurated Russian Orthodox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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